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분을 만나고 나서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201

스님의 하루 2018.02.24 16:00

"제가 이 분을 만나고 나서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2018.2.1 인도JTS 활동가 소풍

도량석 목탁소리에 2월 1일 새벽 4시 30분에 깨어납니다. 어느새 새벽의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해진 인도입니다. 오늘은 스님과 함께 인도인 스텝, 한국인 스텝들이 함께 소풍을 가는 날입니다. 새벽예불을 마친 후 발우공양 대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6시 30분이 되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수자타 아카데미로 모입니다. 보리수나무 아래 미리 준비해둔 짜이를 한 잔 씩 마시고 각자에게 준비된 간식을 챙기고 점심 해 먹을거리를 차에 실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와 분교 스태프 15명, 지바카 병원 스태프 5명, 건축과 마을개발 스태프 3명, 상카시아에서 온 수바스와 쉬라즈, 그리고 스님을 비롯한 한국 활동가 13명 등 모두 38명이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전 7시. 차가 정시에 출발을 하자 스님은 “인도에서 늦어지지 않고 약속된 정시에 출발하네.”라며 웃으니 보광법사님이 그동안 버스를 사용할때는 무조건 시간을 지키도록 이야기 하니 어떤 때는 2시간 전에 오기도 했다면서 인도 스텝들도 많이 훈련되었다고 답했습니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제띠안입니다. 둥게스리에서 차로 약 1시간 20분을 달린 후 가벼운 차림으로 10여 분을 걸어 한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 탑은 부처님께서 1천명의 비구들과 빔비사라 왕을 만났다는 것을 기리며 2300여년 전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인데 그 이후에도 복원된 적이 없어 그 당시의 벽돌 그대로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잠시 벽돌에 손을 대고 당시의 기운을 느껴보았습니다. 이제는 거의 무너져 버린 채 스투파 것으로 보이는 벽돌 조각들이 산비탈에 그대로 굴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 서서 삼배를 드렸습니다.


“제띠안은 중요한 곳입니다. 앞에 보면 족마한 탑이 있는데 1km마다 1개씩 설치해 놨어요. 제띠안으로 들어오는 삼거리에서부터 여기 탑까지 1km이고, 여기서 손반다르 동굴까지 13km, 손반다르에서 라즈길까지 2km입니다. 그래서 총 16km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15km 정도를 걸었습니다. 그걸 ‘1유순’이라고 합니다. ‘유순’은 소가 짐을 싣고 삐그덕 거리며 하루에 걷는 거리입니다. 그게 현대적으로 보면 약 15km정도가 됩니다. ‘유순’과 같은 말이 힌디로 있어요?”

(대중) “벨가리~”

“부처님께서는 둥게스리에서 6년 수행하시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하시고 다시 보드가야로 오셨습니다. 당시 그 지역의 이름은 우루벨라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루벨라가섭과 그 제자 500명을 교화하고, 만코시 힐 건너 힌두템플 있죠? 나디가섭이 수행하던 곳에서 300명을 교화하고, 가야에서 만푸르 올 때 힌두템플 많잖아요. 지금 뭐라 불러요?”

(대중) “가야 쉬르~.”


“가야가섭 수행하던 그곳에서 200명을 교화한 후 모두 1천명을 가야산 중턱에 모으시고 탐진치 삼독을 멸하는 불의 설법을 하셨습니다. 원래 우루벨라 가섭은 불을 섬겼는데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을 피우는 제사의식등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밖의 불은 껐다, 그러나, 마음속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첫째가 욕망, 두 번째가 성냄, 세 번째가 어리석음이다. 이 세 가지 불을 꺼야 한다.’ 그리고 그 천 명을 데리고 라즈길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습니다.

라즈길에서 여기는 서쪽입니다. 서문 밖 1유순거리입니다. 빔비사라 왕은 여기까지 부처님을 마중 나왔습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는데 사실은 우루벨라가섭을 마중 나왔다 보는 게 맞습니다. 왜 그러냐면 왕이 1년에 한번은 우루벨라 가섭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었지만 아직 부처님이 누구인지 모를 때거든요. 우루벨라가섭과 부처님, 그리고 천 명의 비구가 앉아 있었는데 그때 왕이 인사를 올리고 물었습니다. ‘내가 듣기로 우루벨라가섭이 어느 젊은 수행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저는 그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80살 먹은 노인이 어린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내 할아버지요 하는 것과 같아 도무지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우루벨라가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을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나서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제가 이분을 만나고 나서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빔비사라 왕이 사실을 알고 다시 부처님에게 예를 표하고는 법을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빔비사라 왕과 신하를 위해 법을 설했습니다. 법문을 듣고 빔비사라 왕은 법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예를 표하고, “제가 젊을 때 5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고’, 그 당시에는 왕자라고 다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를 죽이고 나서야 왕이 되었습니다. 프라세나짓 왕은 형제를 100명이나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가 내 나라(마가다국)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 것이고, 네 번째는 그 법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제가 왕이 되었고, 부처님이 출현했고, 부처님을 이렇게 뵙고 법문도 들었고, 법도 이해했고, 이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왕궁으로 드십시오. 공양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부처님이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부처님은 왕궁에 오지 않으려고 하시는 구나. 그러면 부처님은 어떤 곳에 머무르실까?’ 생각하다가 성 밖에 자신이 좋아하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곳에 머무시라고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승낙하셨습니다.

바로 베누반 비하르(죽림정사), 첫 번째 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많은 법을 설했습니다.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도 그때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라즈길, 그 당시에는 라자그라하라고 불렸는데, 그곳에 많이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시내에 있지 않고 주로 성 밖 숲이나 산의 동굴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고 싶으면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곳이 그리드라 쿠타입니다. 길이 잘 나 있는데, 부처님 때문이 아니라 왕이 가기 위해 길을 닦은 곳입니다. 그래서 왕이 어디까지 마차를 타고 갔다, 그 다음에 경사가 지니 걸어갔다. 그리고 신하들을 두고 혼자서 부처님을 만나러 갔다, 하여 나중에 아소카 왕이 스투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 뿐 아니라 부처님이 머무신 곳은 많습니다. 이곳 서문밖에도 동굴이 있고, 지금은 거기는 아무도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계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방문할 때 신하들이 길을 닦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리악에도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도 지금은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이 있다는 것은 왕이 방문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두 군데를 가려고 합니다. 가본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을 여러분과 함께 가려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오늘 소풍 온 곳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그 두 곳의 동굴을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까나홀 분교장인 까필데우지가 가져온 님끼(과자)를 나눠 먹으며 5분여 동안 차를 타고 가서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동굴은 라즈길 서문 밖 동굴입니다. 흙길을 걸으며 나중에 올 때 지표가 될 바위와 버스가 어디로 들어올 수 있는지 살펴보고, 걷던 중에 만난 주민들에게 동굴의 위치도 물어가며 산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앞장서서 숲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길이랄 것이 없는 길을 가시나무에 찔리고 긁히며 허리를 숙여 바닥을 기고, 소와 염소가 지나간 흔적인 배설물을 피해 위로위로 올라갔습니다. 길을 찾아 산을 오르면서 스님께서는 “항상 길을 물을때는 세세하게 물어야 해요. 여기사는 사람은 대충 저 앞 바위에서 산으로 가라고 했지만, 와보니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할때도 잘 모를때는 세세하고 물어보고 조사해야 합니다.”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충 처리하는 일들에 대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또다시 길을 찾아 산의 바위 위로 올랐습니다.



저만치 희끗희끗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스님을 따라가는 길은 등산이든 순례든 수행이든 쉽지 않구나, 그렇지만 멈출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구나, 그냥 따라갈 수 밖에…’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손을 잡아주고 얽히고 설킨 가시덤불을 치워주며 서로서로 도와 1시간 여 동안 길을 찾아 산으로 오른 끝에 빔비사라 왕의 코끼리가 다녔다는 산위에서는 볼 수 없는 조금 넓은 길을 만났습니다. 그 길을 따라 간 끝에 만난 동굴. 모두들 “와~!”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꽤 큰 동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세계 공통예불문인 ‘빤즈실’을 함께 하며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두 개의 불상이 모셔진 동굴 뒤쪽으로 다시 작은 동굴이 아늑하게 이어졌습니다. 박쥐 냄새가 심했고 뜨거운 공기가 가득했지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산을 내려올 때는 선발대였던 인도인 스태프들이 길을 찾아내 오가는 주민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수월하게 왔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배가 고팠던 일행은 평지에 자리를 깔고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38명의 스태프들이 물을 길어오고 배식을 하고 설거지와 정리까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다함께 가져온 간식과 라면을 나눠 먹은 후 다시 기리악의 동굴로 이동하였습니다. 버스로 30여분을 달린 후 다시 라즈길의 상징인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6.5km를 40여분 가서 도착한 곳은 ‘고라 카토라(Ghora Katora)’ 호수입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인 스태프들을 위하여 일부러 마차를 태우고, 또 호수로 와서 배를 타며 재밌게 보내라고 권하신 후 한국인 활동가들과 기리악 동굴을 가보고 싶은 인도인 활동가 일부와 함께 함께 동굴로 향했습니다.

기리악의 동굴은 제띠안 서문 밖 동굴에 비해 높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입구는 깎아지른 절벽처럼 되어 있어 마치 암벽 등반을 하듯 올라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조용하고 세상과 격리된 또 다른 세계인 듯 느껴졌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2개의 동굴을 다 본 후 호수로 돌아오니 인도인 활동가들도 배를 다 탄 후 다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스님은 ‘카자(튀긴 미타이)’로 유명한 지역인 ‘실라호’에 들러서 인도인 활동가들에게 돈을 주면서 집에 선물로 사 갈 것들을 사오도록 시간을 주었습니다. 인도인 활동가들은 삼삼오오 카자 가게에 들러서 집에 가져갈 까자를 신나게 사서는 다시 차에 타고 수자타 아카데미로 향했습니다. 어둑해진 가야를 지나 오후 7시가 넘어서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모두들 피곤한데도 밝은 얼굴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최말순 보살님이 준비해주신 저녁 공양을 맛있게 먹은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델리를 거쳐 한국으로 출국하기 떄문에 인도사업 책임자인 보광법사님과 앞으로 할 일 들에 대해서 늦게까지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이원정(글) 심규선(사진) 손명희(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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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자각입니다.”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31

스님의 하루 2018.02.23 16:00

“변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자각입니다.”

2018.1.31 인도JTS 이사회 및 활동가와 만남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고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일정이 8일째인 오늘은 오전에는 인도JTS 이사회와 인도정토회 이사회, 오후에는 인도JTS 활동가와의 만남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대중들과 함께 새벽예불과 발우공양을 함께 하시면서 발우공양 시 어제에 이어 소심경이 늘어지는 부분과 소소한 대중생활을 다시 한 번 잡아주셨습니다.

발우공양 시에 바닥을 닦는 걸레가 물기가 많으니 물기를 꼭 짜거나, 마른걸레에 물기를 살짝 축여 사용해서 바닥에 물기가 축축하게 남아있지 않아야 하며, 어떤 청소를 할 때든 이것을 주의하기를 세세히 당부하셨습니다.

요즘 인도는 겨울의 막바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금씩 인도의 따뜻함이 다가오고는 있지만 아직은 습하고 찬 기운이 아침저녁으로 자욱합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기 위해서는 장판 아래에 압축 스티로폼을 까는 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며 대중들의 생활을 꼼꼼히 살펴주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친 후 오전 9시에 진행될 이사회 전 수자타 아카데미 앞에서 진행되는 현지 불자들의 ‘붓다의 길’ 행사에 잠시 참석하셨습니다.

이 행사는 수자타 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에서부터 보드가야까지 도보행진이라고 합니다. 행사를 마치고 도보행진이 시작되자 스님께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이사회 준비가 되어있는, 수자타 아카데미 내의 JTS센터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이사회에 앞서 먼저 도착한 쁘리야팔 스님(인도JTS 이사장)과 방글라데시에서 탄압을 받아 인도로 넘어와 살고 있는 차크마 족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를 함께 논의하였습니다.

곧이어 이사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이사회는 2017년을 결산하고 2018년을 공유하는 이사회 및 총회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쁘리야팔 스님과 프리앙카 지(사무국장)를 비롯하여 총 35명의 이사회 및 총회멤버가 참석한 가운데 먼저 2017년 사업 진행내용과 평가 내용이 공유되었고, 곧이어 스님의 2018년 사업계획에 대한 제안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부모가 벽돌공장에 일하러 가면서 아이를 돌보지 못해 아이가 부모를 따라 공장으로 가버려서 학업이 중단된 유치원 아이들, 학생이 늘어나 교실 증축이 필요한 유치원, 오래전 증축된 후 운영이 중단된 마을유치원 문제 등의 유치원 사업에 관한 논의를 제안 하셨습니다.

이어서 까나홀 분교에 관한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전정각산 너머에 있는 까나홀 분교(수자타 아카데미의 분교)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산을 넘어 수자타 아카데미까지 매일 오기가 어려워 가까운 분교에서 수업 후 4학년이 되면 수자타 아카데미로 오도록 운영되고 있는데, 작년에 입학한 4학년생들이 모두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스님께서는 아이들이 4학년이 되면서 수자타 아카데미로 와서 새 친구 및 환경이 낯설어서 적응을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원인을 찾아 대책을 세우라고 하시면서 또 천민 아이들과 양민 아이들, 서로 계급이 다른 아이들이 섞여 자라야, 졸업 후 사회생활이 순조로울 수 있는 점 등을 살펴보시며, 멤버들과 함께 해결방안을 논의하셨습니다.

다음으로는 교육의 질 향상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인도의 경제수준이 갈수록 높아지며, 한국과의 문화교류 역시 활발해 질 것을 고려하여, 한국어 수업을 시작하거나, 컴퓨터교육, 과학 실험실, 영어 등의 교육을 어떻게 더 확대해 운영해 나갈 수 있는지 방안을 함께 논의하신 후 우리가 일상에서 놓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짚어주었습니다.

“항상 우리는 마을에 가거나 길가에서 아이들이 구걸하고 있으면 왜 그런지를 물어보고 형편에 맞게 입학을 시키고, 노인들이 아프면 왜 아픈지 물어보고 왜 병원은 안 가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아픈 노인은 데려와서 치료하던지, 의사가 오토바이 타고 가서 치료하던지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인도JTS 이사회를 마치고, 회원들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인도 정토회 총회가 이어졌습니다. 인도정토회 이사회에서는 보드가야 명사센터, 상카시아 담마센터를 짓는 것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 하고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후 5명의 이사들과 함께 점심공양을 하시며 소수민족인 차크마족 중에서 이민권이 없는 난민들의 시민권 부여에 대한 이야기, 로힝야족 이야기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인도 소수민 족들에 대한 지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후에는 학교, 병원, 마을개발, 건축부의 각 인도 활동가들과 함께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먼저 각 교사들의 개인 학업상태(대학 재학 중인 교사들)를 살펴보시고, 각 마을의 인구 및 유치원 학생 수 등을 꼼꼼히 확인하셨습니다.


이사회에서 논의되었던, 까나홀 분교의 4학년 신설문제, 유치원 증축 문제, 교육의 질을 높이는 문제 등의 논의를 차례로 제안하시고, 교사 및 여러 스텝들의 의견을 모아 2018년 사업계획을 함께 세우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첫째 까나홀 분교에서 4학년이 되는 학생들을 수자타 아카데미로 오게 하는 것과 까나홀 분교에 4학년을 신설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한 후 거수로 분교에 4학년을 신설해서 운영해 본 후 재평가 하기로 하였고, 빠레와 마을에 지어진 후 운영되지 않고 있던 유치원은 올해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빠레와 유치원을 시작하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를 했지만, 교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었습니다. 수자타에서 파견하는 안과 마을에서 유치원 교사를 물색하는 방안들이 논의가 되었는데, 일단 다시 시작하는 유치원이기 때문에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직접 파견해서 6개월 정도 틀을 마련하자고 논의되었습니다.



오늘 모임은 이사회에서 제안되었던 여러 사항들에 대하여 실무를 맡고 있는 스텝들의 의견을 모아 2018년 사업계획을 세워보는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스텝들과의 모임은 내일 있을 스님과의 소풍을 공지한 후 함께 모인 사람들 전원에게 달력과, 다이어리, 용돈을 지급하며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한국인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법회가 이어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좀 더 행복하고 즐겁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은 다 자기가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서 ‘좋다’ 그러고, 내가 싫어서 ‘싫다’ 그러고, 가고 싶어서 ‘간다’ 그러고, 오고 싶어서 ‘온다’면서 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어떤 자극이 오면, 즉 냄새를 맡거나 모양과 빛깔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이 일어나면, 자동으로 좋고 싫은 게 반응됩니다. 자동으로. 그렇게 작동할 때 ‘내가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고, 그렇게 의견을 말한다’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 ‘나’라는 건 없고, 그렇게 반응하고 작동하는 게 거의 자동화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알고리즘(algorithm, 문제해결을 위한 공식, 절차, 방법) 같은 거라서 자동으로 그렇게 반응하는 거예요. 그걸 ‘까르마’라고 합니다. 일종의 프로그램 같은 거예요.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다 자동으로 소화하고, 에너지로 전환하고, 이런 게 프로그램처럼 되어 있잖아요. 유전자, 유전정보에 의해서 그렇게 자동으로 움직이는 거지요.

그런 것처럼 우리들의 정신작용도 일종의 알고리즘처럼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있으니까 거기에 반응만 할뿐 변할 수가 없죠. 그래서 옛날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다’, ‘타고 났다. 천성이다.’ 이런 표현이 있는 거예요. 인도 말로 그것을 까르마라고 합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조금씩 달라요.

전생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전생론, 생년월일시가 그것을 정한다는 사주팔자론, 하나님이 그것을 정해준다는 창조설,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이론은 서로 표현은 달라도 결론은 같습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핏 사람을 관찰해 보면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왜냐하면 사람의 성격이나 하는 행동은 나이가 들어도 크게 바뀌는 게 없거든요. 조금 바뀌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늙어서 보면 거의 비슷해요. 콩을 심어서 싹이 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을 때까지는 콩의 씨랑은 전혀 다른 모습인데 나중에 열매 맺은 걸 까보면 심었던 씨앗이랑 똑 같잖아요. 그런 것과 같아요. 우리가 젊을 때 하는 걸 보면 영 부모와 다른 것 같았는데, 늙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보면 내가 하는 게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나 아버지, 어머니랑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거든요. 생긴 것만 비슷한 게 아니라 하는 것도 비슷한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다 못 보니까 모룰 뿐이지요.

그래서 옛날부터 ‘가족 사이에도 내력이 있다’는 말이 있는 거예요. 한 사람의 삶이 그 내력의 큰 테두리를 못 벗어난다는 거지요. 조금씩 다를지라도 원형은 거의 유지가 되지요. 그래서 천성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도 있고, 애쓴다고 해 봐야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연구를 하셨지요. 대개 잘 변하질 않으니까 운명이나 천성이라고 할 만하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더 깊이 들여다보신 결과, 그런 프로그램은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형성되어져 가는 것임을 알게 되신 거예요. ‘형성되어져 간다’는 것은 원래 있던 것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또 조금씩 변화가 보태진다는 뜻이잖아요.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리로 정리한 게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형성되어진 것이다, 형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즉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것이다’와 ‘변하는 것이다’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거의 비슷합니다. 현실은. 왜 그럴까요?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인데, 쉽게 변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 변화는 굉장히 더디고, 어렵거든요. 그래서 짧게 관찰하거나 얼핏 보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사람들이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할 만하지요. 우리가 바위를 보면서 ‘저 바위는 천년, 만년 그대로다.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인간의 수명이 짧으니까 그 바위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수 억 년의 기간을 두고 관찰해 보면 그 바위도 반드시 변합니다. 부서지고, 가루가 되고, 다시 뭉쳐서 굳어져서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한 정진’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결정론, 운명론에 반해서 붓다는 ‘변한다’고 하셨습니다. 변하니까 우리는 뭐든 바꿀 수가 있는 거예요. 괴로움이 있다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갈 수가 있고, 화를 잘 낸다면 화를 안 내는 경지로 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렵긴 합니다. 천성처럼 프로그램된 것, 이미 형성되어진 것은 변화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꾸준히 해야 합니다. 즉, 길게 보고 해야 합니다. 조급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속적으로 자극을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물방울이 10년 떨어지고, 100년 떨어져도 바위는 잘 안 뚫려요. 그렇다고 안 뚫리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요. 뚫립니다. 금방 안 뚫릴 뿐이에요. 그리고 천년, 만년 시간만 보낸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한 군데에 지속적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한 군데에. 그런데 우리는 아예 안 하고 포기하거나 조금 하다가 안 되니까 말아버리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마치 운명 지어진 것처럼 ‘천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의 어떤 기질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쉽게 포기해도 안 되고, 쉽게 고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고치려면 첫째, ‘아, 나한테 이런 성질이 있구나.’하고 자신의 기질을 잘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이대로 살아도 되겠냐?’고 질문하고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면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화를 잘 내면 화를 잘 내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즉 손실을 감내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것도 감수해야 되고, 무시당하는 것도 감수해야 되고, 신뢰를 못 얻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 크니까 개선을 좀 해야 되겠다 싶으면 굉장히 집요하게, 꾸준히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옵니다.

