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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설

"요양병원에 부모를 맡기고 3년 동안 연락이 없는 자식에게 화가 납니다.”


[2016.10.18.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대화(5) 경기도 김포시 김포아트홀] 

행복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스님은 한국에서 다시 행복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일주일간 네팔학교준공식을 시작으로 델리 즉문즉설, 암베르카르 개종 60주년 행사, 나가푸르대회, 석가족 법회, 평화담마행진, 방콕 즉문즉설까지 네팔-인도-태국에서 쉼 없는 일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방콕에서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오늘 새벽 6시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하니 이제 막 아침 해가 뜨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고단 할 만도 한데 10시 30분부터 김포에서 즉문즉설이 있어 바로 이동했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됩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았는데 결과가 괴로운 것이 문제입니다. 왜 이렇게 힘들까 고민하다가 남편을 원망하고, 사주를 탓합니다. 그러나 싹이 트려면 씨앗이 좋아야하고 밭도 좋아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행복하게 할까’는 씨앗을 좋게 하는 일이고, ‘내가 사는 사회를 어떻게 좋게 만들거냐?’는 밭을 좋게 하는 일입니다. 사회적인 것은 오늘 오신 시장님, 국회의원님이 하실 일이고 저는 똑같은 조건에서도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오늘 대화를 통해 행복도를 높여봅시다.”  

오늘 강연에는 김포 시장, 국회의원, 시의원, 여성위원장도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스님은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애로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참석을 반겼습니다. 김포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함께 했을까요? 오늘의 주제는 행복입니다. 출발은 괴로움입니다. 오늘은 다섯 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질문자들의 각각 마음을 이해해주는 한편,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이야기 했습니다. 그 중, 요양병원을 운영하는데 적자가 나서 괴로운 분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질문자는 어르신을 맡겨 놓고 3년 동안 연락 없는 아들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고 하는데요. 그 속에서도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저는 어르신들 모시는 요양소에서 보호사 겸 원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자식들이 부모님을 등한시하는데, 별 경우를 다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3년 동안 어르신을 맡겨놓았습니다. 기저귀 값과 식사비도 받아야 하는데 3년 동안 연락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찾아오지도 않고 제가 연락을 해도 닿지 않는데, 이런 경우에는 제가 쫓아가서 패주어야 하나요?” (청중 웃음)

“그러고 싶으면 그러세요. 그리고 질문자는 감옥에 가면 돼요. (청중 웃음) 그런 사람들 욕하고 패주고 감옥에 가서 조금 살다 나오면 됩니다. 그건 질문자의 자유입니다. 스님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 패는 것은 질문자의 자유이고 대신 타인을 폭행했으니 감옥에 가는 것은 그에 따른 과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 거예요. 성질난다고 가서 때리고 그 과보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요?”

“아니요.”

“그러면 패주고 싶어도 안 때리는 선택을 해야죠.”

“제가 볼 때, 저희 세대들이 자식들에게 대우를 못 받고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이에 대한 스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것은 사회적 변화에 의해 생겨난 현상입니다. 질문자 세대가 물려받은 문화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알았고, 지금 2, 30대인 자식들은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을 문화로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지금 5, 60대 분들은 결혼하면 시댁 어른을 깍듯이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본인들도 그렇게 하려하지만, 자식들로부터는 봉양을 받지 못하는 과도기에 놓여있는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질문자의 경우에는 1년 선배를 만나도 ‘선배님, 형님’이라 부르면서 대우하지만 아래 세대로부터는 나이차가 10년이 나도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이를 두고 ‘나는 부모를 봉양했지만 자식들로부터는 봉양 받지 못하고, 선배들을 깍듯이 대우했지만 후배들로부터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부모를 모시는 문화도 경험했고 그렇지 않은 문화도 경험했다. 선배에게 깍듯이 대우하는 문화도 경험했고 선후배가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는 평등한 문화도 경험했다’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윗세대는 부모를 봉양하고 선배들을 깍듯이 모시는 문화 밖에 경험하지 못하고, 아래 세대는 모시지 않는 문화 밖에 경험하지 못하지만 질문자는 모시는 문화와 모시지 않는 문화를 둘 다 경험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복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저는 제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옷을 만들 때 무명을 가지고 물레를 돌려서 길쌈해서 만들어 입었어요. 누에고치에서 실을 직접 뽑고 대마를 심어서 삼베도 만들어 입었고요. 그렇게 모시, 삼베, 무명, 명주까지 다 직접 만들었어요. 그리고 집이 가난하다보니 평소에는 맨발로 다니거나 기껏해야 기차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추석이나 설에 누가 운동화라도 하나 사주면 그거 자랑하려고 동네 우물가에 아무 일도 없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청중 웃음)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신발 닳을까봐 신발을 들고 학교에 가서 교문 앞에서부터만 신고, 하교 길에는 교문만 나오면 신발을 벗어서 들고 다니곤 했어요. 