그럴 때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아, 내가 이게 문제다.’ 이런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변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자각입니다, 자각. 그냥 막연하게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건 욕심이고, 스스로 살펴봤을 때 ‘아, 내가 어떤 순간에 부딪치면 너무 성질을 잘 낸다. 같이 사는 사람이 참 불편하겠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하면 신뢰를 잃겠다.’는 그런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해도 스스로 그런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자각’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개과천선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그 사람이 자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각했을 때만 기적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도 몇 가지 문제가 안 고쳐지는 것은 그 사람이 그걸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은 자각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남으로부터 지적받고 그러니까 자기도 욕심을 내서 ‘고쳐야지!’ 이러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뭐, 나만 그러냐? 성질 안 내는 사람이 누가 있어? 욕심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 이렇게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결심하고, 결심해도 변화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아, 이건 좀 문제다’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간 우울증이 있구나’, ‘내가 감정기복이 심하구나.’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가만히 살펴서 ‘내가 감정기복이 심해서 굉장히 히스테리컬 하니까 주위사람들이 좀 힘들겠다.’ 이런 자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각을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각을 못해서 신경질을 내면서도 남 탓하고, 또 때로는 그런 자기를 자기가 용납을 못해서, 신경질을 낸 자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사람들도 만나기 싫고, 그래서 방밖으로 나가지도 않으면서 후회를 심하게 하는 일종의 자학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왔다 갔다 해요. 막 성질을 내놓고는 자책하고, 또 성질을 막 내놓고 또 자책하고, 이걸 반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결심해서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감정기복이 좀 심한 사람이다. 나는 우울증이 좀 있다.’ 이렇게 자각을 하면 감정기복이 막 일어날 때 ‘아, 이건 내 문제다.’ 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이 순간은 저 사람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자기가 그런 우울증이 있는 사람, 즉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면 ‘아, 이건 내 까르마다. 내 까르마가 또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막 마음에서 들뜸이 일어나는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예요. ‘아, 또 우울증이 시작되는구나. 또 감정이 들뜨는구나.’ 그러면 그게 금방은 안 없어져도, 바깥으로 표출되어서 히스테리컬 하게 난동을 피우지는 않게 됩니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난동을 피워놓고도 금방 ‘내가 관점을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가볍게 참회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남 탓하며 성질을 내놓고는 그걸 나중에 자기가 알게 되면 또 처박혀가지고 안 나타나려고 그러고, 확 가라앉아서 며칠을 헤매고, 그러다 일주일이나 열흘이 지나서 회복이 되면 또 멀쩡하게 지내다가 또 어느 순간 한 번 확 뒤집어지고 또 확 가라앉고 그러지요. 그러면 같이 사는 사람들은 힘든 거예요. 갈수록 신뢰도 잃게 되고요. 그래서 자기 상태를 자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면 내가 화를 잘 낸다는 걸 자각해야 되지요. 그런데 이게 금방 고쳐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프로그램화 되어있기 때문에. ‘나는 안 그러고 싶다’고 해서 안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 그러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첫째, 이때 이런 상태, ‘내 까르마가 이렇다’는 걸 알고 있으면 이것이 작동할 때 자기가 알아차리기 때문에 덜 흥분하고 덜 광분한다는 거예요. 또, 광분을 해 놓고 ‘내가 문제다’ 하면서 침잠하지 않고 ‘내가 놓쳤구나’ 하고 다른 사람한테 금방 밝게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놓쳤네요.’ 이럴 수도 있습니다. 회복속도가 아주 빨라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자기 상태를 스스로 딱 점검해서, 내가 키가 작으면 높은 곳에 있는 건 키 큰 사람한테 부탁하든지, 아니면 의자를 갖다놓고 올라가든지, 아니면 기계를 발명해서 대처하든지, 이렇게 연구를 해야 됩니다.

첫째, ‘나한테 약간 우울증이 있으니까 내가 혹시 뒤집어져서 난동을 피우더라도 그 순간에 나한테 딱 지적을 해 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럴 때는 나도 제 정신이 아니니까 너무 나를 탓하지 말고 조금 놔두고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나한테 얘기 좀 해 주세요. 제가 미쳐서 날 뛸 때는 눈치를 봐서 좀 놔뒀다가 좀 가라앉거든 미친놈이라고 쳐내지 말고, 얘기 좀 해 주세요.’ 이렇게 자기 상태를 인정하고 도반들에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 있고요.

두 번째, 의사선생님께 우울증 약이나 진정제를 처방받아서 항상 지니고 다니다가 심리가 막 흥분되면 약을 먹으면 됩니다. 사람이 흥분되면 세상 사람이 다 나쁜 놈들 같거든요. 한 사람만 미운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미운데 이 사람을 저 사람이 편드니까 저 사람도 밉고, 또 말리는 사람도 밉고, 이렇게 되면 벌써 병이 도진 거예요. 그러면 약을 먹어야 돼요. 또 죽고 싶고, 사람들 꼴도 보기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다면 이것도 병이에요. 그러면 약을 먹어야 돼요. 그러면 금방 괜찮아져요. 이게 자기 컨트롤이에요.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럴 때는 약물의 도움을 조금 받아야 합니다.

무조건 이를 악다물고 참는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감기몸살 기운이 있으면 한 일주일 쉬면 좋지만 여기는 그렇게 쉴 형편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약을 먹든지, 병원에 가서 주사를 한 대 맞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상태를 잘 알아서 점검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자기 상태를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땐 또 옆 사람한테 얘기해 보세요. 여기서 나누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우리 중에 누가 약간 우울증이다. 아이고, 또 시작이다. 저렇게 또 성질 한번 내면 며칠 간다. 그러고 또 방구석에 처박히면 또 며칠 간다.’ 이런 거 다 알잖아요? 남에 대해서는 다 알아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요. 며칠 겪어보면 ‘또 시작이다.’ 이렇게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도반들에게 조금 도움을 얻든지, 아니면 스스로 관찰해서 ‘나한테 이런 까르마가 있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 거기에 맞춰서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차려서 그 흥분에 안 넘어가든지, 넘어갔다면 빨리 알아차려서 참회를 하든지, 아니면 도반들한테 미리 얘기해서 양해를 구하든지, 대책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거예요. 현명한 사람은 돈이 없을 때 조금 어렵더라도 참고 살든지, 약간 빌려서 위급상황에 대처하든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겠지요. 자기 성질에 대해서도 그런 것과 같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성질이 좀 있고 문제가 있어도 도반들끼리는 서로 신뢰할 수 있단 말이에요. ‘저 분은 잘 안 고쳐진다. 그러나 자기가 알고 있다. 그러니 저렇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살아가자.’ 고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저러냐?’ 이렇게 서로 불신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 여기에 수행자라고 와있지만 각자 까르마를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 까르마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첫째,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알고, 스스로 조절해야 됩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도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의 까르마를 너무 탓하지 말라는 거예요. ‘또 지랄한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또 병이 났구나. 그러니 조금 기다려줘야 되겠다. 조금 받아줘야 되겠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이해하면서 수용한다면 생활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한국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수행자로, 봉사자로 왔는데, 막상 와보면 날씨도 덥고 말도 안 통하니까 한국에서 보다 여기서 까르마가 더 발동합니다. 그렇다고 성질이 올라오는 대로 다 표현하고 살면 자기 스스로도 여기 와서 사는 의미가 없다 싶으니까 자꾸 자책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이 어려운 데에 와서 사는 게 다들 힘드니까 또 도반들끼리 부딪치게 되는 거고요. 즉, 도반을 더 힘들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항상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다 부족한 존재다.’ 아직 우리는 해탈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부족한 줄 알고 살면 됩니다. ‘내가 부족하다.’ 이걸 알고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부족한 사람은 일을 안 해야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도 세상에 조금 도움 되는 일을 하겠다. 내가 성질은 좀 있지만 밥이라도 한 끼 잘 하겠다’, ‘내가 성질은 좀 있지만 심부름이라도 좀 잘하겠다.’ 이렇게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되 좌절하지도 말고, 또 욕심내지도 말고, 그래도 내가 없는 거 보단 있는 게 나으니까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아간다면, 이런 자세가 된다면 부족한 우리들끼리 이렇게 한 집에서 살아도 서로를 신뢰하며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여기 한 명이라도 없어 봐요, 얼마나 아쉬워요? 성질이 날 때는 ‘저런 인간은 없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을 생각해 보면 어때요? 그 사람이라도 있어서 시장이라도 봐오고, 그 사람이라도 있어서 회계라도 봐주고, 그 사람들이 있어서 밥이라도 해 주니까 우리가 지금 이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며 다 빼버리면 같이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없다면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의 이 큰 일을 할 사람이 없잖아요. 부족한 것 같아도 여러분들이 계셔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성질을 들여다보면서 ‘저런 인간이 여기 있으면 뭐 하냐?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 이럴 때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런 관점으로는 여기서 살기가 힘들어요. 항상 자기 성질을 보고 자기의 한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한계를 알아 차린다’는 게 잘못하면 자학증세가 되기가 쉬우니까 잘 살펴보시고요. 우리가 도반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아야 되지만 자기 자신도 소중하다는 걸 알아야 돼요. 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래도 내가 여기서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자기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인도에 봉사하러 왔지만, 우리가 가진 성질 때문에 스스로 자책하거나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잘 챙겨서 함께 나아가도록 격려도 해주시고 자긍심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해 해주었습니다.

내일은 스님과 함께 인도인 활동가, 한국인 활동가가 다함께 소풍을 가는 날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민정(글) 심규선(사진) 정란희(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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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 법륜스님의하루 20180130

스님의 하루 2018.02.22 16:00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2018.1.30 인도 수자타아카데미 마을잔치

어제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제1801차 깨달음의 장’이 마무리 된 날이었습니다. 상카시아에서 온 수바스 수라즈, 학교 스태프 12명이 수련생으로 참가했습니다. 특히 스태프들은 수자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교사로 활동하고 있어 이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수련의 장은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얼굴이 환해진 스텝들과 인도 JTS활동가들은 도반이 된 기쁨을 함께 나누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수련에 참가했던 인도인 스텝들은 “처음에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스승님을 믿고 계속 해서 지금 이렇게 기쁜 순간을 맞이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부처님 법을 전하는데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바라지들에게도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은 이 환희심을 이어가기 의해 백일 동안은 정진도 해보기로 했습니다. 인도인 스텝들의 소감나누기는 우리에게 가슴 뭉클함과 더불어 초발심을 낸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수행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새기게 하였습니다.

오늘은 마을 잔치가 있는 날입니다. 한동안 추웠던 날씨가 따뜻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발우공양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예불과 소심경이 조금 늘어지는 것에 주의를 주셨고, “초심자들이 식사를 급하게 하는 것을 배려해서 숭늉 내는 시간을 늦추었더니, 아예 식사가 끝나고 한참 있다가 숭늉을 내는 것은 너무 늦으니 대중이 3분의 2 가량이 식사를 끝냈을 때 숭늉을 낸 후, 오히려 뒤에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 법에 맞다.” 고 알려 주시면서 “원래 원칙이 아닌데 편의상 결정된 게 법이 되어가지고 아예 변화된 것들이 많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모르는데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게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을 잔치에는 수자타 아카데미와 가까운 두르가푸르와 자그디스푸르 두 마을의 모든 주민들과 14개 마을의 유치원 부지 기증자, 각 마을의 일손을 돕는 청년들이 모두 초대되었습니다. 두르가푸르 마을은 1994년 수자타아카데미를 지을 때 땅을 기부한 곳입니다. 마을잔치는 수자타아카데미와 역사를 함께한 마을 주민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자녀인 학생들의 공연을 보고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매년 이 맘 때쯤 열고 있습니다.

곱게 차려입은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수자타 아카데미의 쁘락보디 홀로 모여들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들도 한껏 머리 손질을 한 남학생, 예쁘게 머리를 땋은 여학생,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바쁘게 모여들었습니다.

자그디스푸르 주민은 두르가푸르 학생들이, 두르가푸르 주민들의 식사는 자그디스푸르 학생들이 돕기로 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음식이 준비되고 학교 이곳저곳에 식사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교장인 쁘리앙카지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1, 2학년 학생들이 남녀 학생 커플을 이루어 춤을 선보였고, 자그디스푸르 청년들은 스님께 꽃목걸이를 드리고 재미있는 춤과 기교 있는 덤블링으로 주민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바가히, 망코시힐, 자그디스푸르, 까나홀 등 4개 마을 주민들이 공연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 그리고 이번에 새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느낀 점을 10여 명의 남자 분들이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인도인들이 춤과 노래 문화를 볼 수 있는 무대였습니다. 학생들이 공연도 이어졌습니다. 성지순례단을 위해 연습했던 춤을 다시 한번 뽐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태권도 시범을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학생과 마을 주민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 댄스파티를 했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자유로운 몸놀림으로 틀에 매이지 않고 춤추며 즐기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스님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행사가 재미있었는지 물어보고는 처음에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변한 것은 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이곳에 사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꼭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기 학교가 없었을 때는 이 아이들이 구걸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공부를 하니까 가야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앞으로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들도 훨씬 더 살기 좋아질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 둥게스와리는 부처님께서 6년간 수행했던 곳입니다. 우리가 세계 어디를 가던지 ‘둥게스와리가 부처님께서 6년간 수행한 곳이다’ 라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오늘 마을잔치를 준비하면서 음식양이 많아 미리 준비한 음식이 식은 것에 미안해하시며,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인도 스태프가 공양 장소를 안내하고 마을별로 남자, 여자가 나뉘어 이동하였습니다. 자리에 앉자 학생들이 접시와 물컵 물 음식과 과일을 들고 하나씩 놓습니다. 아이들이 오고 가며 부족한 음식들을 더 드리는 인도에서 행해지는 마을 잔치의 방식대로 풍족한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식사를 일찍 마치신 스님은 공양 장소를 두루 다니시면서 식사는 맛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민이 아닌 밖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80여 명도 안에 자리를 마련하여 대접을 했습니다. 혼자서 손을 떨며 음식을 먹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니 배고픈 사람에게 베푼 공양의 공덕이 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행사가 다 끝난 뒤에 마을 장기자랑에 참여해 준 4개 마을의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선물을 전하며 수고하셨다며 저녁에 맛있는 것 드시라며 격려금도 함께 전해주면서 내년에는 청년들을 위해 축구시합도 다시 한 번 해보자고 하였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법당에서는 17명의 마을리더들과 12명의 유치원 교사와 만남이 법당에서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마을 리더들과 유치원 교사들에게 올해 날씨가 어떤지, 가물었는데 농사는 어떤지, 마을의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어보시고, 현재 식수는 어떠냐는 질문에 가물어서 우물 물이 얕아 2명이나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한달 후면 마실 물이 없을 거 같다는 말과 우물은 거의 말라버렸다는 대답에 물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지 어디서 물을 구하는지 정부에서 물을 공급해주는지 각 마을의 물 사정을 하나 하나 체크 하였습니다

마을리더들, 유치원 교사와의 미팅이 끝나고 나서는 6학년부터 10학년까지 봉사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자그디스푸르 두르가푸르 외에 다른 마을에서 몇 명이 다니는지 손 들어 보라 하시고, 지금 유치원에 봉사 나가고 있는 학생이 몇 명인지, 유치원의 학생 수는 몇 명인지, 한 명 한 명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마을에 있는 아이들은 학교에 잘 나오는지, 학생 수가 적어진 이유가 무언인지, 졸업하면 정부학교에 가는지 등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병원과 식당에서 봉사하고 있는 학생들은 몇 명인지 확인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물어보았습니다.

성지순례 때 페인트 칠하고 춤추었던 학생이 누구였는지, 오늘 공연 한 사람은 누구인지 세세하게 물어보면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을 챙겼습니다.

또, 유치원에 봉사 하는 상급생에게는 학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작년에 수리하기로 했던 유치원은 수리가 다 되었는지, 아직 고쳐지지 않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였고, 책임자인 반자이지에게도 이런 상황들을 파악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병원과 키친에서 봉사하는 학생들에게도 부족한게 있는지 필요한게 있는지 물어보시고 점심 식사는 괜찮은지 나쁜지 질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자기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학교에 나오면서 이런게 있으면 좋겠다는 게 뭐가 있는지 질문하자 수학 수업이 매일 필요하다, 선생님이 더 필요하다, 책이 더 필요하다는 대답이 이어졌습니다.

운동기구중에 필요한게 있냐는 물음에는 놀 시간이 없다는 얘기에 모두가 다 함께 웃었습니다,

학생들이 스님께서 언제 오시는지 확인하고 기다리는 이유가 이런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을 주민들 식사 드린다고 수고했어요 .내 공부도 해야 하지만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 JTS의 원칙에는 ‘초등학교까지만 도움을 받고, 중학교부터는 도움을 받은 만큼 남에게 도움을 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봉사 안 하고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은 수자타 아카데미 다닐 수 없어요. 반드시 내가 배운 만큼 나도 가르치는 일, 내가 도움 받은 만큼 도움을 주는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인도말로 “사마즈가 헤?” 라며 이해했는지 물으니, 학생들은 “예스”를 크게 외치며 웃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용돈과 달력을 선물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나서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한 후 앞으로 정비해야 하는 학교 주변의 땅을 둘러 보기도 하였습니다.

예불 후 인도 상근자들과 회의가 있었습니다. 마을 리더 미팅 때 나왔던 물 부족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리고 까나홀 분교 학생들이 3학년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4학년부터 본교로 옮겼는데, 잘 나오지 않는 이유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또 천민 학생만 모아서 계속 교육할 것인지, 양민아이들도 함께 섞어서 할 것인지등도 함께 논의 하였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천민아이들만이 아니라 양민아이들도 함께 공부를 해야 천민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에 적응하고 기를 펴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후에 빠레와 유치원, 까나홀 분교, 수자타 아카데미에 대한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또 학교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처우하는지? 지금 중학교 까지 운영이 되고 있는데 고등학교까지 허가를 받고 인터칼리지까지 가능할 수 있게 알아 보도록 하고, 또 장기적으로 학교 건물들이 필요한데,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보도록 하였습니다.

또, 모레 있을 학교스텝들과의 소풍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내일은 인도정토회 이사회와 인도 JTS이사회 그리고 한국인 법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이정미(글), 심애남(사진), 손명희(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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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법”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24

스님의 하루 2018.02.21 16:00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법”

2018.1.24. 인도 19일째_상카시아에서 가야로 이동

원래 어제 밤 9시 15분에 출발할 예정이었던 기차는 연착되고, 연착되어서 결국 오늘 아침 10시 10분경 이타와 역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을 비롯하여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보광법사님, 쁘리앙카지, 수바스지, 수라즈지, 수행팀 일행 약 7명은 아침 9시경 이타와 기차역에 도착해서 다시 1시간여를 기다리는 동안 스님께서는 업무를 보시고, 또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고치는 사람이 지나가길래 보광법사님과 수바스지는 가방의 자크를 고치고, 스님께서는 뜯어진 고무신을 기웠습니다.




그리고 10시 10분경 약 13시간이 연착된 기차를 겨우 타고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가야로 향했습니다.

기차에서 점심, 저녁을 과자와 과일로 해결하고 스님께서는 원고 점검 등 업무를 보고, 다른 일행들도 각자 일에 임했습니다.

기차는 최종적으로는 약 16시간 20분을 연착한 후, 새벽 1시 32분에 가야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었습니다.

오늘은 강연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2017년 하반기 즉문즉설 강연 중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했던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40대 중반인데요. 이성과 인연이 안 닿아서 어떻게 하면 좀 인연이 닿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머리를 좀 써야지요. 지금 아이 낳아서 언제 키우려고 그래요? 아이가 다 큰 50대 중반의 아주머니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어요. 40대 중반의 남자가 20~30대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좀 어려운 거예요. 생각을 딱 바꾸면 돼요.

질문자는 만약 가격이 같다면 조그마한 티코 같은 새 차 사는 게 나아요? 벤츠 같은 중고차 사는 게 나아요?”

“벤츠가 낫습니다.”

“그래요. 그것처럼 사람도 돌싱 중에 괜찮은 사람 많아요.(대중 웃음) 결혼했다가 실패했든, 남편이 돌아가셨든 관계없이 자기 나이를 기준으로 밑으로 10살 위로 10살 범위를 넓히면 괜찮은 사람은 많아요.

인연 닿는 대로 만나면 됩니다. 사람을 먼저 만나야 돼요. 결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나면 ‘나이가 많다’, ‘나이가 적다’, ‘인물이 어떻다’ 이렇게 되는데 일단 먼저 사람을 사귀어야 돼요. 첫째, 사람을 그냥 친구로 사귀어야 됩니다. 친구로 사귀려고 하면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어요. 결혼을 했든 안했든 상관이 없어요.

둘째, 그렇게 친구 중에 대화가 되는 사람과 연애를 먼저 하는 거예요. 연애 하는 정도는 나이와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결혼은 나도 좋아해야 하지만 상대도 나보고 좋다 해야 되니까 이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또 소수란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결혼이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혼자 살고, 그래서 재수 좋으면 계속 혼자 살 수 있고, 재수 없으면 물릴 수도 있어요.(대중 웃음) 그러면 뭐 재수 없어 물린 것을 하늘의 뜻인가 보다 하고 그냥 물려서 사는 건데, 그럴 때 이것을 인연이라 그래요.

이렇게 너무 따지지 않으면 인연을 만날 수 있어요. 한국 사람만 꼭 구할 이유도 없어요. 제가 전 세계로 다녀보면 한국 여성들도 다른 나라 남자들과 사는 경우가 많아요. 또 너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만 찾으면 안 돼요. 젊은 사람 데리고 살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돼요. 젊은 사람들은 도망갈 위험이 있지만 열 살, 스무 살 많은 사람하고 결혼하면 도망갈 위험이 없어요. 한눈 팔 위험도 없어요. 안전하게 가는 게 좋아요.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면 말이 좀 안 통하고 불편한 것도 있는데. 질문자가 사업하는 데 좋은 점도 있어요. 요즘 베트남 같은 곳은 경제가 많이 좋아지잖아요. 혼자 가서 일하려면 힘 드는데, 결혼을 하면 부인이 그 지역에 이미 터전을 잡아놓은 거잖아요. 부인의 학교 동기도 있고, 친구도 있잖아요. 그렇게 결혼해서 사업을 잘 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해도 되고 길은 뭐 무궁무진해요. 그냥 저처럼 머리를 싹 깎아버리면 얼마나 좋아요? 절에 들어와도 돼요. 이 넓은 세상에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있는 현대사회에서 뭘 그걸 가지고 걱정을 해요? 자, 저와 대화하면서 무엇을 깨달았어요?”

“일단 처음에는 사람을 만나야 되고요. 먼저 친구가 되고, 인연이 닿는 사람이면 연애를 하고요.”

“첫째, 가능하면 폭넓게 만나야지 나이, 인물 이런걸 너무 따지면 안돼요. 둘째, 대화가 되는 상대는 자주 바뀔수록 좋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헤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고 많이 사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재수 없이 많이 못 사귀고 몇 번 만나다가 탁 물리면 할 수 없이 결혼을 하면 돼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네.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보통 결혼할 때 무엇을 제일 먼저 봅니까? 첫째, 인물을 제일 먼저 봐요. 인물, 키, 얼굴 모양이 거의 50%를 좌우합니다. 둘째, 인물 갖고는 못 먹고 사니까 능력을 봐요. 어느 대학 나왔나, 직업이 뭐고 월급은 얼마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고. 유산 고려하고 재산을 고려해야 되니까요. 셋째, 좀 오래 사귀면 성격도 좀 보죠. 순서가 이렇단 말이에요. 그런데 결혼해서 같이 산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요. 인물은 사는 데 별 도움이 안 돼요. 처음 만날 때만 도움이 되지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럼 살면서 갈등이 제일 심한 게 뭘까요?”

“성격이요.”

“성격보다 더 심한 갈등을 불러오는 것이 있어요. 이건 결혼할 때 거의 고려를 안 해요. 같이 살면 제일 부닥치는 것이 첫째, 생활 습관입니다. 여러분들이 잔소리 하는 핵심이 뭐예요? 밥 먹을 때 음식이 짜다, 싱겁다, 왜 이거를 볶아야 되는데 삶았나, 이런 거잖아요. 그 다음에 청소 문제입니다. 옷 벗어서 아무데나 던져놓는 문제, 남자들이 오줌을 서서 누어서 맨날 앞에 떨어뜨리는 문제. 저녁에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자는 시간 늦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 갈등의 원인이에요.

둘째, 성격입니다. 짜증내고 화내고 잔소리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결혼할 때 하나도 고려를 안 해요. 그런데 실제 결혼 생활은 생활 습관과 성격이 살고 못 살고를 좌우합니다. 셋째,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물은 큰 상관이 없어요. 살아보면 그래요.

그러니 결혼 생활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선택할 때 우선순위와 살면서 실제로 부딪치는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결혼할 때는 생활태도가 어떠냐 이걸 봐야 되는데, 사실 생활태도를 알기가 좀 어렵잖아요. 생활태도를 알려면 상대편 집에 가봐야 돼요. 시어머니가 어떻게 사는지, 장모 될 사람이 어떻게 생활 하는지, 설거지, 방 구조, 살림을 어떻게 사는지를 보면 돼요. 왜냐하면 부모를 거의 100% 닮기 때문에요. 인물만 보면 이런 생활태도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결혼하기 전에 주로 상대의 어머니를 보았어요. 딸 대신 어머니를 보면 훨씬 더 정확해요.

결혼을 할 때는 첫째, 생활 태도가 중요하고, 둘째, 성격이 중요합니다. 성격은 조금 오래 사귀어야 알 수 있어요. 장시간 연달아서 있어봐야 돼요. 잠깐 만났을 때는 성격을 억제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도 낯선 사람한테는 다 젠틀하게 하지만 집에 오면 신경질 내고 그러지 않습니까? (대중 웃음)

그러니 생활태도와 성격이 더 우선순위예요. 그 다음이 능력입니다. 결혼할 때는 인물을 볼 필요가 없어요. 능력은 같이 사니까 조금 필요하지만 인물은 전혀 고려를 안 해도 돼요. 이런 기준으로 선택을 하면 훨씬 살기 좋은 사람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보광,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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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야 진정한 내 것이 됩니다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23

스님의 하루 2018.02.20 16:00

내가 만들어야 진정한 내 것이 됩니다

2018.1.23. 인도 상카시아 2일째

오늘 아침은 부처님께서 하늘에 가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교화한 후 다시 땅으로 내려온 곳이라는 상카시아에서 맞이하였습니다. 어젯밤에는 법당에서 회의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니, 밤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더니, 오늘 새벽은 새벽별도 보이고, 공기도 맑고 조금 차가운 새벽 공기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침 식사는 감자와 촐라(콩이름), 양파, 고추를 섞어서 삶아서 내고, 구운 빵과 짜빠띠에 따뜻한 짜이를 곁들여서 먹었습니다.



식사 후에 스님과 YBS(Youth Budhist Society) 멤버들은 작년 가을에 석가족 자녀들을 위한 전문대학 설립을 위해 구입한 땅을 보러 갔습니다. 현재 우리 명상센터가 3.5에이커 가량 되는데, 새로 구입한 땅은 1.8에이커가 조금 넘습니다. 전문대학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부지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현재 그 땅 위에는 유채가 씨를 맺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구분이 딱 바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지 위치를 살펴보시고, 큰 길과 연결되는 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지도상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교통은 어떤지, 기차는 하루에 몇 번 서고 어디서 어디로 다니는지, 기차역이 어느 위치에 몇 킬로정도 떨어져 있는지 세밀하게 하나하나 다 점검을 하셨습니다.


산책하듯 걸어서 땅 부지를 둘러보는 중에 초창기에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활동한 수레스를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캄보디아 절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다시 짜이 한 잔을 마시면서 토론을 했습니다. 명상센터는 인도정토회 사업이고, 전문대학은 JTS사업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어떤 것이 우선이냐고 묻자, 둘 다 빨리 지어야 한다며 세부적인 사항들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습니다. 전문대학을 설립하려면 어떻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부지에 건축을 하면 어떤 허가사항이 있는지, 외국에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른 단체들은 어떻게 외국지원금을 받고 있는지, 현재 법인 상황 속에서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구체적으로 누가 무엇을 알아볼지 역할도 나누었습니다.

그런 중에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오늘 점안식 법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럭나우라는 도시에서 온 젊은 의사였습니다. 담마팔스님과 어릴 적 친구인데 지금은 의사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며, 석가족을 위한 병원 건립을 계획하고 있고, 앞으로 석가족을 위한 일에 뒷받침이 되겠다며 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행사장으로 가던 중, 크리켓(운동경기) 경기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인도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각 마을별 크리켓 매치를 위해 우루루 몰려 있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스님께서 크리켓 경기장에 잠시 내려 인사말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어서 경기장에 내려 인사말도 하고, 크리켓 경기의 시구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분이라며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점안식 및 법회를 하는 마을에 도착하니, 큰 마이크 소리와 많은 사람들로 잔치집 분위기였습니다. 보라색 천으로 행사장 막음을 하고, 바닥에는 초록색 카펫이 깔려 있고 벌써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집에서 제일 예쁜 사리를 입고 온 동네 여인들이 모여서 짜빠띠를 밀고 있었는데, 짜빠띠 미는 사람들이 마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아 보일정도로 그 동네 여인들은 다 나온 듯 했습니다.





이 마을은 나발로푸르 풀레이아마을로 주변 전체가 다 석가족인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절을 지은 사람은 60세가 넘은 시각장애인입니다. 혼자 살면서 자기 땅에 절을 지었습니다. 3년간 꾸준히 지은 절에 오늘 드디어 부처님을 모시고 점안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깨끗하게 차려 입고 스님 옆에 앉아 점안식에 참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 뿌듯하겠다 싶었습니다.

동네에 이렇게 절을 지어 마을사람들이 언제나 부처님을 참배할 수 있고, 법문도 들을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싶었습니다. 이 곳에서도 불상 점안식을 한국식, 인도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점안식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불상에 참배를 했습니다. 점안식 이후에는 법회가 이어졌습니다. 동네 유지들이 스님께 꽃공양을 올리고, 인사말 하는 시간을 가진 후, 스님 법문을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이 마을에 절을 지어 보시하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보드비하르를 지으신 스리라칸신 샤키야 님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모두 박수) 절을 지은 큰 공덕으로 비록 육신의 눈은 어둡지만 마음의 눈이 열려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실 것입니다.(모두 박수)”


이어서 점안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참가하신 내외빈분들께도 환영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또 오늘 법당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는데요, 처음 가져왔을 때는 그냥 조각에 불과했지만 오늘 우리 담마빨 스님과 상가가 함께 점안함으로써 이제 살아계신 부처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점안식의 의미입니다. 여러분께서 앞으로 이곳에서 수행하고, 기도하시면 부처님의 가피를 많이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점안식을 해 주신 담마빨 스님과 비구 상가들께 감사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모두 박수)

그리고 오늘 바쁘신 중에도 많은 내빈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닥터 나왈 께서르 사키야는 의사로서 정말 바쁘신데 이렇게 오셔서 여러분들을 위해 축하인사를 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모두 박수) 또 함께 해 주신 많은 내빈들께도 박수를 드리겠습니다.(모두 박수)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여러분은 한국을 아십니까?”

“(한 대중) 네.”

그리고 인도에서 불교의 역할, 불교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한국은 중국을 지나서 더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멉니다. 그런데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된 것은 2600년 전이고, 한국에 그 불교가 전래된 것은 2000년 전입니다. 한국에는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불교국가가 됐습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재의 대부분은 불교문화재입니다. 또 지금으로부터 1300년 내지 1500년 전에는 한국의 많은 스님들이 인도 날란다대학으로 유학도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은 인도불교에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도에 불교가 많이 쇠퇴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인도에 불교가 쇠퇴하다 보니까 불교가 아주 작은 종교, 소수의 종교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 밖으로 나가보세요. 불교 믿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등이 있습니다. 아시아지역의 동쪽은 대부분 불교국가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유럽과 미국에도 불교가 아주 많이 전파되어 환영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소수자가 아닙니다. 담마빨 스님이 아까 ‘불교는 마이너리티(minority, 소수)’라고 하셨는데 세계적으로는 불교가 마이너리티가 아닙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세 가지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인도가 크게 부흥할 것이라는 겁니다. 19세기에는 세계의 중심이 영국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미국이었고요, 지금은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은 그 흐름이 어디로 갈까요? 바로 인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인도는 굉장히 부흥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됐지만 현재 인도에는 불교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부처님 열반 이후 2500년이 지나면 불교가 다시 인도로 들어와서 부흥한다고 했습니다. 이미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2500년이 지났고, 이제 인도에는 불교가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에 가보셨습니까?”


“(대중들) 예.”

“그곳에는 외국 불교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고, 여러 나라에서 절도 많이 짓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도불교가 다시 일어날 징조입니다. 그러나 아직 인도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인도불교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누가 시작을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이 상카시아의 석가족이 시작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럴 요의가 있으십니까?(모두 박수)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마을마다 절이 조금씩 생기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그래서 우리는 상카시아에 모든 불자들이 담마를 공부하고 명상도 할 수 있는 담마센터를 지으려고 합니다.(모두 박수) 또 상카시아 스투파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회할 수 있는 강당도 만들려고 합니다. 그 시설들은 외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도인, 인도 불자를 위한 것이 될 겁니다. 그러니 외국의 도움을 받을 게 아니라 여러분들께서 직접 하루라도 와서 일하고, 벽돌 한 장이라도 쌓는 등 여러분들 손으로 직접 하셔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야 진정한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겠습니다!(함 까렝게!)’ 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나서주신다면 저는 여러분들을 후원하겠습니다.(모두 박수) 여러분들이 1락(인도의 돈 단위)을 모으면 제가 1락을 지원할 것이고, 여러분들이 1 까르(인도의 돈 단위)를 모으면 제가 1 까르를 지원할 것입니다.(모두 박수) 여러분들이 하는 만큼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대신에 여러분들이 일단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해야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조금 어렵게 살아도 외부의 지원을 별로 원하지 않는 전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는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좀 어려워도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도불교를 부흥시키는데 부디 여러분들이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불교를 전한 분들은 다 인도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곳을 지원할 생각입니다.(모두 박수)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려면 중간에 통역이 필요해서 서로 직접 소통하기가 어려운데, 여기 이렇게 담마빨 스님이 계십니다. 앞으로는 담마빨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법문을 많이 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마을에 절을 지으면 불상은 후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절 10개를 지으면 제가 불상 10개를 지원할 것이고, 절 100개를 지으면 불상 100개를 지원할 것입니다.(모두 박수) 여러분들, 저와 반반씩 나눠서 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대중들) 네.”

“그렇게 해서 우리 함께 인도불교를 다시 한 번 일으켜봅시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스님께서 석가족들에게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습니다. 부처님 열반후 2500년이 지난 지금, 그 옛날 누구가가 2500년이 지나면 다시 인도에 불교가 흥성할 것이라 했다는 말이 그냥 빈 말은 아닐 듯 싶었습니다. 그냥 다시 불교가 흥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골 곳곳까지 다니며 법을 설해 주시고, 불상을 지원하고, 석가족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시는 스님같은 분이 계시기에 다시 불교가 흥할 수 있으리라 싶었습니다.

옥상에 테이블이 깔리고 음식이 차려졌습니다. 아침에 간단한 식사를 한 이후로 오후 3시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따뜻하게 구워 온 짜빠띠와 달, 사브지, 유미죽이 전부였지만,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하는 중에 그 지역 MP(지역 국회의원)가 늦게 도착해서 미안하다며, 스님을 찾아와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행사를 다 마치고 행사장에서 나와 밤기차를 타기 위해 이타와라는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기차가 4시간 연착된다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기차 시간까지 수바스지 집에 잠시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계속 연착이 됩니다. 두 시간 더 연착이 되고, 한 시간 더 연착이 되고....오늘 밤 9시 15분이 예정이었던 기차는 아마도 내일 오전 9시경에나 되어야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방에서 원고 점검을 하고 계셨는데, 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기차가 연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 지역 MP(지역 국회의원)의 형님과 사립, 공립 학교 교사들 5분이 찾아와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갔습니다.
늦은 밤, 아직까지 기차는 계속 연착되고 있습니다.

내일은 하루종일 기차로 이동하는 일정입니다. 이타와에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가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보광,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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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유산을 받아도 후손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 법륜스님의하루 20180122

스님의 하루 2018.02.19 16:00

아무리 좋은 유산을 받아도 후손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2018.1.22. 인도 상카시아 1일째

성지순례 기간에는 아침마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더니, 며칠사이 날씨가 많이 변했습니다. 이타와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안개없이 맑고 기온도 그 때만큼 차지 않았습니다.

델리 자혜정사에서 이동하면서 먹을 저녁밥으로 김밥과 빵, 샌드위치를 싸주셨는데, 어제 다 먹지 못했습니다. 수바스지 부인이 따뜻한 감자 빠라따를 해 주기위해 식재료를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스님께서 일절 음식은 하지 말라고 하셔서 짜이 한 잔으로 대신하고, 어제 싸온 김밥을 후라이팬에 굽고, 먼저 상할 것 같아 보이는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찬 샌드위치를 아침으로 드실 때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먹으면 되는데... 언제나 몸소 보여주시는 모습 하나하나 새삼 감사하고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석가족 두 개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하고,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법회를 하는 날입니다.

옛날 석가족이 멸망하고 성을 숨기고 살아왔던 샤키족들은, 자신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의 후예인 것을 알고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왕족이었던 석가족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은 인도에서 미들 카스트로서 주로 농사를 짓는 자영업자들이 많습니다. 상카시아지역 주변으로는 약 200만명 정도의 석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도정토회에서는 20여년전부터 석가족마을에 법당 및 불상 지원 사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불상 점안식을 한 곳은 우타르 프라데시주, 이타와 디스트릭(시), 파르티야 꼬띠 람푸라빠짜르란 마을입니다. 2009년도에 불상 점안식을 한 곳입니다. 당시 불상은 한국에서 직접 가지고 와서 모셨는데, 기후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근 10년만에 불상 여러 곳이 벗겨지고 파손된 부분이 있어서 새로운 불상으로 점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당시 작은 홀실처럼 불상 하나 넣어 둘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그새 법당이 만들어져서 법당에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스님께서는 기존에 있던 불상 이운식을 거행했습니다. 기존 불상은 다시 잘 싸서 상카시아 담마센터로 모시고 가기위해서 차에 실었습니다. 그 후,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 불상 점안식을 한국식으로 간단하게 하시고, 인도 스님이신 담마팔 스님께 인도식으로 점안식을 다시 요청하셨습니다. 인도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빤쯔실과 경전을 외며 점안식을 진행했습니다.

점안식 이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스님께 꽃목걸이를 걸어 주며 인사를 드렸고, 한국에서 온 분들에게는 하얀 천을 걸어주며 환영식도 해 주었습니다. 스님께선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다음 점안식 시간이 다 되어 짜이 한 잔 마시고, 다음 마을로 이동했습니다.



두 번째 점안식이 있었던 곳은 메인뿌리 디스트릭(시) 너글라 더누란 마을이었습니다. 총 85가구의 마을인데 석가족이 45가구, 암베드카르 불교를 믿는 천민이 30가구, 그 외 몇 개 가구로 한 마을이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신심깊은 스리 하리람 샤끼야란 사람이 자기 땅에 절을 지어서 오늘 점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착해서 먼저 정성껏 차려주는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아직 상표도 채 떼지않은 스테인레스 그릇에 정성껏 한 국자씩 달과 유미죽을 퍼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첫 개원을 하는 법당이라 리본 커팅식으로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곳에서도 스님께서 먼저 법당에 들어가 거불을 시작으로 점안식을 진행하셨습니다. 오색실을 길게 늘어뜨려 참가한 사람들이 잡고, 한국식, 인도식으로 점안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점안식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법당에 들어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부처님께 꽃을 올리고 친견을 했습니다.

마을 유지들과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2부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스님 법문을 듣기에 앞서 마을 유지들이 스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축하인사말을 했습니다. 인도에서는 행사를 하게 되면 축하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정작 행사보다 인사말 하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한 사람이 혼자서 30분, 또 다른 한 사람이 한 시간은 족히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다 앉아서 듣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 문화가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나무 붓다, 나무 담마, 나무 상가. 여러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점심은 드셨어요?”

“(대중들) 예.”

“오늘 이 나글라더노 마을에 ‘석가모니 보땀 보드비하르’ 개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대중들 박수)

그리고 오늘 이 곳에서 점안식도 했습니다. 우리가 ‘점안(點眼)’을 하기 전에는 그냥 조각일 뿐인데 점안을 함으로써 비록 돌로 만든 불상이지만 앞으로는 우리에게 부처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는 이 보드비하르에서 담마도 공부하고, 기도도 하시기 바랍니다.

이 보드비하르를 이렇게 지어 기부해 주신 스리하리람 사끼아님께 큰 박수를 보내드립시다.(대중들 박수)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이 됐습니다. 지금의 네팔 땅에 있는 카필라바스투의 왕자로 태어나신 분이 고타마 싯다르타인데, 그분께서 수행을 하셔서 도를 이루시면서 불교가 시작이 됐습니다. 그분의 아버지 종족은 여러분과 같은 석가족이셨고, 어머니는 꼴리족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신지 200여년이 지난 아쇼카 왕 때에 이르러서 불교는 전 인도에 전파가 됐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로 전파가 됐습니다. 남쪽으로는 스리랑카로 전해 졌고,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전해 졌고, 북쪽으로는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 졌습니다. 또 티벳이나 몽골로도 전해 졌습니다. 그러나 700여 년 전에 무슬림이 인도에 침입하면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많이 쇠퇴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인도에는 힌두교도가 제일 많고, 그 다음이 무슬림과 시크교도 순입니다. 불자는 아주 소수입니다.