이런 문화를 경험한 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 이런 경험은 네팔,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지에 있는 가난한 마을에 구호활동을 가면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제 어린 시절 환경과 비슷하거든요. 그러다보니 언어가 안 통해서 그렇지 통역만 하면 대화가 금방 이루어져요. 그 곳에 가서 동네 아저씨를 만나면 나이가 몇인지, 그리고 아이들은 몇 명이나 있는지 물어봅니다. ‘나이는 37살이고, 자식은 네 명이 있다’는 등의 대답을 해요. 그리고 가지고 있는 논밭의 면적에 대해서 물어보면, 저희가 한 마지기, 두 마지기로 이야기하듯이 그 곳 사람들은 1헥타르, 반 헥타르 혹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곳은 1에이커, 2에이커 등으로 그 크기를 알려줍니다. 1헥타르는 3천 평, 우리나라 말로는 1정보이고 논밭으로 따지면 열다섯 마지기 정도 됩니다. 

저는 ‘37살에 자식은 네 명이고, 가지고 있는 논밭의 크기는 1헥타르’라는 이야기에서 어릴 때 저희 동네에 살던 자식이 네 명이고 논밭은 열다섯 마지기를 가지고 있던, 즉 비슷한 환경을 가진 이웃이 떠올라요. 그 정도 생활수준이면 첫째 아이 정도만 중학교에 보내지 나머지 자식들은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 되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을 중학교에 못 보내거나 첫째 아이 정도만 중학교에 보내겠네요.’ 하고 이야기하면 ‘아이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는 반응을 보여요. 

저는 경험에 비추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도사 취급을 하곤 해요. (청중 웃음) 남의 나라에 와서 말도 안 통하는 스님이 통역하는 자기들보다 그들 사정을 더 잘 알고 주민들과 뜻이 더 잘 통하니까 통역하는 사람들도 놀라곤 하지요.

집에 방문해서는, 우리네 70년대 새마을 운동하면서 낡은 지붕 개량이나 부엌 개량을 많이 했듯이 저렴하게 할 수 있는 부엌 개량에 대한 조언도 해주곤 해요. 그러면 아주머니들은 같이 사는 남편은 20년을 살아도 자기가 부엌에서 어떤 불편함을 겪는지 잘 모르는데 스님이 와서 ‘부엌 이 부분은 너무 낮아서 쓰기 불편하다, 집에서 우물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불편 하겠다’ 등의 이야기를 해주니까 위로도 많이 받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제가 직접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교에서 사회 복지와 관련한 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봉사 교육을 받고 그 나라에 파견되었다면 알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거예요. 심지어 그 나라 젊은이라도 시골에 보내면 알기 어려울 거예요. 반면에 저는 경험이 있으니까 논밭에서 사람들이 못줄치고 낫질하는 것만 봐도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그곳에 계신 주민들도 외국에서 온, 그것도 잘 알려진 유명한 스님이 농사일에 못줄, 낫질까지 알 거라고는 상상을 잘 못해요. 그런 것은 제가 대학을 나오거나 유학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지요. 이건 제가 조기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예요. (청중 웃음)

속된 말로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이런 시대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낫질, 괭이질, 호미질 등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익히는 조기 교육을 많이 받다보니 그 분야에서는 박사란 말이에요. 이게 복이에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것이 아니라 복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이런 시대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런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에요.

그러면서 요즘은 과학 공부도 하고, 첨단 시대 경험도 하니 앞으로 4차 산업 혁명이 어떻게 일어날지도 알게 됩니다. 젊은 사람들도 4차 산업 혁명이 어떻게 일어날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잖아요. 과거의 문화와 새로 형성되는 문화를 둘 다 경험하기에 혼란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 둘 모두를 알 수 있는 분기점을 살기 때문에 천 년 전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고 천 년 후의 모습도 내다볼 수 있는 거예요.

다시 질문자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질문자가 자신은 부모를 봉양했는데 자식들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이해관계를 따져서 본인이 불행한 시대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질문자가 양 세대의 다른 문화를 모두 경험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복 받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문화에 살았지만, 시댁 어른들을 모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집에 온다고 해도 오지 말라고 하고 자기도 가능하면 며느리 집에 가는 발걸음을 줄여야 문화가 바뀌어요. 제발 와달라고 부탁하면 한 번씩 가주는 거예요. (청중 웃음) 