그러나 인도 밖으로 나가면 불교는 힌두교보다도 더 많은 나라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교성지인 보드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르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불교도들의 방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그런 데에는 외국에서 온 불자들이 자기네 나라 절을 곳곳에 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불자의 수가 적다 보니까 인도 절은 아주 드물게 있거나 또 그 규모도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이 상카시아 주변에는 부처님의 혈통을 계승한 석가족이 아주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큰 절은 아직 못 짓더라도 우선 동네마다 작은 규모의 절이라도 지어서 부처님을 모시자는 뜻에서 이런 절이 지어진 것입니다. 제가 전에 ‘절이 지어지면 불상은 제가 기부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이 절은 스리하리람 사끼아님이 짓고, 불상은 제가 기부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불상을 전부 한국에서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점점 절이 많이 지어지니까 불상을 다 한국에서 모셔오기 어려워서 이번에는 인도 라자스탄(Rajasthan, 인도 최대 대리석 생산지)에서 제작한 불상을 모시게 됐습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후손, 후예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전 세계로 나갔을 때 ‘내가 석가족이다’라고 밝히면 세상 사람들은 분명 여러분들을 굉장히 존경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우선 자신의 마을에서부터 부다 담마를 공부하고, 또 부처님을 신앙하는 운동부터 하십시오.



우리가 상카시아 만큼은 인도 불자들, 석가족을 위한 큰 절을 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상카시아 스투파’(상카시아 탑)가 많이 허물어졌고, 또 거기에 힌두가 있으니 우리가 상카시아 스투파를 다시 하나 지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수 만 명이 모일 수 있는 오픈된 강당도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담마도 배우고 명상도 할 수 있는 담마센터도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벽돌 한 장이라도 기부하시고, 하루 울력이라도 참여하셔서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상카시아에서 가장 큰 절은 바로 인도 불자들의 절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땅은 이미 구해 졌으니 앞으로 여러분들이 힘을 합해서 그런 불사를 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왜 저는 상카시아에 한국 절을 안 짓고 인도 절을 지으려는 걸까요? 한국에는 한국 절이 많이 있습니다. 굳이 인도까지 와서 한국 절을 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인도에는 여러분들이 마음껏 가서 수행할 수 있는 인도 절이 필요한 거예요. 성지에 있는 모든 외국 절은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인도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니까요.

그럼 왜 저는 여러분께 관심을 갖는 걸까요?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2000년 전입니다. 그 이후에 한국은 불교국가가 됐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이 불교국가는 아니지만 불교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정도 됩니다. 그리고 한국의 국보 등 문화유산의 대부분이 불교문화유산입니다. 또 1000년 전에는 한국의 많은 스님들께서 인도에 유학을 오셔서 당시 선진불교를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즉, 한국 불교나 문화는 인도 불교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인도 불교는 쇠퇴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세계의 불교인들은 인도 불교를 다시 부흥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런 말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전파되고 인도에는 오히려 불교가 없어졌다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2500년이 지나면 다시 불교가 인도로 돌아와서 부흥할 것이다.’ 현재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250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인도 불교가 부흥할 것입니다. 인도도 부흥중입니다.

그러면 인도불교를 누가 부흥시키게 될까요? 현재 인도 불교는 세 갈래로 나뉩니다. 북쪽에 티벳불교, 즉 라마불교가 있고, 동쪽 아삼이나 트리푸라 지역에는 테라밧다불교가 있고, 또 나그푸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암베드카르불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교는 아직 인도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주류사회에 진입을 하려면 여러분들, 즉 석가족 불교가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유산을 받아도 후손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인도불교를 새로 부흥할 책임이 있다,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마음이 있으십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장서신다면 저는 여러분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입니다.(대중들 박수) 그런데 어떤 일이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는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중심이 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겠습니다!(함 까랑게!)’ 이런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옆에서 도와주면 일이 잘 됩니다. 여러분들, 다 ‘내가 하겠습니다!(함 까랑게!)’ 이런 마음이 생깁니까?(모두 웃음) 여러분들이 그러신다면 저는 적극적으로 여러분들을 후원을 하겠습니다.(대중들 박수)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불교가 인도에서는 소수종교이지만 세계로 나가면 아주 많은 나라들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고, 부디 자신감을 가지세요. 이 보드비하르가 지금은 작게 시작하지만 앞으로는 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한 사람이 시작했어도 이제 앞으로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힘을 합해주셔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석가모니 보땀 보드비하르’ 개원을 축하드리고요, 이 절을 시작해 주신 스리하리람 사끼아님께도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또 오늘 이런 행사에 참여해 주신 비구 상가 여러분께도 존경을 표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피르 미렝게(PHIR MELENGE).”(대중들 환호와 박수)

법회를 다 마치고 법당 입구에 보리수나무 한 그루, 아쏘카나무 두 그루를 기념 식수로 심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상카시아에 있는 담마팔스님 절로 이동했습니다. 담마팔스님은 초기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잠시 교사생활을 했었고, 상카시아에 절을 지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법당에서 YBS(Youth Budhist Society) 멤버들과 향후 상카시아에서의 불교활동과 사회활동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각각 멤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업과 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고, 현재 인도 및 상카시아, 이타와, 메인뿌리 지역의 교육 환경이 어떤지에 대해서, 불교 활동단체 현황에 대해서 소상하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상카시아 명상센터는 세 구역으로 나눠서 맨 안쪽에는 석가족을 위한 담마센터를, 중간에는 큰 집회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오픈 강당을, 그리고, 입구에는 상카시아 스투파를 재현하는 큰 스투파를 짓고, 그 스투파 위에 하늘에서 인드라신, 제석천왕과 함께 내려오는 부처님 불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축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구입한 땅 부지에 석가족 아이들을 위한 전문대학을 만든다면 누가 책임을 맡을지, 어떻게 운영을 할 것인지, 무슨 과목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학 이름은 어떤 이름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등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담마팔스님이 ‘수자타아카데미’, 그리고 상카시아 석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마하마야아카데미’ 등 다 여자 이름을 딴 학교라며, 이제 남자 이름을 딴 학교를 하나 설립하자고 해서 다같이 웃기도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상카시아 명상센터, 새로 설립할 학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 일정에 대해서 같이 체크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전문대학을 짓기 위해 구입한 땅 부지를 둘러보고 와서 다시 운영방안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후, 마지막 점안식을 하기로 한 세 번째 마을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보광,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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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21

스님의 하루 2018.02.18 16:00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

2018.1.21 델리_인도인 즉문즉설 강연

델리 근교 구르가온이란 도시에 자리한 ‘자혜정사’. 델리 인근에 사는 한국인 교민들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포교당입니다. 스님께선 델리에 오시면 주로 이 곳에 머무십니다. 오늘 오전 법회는 자혜정사 회원들을 위한 법회로 준비되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이 넘어서니 회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습니다. 스님께선 환하게 웃으시며 자혜정사 가족들에게 2018년 정토회 달력과 스님의 신간책 ‘야단법석2’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가족들은 오는대로 법당에서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자그마한 법당에 20-30명이 서성대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니 활기가 넘쳐나 꼭 잔치집 같았습니다. 델리에 산 지 14년이 넘어가는 우정민 회장님 부부를 비롯해 이제 갓 델리에 정착한 신입 총무님 가족까지 인사를 나누고 9시 정각부터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선 종교로서의 불교와 진리로서의 불교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면서, 변화하는 이 시대에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그리고 괴로움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 일상에서 깨어 있기, 알아차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11시에 법회가 끝나자마자 자혜정사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짐을 모두 챙겨서 다음 강연이 진행되는 주인도한국문화원으로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델리는 교통체증이 심한 세계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교통체증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만 합니다. 오늘은 한 시간 삼십분의 여유를 두고 움직였더니, 다행히 15분전에 주인도한국문화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원에 도착하니 김금평 원장님 부부와 이번 강연 실무를 담당한 곽미라님이 반갑게 스님 일행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거의 매년 주인도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인, 인도인 대상으로 법륜스님의 강연을 진행해 왔습니다. 올 해는 자혜정사 회원을 대상으로 한국인 강연은 진행하고, 문화원에서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인도인 강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강연장에는 벌써 젊은 인도인, 한국 젊은이들로 북적북적 소란스러웠습니다. 오후 12시 30분, 격의없이 언제나 편하게 진행해 주시는 김금평 원장님의 소개로 법륜스님의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인들을 위한 강연의 서두에서 힌두사상과 불교사상의 차이점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신 후, 질문자와 질문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믿음(힌두)은 ‘까르마’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다고 봅니다. 전생의 삶에 의해서 정해져있다고 보든, 신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보든, 혹은 태어나는 생년월일시에 따라서 정해진다고 보든,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까르마가 정해져있다고 봅니다. 즉,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정신작용에 대해서 아주 많은 연구를 하셨는데 까르마가 정해져 있다고 가정을 했을 때의 모순을 발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고 해봅시다. 만약 까르마가 정해져있다면, 이미 정해져있는 까르마에 의해서 살인의 행동을 저지른 것이니 그게 죄가 될 수 없잖아요? 즉, 전생의 어떠한 일로 인해서 나는 너를 죽이도록 되어있고, 너는 나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있다면 이것은 까르마의 문제이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사람에게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 거의 자동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봐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응을 하는 그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느냐, 정해져있지 않느냐에 대해서, 전통적인 인도 사상에서는 그것이 정해져있다고 보는 것이고, 붓다는 오랜 탐구 끝에 그것이 정해져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즉, 까르마는 형성되어진 것입니다. 형성되어진다는 것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까르마’라는 용어는 인도의 전통적인 믿음에서도 쓰이고 불교에서도 쓰이지만,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믿음에서 쓰이는 까르마는 ‘운명 지어진’ 혹은 ‘정해진 운명’이라는 의미라면,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비록 같은 용어를 쓰지만 정해진 것이냐, 형성되어진 것이냐라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화를 잘 낸다고 해봅시다. 이럴 때 화를 잘 내는 것을 그 사람의 성격, 성질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질’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것이 잘 바뀐다는 거예요, 잘 안 바뀐다는 거예요?”

(인도인 참석자들) “바뀌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우리가 그건 그 사람의 성질이야, 그 물건의 성질이야라고 표현을 할 때는 그것이 잘 안 바뀌기 때문에 성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반면 잘 안 바뀐다고 할 때도 그것이 절대 안 바뀌느냐, 아니면 잘 바뀌지는 않지만 바뀔 수는 있느냐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처럼 안 바뀐다고 하면 인도 전통(힌두)에서 말하는 ‘까르마’이고, 후자처럼 잘 안 바뀌지만 바뀔 수는 있다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까르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필요한 쪽으로 바꾸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수행에서는 까르마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잘 안 바뀌는 까르마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꾸준함’입니다. 꾸준히 수행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신 것이 바로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한국말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어요. 어떤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버린다는 의미인데, 인도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인도인 참석자들) “하려고 했는데 사일만 하고 나머지는 남들이 다 도와줬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이 까르마를 바꾸는 데에는 우리의 정신작용 중 어떤 게 필요할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신작용은 자극이 주어지면 까르마에 의해서 자동 반응이 나오는데, 대체 우리에게는 어떤 정신작용이 있기에 까르마를 바꾸는 게 가능할까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며 욕을 한다고 해봐요. 비록 ‘내가 화를 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했다기 보다는 프로그램에 의한 자동 반응에 가깝습니다. 상대방도 욕을 듣고 같이 화를 냅니다. 그렇게 둘 다 화를 내면 결국 싸우게 돼요. 싸우면 둘 다에게 손실이 많아요. 이것을 ‘과보(果報)’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보로 인해 손해를 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화가 나지만 손해를 안 보려고 참습니다. 자동으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고, ‘이것은 손해다’하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생각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성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참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면 속에 쌓이는 앙금이 점점 더 커집니다. 그걸 다른 말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세 번 이상 참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게!’ 하면서 세 번째 터지거나, ‘보자 보자 하니까’ 하면서 세 번째 터집니다. (모두 웃음)

그렇게 터지면 또 과보가 따르고, 과보에 의한 손해가 생기면 그제서야 ‘내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됐는데’ 하며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 참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걸 못 참고 터뜨리면 가슴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참았다가 터뜨렸다가 참았다가 터뜨렸다가를 반복하게 됩니다.

자기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을 따르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반면 감정을 억누르거나 참는 것을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이 둘 중에는 어느 것을 선택해도 평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사례처럼 결국 이 둘 사이를 계속 돌고 돌게 됩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인도의 전통(힌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그것을 윤회라고 표현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아까 ‘까르마’처럼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의미에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에서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니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더이상 안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라고 하니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더이상 되풀이 하지 않는다 즉,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解脫)’을 의미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말로, 어떻게 하면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붓다가 발견한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란 어떤 것일까요? 화가 날 때 그것을 바깥으로 내면 쾌락주의가 되고, 그것을 참고 억누르면 고행주의가 됩니다. 우리는 대개 이 둘 중 하나 밖에 선택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붓다가 발견한 제 3의 길, ‘중도’는 화를 내지도 않고 참지도 않는 길입니다. 이 길이 무엇일까요?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화가 날 때 ‘지금 화가 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구나’하고 자기를 알아차리니까, 이건 다만 알아차릴 뿐이지 밖으로 화를 내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고 참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알아차리는 겁니다.

우리의 정신작용 중 이 알아차림은 아주 독특한 작용입니다. 우리의 신체작용에도 팔을 들어 올리거나 원하는 장소로 걸어가는 등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작용이 있고, 위장이 소화를 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 중 호흡은 조금 독특합니다. 호흡은 기본적으로 자율적인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의 의지로 인해 약간의 통제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원하면 잠깐 멈출 수도 있고, 숨을 크게 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심장의 경우에는 내가 빨리 뛰도록 하고 싶다고 빨리 뛰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호흡만은 심장처럼 자동으로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약간의 통제가 가능합니다.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은 ‘무의식’이고 조절하는 것은 ‘의식’인데, 호흡은 기본적으로 자동이지만 약간의 조절도 가능하기 때문에 ‘의식’이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을 신체 작용에서는 호흡을 통해서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호흡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작용에서도 이성적인 작용과 감성적인 작용은 서로에게 영향을 거의 주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아무리 결심을 해도 잠이 들고 의식이 작동을 멈추면 다음 날 아침에 못 일어나잖아요. 그만큼 ‘의식’이 ‘무의식’에 거의 영향을 안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의식’을 가지고 감정 혹은 무의식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해봐야 일시적으로 참는 정도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마음을 컨트롤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정신작용 중 ‘알아차림’은 이성에서 출발하지만 지속적으로 하면 무의식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의식이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통로입니다.

화가 날 때 ‘화가 났구나’하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감정이 저절로 누그러집니다. 감정을 억제하면 바깥으로 표출만 되지 않을 뿐 속에 쌓이는 압력은 점점 커집니다. ‘알아차림’은 한 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할 때 감정은 저절로 가라앉게 되어있습니다.

특별히 수행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에게 ‘알아차림’이라는 현상은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바로 ‘자각(自覺)’이라는 것입니다. ‘내 성질이 더럽네, 내가 욕심이 많네’ 하고 스스로 알아차릴 때가 있잖아요? 그것을 ‘자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 무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줍니다. 결심은 무의식을 억압할 뿐 무의식의 변화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데, 자각은 무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이 ‘너 정말 게으르다. 너 그렇게 게을러서 어떡하니?’라고 야단을 치고, 스스로도 ‘그래, 이제부터는 부지런해져야지’라고 아무리 결심을 해도 며칠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야단을 쳐도 변하지 않으니까 ‘게으른 건 그 사람의 천성이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본인 스스로가 ‘내가 조금 게으른 거 아닌가’하고 ‘자각(알아차림)’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인생에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안 하던 아이나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확 변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혹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런 계기는 외부에서 온 게 아니라 대부분 자기가 무언가 자각할 때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원리를 알고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자발성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발적이라는 것, 즉 자기가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심(發心)’인데, 수행자가 되려고 하면 스스로 발심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식 교육을 시킬 때도 아무리 야단을 친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호흡을 참으려 해도 잠시밖에 참을 수 없고 화를 참는 것도 며칠밖에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억지로 어느 정도 끌고 가는 것이지 그것이 아이의 삶을 바꾸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자기 스스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강제로 참고 견디는 방식의 교육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학습의 효과를 내어왔습니다. 그 방식으로 창조적인 의식은 생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필요한 인간은 창의적인 인간이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을 만들려면 자발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수행자도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자발적으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고행에는 상처가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이 억지로 하는 고행에는 고통이라는 트라우마가 남게 돼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당시에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지나고 나면 경험으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강제로 하는 행동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되면 무의식이 작동을 하여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한다’는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인도문명사에 있어서 인도의 가장 큰 기여는 수학에서 ‘0’의 발견과 붓다의 ‘알아차림’의 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인도인 참석자들) “아니요.”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의 시대에는 더욱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점점 발달 될텐데, 아무리 인공지능의 기억 기능이 증진되고, 인공지능에게서 감정의 기능이 나온다고 해도 이 ‘알아차림’의 기능이 나오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게 ‘알아차림’의 기능이 생기면 인공지능의 업그레이드를 굳이 사람이 하지 않아도 인공지능 스스로 할 수 있는 단계가 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시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에 대한 핵심사상을 일러주시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을 하고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쁘리앙카 교장 선생님의 통역도 힘이 있고 당당했습니다. 스님도 대중들 가까이에 서서 직접 호흡하며 온 몸으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욕구란 무엇입니까?”
“부모님에게 누구나 존중하고 존경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를 존중하지않는 사람을 보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에 답이 있습니까?”
“화가 났을 때 알아치리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전적으로 수행을 할 수가 없는데 그러면 하고싶은 것들을 다 그만두어야 합니까?”

질문하는 사람들이 젊고 진지하면서도 활기찼습니다. 한 번 질문을 했던 사람이 다시 손을 들면 우-하기도 하고, 스님 말씀에, 질문자의 질문에 공감하는 웃음들도 중간중간 툭툭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의 강연장과 다를 바가 없었습다. 아니, 젊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해서 오히려 토론의 장처럼 되어 활기가 넘치고 스님도 온 몸으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넘어섰는데도, 질문자들이 서로 질문을 하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한 사람만 더 질문 받겠다고 하고는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마지막에 단체 사진을 찍자, 한국어 배우는 학생들이라 “감사합니다.”하며 스님께 인사드렸습니다.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착하게 살아서 손해 보는 것 같다고 질문한 여자 분에게 살짝 물어 보았습니다.

“만 깨싸 해?(마음이 어때요?)”
“보훗 할까 해.(매우 가벼워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젊은 한국인 남자가 보여서, 오늘 강연이 어땠는지 물어보자, 대뜸 자기는 주인도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다고 자기 소개를 하면서, “지금도 환희심에 가슴이 뜁니다.”하며 약간 흥분된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한국인, 인도인들의 환한 얼굴들을 보면서 인도에도 이런 강연이 더 자주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은 한국인이나 인도인이나 크게 다르지가 않고,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는 일은 그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문화원에서 준비해 주신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음 일정은 내일부터 진행되는 석가족마을 불상 점안식 및 법회를 위해 우따르 프라데시주 이타와라는 도시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차가 4시간 연착이라고 떴습니다. 인도 겨울에 워낙 흔히 있는 일이라 놀라울 일은 아니지만, 밤 9시 30분까지 기차를 기다리기엔 있을 곳도 마땅치가 않고, 또 더 연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차를 대여해서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국문화원장님, 자혜정사 회장님 등 도와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7인승 이노바를 타고 5시간을 달려 이타와에 도착했습니다. 20년 이상 스님과 인연이 깊은 수바스지 가족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스님께선 수바스지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시면서, 상카시아 명상센터 건축에 대해서 건축 설계 전공인 수바스지 아들과 함께 또 회의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선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않고 일에 몰두하시는 느낌입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며 석가족을 위한 명상센터의 완성된 그림을 그려봅니다.

내일은 석가족 마을 불상 점안식 및 법회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보광, 조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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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했던 계층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20

스님의 하루 2018.02.17 16:00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했던 계층

2018.1.20.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5일째_델리

오늘은 인도에서의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입니다.

어제는 무슬림 공휴일인 금요일이라 타지마할 관람을 하지 못해서 오늘 아침 일찍 타지마할 관람과 오후에 델리 박물관 관람 일정만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어제 아그라에서 모처럼 여유가 잠깐 있어 스님은 인도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해 주었는데 이해를 돕고자 강연 중 일부 내용을 싣습니다.

성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델리의 복잡한 도로▲ 성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델리의 복잡한 도로

“인도대륙, 즉 인디아반도에 원주민이 있었고, 인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아프가니스탄이 있는데 거기는 유목민족이고, 이 남쪽은 농경민족입니다. 어떤 때는 북방에서 유목민족이 내려와 인도대륙을 차지했다가, 어떤 때는 인도에서 올라가서 북쪽까지 점령했다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인도의 역사가 이루어진 거예요.

델리박물관에 가기 전에 이런 걸 좀 알고 가야 박물관 구경을 제대로 할 수가 있어요. 사르나트박물관은 그 지역에서 나온 유적만 전시해 놨기 때문에 그것만 보면 되지만, 델리박물관은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이니까 전 인도의 역사가 전시되어있거든요.

그러면 인도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인더스문명으로 시작이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5,000년 전, B.C. 3000년 경입니다. 델리박물관에 가면 인더스문명관이 있는데 거기에는 B.C. 2500년 유물이 주류입니다. 한참 번성했을 때의 유물들로써 4500년 전 유물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지금의 인더스강 유역에서 아주 고대의 문명을 이루었던 것들입니다. 이 문명을 주도한 민족이 누구일까요? 원주민인 드라비다족(Dravdian)이라고 합니다. 인도대륙에 살던 원주민이 바로 드라비다족이거든요. 지금의 인도를 지배하는 민족은 아리안족(Aryans)입니다. 이 아리안족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 있는 파미르 고원(Pamir Mountains) 위쪽의 중앙아시아에 있던 민족이에요. 이들이 내려와서 인도를 점령한 거예요. 그래서 인더스문명은 민족적으로는 드라비다족이 주도했고, 드라비다족은 인종적으로는 흑인에 가까운 민족입니다. 세계 3대 인종은 황, 백, 흑인이잖아요. 이들은 완전히 흑인도 아니고 황인도 아닌 독특한 하나의 민족입니다. 그래서 드라비다족은 말레이계열이나 흑인계열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북방의 백인계열인 아리안족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지금의 파키스탄지역으로 내려왔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파가 서쪽으로 갔습니다. 이란을 거쳐서 오늘 날 유럽으로 간게 함족, 샘족, 아리안족이고, 이 사람들이 펀잡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걸 동아리안이라 그래요. 이들이 지금의 이 힌두스탄 평원(Hindustan 平原)을 점령해서 문명을 이루었는데, 인도 역사에서 이 동아리안족이 힌두스탄 평원에 이룩한 이 문명이 인도의 전 역사에서 볼 때 두 번째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걸 아리안문명 또는 브라만문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브라만계급이 주도한 문명이기 때문에. 이게 지금의 인도문명의 뿌리입니다. 그들은 브라만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브라만 신의 입에서 브라만 계급이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브라만이 지배하는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계급제도가 나왔습니다. 브라만, 짜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런 계급제도로써 신분제에 의한 사회를 만든 거예요. 이건 4시기로 나뉩니다. 첫째가 베다시대로서 초기 자연신을 찬양하는 시대, 둘째가 종교시대로서 계급이 정착하고 브라만 신을 섬기는 시대, 셋째가 우파니사드 철학시대, 넷째가 문명의 쇠퇴기로서 브라만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의 쇠퇴기이고,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문명의 부흥기로서 인문학이 급속도로 발달한 시기예요. 이 시기가 붓다의 시대입니다.

멀리 보이는 인디아게이트▲ 멀리 보이는 인디아게이트

그 시대는 어땠냐 하면,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평화롭게 살다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약육강식으로 절대 왕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입니다. 정치적으로 엄청난 혼란기로써 전쟁이 끝없이 진행됐어요. 그래서 사람 죽이는 걸 파리 죽이듯이 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브라만의 사상으로는 이해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아야 되는데, 사람을 몇 십만 명이나 죽여 놓고도 아무 벌도 안 받고 오히려 왕이 되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어떤 철학이 나오느냐 하면 무인과론(無因果論)이 나옵니다. ‘사람을 죽여도 죄가 안 된다. 살인이란 그저 칼날이 몸 사이를 지날 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단적 주장까지 나왔던 것은 그때까지의 사상으로는 도저히 당시 세상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브라만의 권위가 점점 허물어지고 이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새로운 사상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이 신흥사상을 통틀어서 사문류(沙門類)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브라만도, 어떤 사문도 이 음식은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잖아요. ‘어떤 브라만이나 사문도 붓다만한 사람은 없다’는 뜻인데, 경전에는 ‘브라만과 사문’은 항상 붙어서 나오거든요. 당시 주류와 비주류 사상의 양대 산맥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출가해서 사문류에 참여하셨다가 결국 양쪽을 다 한 차원 높은 데서 통합해 내는 중도(中道)를 발견하셨지요. 이게 B.C. 5-6세기의 일로서 당시는 인류문명의 황금기입니다.

인디아 게이트와 일직선 상에 있는 대통령 궁▲ 인디아 게이트와 일직선 상에 있는 대통령 궁

이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로서 공자가 나와서 중용(中庸)을 주장했고, 인도에서는 붓다가 나와서 중도(中道)를 주장했고, 이 당시 유럽은 그리스문명이 한창 꽃피던 시기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분들이 나오는 시기였어요. 역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을 얘기했지요. 그러니까 전연 다른 지역들에서도 인류문명의 발전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가 되면서 이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진리가 나오게 된 거지요. 그 관점도 실제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플라톤의 중용사상과 공자의 중용은 주로 정치에 적용해서 ‘정치를 할 때 극단을 피하고 중간을 취하라’는 거고, 부처님의 중도는 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행과 쾌락이 아닌 제3의 길을 중도라고 한 거지요. 관점은 비슷한데 적용은 서로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시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사물을 한 면만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걸 지혜라 그러고, 한 면만 보는 걸 편견, 아집이라 그러지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300여개의 나라가 있었고, 그 각 나라에서 사람들이 태어나서 자기 나라에서만 살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한 면밖에는 볼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주장이 나왔던 건데, 붓다의 가르침은 그 전체를 보고 진리를 얘기한 것이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 시대에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했던 사람은 지식인이고 종교인인 브라만도 아니고, 우파니사드 철학주의자도 아니고, 사업을 하는 장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사꾼은 여러 나라를 오가며 무역을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이해해서, 당시 불교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 이 장자계급이었던 거예요. 여러분들도 잘 아는 수닷타장자, 칼란다장자가 있고, 위사카부인도 장자의 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업하는 게 경제인들 아닙니까? 경제인들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건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이다’ 하는 걸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요즘은 경제인보다도 더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과학자라는 집단도 있어서, 이 과학자나 경제인들이 아마 불법을 제일 빨리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럼 언제 불교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을까요? 바로 아쇼카 왕이 전 인도를 통일했을 때입니다. 전 인도를 통일하니까 보통 사람도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가 있게 되어서 여러 사상들이 다 편협한 주장에 불과했고 ‘아, 붓다의 가르침이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거예요. 변화된 세계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 보니까 아쇼카 왕 시대에 와서야 불교가 전 인도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불행히도 이 시대에 한 번 큰 사상의 지각변동이 있었고, 그 후로 2000년 가까이 사상의 지각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모든 사상은 훈고학(訓?學), 즉 옛날 것을 재해석한 것에 불과해요.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어떤 새로운 사상의 전개가 없습니다. 공자나 논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로 양명학이다, 주자학이 등장했을 뿐이고, 유럽도 마찬가지,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지식의 암흑시기를 거쳐서 유럽에서는 지금으로부터 4, 500년 전에 ‘그리스를 재발견하자’는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인문학이 부흥을 했지요. 그러나 아직도 종교적으로는 2000년 전 기독교, 2500년 전 불교를 계속 우려먹고 있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과학이 발전해서 유전자가 발견이 되고, 새로운 IT사업이 등장하고, 인공지능이 출현하고 그러면 옛날 사상이나 종교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설명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 한편으로는 대혼란기이자, 문예부흥적 측면으로 볼 때는 이 대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등장할 때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과거의 종교 가운데 우주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는 불교다’고 얘기했답니다. 그만큼 담마, 법, 진리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거지요.

아무튼 인도에서 아쇼카왕 시대를 마우리아 왕조(Mauryan dynasty)라고 부릅니다. 그 핵심적인 시기가 B.C. 3세기입니다. 그래서 델리박물관 들어갔을 때 조각 밑에 ‘B.C. 3세기’라고 쓰여 있다면 그건 마우리아 시대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도 역사에서 첫 번째 시기가 인더스문명시기, 두 번째가 아리안문명시기, 세 번째가 마우리아 시대로서 이때가 부처님의 발자취가 정리된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마우리아 시대는, 마치 진나라가 얼마 못 가고 망하고 한나라가 되듯이, 아쇼카 왕조가 금방 망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왕조가 생기고, 또 새로운 왕조가 생겨도 이걸 다 합해서 마우리아 시대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왕이 되면 왕의 아들이 무조건 왕이 되고, 이건 신이 왕이 되도록 정했다.’ 이런 가르침이 지배적일 땐 이 왕조가 500년씩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처럼 계급도 부정하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사상에서는 ‘이 사람이 왕이 됐으면 이 사람이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왕이 된 것도 아니고, 제 아버지가 왕이라 왕이 된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똑똑해서 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니까, 신하도 왕이 되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쿠데타를 일으켜서 또 왕이 되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이 되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말하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가기는 어렵지만 이건 그 나라 안에서의 정권변화, 즉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이지 하나의 시대이기 때문에, 통틀어서 마우리아 시대라고 하는 겁니다.

하라파 시기,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 하라파 시기,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

그 다음에 지금 아프가니스탄이 있는 북쪽에서 두 번째 북방민족이 일어나서 남쪽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걸 쿠샨 왕조(Kushan dynasty)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우리아 왕조가 망하자 인도는 또 각 민족별로 분열이 됐어요. 그런데 쿠샨왕조가 내려와서 다시 인도 북부를 통일했어요. 그런데 쿠샨왕조는 불교국가입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은 비록 무슬림 국가이지만 천여 군데가 넘는 불교 유적지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한다고 가봤더니 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것을 탈레반들이 전부 파괴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이라는 데에 있었는데 이것도 다 파괴했거든요. 그래서 ‘A.D. 1, 2세기’라고 써놓은 조각은 쿠샨시대의 것이라고 보시면 돼요. 쿠샨시대에나 와서 불상이 나옵니다. 회색에 아주 차가운 암질로써 그리스의 조각처럼 매끄럽게 생겼으면 그건 간다라 양식(Gandhara art)의 유물입니다. ‘간다라’라는 건 유럽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서 지금의 파키스탄 간다라지역의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겁니다.

지금 아그라보다 약간 북쪽으로 50킬로미터쯤 가면 마투라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 지역의 붉은 사암에 아주 육감적으로 조각한 건 마투라 양식(Mathura art)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간다라 양식 불상은 통가사를 입어서 몸 전체를 가리고 있고, 마투라 양식은 인도전통문화를 따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으로 조각되어있어요. 여성들 가슴이 아주 풍만하게 묘사되어있거나 아랫도리가 다 노출되어있고 그러면 그건 마투라 양식입니다. 이게 쿠샨시대입니다.

그 후, 원래 마우리아의 중심지에서 일어나 부흥해서 인도를 통일한 왕조를 굽타 시대(Gupta Period)라고 합니다. 이건 5세기 왕조입니다.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계속됐지만 이들이 왕성할 때가 5세기였어요. 이때는 간다라 식과 마투라 식이 통합된 시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르나트 박물관에 갔을 때 본 유물들이 바로 간다라 식과 마투라 식이 통합된 양식이었어요. 그래서 델리 박물관에 갔을 때 마우리아 시대, 쿠샨 시대, 굽타 시대라고 쓰여 있으면 이건 B.C. 3세기, 이건 A.D. 1, 2세기, 이건 A.D. 5세기,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굽타왕조 때까지는 불교국가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불적지에 남아있는 어마어마한 탑들을 보셨지요? 대부분 굽타시기의 것입니다. 바깥에 또 쌓고, 또 쌓아서 어마어마한 규모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탑은 다 굽타시기의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표현한 굽타 시대의 유물(상부)▲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표현한 굽타 시대의 유물(상부)

굽타왕조가 망한 후로 더 이상 인도에 통일국가는 없었습니다. 인도는 민족도 다 다르다고 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한 민족이 다 자기네 민족국가를 건설한 거예요. 지금의 유럽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유럽을 한번 통일해 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나폴레옹도 그랬고, 히틀러도 그랬지만 유럽은 통일국가가 잘 안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유럽연합이 거의 통일국가나 마찬가지지요. 지금 유럽연합이 유럽합중국을 만들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국대륙이나 인도대륙은 몇 번 통일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절반은 통일국가로, 절반은 각각 독립국가로 있었어요. 그런데 인도는 굽타왕조이후로는 통일국가가 없이 각자 자기 민족국가를 이루고 이렇게 내려왔는데, 7세기가 되면서 무슬림이 일어나서 8, 9세기 때 인도대륙에 무슬림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인도대륙의 북쪽은 무슬림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통일국가는 아니에요. 이때를 ‘노예왕조’라고 하는데, 궁중노예들이 일어나서 왕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때에도 환관들이 권력을 잡은 적이 있었잖습니까.

이렇게 인도는 1000년 동안 분열국가였습니다. 사실 ‘분열’이란 말은 맞지가 않아요. 원래 자기 민족끼리 나라를 형성하는 게 정상이니까요. 하여튼 통일국가 없이 각각 발전하는데, 북쪽은 무슬림, 남쪽은 힌두왕국이 되었어요. 그리고 불교는 종교나 수행의 가르침으로는 남아있었지만 이후에 왕국의 중심사상은 된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왕국(王國)이라는 건 ‘신이 왕한테 권력을 부여했다’는 사상적 배경이 좀 있어야 생명이 오래갈 거 아니겠어요? 그래야 자식이 왕이 되는 것도 허용이 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좀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다 보니 왕조사상으로는 맞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힌두교가 오히려 부흥을 하고, 그래서 왕국은 대부분 힌두왕국으로 형성됩니다.

그런데 13세기쯤 오면서 무슬림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와서 인도의 중앙까지 다 점령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절멸하는 시기를 거쳐서 6, 700년간 인도의 주무대에서 사라지고, 북쪽, 히말라야나 동쪽, 소수민족 지역에만 남아있는 암흑기를 거치게 됩니다. 1526년, 즉 16세기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이란 계통의 바부르라는 사람이 인도로 쳐내려와서 지금의 델리에 있던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제국이 무갈제국(Mughal Empire)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인 후마윤 대에 와서 결국 전쟁에 져서 왕국이 망하고 이 사람은 지금의 이란 즉 페르시아 쪽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다가 1600년경에 다시 델리로 쳐들어와서 왕국을 복원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가 3대 왕이 됩니다. 악바르가 제위에 올라서 무갈제국이 인도의 대부분을 통일하게 됩니다.

간다라 영향을 받은 불상의 모습을 보며 초기 불상의 형태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 간다라 영향을 받은 불상의 모습을 보며 초기 불상의 형태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

이건 중국역사와 비교하면 청나라와 같은 시기입니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로 최고로 강했을 때가 강희제 때입니다. 강희제가 7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황제가 됐잖아요. 7살에 왕위에 올랐다는 건 실제로 정치는 왕의 엄마가 했다는 겁니다. 악바르도 13세살에 왕이 됐어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엄마가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악바르 시대의 특징은, 무슬림 왕국이 자기네 종교만 위하고 다른 종교를 탄압한 것과 달리, 힌두를 전부 수용해서 사람을 등용할 때 종교를 따지지 않고 등용을 했습니다. 이건 강희제가 친중정책을 쓴 것과 똑같습니다. 강희제도 대신을 등용할 때 한족, 만주족을 구분하지 않고 등용했거든요. 악바르는 부인도 힌두여자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힌두교계를 차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안 싸우고 평화적으로 통합을 해 갔거든요. 이 시대에 만든 게 아그라 성입니다. 처음에는 델리에 붉은 성을 짓고 나중에 수도를 아그라로 옮겨서 아그라 성을 쌓았습니다. 이건 궁성입니다. 처음은 군사적 요새로써 쌓았다가 평화시대가 되니까 저 안에 사치스럽도록 아름다운 궁궐 건축물을 많이 짓게 됐다는 거예요. 악바르 후대로 내려가면서 제국이 점점 더 안정되고 넓어지게 됩니다.

오늘 들은 인도 역사는 델리 박물관에 가셔서 확인하시고, 아그라 성에서는 무갈제국의 역사를 보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아우랑제브 이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면서 제국의 힘이 약해졌고, 각 인도 지방 왕국들이 다시 부흥했는데, 그때 마침 영국이 식민통치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무갈제국은 이름만 남고 형식적으로 남았다가 결국 1800년에 들어와서 없어졌어요. 영국은 형식적인 무갈제국도 식민통치에 장애가 된다며 없앤 거예요. 그래서 무갈제국이 망했습니다.

그것은 청나라가 망한 것과 비슷합니다. 청나라 말에도 태평천국의 난처럼 온갖 혼란이 있지 않았습니까. 대신 외국에 의해서 망한 건 아니고 손문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서 망했지요. 망할 때 직접 식민지 지배는 안 당했지만 아편전쟁이라든지 이런 걸 겪으면서 거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지요. 그래서 연해주도 러시아한테 넘겨주고, 대만은 일본한테 넘겨주고, 홍콩은 영국한테 넘겨주고, 마카오는 포르투칼한테 넘겨주고, 상해에는 프랑스가 조차를 하고, 이렇게 서구열강에 짓밟히다가 1949년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부흥했지요.

인도는 1947년에 독립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인도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발전과정을 걸어서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 마투라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인 둥근 눈매의 두상

어제 아그라성 앞에서의 스님 강연을 기억해 가며 타지마할 관람을 하고 순례객은 항공편 별로 차량에 나누어 타고 델리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시내는 1월 26일 ‘인도 공화국의 날’ 준비로 곳곳에 교통 통제가 되고 있어서 많은 차들이 우회 도로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인디아 게이트에서 대통령궁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의 도로에서 기념식을 준비하느라 관람용 의자가 어마어마하게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러한 광경을 차 안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냥 스쳐 지나 갈 때와 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임을 확연히 느끼게 됩니다. 스님은 델리 박물관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순례객들이 차량별로 도착할 때 마다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의 진신사리탑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의 모습. 
‘카필라바스투’라고 새겨진 명문이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의 진신사리탑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의 모습. ‘카필라바스투’라고 새겨진 명문이 사리함에서 발견되었다

국립 박물관인 델리 박물관에서 인도 역사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삐쁘라하와의 진신사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순례객들이 핸드폰을 들고 사진부터 찍으려 하자, 스님은 “우선 참배부터 하겠습니다. 우슬착지, 오른쪽 무릎을 땅에 닿도록 하여 세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차분히 살펴보시고 다른 분들에게도 방해되지 않도록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보고 나오겠습니다.”

라고 안내하였습니다.

내 앞에 진리로서의 가르침을 남겨주신 부처님께 저는 믿음으로서의 부처님으로 대할 때가 많았지만 오늘 이 순간에는 ‘사리라는 부처님의 흔적’ 앞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롯이 받들고 익혀나가는 제자가 될 것임을 다짐하는 마음을 내어보았습니다.

송수신기에서는 또 다른 차량을 처음부터 안내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울려오고 있었습니다. 16박 17일 동안 눈이 있으되, 진실을 보지 못한 붓다의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해주신 법륜스님과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신 법사님, 스텝, 차장, 조장 도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남은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실천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착한 모든 차량에 설명을 마치고 델리 공항으로 먼저 나서는 사람들에게 손 흔들며 인사하는 스님께 사람들은 함께 손 흔들며 가슴 뿌듯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보다 앞으로의 할 일이 많음에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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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마무리 법문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9

스님의 하루 2018.02.16 16:00

성지순례 마무리 법문

2018.1.19.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4일째_아그라



오늘은 인도 문화를 느끼는 시간으로 배정이 된 날입니다. 상카시아 순례자 숙소에서 짐을 정리해서 새벽 4시 반에 출발하였습니다. 아침에 안개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라는 드라이버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일찌감치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안개도 적고 도로사정도 아주 좋아서 아그라성에 도착하니 8시 반 경이 되었습니다. 여유가 생긴 셈입니다.

아그라성 주차장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 스님께 인도 문화사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일 인도 국립 박물관을 관람할 때를 대비해 인도전역사와 각 시대의 건축, 불상 양식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각 조별로 아그라성을 자유관람 하였습니다.

아그라성 관람과 자유시간을 가진 후 오후에는 호텔에 도착하여 정리 법문을 들었습니다.