또 나는 남자 형제 사이에서 교육이나 재산 상속 등 남녀차별을 받았지만 그 부당함을 아니까 내 딸은 차별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명확해야 ‘변화’가 일어나는데, 자기도 아들만 챙기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러한 욕구에 끌려가지 않고 극복을 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안 좋게 보거나 자식 세대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자연 생태계에 기초하여 원리적으로 보면,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의무이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선택이에요. 그러니 세대를 막론하고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은 동물 생태계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잘못된 일입니다. 물론 생계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 책임을 모두 전가하기에는 무거운 면이 있기 때문에 출산 후 3년 유급 휴가 지급 등 사회적 제도 보완도 필요합니다. 반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생태계에는 없는 현상입니다. 이건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일이에요. 생태계에 없다는 것은 하면 좋은 일이긴 하지만, 하지 않는다고 나쁜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요즘 부모 세대들은 자식이 20살이 넘어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식의 취직, 결혼, 살림살이까지도 신경 쓰느라 7, 80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 걱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갑니다. 또 자식들은 20살이 넘었는데도 부모의 잔소리를 듣고 살아가고, 부모 봉양의 문제가 부부 갈등의 원인 중 큰 요인으로 안고 삽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받은 교육으로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 계시는 분들도 며느리가 봉양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그저 도망가지 않고 우리 아들과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마음을 내세요. 아이 둘 낳고 며느리가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어쩝니까. 다 늙어서 손자 키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며느리 보면 ‘힘들지? 내가 낳았지만 네 남편 골칫거리인데 네가 이렇게 살아주니 참 고맙다’하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고부관계를 좋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자꾸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와야 한다, 돌보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질문자가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것은 선행입니다. 그렇지만 선행은 스스로 행할 뿐이지 다른 사람이 선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욕할 필요는 없어요. 마찬가지로 질문자도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돌보면 되지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님 말씀 잘 들었는데요, 부모는 자식들이 어릴 때 똥 기저귀 갈아주고 다 살펴줬는데, 자식들은 부모의 똥 기저귀가 냄새난다고 싫어하는 심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그건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만약 질문자가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질문자가 조금 이상한 거예요. (청중 웃음) 평소에 아기를 싫어하고 똥냄새 싫다했던 여자도 아기를 낳으면 그 거부 반응도 다 없어지고 모성애라는 종족 보존의 본능이 발동합니다. 그 본능이 없으면 이 종족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부모를 돌보지 않는 그 자식도 제 자식을 낳으면 그렇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가 내 똥 기저귀를 갈아줬으니까 나도 부모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내 똥 기저귀를 갈아주었듯이 나는 내 자식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 자식은 또 제 자식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일로만 계산할 일이 아니에요. 지금 질문자는 계산을 잘못하고 있네요.(청중 웃음)

똥 기저귀 냄새는 누구나 다 싫은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싫은 일이라고 안 할 수도 없고, 좋은 일이라고 다 할 수도 없잖아요. 부모 똥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람도 그 냄새는 싫지만 옛날의 은혜를 생각해서 참아내는 거예요. 반면 부모가 자식들 똥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은 싫지만 참으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성애에 의해 저절로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저절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자식들을 키워내겠어요. 그런데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것은 본능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짐승들은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싫은 것도 참으며 할 뿐이에요. 막 좋아서 하게 되지는 않아요.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래요. 지금 질문자는 사람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기대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지나친 윤리,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힘들어집니다. 윤리나 도덕도 사람이 살기 좋게 하려고 만든 기준인데, 그것이 지나치면 윤리, 도덕이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게 되고 고통을 만듭니다.

자식으로서 질문자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렇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고 돌본다면 좋은 일이라서 권장할 일이지,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야단치거나 미워할 일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권장할 뿐이지 그것을 의무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의무사항에 들어갑니다.”

“네, 감사합니다.”

“질문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자식된 도리로 부모를 사랑하고 봉양하는 것은 좋은 일인 반면 부모가 나에게 상속을 해주지 않았다거나 어릴 때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미워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이지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아요. 사랑하는 것은 권장사항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다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권장사항이에요. 마치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부모를 미워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듯이, 여러분도 애틋하게 키운 자식이 부모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그것도 도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권장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부모 입장에서도 유학을 보내주거나 유산을 물려줄 의무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스무 살까지 키운다는 것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그리고 남들 다니는 정도의 학교에 보내서 교육받게 해주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해주면 좋지만, 꼭 해주어야 하는 의무는 아닙니다. 심지어 부모가 나를 낳아서 고아원에 맡겼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미워할 일은 아닙니다. 낳아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만큼 해주지 않았다고 미워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는 도(道)가 있습니다. 그 도(道)에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더 잘해주면 좋은 일이지만 잘해주지 않는다고 미워할 일은 아닙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의 이야기가 공감이 가면서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로 생각했는데,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든 것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영상이었는데요. 김포시 대곶면 거물대리가 난개발 되어 환경오염이 되고 시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합니다. 질문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을 해왔지만 해결이 안 되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질문했습니다. 

“질문자가 잘 해오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너무 욕심을 내면 원망하고 지치고 운동이 과격하게 됩니다. 뜻은 좋은데 성과가 안 좋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은 제가 이야기 하는 것보다 오늘 이 지역 국회의원님도 참석하셨으니 의견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즉문즉설을 들으러 왔던 김두관 국회의원이 무대 위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김포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처음 드린다며 말을 이었습니다. 김 의원은 김포시민이 된 후, 제일 고민했던 문제가 환경문제와 난개발이었다며 해결해야할 문제이지만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답변했습니다. 국가는 발전하고, 국민은 행복해져야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새기며 더 많이 고민하고 소통하며 기대에 부흥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개인의 문제를 듣고, 고민하고, 행복을 찾는 것도 좋았고, 함께 사는 사람들과 우리 지역의 문제를 고민해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강연을 위해 곳곳에서 힘써주신분들입니다. 스님은 곧이어 저녁 강연이 있는 원주로 떠났습니다. 원주에서는 또 어떤 분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그럼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