“보름 동안의 인도성지순례를 두 가지 방법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 일생별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순례한 코스별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인도대륙을 중심으로, 또는 인도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아라비아 해, 동쪽은 벵골 만, 남쪽은 인도양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아라비아 해나 벵골 만도 다 인도양에 들어가지요. 그리고 북쪽은 세계최고봉인 히말라야 산맥이고, 북서쪽은 파미르 고원이 있습니다. 세계최고봉과 중간의 데칸 고원 사이에 강가강이 흐르고 거기에 힌두스탄 평원이 펼쳐져 있지요. 부처님 당시에는 거기가 인도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문명은 다 건조지형에서 발달을 합니다. 그 이유는, 고대문명이 발달할 때가 신석기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또 나중에 청동기가 발명이 되어도 청동기는 제기나 무기로까지는 사용을 해도 생활용품을 청동기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용품은 다 석기입니다. 석기로 풀은 벨 수 있는데, 큰 나무를 자를 수는 없기 때문에 문명의 중심지가 다 초원지대입니다. 그래서 인도대륙에서도 초원지대인 인더스강 유역이 인도문명의 초기 발달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더스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달했습니다. 중국의 황하문명도 북쪽에 황하강 유역에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한 3500년 전에 인류는 철기문명을 맡게 됩니다. 이 철기가 나오게 되면서 인도에서는 갠지스강 유역을 개발하게 되고 중국에서는 양자강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강남문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철기 문명이 아주 발달하기 시작한데가 중국은 소위 동주시대, 주나라 후기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이고 인도에서는 아리안문명의 후기시대에 주로 이 강가강 유역의 힌두스탄 평원에서 발달하게 됩니다.
........
이런 배경에서 붓다가 출현했습니다. 부처님은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전륜성왕이 되거나 붓다가 될것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희원, 요구가 이런 세상의 혼란을 좀 평화롭게 해 줄 전륜성왕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었고 사상계의 혼란을 정리해 줄 일체의 지자, 일체를 다 아는 자,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한 인간의 출현은 바로 이런 시대적인 요구에 응답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붓다는 전륜성왕으로 응답한 게 아니라 일체지자로 응답을 했다는 거예요. 결국 전륜성왕으로 응답한 사람은 나중에 아쇼카 대왕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붓다의 출생의 모습, 그 출생하실 때의 여러 가지 현상을 우리가 신비주의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이런 사회적인 환경,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걸 해석한다면 ‘아, 그래서 부처님의 출생을 이와 같이 묘사했구나. 이런 설화들이 가미가 됐구나.’ 하는 걸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가 갔던 카필라성 룸비니에서 태어나셨고, 카필라성에서 성장을 하셨고, 어릴 때는 당연히 부모나 사회의 요구와 요청에 따르는 촉망받는 젊은 이였으나 농경제에 참여해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고 사람이 소를 때리며 쟁기질을 하고 농부가 헐벗어서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이 왕궁의 풍요가 그냥 주어주는 게 아니라 저 농부들의 희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구나. 사람이 가축을 이용해서 농사짓는 그 편리함이 가축의 고통 위에 있구나. 새의 생존이 벌레의 죽음 위에 있구나. 이렇게 단독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있는 거예요. 아무튼 삶이란 이런 모순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당연히 살아가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겨야 되고 살아야 되는, 그래서 모든 세상의 학문은 어떻게 하면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기고, 어떻게 하면 내가 풍요를 누리느냐 이런 관점에서 학문이라는 자체가 지금도 그렇고 옛날도 그렇게 다 되어있는데 붓다는 그 둘을 동시에 봤지요. 나만 보고 남에게 이기는 게 아니라 이 둘이 함께 사는 길은 없느냐 함께 행복해 지는 길은 없느냐 하는 양쪽을 다 보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젊은 이가 사고를 그런 식으로 하게 되니까 세상의 모순 앞에서 굉장한 고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 성지순례할 때 그 붓다의 사문유관, 성 밖으로 나갔을 때 그가 고뇌했던 것, 죽은 자, 늙은 자, 병든 자를 보고 고뇌했던 것을 체험적으로 해 주려고 제가 시도했던 것이 콜카타(Kolkata)의 빈민촌이었어요. 그 성안과 같은 데가 어디였다? 콜카타에 있는 오베로이 호텔(Oberoi Hotel)이었어요. 그 오베로이 호텔이 5성급 호텔인데, 그 호텔 안에 채색이 전부 금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릇도 금이고요. 그런데 그 호텔의 문을 열고 나오면 호텔 앞에 거지 떼가 그렇게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봤을 때 인간이 결국 사고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예요. 그것을 보고 고뇌하든지 나는 그런 처지가 안 되기 위해서 더 내가 권력을 잡고 더 부를 축적하든지.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도를 볼 때는 왜 저런 사람을 보고 인도사람은 사회문제의식을 안 갖나 할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보고 자라기 때문에 결국은 어릴 때 이게 결정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고뇌하든지, 그래서 부처님처럼 출가를 하든지 안 그러면 그것을 무시하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든지.

그런데 제가 콜카타를 통해서 이걸 체험하게 하는 게 일정상 너무 힘든 거예요. 여러분들이 콜카타 갔다가 기차타고 올라오면 우리가 이번에 한 성지순례 일정은 너무나 편한 거라고 느낄 겁니다. 콜카타로 들어오면 우리가 다음 일정을 위해서 인도기차를 타야 되거든요. 인도 기차의 3등 열차가 얼마나 힘 드느냐 하면 이런 조크가 있을 정도예요. 이 세상에서 사람이 말 안 듣고 애먹이면 ‘저놈의 자식 지옥을 가거라’ 이러잖아요. 그런데 지옥에서는 말 안 듣고 애먹이면 ‘저놈, 인도기차나 타라’고 한 대요.(모두 웃음) 그만큼 역전에 가보면 그냥 완전히 피난민열차 같고 북새통 시장 같거든요.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부처님의 고뇌를 우리가 이해해야 이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다가오지 부처님의 고뇌를 이해하지 않으면 깨달음의 법이라는 건 그냥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일이 많고 위험했어요. 기차가 연착은 물론이고 결항하고 그러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고 두 번째는 한국이 점점 살기 좋아지면서 굳이 콜카타를 안 가고 한국이 성 안이고, 인도가 성 밖이에요. 그래서 인도에 와서 굳이 콜카타를 안 가고도 우리가 지금 받고 있잖아요. 그래서 ‘굳이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되겠다’ 해서 콜카타를 코스에서 포기하고 바라나시로 비행기 타고 들어오도록 한지가 3, 4년밖에 안됐습니다.”

...... 제가 순례코스를 잡을 때 어떻게 잡으면 좋을지가 굉장히 고민이었어요. 부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려면 코스가 너무 복잡해지니까요. 제일 좋은 건 룸비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만 코스도 덜 중복되고 의미전달도 잘 되도록 잡은 게 우리가 다닌 코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붓다는 언제부터 붓다입니까?”

“(순례객들) 깨달았을 때 부터요.”

“깨달음을 얻는 때부터라고요? 설법을 하신 때부터이지요. 설법을 하신 걸 듣고 내가 깨달아야 그분이 붓다인 줄 알지요. 그런 것처럼 중생에게 붓다는 붓다담마를 설하신 때부터 붓다인 거예요. 그래서 어디를 첫 코스로 잡았느냐 하면 사르나트를 잡은 거예요. 그래서 붓다의 첫 설법을 우리가 듣고, 그 다음에는 ‘이런 설법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했던 것인가?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수행을 해야 되느냐?’ 해서 우리가 보드가야에 가서 깨달음과 수행을 연결해서 살펴본 거예요. 또 그 다음에는 그 깨달음을 널리 전한 왕사성에 들어가 봤던 거지요. 왕사성 갔다가 사위성까지 들렀다가 도로 돌아 나오면 제일 좋은데 그렇게는 못 하니까요. 앞부분은 그렇게 끝나고, 두 번째로는 붓다의 마지막 여정이 왕사성에서 쿠시나가르까지니까 그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 본 거죠. 성지순례는 사실 여기까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분이 젊은 시절엔 어땠느냐?’ 이렇게 다시 접근을 해서 룸비니로 가서 태어나시고, 성장하시고 출가하신 과정을 본 거예요.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설법하셨던 쉬라바스티로 가서 부처님의 법문을 많이 다뤄본 거예요. 이렇게 해서 마무리를 하고, 8대 성지 중에 상카시아는 ‘불교가 신앙을 가진 종교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을까?’ 하는 걸 살폈습니다. 그 답은 뭡니까? ‘붓다는 어떤 신들보다도 더 위에 있다.’ 이렇게 신앙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인사(天人師)라는 표현으로 부처님을 표현하잖아요. ...... 쉬라바스티에서는 또 수닷타 장자와 같이 그렇게 신심 있는 불자에 관한 얘기도 나눴고, 또 동원정사에 가서 신심 있던 위사카 부인의 동원정사 창건 이야기도 나누면서 쉬라바스티 참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제 마지막으로 상카시아로 가서 부처님께서 낳아주신 어머니가 계신 하늘로 가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고 내려오셨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출가가 결코 불효가 아니고, 오히려 죽음과 가족을 뛰어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석가족들이 전 인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유독 상카시아에 많이 모여 살고 있어요. 석가족이 그 상카시아 주위의 5개의 디스트릭(District)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신앙을 지키고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디스트릭마다 석가족이 최대의 인구수를 자랑하는 카스트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그들을 위해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불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성지순례를 마치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 다시 정리하는 이유는, 다닐 때는 정신없이 다녔기 때문에 이제 와서 돌아보면 자기가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모두 박수)

전체 여정을 스님의 말씀에 따라 되짚어 본 다음, 순례객은 그동안 있었던 소감문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차량당 두 사람씩 발표를 했는데 자신이 인도에까지 와서 매일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할 만큼 깔끔을 떠는 사람인줄을 몰랐다는 분, 자신이 집이나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군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새삼 ‘아내’에게 고마움이 생긴다는 분, 수신기가 익숙하지 않아 순례기간 내내 적응하기 힘들고 불러도 대답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조금 적응이 된다고 하시는 분 등 각자의 소감을 진솔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소감문을 모두 나누고 인도식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드라이브지와 컨덕트 지를 비롯해서 차장과 조장님, 스텝에게 스님은 머플러 하나씩을 선물해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플러를 걸어주는 스님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값으로 따지자면 더 없이 훌륭하고 비싼 것들이 많겠지만 16박 17일 내내 함께 성지순례를 보낸 우리들은 스님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고해주신 드라이브지, 컨덕트 지, 차장님들. 수자타아카데미에 순례객을 대신하여 보시금을 전달하는 스님▲ 수고해주신 드라이브지, 컨덕트 지, 차장님들. 수자타아카데미에 순례객을 대신하여 보시금을 전달하는 스님

스님, 운전해 주신 분들, 스텝들, 법사님들, 내 옆의 도반들. 이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제29차 인도성지순례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는 몰랐는데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바로 내일인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내 앞에 놓인 인도식 만찬의 훌륭한 음식들을 놓고서야 인도 아이들이 ‘박시시’하며 입으로 가져가던 그 손짓과 매일 저녁마다 졸린 눈으로 다음날 먹을 도시락 밥을 싸던 우리 조원들의 따뜻한 마음이 다가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 나라에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참으로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스님과 법사님, 스텝분들에게 더 없는 감사의 마음이 생기는 오늘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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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카시아 탑터에 울려퍼진 '부모님 은혜'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8

스님의 하루 2018.02.15 16:00

상카시아 탑터에 울려퍼진 '부모님 은혜'

2018.1.18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3일째_상카시아

오늘은 가장 차를 많이 타고 이동하는 날입니다. 쉬라바스티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이제 성지순례로서는 마지막 일정인 상카시아를 향해 가려고 합니다.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서 4시에 모든 차량이 출발하였습니다. 둘 혹은 세대의 차량이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하여 화장실 가는 것, 아침 공양 하는 것도 함께 가는 두 대 혹은 세대의 차량이 의논하여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님이 탄 4호차는 1호차와 짝이 되어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순례객 중 한 분의 시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스님은 저녁 7시 반, 델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도록 조치해 두고 차량끼리 연락하여 한국 가야하는 순례객을 4호차로 옮겨 타도록 하였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가려는 곳, 상카시아 담마센터의 책임자로 계시는 수바스지와 통화하여 델리 공항까지 빨리 달릴 수 있는 차와 운전기사를 찾아서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스님은 4호 차량 드라이브지에게도 비상 상황이어서 중간 지점까지 최대한 빨리 가야 순례객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직접 설명하였습니다. 드라이브지는 스님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운전하였습니다. 경적을 울려대며 달려갔습니다. 4호 차량 순례객들도 화장실이 급해도, 아침 공양 시간이 늦어져도 모든 상황에 우선하여 중간 지점까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목적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4시간가량, 앰뷸런스처럼 달리던 4호차가 드디어 차량과 운전자를 섭외하여 나온 수바스지를 중간지점에서 만났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닥친 일에 어리둥절한 순례객을 격려하고 인천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안내해 줄 수 있도록 박지나 대표님도 함께 가도록 하였습니다. 4호차 순례객들도 조심해서 잘 가시라 격려를 보냈습니다.
긴급한 상황이 지나가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화장실이 급해졌습니다. 다들 웃으며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너른 공터에서 아침 공양으로 싸온 도시락을 점심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두 시간쯤 차를 더 달려 상카시아 탑 터에 도착하였습니다.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상카시아 탑을 크게 돌았습니다. 탑돌이를 하고 있을 무렵, 다른 차량들도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상카시아 탑터를 바라보는 위치에 모두 자리를 펴고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이번 순례기간 중에 제일 멀리 온 날입니다만 예전에 비해서는 매우 일찍 도착한 편입니다. 인도도 자꾸 발전하다보니까 강가강을 건너는 다리를 하나 더 놓았네요. 옛날에는 럭나우(Lucknow)나 깐푸르(Kanpur)로 둘러오던 것을 오늘은 바로 가로질러왔기 때문에 시간이 단축되어서 예년에 비해 쉽게 왔습니다. 그래서 늘 이곳에서는 해가 지평선에 걸렸을 때나 행사를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해가 쨍쨍할 때 하게 됐네요. 또 늘 춥다가 오늘만 더웠지요?”

“(순례객들) 예.”

“제가 ‘17일 지나면 풀린다’고 얘기했잖아요. 보세요. 딱 17일 지나고 18일인 오늘부터 풀렸습니다.(모두 웃음) 아침에 지독히도 안개가 심하더니 말이에요. 여기가 성지순례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여러분들, 지난 보름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로 한 일은 없었지만요.(모두 웃음) 밥 먹고 똥 누는 일이 가장 큰일이었지만요.(모두 웃음)
이곳은 부처님의 흔적이 많지 않은 곳입니다. 부처님이 상카시아에서 좀 더 델리 쪽으로 가신 흔적은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활동하신 흔적은 별로 없습니다. 왕사성이나 사위성이나 바이샬리 같은 그런 활동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어제 경전 독송할 때 나왔던 코삼비(Kosambi)입니다. 이 코삼비는 여러 경전이 설해지거나 비구들의 갈등 등 어쨌든 사건이 많았던 곳인데, 상카시아는 아무 사건도 없다가 뜬금없이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서 도리천궁으로 가서 3개월간 설법하신 뒤 이리로 내려오신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말이에요. 전생 얘기도 아닌데 마치 전생 얘기처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게 후대에서 누가 지어낸 얘기라고 하기에는 초기부터 알려진 얘기거든요. 이게 대승불교에서 만든 얘기가 아니라 불멸 후 200년 때인 아쇼카 석주가 조성되어 있잖아요. 부처님같이 아주 합리적이신 분이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으셨기에 그게 이렇게 변해서 전해지게 된 건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른 건 그래도 해석이 되는데 이건 너무 앞뒤가 없어요. 그런데 이게 또 아주 초기부터 있던 얘기란 말이에요. 후기에 나온 얘기라면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설화로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해서 해결해야 부분입니다.

그런데 나름 의미는 있는 사건이에요. 뭐냐 하면, 부처님이 인드라천에 가셨다가 지상으로 내려오실 때 브라만신과 인드라 신이 부처님 양쪽으로 부처님을 시립해서 내려왔단 말이에요. 부처님이 계단 가운데로 내려오시면 인드라 신은 부처님께 일산(日傘)을 씌우고, 브라만은 ‘불’자를 들고 이렇게 두 신이 양쪽으로 부처님을 시립해서 내려왔습니다. 인드라신과 브라만신은 부처님 당시에 최고의 신이었어요. 인도는 다신교의 나라잖아요. 그런 다신교의 나라에서 최고의 신인 두 신이 부처님을 시봉했다는 건 뭐예요? 부처님이 신보다 높다는 거죠. 부처님이 신의 개념으로 다른 신보다 더 높은 게 아니라 신의 개념이 아니면서 신보다 더 높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 10가지 명호 중에 천인사(天人師), 즉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는 명호가 있지 않습니까. 신의 세계마저도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 안에 있는, 윤회의 세계 안에 있잖아요, 신의 세계도 복을 지어서 받는 과보의 세계이니까요. 그런데 부처의 세계는 해탈의 세계, 즉 인연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 과보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라는 거죠. 그래서 붓다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붓다는 신과 인간의 스승이다. 신과 인간을 통틀어서 붓다와 비교할 사람은 없다’고 칭송받았잖아요. 그게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고요. 그러니까 이런 표현들은 수행, 정진을 통한 해탈이 믿음을 통해서 얻는 그 어떤 복보다도 더 수승하다는, 수행자들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봤을 때 불교가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당시의 모든 종교의 우위에 설 수 있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무슨 사건 때문에 이런 이야기로 각색이 됐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신앙적으로는 ‘부처님이 그런 이적을 행하셨다’고 하면 되겠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는 해석이 아직은 잘 안 되는 겁니다.

그 스토리를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해 안거 때 부처님이 안 계셨어요.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번 안거는 어디서 어떤 대중들과 지내신다는 게 있는데, 어느 한해 안거 때에는 부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부처님께서 어디 계신지 누구도 몰랐어요. 가섭존자, 사리불, 목건련도 몰랐고, 아난존자도 몰랐어요. 그래서 대중들이 목건련존자에게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좀 찾아달라’고 했어요. 목건련은 ‘신통제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목건련이 선정에 들어서 신통력으로 보니까 부처님께서 도리천(?利天), 즉 제석천(帝?天)이라고도 하고 인드라천(Indra天)이라고도 하는 천상계의 두 번째 하늘, 이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서 설법을 하시고 계신다는 거예요. 싯다르타 태자를 낳자마자 돌아가신 마야 부인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부처님께서 직접 도리천궁으로 가서 설법을 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중들이 목건련존자한테 ‘언제 오실 건지 부처님께 좀 여쭤달라’고 하니까 목건련존자가 신통으로 부처님께 가서 ‘언제 쯤 내려오실 겁니까? 어디로 내려오실 겁니까?’ 여쭈니까 ‘9월 (인도 달력으로 7월) 15일에 상카시아 성 밖으로 하강하겠다’고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항상 성밖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그날에 맞춰 사람들이 부처님을 뵈려고 여기로 모여들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하늘로부터 계단을 타고 쫙 내려오시는 걸 어떤 비구니 스님께서 제일 먼저 뵌 거예요.

‘부처님, 제가 1등으로 부처님을 뵙습니다.’
‘아니다.’
‘아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그럼 저보다 누가 더 먼저 부처님을 뵈었다는 겁니까?’
‘수보리다.’
하셨어요. 우리말로는 수보리(須菩提), 인도말로는 수부티(Subhuti)죠. 금강경에 나오는 그 수보리 말이에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수보리는 그때 어디 있었느냐 하면 그리드라쿠타(Gridhrakuta), 즉 영축산(靈鷲山)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마중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제법이 공한 이치를 탁 깨쳤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도로 앉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뭘 말합니까?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는 거지요. 여래의 육신을 보는 게 여래를 보는 게 아니라 법을 보는 자,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수보리가 제법이 공한 이치를 탁 깨닫고 그 자리에 앉았을 때 바로 수보리가 나를 본 것이다’라는 게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의 뜻입니다. 금강경에는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모양과 형상과 소리로 나를 보려면 결코 나를 볼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오지요? 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도 했고요. 이런 얘기가 다 ‘제법이 공한 줄을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얘기와 연결이 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 성 밖, 상카시아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이곳에 탑을 쌓고 아쇼카 왕이 석주를 세웠습니다. 불멸 후 200년에 석주를 세웠다고 하니까 이 얘기는 초기부터 벌써 알려져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아쇼카 왕이 석주를 세울 정도이니까요. 여기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석주 머리 부분에 코끼리가 있었지요? 여러분들은 주로 사자상을 보셨을 거예요. 석주 머리 부분에 소도 있고, 말도 있는데, 여기는 코끼리 상이예요. 그런 걸 보면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이 상카시아는 8대 성지 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4대 성지는 왜 4대 성지로 선정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잖아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고, 깨달으신 곳이고, 처음 설법하신 곳이고, 열반에 드신 곳이니까요. 그런데 나머지 4대 성지를 한번 보세요. 다 약간의 기적과 연관이 있지요? 왕사성과 사위성은 부처님께서 굉장히 활동을 많이 하신 곳이에요. 전법활동을 주축으로 하신 곳이니까요. 그런데 그걸 상징하는 건 모두 약간 신화적인 이야기들과 관련된 것들이지요. 왕사성은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모습, 사위성은 천불화현,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꿀을 공양 올리는 모습,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으니까요. 이건 다 약간신비적인 요소와 결합된 거잖아요. 부처님께서 아무리 대중들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가르치셨다고 해도 아마 인도의 문화적인 환경 때문에 후대의 기록은 결국 그런 상징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요?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자식을 키워놨는데 그 자식이 집을 떠나버리면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쉬운 일이잖아요. 그래서 유교적 입장에서는 출가를 굉장한 불효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인도 문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인도에서도 집을 떠나는 건 부모한테 뭔가 미안한 일일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백중절, 그러니까 7월 보름에 돌아가신 부모의 영가천도를 한다든지 하는 거 아닐까요? 부처님께서 친모인 마야부인을 위해서 설법하러 하늘에 다녀오셨다는 이런 설화가 생긴 건 이 출가수행이 결코 불효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세속적인 저항을 완화시키는 그런 의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라도, 설령 부처라 하더라도 다 어릴 때는 엄마 손에서 자랐지요? 어릴 때는 다 똥 누고, 오줌 싸고, 침 흘리고, 떠먹여주는 밥 먹고 자랐는데, 나중에 커서 보면 다 저절로 큰 것처럼 생각하지요? 애를 한번 키워보면 잔손이 엄청나게 많이 가요. 그러니 우리가 다 부모의 은혜, 특히 부모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건 어머니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어머님의 은혜를 칭송하는 노래도 있잖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어머니의 마음’을 다함께 불러보겠습니다. 누가 선창해 볼래요? 자, 우리 모두 다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하러 하늘에 다녀오셨다고 하니까, 오늘 우리도 다 각자의 부모들 은혜를 생각하면서 같이 불러봅시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모두 박수)’

다 함께 ‘부모님 은혜’노래를 불렀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상카시아 탑터는 ‘부모님 은혜’ 노래로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자리를 정리정돈 하고 차량에 타서 5분 거리의 담마센터 부지로 출발하도록 하였습니다.

벽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곳에 석가족 여러분이 꽃 목걸이를 준비해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맞아주시는 석가족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웃음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천을 깔아놓고 행사장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우선 성지순례 회향식을 먼저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차량 별로 두 줄씩 자리를 펴고 앉았습니다.
선주 법사님의 사회로 제29차 인도성지순례의 회향식을 시작하였고 이어 스님께 회향 법문을 청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가시는 길까지 같이 갔다가 여러분들만 보내놓고 저는 다시 이곳 상카시아로 내려올 겁니다. 와서 수련을 지도하거나 아니면 개원한 절을 방문해서 개원법회를 해야 합니다. 지금 저 포스터의 내용은 뭐냐 하면 ‘절 개원한다’는 거예요. 불교로 개종한 석가족들이 동네마다 절을 지었거든요.
저한테 ‘절 지어 달라’고 하기에 제가 ‘당신들 절은 당신들이 지어라. 그러면 내가 불상은 모셔줄 거고, 개원법회는 해 주겠다’고 했더니 자기들이 동네마다 작게 지었어요. 여기는 힌두절들도 다 규모가 작습니다. 그래서 여기 유지들이 땅을 내고, 자기들이 절을 짓고, 불상은 우리가 지원했어요. 그래서 저는 모레 다시 이리로 내려와서 이틀 동안 동네마다 다니면서 개원법회를 합니다. 우선 상카시아 탑이 허물어져 있으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저 탑의 원형을 하나 복원하려고 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아직 담마보다는 신앙이거든요. 그리고 이들이 교육받고 연수받아서 법을 알 수 있도록 연수원 시설을 하나 마련하려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음력 9월 보름, 양력으로는 10월에 여기에서 몇 만 명씩 모이거든요. 그럴 때 집회할 수 있는 오픈된 강당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니까 그런 것을 지원해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조건이 있거든요. ‘반은 너희가 부담해라.’ 그러니까 ‘예.’ 해 놓고 지금까지도 안 내고 있어서 저도 버티는 중이에요.(모두 웃음) 왜냐하면 우리가 지어주면 그게 이 사람들 게 안돼요. 자기네가 벽돌 한 장이라도 내고 노동이라도 하루 하고 그래야 진짜 이 사람들 게 되거든요. 우리가 형상만 만든다면 그건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제가 여기 동네에 학교를 짓는 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게 목적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거기 와서 일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는데, 저는 자기 아이에 대해서는 부모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걸 가르치려는 목적도 있거든요. 돈이 없어서 못 내면 와서 며칠 일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 와서 일한 사람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까요, 안 보낼까요?”

“(순례객들) 보내요.”

“그런데 우리가 학교를 지어 주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하면 보낼까요, 안 보낼까요? 매일 우리가 데리러 다녀야 돼요.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납득을 하고 와서 며칠이라도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제 아이를 학교에 보냅니다. 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도 않을 거면서 와서 일하는 부모는 없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직접 지은 학교에는 해를 안 끼칩니다. 우리가 지어서 주면 벽돌이라도 깨가거나 해서 다 부셔버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사업이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형상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하도록 하느냐는 게 더 중요해요. 우리가 폼 잡고 사진 찍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성지순례 와줌으로 해서 이 사람들 활동을 지원할 수도 있고, 제이티에스에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 왔을 때 환영도 받고,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는 거고요. 회향을 여기서 하는 이유도 여러분들이 10년 후, 20년 후에 다시 여기 오셨을 때 ‘아, 내가 성지순례하면서 호텔에서 안 자고 밥 해먹으면서 순례자숙소에서 잤더니 이런 결과가 있구나.’ 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그렇게 생활한 것 자체가 보시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처음 지었을 때 그 돈의 원천도 그 당시 성지순례에서 남은 돈이었어요. 나중에는 후원금이 들어가기도 했지만요. 여기도 그런 식으로, 자기들도 십시일반 참여하고 우리도 좀 보태서 이 석가족 후예들이 정신적 구심점을 찾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요? 우리가 순례 다니면서 아무 데나 똥도 누고 오줌도 눴으니까 우리가 인도에 그 빚도 좀 갚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옛날에 혜초스님 등이 오셔서 여기서 밥 좀 얻어 드셨으니까 그 자손인 우리가 그 빚도 좀 갚아야 되지 않겠어요? 옛날에는 못 살아서 못 갚았지만 요즘은 살만 하니까 좀 갚으면서 살아야지요.

그러니까 돈이 있다고 호텔에 자고 그러지 말고 순례자숙소에 자면서 아낀 돈들을 인도 사회 변화를 위해서 쓴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겠습니까. 배고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병든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인도에도 이런 좋은 불법이 부흥될 수 있도록 우리의 지나간 자취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사람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겠지요? ‘한국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다녀갔는데 그 사람들 지나간 자리에는 휴지도 한 장 안 떨어져 있더라. 그 사람들이 다녀간 숙소에는 청소할 것도 없이 깨끗하더라. 사람이 400명이나 되는데 한 줄로 주욱 와서 조용히 앉아서 기도한 뒤에 한 줄로 주욱 나가더라. 대단하더라.’ 교육 중에서는 체험교육이 제일 중요하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교육적 모델이 되어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성지순례에서 이렇게 생활 한 것 자체가 보시를 이루었다는 스님 말씀에 내가 알고 한 것은 아니지만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보시가 되고 모델이 되는구나. 부처님 제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사르나트에서 수계식과 함께 받았던 가사를 반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사를 반납하여 17일간의 순례자로서의 시간은 마무리 하지만 수행자로서의 삶은 지금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이어 석가족 여러분과 함께 하는 감사와 축하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석가족의 많은 분들이 꽃 목걸이를 만들어와 스님께 걸어드리고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꽃 때문에 스님 얼굴이 잠기듯 사라져가는데 웃음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꽃 목걸이를 걸어드리고 기념 사진을 찍는 석가족 여러분의 모습이 재밌었습니다. 석가족 청년(?)회를 이끌고 있는 수바스지의 인사말에 이어 축하공연도 있었습니다.

현란한 손짓, 발짓이 신기했습니다. 준비한 순서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석가족에서 마련해 주신 짜이를 마시며 석가족 여러분들과 사진을 찍기도 하고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였습니다.

스님은 한 쪽에 짓고 있는 요사체(?) 건물을 수바스지의 안내를 따라 둘러보았습니다. 부엌, 식당, 작은 방이 1층에 있었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건물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자 석가족 분들이 모여서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석가족의 활동에 감동을 받은 순례객들이 보시해주신 7만 루피의 보시금을 수바스지에게 순례객을 대신하여 전달해드렸습니다. 수바스지는 머리 숙여 보시금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스님은 어제 쉬라바스티 중국절에서 프라즈난다 스님의 영정과 사리를 친견한 것을 전하면서 부도탑 건립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프라즈난다 스님은 이곳 석가족들의 스승이셨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성지순례 일정을 마무리 하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순례객들도 이 먼 곳, 인도 상카시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하며, 특히 같은 부처님의 제자라는 동질감을 느끼면서 마음 뿌듯하게 순례 일정을 마무리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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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싶은 땅의 크기만큼 금화를 깔아야 살 수 있는 땅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7

스님의 하루 2018.02.14 16:00


사고 싶은 땅의 크기만큼 금화를 깔아야 살 수 있는 땅

2018.1.17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2일째_기원정사

스님을 비롯한 순례대중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와 합장한 두 손, 한 발자국씩 발걸음에 집중하며 행선하듯 걸어가는 대중들은 2600여 년 전 부처님과 1250인의 비구 대중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스리랑카 숙소에 묵었던 두 개 차량도 행렬에 합류하여 기원정사 입구에 도착하였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가면서 기원정사로 입장하였습니다.
스님은 천천히 행렬을 이끌어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자리, 부처님께서 찾아오신 손님을 맞이하셨던 코삼비쿠티, 열아홉 발자국 행선하셨던 곳을 거쳐 마지막 아난다 보리수까지 돌아 간다쿠티를 바라보는 자리로 대중이 앉을 수 있게 안내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자리▲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자리

부처님께 찾아오신 손님을 맞이하는 곳, 코삼비 쿠티▲ 부처님께 찾아오신 손님을 맞이하는 곳, 코삼비 쿠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하셨던 곳▲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하셨던 곳

아난다의 보리수 : 부처님이 안 계신 동안 부처님처럼 볼 수 있도록 보리수를 남겨달라는 수닷타 장자의 요청에 따라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가지고 온 보리수▲ 아난다의 보리수 : 부처님이 안 계신 동안 부처님처럼 볼 수 있도록 보리수를 남겨달라는 수닷타 장자의 요청에 따라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가지고 온 보리수

모두 간다쿠티를 바라보며 예참 불공을 올린 후, 스님은 지극한 마음을 담아 발원하였습니다.

“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Varanasi) 성 밖 사르나트(Sarnath)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
최초로 절을 지은 죽림정사가 있는 왕사성과
원숭이로부터 꿀을 공양 받은 바이샬리를 거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부처님께서 사문유관하시고 유성출가하신 카필라 성을 거쳐서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동안 머무신 이곳 쉬라바스티, 사위성 기원정사를 참배하고,
예불공양 올리며 부처님을 찬탄하옵나니
이와 같은 기원정사 참배 공덕, 부처님께 예불 공양 올린 공덕,
이 모든 공덕으로 순례대중들의 육신이 강건하고,
정신은 맑아 지혜가 증장되고 복덕이 구족하여
성불하는 그날까지 불퇴전의 신심으로 용맹정진 할 것을 발원하옵나니
제불보살님들은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시옵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부처님 성지순례 공덕, 수행 공덕,
저희가 태어난 한반도에 회향하오니
남한국민 5,000만, 북한국민 2,300만, 해외동포 700만 등
8,000만 한민족, 온 국민들이 모두 다 편안케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발원 하옴은,
지금 한반도에 전운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사오니
부처님의 지혜 광명과 평화의 빛으로 이 전쟁의 먹구름을 속히 걷어주옵소서.
또한 북한 동포들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인권이 개선되어 우리와 더불어 인생의 복락을 누리게 하여주옵소서.
이와 같이 순례공덕, 발원공덕을 고통 받는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에게는 양식이 되고,
병든 이는 속히 쾌차하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이 이고득락케 하옵소서.
저희의 이와 같은 발원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도 다 함께 왕생극락 하여지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스님은 이어 이번에 성지순례를 신청하셨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셔서 성지순례에 참석하지 못하신 부산 동래, 묘각화 김혜정 보살님의 천도 축원도 덧붙여, 대중들과 함께 왕생극락을 발원하였습니다.

예불 공양을 잘 올리고 자리에 앉아 잠시 명상을 하였습니다.

“이불로 두르다시피 옷을 입고 왔는데도 좀 춥네요.(모두 웃음)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바로 기원정사(祇園精舍)입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기원정사의 창건 유래부터 한 번 더 말씀드린 후에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맨 먼저 설법하신 곳이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입니다. 거기에서 5비구 등과 야사, 야사의 친구 55인, 합해서 60명에게 전법선언을 하시고, 보드가야 가까이에 있는 우루벨라촌으로 와서 우루벨라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과 그 제자들 등 천 명을 교화하신 후 이 대중들과 함께 왕사성 서문을 통해서 왕사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들어오실 때 서문 1유순 밖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서 그를 교화하고 죽림정사를 기증받으셨고요.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그리고 그 제자 200명도 귀의를 받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초창기 부처님의 제자를 ‘1250인’ 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1260명이지만 일반적으로 ‘1250인, 또는 1200 제대아라한’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곳에 계실 때 마하가섭존자의 귀의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을 교화하셔서 왕사성에는 이미 부처님의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사위성에는 아직 부처님의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나 봐요. 당시 인도의 시대상황은, 전 인도에 300여개의 나라가 있었고, 그 가운데 16개의 큰 나라가 있었는데, 그것을 ‘16 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우리가 ‘G20’라고 하듯이. 그 가운데에서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은 G2, 요즘으로 말하면 미.중, 옛날 같으면 미.소와 같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마가다국은 조금 오래된 나라이고, 왕사성은 문화가 아주 발달한 나라이고, 코살라국은 신흥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위성(舍衛城)의 인도 말인 ‘쉬라바스티(Shrvasti)’는 물자가 풍부하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군사적으로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아직 문화가 발달된 그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신흥도시였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사위성에서 장사를 하는 사업가 출신의 수닷타 장자라는 사람이 왕사성에 사업차 오게 되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보통 사업차 왕사성에 오면 칼란다라는 친구 집에서 주로 머물었나 봐요. 그래서 그 집으로 가서 문지기한테 ‘친구가 왔다고 주인에게 가서 알려라’고 했는데 이 친구가 나타나질 않는 거예요. 보통 때에는 버선발로 뛰어나오던 친구인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으니까 속으로 좀 섭섭했어요. 한참 뒤에 친구가 젖은 손을 닦으며 나와서는

‘오래 기다렸지? 미안하다.’
‘무슨 일이냐? 딸이라도 치우거나 아들이라도 장가보내느냐?’
‘아이고, 그만한 일로 내가 자네를 기다리게 했겠느냐?’
‘그럼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느냐?’
‘내일 우리 집에 부처님과 성중들을 초대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요리를 감독하느라고 좀 바빴다.’
‘아니, 부처님이라니? 부처가 출현했단 말인가?’
‘자네는 아직 그 소식도 못 들었는가?’

이러면서 친구는 수닷타 장자에게 부처님의 얘기를 쭉 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부처님 얘기를 하느라 밤이 깊은 줄도 몰랐는데, 친구가 수닷타 장자에게 ‘너는 복도 많다. 부처님을 친견하기가 어려운데,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오시니까 너는 내일 여기 앉아서 부처님을 뵐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어요. 둘이 그러고 헤어졌는데, 수닷타장자는 내일 부처님을 뵙는다고 생각하니까 밤에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날이 밝기를 못 기다리고 이렇게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녘에 밖으로 나와 숲을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저 나무 밑에 어떤 수행자가 앉아있는데 그 자태가 정말 그림 같은 거예요. 뭔가 느낌이 와서 그 수행자한테 다가가 인사를 드리며

‘부처님이 아니십니까?’
‘그렇다. 내가 당신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하셨어요. 전에도 부처님께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였습니까?”

“(한 순례객) 마하가섭존자요.”

“예, 마하가섭존자가 부처님을 찾아뵈었을 때 부처님께서 ‘내 당신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요’라고 하신 일이 있었지요.
어쨌든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께 법을 청했고 부처님께서는 수닷타장자에게 법을 설하셨는데, 그 법을 듣고 수닷타장자는 번뇌가 다하게 됐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어요. 어쩌면 부처님과 수닷타 장자의 인연이 대중들 속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해서 아마 새벽녘에 단 두 분이 만나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수닷타장자가 부처님을 이 사위성으로 초대한 거예요.

‘저희 나라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많으니까 여래께서 오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위성으로 와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승낙을 하셨어요. 그게 성도 후 3년째의 일입니다. 그래서 수닷타장자는 사업이고, 뭐고 다 버리고, 먼저 이 사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먼저 부처님과 1250명의 성중이 왔을 때 그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할 생각을 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자이니까 공양은 얼마든지 접대할 수 있었어요. 또 성중이 걸식을 하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때까지 공식적인 정사로서 인정받은 건 죽림정사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죽림정사는 왕사성 북문 밖 1킬로미터 이내에 있습니다. 절의 위치조건은 마을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멀면 걸식하기 어렵고, 가까우면 번다하니까요. 그래서 이걸 기준으로 가장 머물기 좋은 곳이 어디일지 사위성 주위를 돌아봤어요.

그러다 이 사위성 서문 밖 한 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이 숲이 가장 머물기가 좋겠다, 죽림정사에 버금간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누구 소유인지 확인해 보니까 한문으로는 기타태자(祇陀太子), 인도말로는 제따(Jeta)태자의 숲이었어요. 이 제따태자는 이 나라 왕인 프라세나짓(Prasenajit) 왕, 즉 빠세나디(Pasenadi) 왕의 동생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도 왕자였습니다. 왕자는 이걸 팔 리가 없잖아요, 돈이 아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수닷타장자는 소유자를 알게 된 후에도 포기를 하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장자는 제따태자를 찾아가서 이 숲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는데 태자가 거절을 했어요. 수닷타장자가 부자이긴 하지만 감히 ‘왕자의 땅을 달라’고 하니까 기분이 나빴던가 봐요. 그러니까 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파십시오’라고 하면서 백지수표를 제안한 거예요. 당시 인도에는 백지수표를 제안하면 거절할 수가 없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 백지수표 관련된 일화가 또 하나 있었지요? 선혜동자가 꽃 일곱 송이 구할 때 구리선녀(拘利善女)한테 자기에게 꽃을 팔라고 했지만 구리선녀가 안 판다고 하자 선혜동자가 꽃값은 얼마든지 드리겠다며 백지수표를 제안하니까 구리선녀가 ‘꽃 한 송이에 금화 백 냥을 내시오’라고 해서 금화 500냥을 주고 꽃 다섯 송이를 산 일이 있었잖아요.
어쨌든 수닷타장자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파십시오’ 하니까 태자가 ‘사고 싶은 땅에다 금화를 깔아 보시오’ 했어요. 그러니까 땅값이 얼마라는 거예요? 금값이라는 말이지요. ‘네가 사고 싶으면 금화로 깔아 봐라. 네가 돈 좀 있다고 건방지게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런 거지요. 그래서 액수로는 얼마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는 높은 금액을 부른 거예요. 안 팔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때 장자가 ‘너무 비싸네요’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먼저 백지수표를 제안했기 때문에. 그래서 장자가 ‘알았습니다’ 이러고 돌아갔어요. 태자는 장자가 ‘알았습니다’ 하고 돌아가니까 포기한 줄 알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이 숲을 지키던 동산지기가 와서는
‘태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수닷타장자가 마차에 금화를 싣고 와서 땅바닥에 까는 중입니다.’

그래서 쫓아가봤더니 진짜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팔겠다고 승낙도 안 했는데 뭐 하는 거요?’
‘당신이 값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금화를 깔라고 해서 내가 지금 깔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 거래가 성사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소송을 건 거예요. 요즘 같으면 법원에 갔더니 판결이 어떻게 났겠어요? 계약이 성립된 걸로 판결이 났어요. 그런데 장자가 아무리 부자라도 땅바닥을 금화로 다 채워 넣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깔다가 중간에 금화가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제따태자가 좋아했어요.

‘봐라. 네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걸 다 깔 수 있겠냐?’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숨겨놓은 돈이 더 있으니까 가져와서 깔겠소. 또 어음을 친구한테 맡기고 돈을 빌려와서 깔겠소.’

이러니까 제따태자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래서 물었어요.

‘이 땅을 사서 뭐하려고 그러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태자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기가 막힌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과 아무 관계도 없는, 수행자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한다고 숲을 사들이는데 전 재산을 다 쏟아 붓다 못해 빌려서까지 값을 치르겠다고 하니까 궁금해진 거예요.

‘도대체 그 부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오?’

장자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다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제따태자가 그 설명을 듣고 감동을 해서 ‘그렇다면 나머지 땅은 내가 기증을 하겠소’라고 한 거예요. 어쨌든 땅값은 받았다는 거죠?(모두 웃음) 그런데 땅 전체로 봤을 때 산 게 더 넓을까요? 기증받은 게 더 넓을까요? 기증받은 게 더 넓어요. 왜냐하면 장자가 아무리 부자라도 숲 입구에 조금 깔았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이 절 이름이 ‘제따의 숲’, 즉 제따바나((Jetavana)입니다. 바나(vana)는 숲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별명이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즉 자선사업가예요. 이걸 한문으로는 급고독(給孤獨), 즉 외로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기타태자의 숲, 즉 기수(祇樹)에,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지은 절, 즉 급고독원(給孤獨園)이라고 해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과 성중들이 이곳에 오게 되었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건물을 지은 건 아니에요. 지금 보시는 유적지들은 훨씬 더 후대인 굽타시대에 스님들이 머무시던 승원터와 부처님을 기념해서 건축물을 지었던 것이 남아있는 것이지, 부처님 당시에는 어떤 건물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자연에서 지내셨는데, 그나마 있었다면 대나무 기둥 몇 개 세우고 그 위를 갈대로 덮어서 비를 피하는 초막 정도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절이 지어졌고, 부처님은 이곳에서 우안거(雨安居), 그러니까 우기 때 3개월간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머무셨어요. 나머지 9개월은 유행을 하셨고요.
그러니까 45년 동안 안거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45번이 있었겠지요? 그 중에 24번을 이 사위성에 머무셨고, 그 중에 19번을 이 기원정사에서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부처님께서 가장 장기주석한 장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께서 이곳에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서 법문하신 양이 전체 경전 중에 제일 많습니다. 거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까 대승경전 작가들이 주로 대승경전이 설해진 배경으로 기원정사를 많이 기술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도들이 제일 좋아하는 금강경이 설해진 장소도 기원정사로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반야심경의 배경은 영축산(靈鷲山), 즉 기사굴산(耆?堀山)으로 되어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가장 많은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설법을 하나, 하나 경전으로 읽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대승불교도들로서 금강경 제6분까지만 독송을 하고, 여기에서 설해진 소승 경전 몇 편도 함께 독송을 한 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금강경을 읽어 내려가는 마음이 새로웠습니다. 금강경과 함께 경전을 몇 편 더 읽은 후, 스님은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가듯 ‘육화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대중 화합의 원칙 중에 6가지가 나오는데 이것을 ‘육화합(六和合)’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남이 싸우면 그 갈등의 원인이 뭔지를 규명해서 해소시켜야지 그냥 ‘싸우지 마라. 갈등 일으키지 마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갈등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라.’ 이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얘기입니다. 윗사람이 안 지키면서 아랫사람한테는 지키라고 한다면 아랫사람이 불만을 갖겠지요? 옛날에 우리 절에 중학생이 살겠다고 하기에 놔뒀어요. 그랬더니 그 중학생이 예불에 안 나왔어요. 그래서 스님이 불러서 ‘너 왜 아침 예불에 안 나왔니?’ 하니까 대번 ‘아무개 언니도 안 나오던데요?’ 제가 묻자마자 바로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모두 웃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불만은 그런 데서 생기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도 갈등이 많은 이유는 모든 사람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도 있잖아요. 지위가 있거나 돈 있는 사람은 수 백 억을 횡령해도 큰 문제가 없고, 하위직 공무원들은 10만 원만 받아도 처벌을 받잖아요. 그러면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사회적 갈등도 커지지요.

두 번째가 ‘의견을 맞추라.’ 아무리 좋은 것도 누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면 불만이 생기고, ‘그게 네 일이지 내 일이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남편이 어떤 결정을 혼자서 내리면 그게 아무리 가정에 이익 되는 일이라도 나머지 가족들은 ‘당신이 알아서 해라’며 방관자가 되고 그러지요. 그래서 반드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의논을 해서, 의견을 맞춰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게 민주주의예요.

세 번째가 ‘받은 공양을 똑같이 나누라.’ 이게 경제적 평등이에요. 오늘 날 우리 사회에 불만이 많은 건 경제적 불평등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절대빈곤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절대빈곤은 극복이 됐는데 상대적 빈곤이 너무 크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만약 제가 대중들과 같이 살면서 절에 들어오는 보시를 저 혼자 차지한다면 대중들의 불만이 많아지겠지요? 들어오는 돈은 회계처리를 투명하게 하지만 예를 들어 저한테 보시물을 건네는 분들은 ‘이건 꼭 스님이 쓰세요’하거나 ‘이건 꼭 스님이 드셔야 돼요.’ 합니다. 그 말에 집착을 하면 받는 사람이 ‘이건 내 거다. 내가 받았으니까 내 거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주로 대중들 앞에서 법문을 하니까 우리 몸에 빗대면 저는 정토회에서 얼굴 같은 존재인데, 우리 몸에는 얼굴만 있어요? 손발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작용하는 내장기관도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공동체에서 누구는 밥을 해야 되고, 누구는 청소를 해야 되는 등 역할을 나눴을 뿐인데, 우리가 사람을 상대할 때 그 사람의 얼굴만 보고 하듯이 얼굴에 해당되는 저한테만 ‘스님이 쓰세요.’ 하면서 보시를 한다고 그것을 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손발이 불평을 할까요, 안 할까요?”

“(순례객들) 해요.”

“예, 청소하던 사람들은 빗자루 던져버리고 다 가버릴 겁니다. 그래서 이 보시물을 모아놨다가 똑같이 나눠야죠. 즉 필요한 사람이 갖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야 불평, 불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놓고 자꾸 ‘불만갖지 마라. 화합하라’고 한다고 될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는데 ‘너는 먹고는 살면서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건 승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에도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 날 한국 승단에 갈등이 많은 건 이 중에 1개도 안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1개만 안 지켜도 갈등이 생기는데, 1개도 안 지키고 있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라.’ 이게 조금 어렵지요. 이건 투명성을 말하는 겁니다.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사니까 시시콜콜한 것까지 서로 다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으로 투명하지 않게 살고 있잖아요. 절에 들어 온 보시금도 어떻게 쓰는지 투명하지 않고, 지난 대통령 당시 청와대 안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투명하지가 않아서 결국 말썽이 났잖아요. 무슨 주사약부터 옷까지 온갖 게 다 말썽이 됐잖아요. 사실 그런 건 시비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게 투명하지 않다 보니까 먹는 것까지 트집을 잡히는 등 온갖 게 다 말썽이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집행하라는 얘기지요.

다섯째는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말의 내용은 옳은데 강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도 거기에 속하는데,(모두 웃음) 말이 옳아도 말이 부드럽지 못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뭘 잘못 하는 사람한테 ‘그게 잘 안 되니?’ 이러지 않고 ‘너 대학 나왔니? 대학 나온 게 그래? 너 뒷문으로 들어갔지?’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물론 저는 농담으로 한다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자비롭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해야 되는데, 꼭 찍어서 침놓듯이 말을 하면 상대가 기분이 나빠지지요. 말은 틀린 게 아닌데 기분이 나빠진다는 거예요. 옛날에 정치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은 동료로부터 ‘옳은 얘기를 싸가지 없이 한다’ 이런 얘기를 듣기도 했어요.(모두 웃음) 부부지간에도 대화를 하다 보면 남편 말이 맞기는 맞고 합당한데, 듣는 아내는 기분이 나쁜 거예요. 자비롭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게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이 옳은 것만 갖고 살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왜냐하면 ‘옳은’ 건 이성적인 건데, 우리들의 감정은 옳고 그름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옳아도 감정적으로는 기분 나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자비롭게 말하라는 거예요.

여섯 번째 ‘남의 뜻을 존중해라.’ 상대의 뜻이 옳든 그르든, 내가 그 뜻이 좋든 싫든, 일단 좀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옳다, 그대로 하겠다가 아니라 일단 얘기를 좀 들어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얘기를 하다보면 들어주기가 쉽지 않지요. 첫마디 들어보면 벌써 ‘저거 되지도 않는 소리다’ 싶잖아요.(모두 웃음) 그래서 ‘알았다. 그만해라. 알았다니까!’ 이러잖아요.(모두 웃음) ‘알았다니까!’라는 건 알았다는 거예요? 듣기 싫다는 거예요?”

“(순례객들) 듣기 싫다.”

“그러면 ‘몰라!’ 하는 건 모른다는 거예요? 듣기 싫다는 거예요?”

“(순례객들) 듣기 싫다.”(모두 웃음)

“예. 그래서 부처님이 와도 구제 못하는 중생이 두 종류가 있는데, 그건 ‘알았다.’ 즉 ‘다 안다’는 중생하고, ‘몰라.’ 즉 ‘다 모른다’는 중생입니다.(모두 웃음) 뭘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뭐라, 뭐라 그러면 ‘안다니까!’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듣기 싫다는 거예요. 그 ‘싫다’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처님도 그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반왕이 깨닫지 못한 거예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내 아들은 옷도 잘 입고, 얼굴도 예쁜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시봉도 받고 해야 되는데, 마하가섭 존자니 뭐니, 사람들은 그들이 다 훌륭한 수행자라고 하지만 외형이 영 형편없으니까 정반왕이 석가족들을 불러 모아서는 인물도 잘 생기고 괜찮은 사람들을 강제로 출가시켜서 ‘부처님 옆에 있어라’고 할 정도였거든요. 순전히 세속적인 생각만 하는 거예요. 오직 ‘우리 아들!’ 말고 다른 데는 관심이 없던 거예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대도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붓다가 출현한다고 우리가 다 구제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알아보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기회가 오지, 그것마저 없으면 기회가 안 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갈등이 생길 때 이 6가지를 딱 적용하면 ‘아, 우리가 어떤 부분이 미진해서 갈등이 생겼구나’ 하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의 말씀은 2600년 전 얘기인데도 오늘 날에도 여전히 공동체의 화합이나 사회의 화합을 위해 그대로 적용 가능한, 합당한 말씀을 하셨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이미 새벽의 안개는 물러가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다가오니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고 기분도 밝아졌습니다. 햇빛 하나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바꿔주었었던가 새삼스럽게 고마웠습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청년들은 아침에 하지 못한 정진을 하고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조용히 앉아 명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시간을 가진 뒤, 스님은

“자, 그럼 우리들은 사위성으로 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차량 타는 일은 없습니다. 앙굴리말라탑터와 수닷타장자의 탑, 그리고 베사카 부인이 기증하신 동원정사까지 거쳐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은 걸으면서 진행합니다. 험한 길은 아니니 천천히 산책 삼아 걸어가보겠습니다.”

환한 햇살이 비추고 있어 껴입었던 옷을 벗고 걸을 준비들을 하였습니다. 줄을 지어 걸어가는 기분이 밝고 상쾌했습니다.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숲길, 모래바닥 길을 400 대중이 걸어갔습니다. 30분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앙굴리 말라 탑터’ 였습니다.

“춘다(Cunda)나 앙굴리말라(Angulimala) 같은 분들은 붓다의 인격을 위대하게 한 분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수자타, 수닷타, 베사카 같은 분들은 그들 자체가 훌륭한 사람들로서 ‘그런 훌륭한 사람들도 붓다의 제자가 됐다’는 의미이고, 이 앙굴리말라는 흉악범에 불과한 사람인데 붓다를 만나서 성인이 된 사람에 들어가니까 붓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앙굴리’라는 말은 손가락이라는 뜻이고, ‘말라’는 염주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서 목에 걸었다’ 해서 앙굴리말라인 거예요. 이건 그의 원래 이름은 아니고 별명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사위성의 좋은 집안 출신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를 공부시키려고 탁실라(Taxila), 즉 지금의 파키스탄이 있는 북쪽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그 당시에는 유학을 가면 스승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했는데, 그 스승은 이미 육십 넘은 노인이셨어요. 아마 본처가 돌아가시고 재혼을 하셨는지 그 스승의 부인, 즉 사모님은 아주 젊은 여자였고요. 그런데 그 집에서 아이들이 숙식을 하니까 그 사모님이 아이들 밥도 해먹이고 그런 거예요. 거기서 공부하는 아이들 중에는 먼 나라에서 온 유학생도 있고, 그 도시에서 통학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앙굴리말라가 공부를 제일 잘했나 봐요. 그래서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스승의 총애를 받다가 어떤 사고가 생겼어요.

주된 얘기는 같은데 경전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버전이 여러 개예요.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어릴 때 유학 와서 공부를 하면서 장성했잖아요? 13 내지 15살 정도면 상당히 크거든요. 사모님이 앙굴리말라를 어릴 때부터 키우다시피 했는데, 이제 장성했으니까 늙은 남편이 없을 때 앙굴리말라한테 연애를 좀 하자고 유혹했다가 거절당한 거예요. 그래서 너무 상처를 입은 거예요. 자기는 앙굴리말라를 그렇게 정성껏 보살폈는데 앙굴리말라는 자기를 내쳤다고 느껴서 한이 맺힌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돌아올 때에 맞춰 자기 옷을 스스로 찢고는 ‘이럴 수가 있느냐? 당신이 없을 때 이 아이가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며 앙굴리말라에 대한 거짓 고자질을 해서 스승이 총애하던 제자에 적의를 품게 되었다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스승과 사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니까 그 동네출신 아이들이 그 스승한테 ‘사모님과 앙굴리말라 사이에 뭔가 있다’고 모함을 했는데도 스승이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보니까 자기 아내가 손으로 밥을 앙굴리말라 입에 넣어주는 걸 보고 질투심을 느껴서 문제가 됐다는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둘이 방에 들어온 쥐를 잡느라 엉켜서 옷이 막 흐트러졌는데 남편이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오해를 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남녀 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걸 빌미로 늙은 스승이 앙굴리말라를 오해해서 일이 벌어졌다는 거지요. 어쨌든 문제가 됐으니까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되잖아요.

‘나는 더 이상 너를 가르칠 수가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라.’
‘아닙니다. 저는 아직 더 배울 게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배우고 싶다면 딱 하나, 마지막 남은 도술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너에게 말해 줄 수가 없다.’
‘아닙니다. 저는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100명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서 목에 걸면 바로 승천해서 하늘나라에 날 수 있다.’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확신이 들면 괴력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건 좋은 측면도 있지만 잘못 믿으면 엄청난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되었고,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피했어요. 왕이 군사 10명을 파견해도 오히려 다 앙굴리말라한테 살해되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고향인 사위성으로 점점 다가오니까 사위성 사람들은 불안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각 집마다 요령을 달고 그걸 밧줄로 이어서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는 표시로 누군가 밧줄을 잡아당기면 동네에 요령이 전부 흔들려서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는 외출을 안 할 정도로 공포가 컸던 거예요. 어쨌든 사람들이 불안해 하니까 빠세나디 왕이 천명의 군대를 끌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난 거예요. 그래서 그 어머니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우리 아들 좀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버전도 있고, 앙굴리말라가 어머니마저도 죽였다는 버전도 있어요. 아무튼 앙굴리말라가 괴력을 가진 공포의 대상이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막 ‘앙굴리말라다’ 하면서 도망을 가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앙굴리말라가 온다는 방향으로 길을 가시니까 사람들이 ‘부처님, 그리로 가지 마세요. 앙굴리말라가 나타날 겁니다.’ 하니까 부처님께서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셨어요. 술 취한 코끼리가 왔을 때도 부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어쨌든 부처님이 서서히 길을 걸어 가시니까 앙굴리말라가 숲속에서 칼과 방패를 들고 나와서는 천천히 걸어가시는 부처님을 쫓아갔어요. 그런데 아무리 쫓아가도 천천히 가시는 부처님께 도저히 닿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도 앙굴리말라는 ‘사문아, 멈춰라.’ 고함을 치면서 쫓아갔어요. 보통 그러면 사람들은 두려워서 ‘살려달라’고 하든지 도망을 가든지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고요하게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앙굴리말라가 씩씩대면서 ‘왜 멈추라는데 안 멈추느냐?’며 칼을 들고 악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나는 멈춘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너다.’고 하신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항상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리시거든요. 그래서 갑자기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문제에서 멈췄냐, 안 멈췄냐는 문제로 바뀐 거예요.

‘너는 계속 가놓고 왜 멈췄다고 말하고, 나는 멈추어 있는데 왜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느냐?’
‘여래는 사람을 해치는 모든 행위를 이미 오래 전에 멈췄다. 그런데 너는 아직 그것을 멈추지 못했구나.’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앙굴리말라의 정신이 돌아와서 자기가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안 거예요. 그래서 칼을 집어던지고 부처님께 무릎을 꿇으면서 ‘제가 지은 죄를 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설법을 했고, 그 설법을 들은 앙굴리말라는 바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출가사문이 되기를 발원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하고 끝내버리셨어요. 이게 부처님의 위대함이에요.(모두 웃음) 아무 절차도 없이 말이에요. 앙굴리말라는 출가사문이 된 후로 엄청나게 집중적으로 정진해서 일주일 만에 깨달아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기원정사에 와있는데 빠세나디 왕이 천명의 병사들을 끌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제따바나 앞으로 지나가다가 그 정사 앞에 군대를 놔두고, 무장을 해제했어요. 부처님을 뵈려면 반드시 무장을 해제하고 부처님께 문안을 드렸어요. 그리고 부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대왕이시여, 무슨 일이시요?’
‘예,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말라가 나타나서 지금 잡으러 가는 중입니다.’
‘혹시 앙굴리말라가 출가사문이 되었다면 왕은 어떻게 하겠소?’
‘부처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소?’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앙굴리말라한테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당신 곁에 있는 이 수행자가 앙굴리말라요.’

그러니까 왕이 부들부들 떨었어요. 이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천명의 군대를 끌고 왔지만 천명의 군대로도 잡을까, 말까 한 두려운 존재인데, 그 살인마 옆에 지금 무장해제하고 혼자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왕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는 아힘사(Ahimsa) 비구요.’
그러니까 앙굴리말라의 법명이 아힘사라는 건데, 그건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왕이 앙굴리말라를 가만히 보니까 이미 그는 수행자인 거예요. 그래서 왕이 아힘사 비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저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이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나는 천명의 군대를 끌고도 그를 제압하지 못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안 가지시고 그를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성자로 바꿔놓다니. 여래의 위신력은 누구도 당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까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비구가 됐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앙굴리말라에 대한 두려움이 안 가셔서 이제는 비구들만 나타나면 그가 앙굴리말라일지도 모르니까 막 요령을 흔들었어요. 그래서 비구들이 사위성에 탁발하러 들어오면 걸식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다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고 나와 보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다들 부처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왜 저런 사람을 출가시켜서 우리가 도매금으로 살인마 취급을 당해야 되느냐’는 거지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는 역시 ‘일주일만 지나면 오해가 풀리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일주일만 굶으면 되지,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불평하느냐’는 거지요.(모두 웃음) 오해가 풀리려면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앙굴리말라를 두려워하다가 앙굴리말라가 진짜 수행자가 됐다는 걸 인식하게 되면서 점점 두려움이 복수심으로 바뀐 거예요.
하루는 앙굴리말라가 어떤 집으로 걸식을 갔는데 사람들이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니까, 그 집에 있던 산모가 아기를 낳다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까무러쳐버렸어요. 아기를 출산하다가 산모가 까무러쳐버리니까 큰일이 난 거죠.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갔어요.

‘부처님, 큰일이 났습니다.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아힘사여, 다시 그 집으로 가라. 가서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한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앙굴리말라가 아힘사로 태어난 이래로, 즉 출가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거죠. 그래서 출가사문에게 출가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아힘사 비구는 그 집으로 다시 가서 ‘여인이여,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그 여인이 정신을 차려서 아이를 순산했다는 거예요. 그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에게는 ‘앙굴리말라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라는 소문이 난 거예요. 그리고 오히려 앙굴리말라를 두려워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걸식하러 오는 앙굴리말라에게 집단적으로 돌팔매질을 해서 결국 앙굴리말라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어요.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달려오시자 숨이 넘어가려던 찰나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이시여, 저는 안온합니다.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스투파에 왔을 때 보니까 여기 이 스투파 밑에 구멍이 나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도 ‘앙굴리말라 굴’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앙굴리말라가 여기 숨어 있다가 나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는데, 여기는 앙굴리말라가 돌을 맞고 쓰러져서 열반한 자리에 기념탑을 세운 거라고 합니다. 앙굴리말라는 붓다의 교화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붓다를 위대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럼 경전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여래의 아들이여, 너는 이제 모든 악을 다 멀리 던져 버린 사람이니라. 앙굴리말라여, 부디 인욕하라, 널리 용서하라. 네가 지난 날 범한 악행으로 인해 너는 지금 이런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니라. 만약 이 일을 겪지 않을 진데 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기나긴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야 했으리라.”
부처님의 이 설법이 끝난 뒤 앙굴리말라는 평화롭게 반열반에 들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가 행한 착한 공덕
과거에 지은 모든 악행을 압도했나니
이 세상에 밝은 빛을 남겼도다.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이 밝게 빛나듯이. "
<법구경>

경전의 구절에 마음이 먹먹하였습니다.
앙굴리말라의 탑터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수닷타 장자의 탑터를 보았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이 탑 위에 올라 탑을 살펴볼 수 있도록 천천히 탑을 돌아 탑 위에 올랐습니다.

탑 위에 올랐다 내려와서 사위성을 가로질러 동문 쪽으로 나갔습니다. 무너진 흙더미 속에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먼지 바람 일으키는 흙 길에 나뒹구는 벽돌들이 2600여 년 전 제국의 영화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라니 신기했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걷다가 마을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릇을 씻는 아주머니, 아이들 머리를 빗어주는 어머니, 우루루 나와서 순례객을 구경하는 동네 개구쟁이들, ‘안녕’하고 인사하니 웃으며 따라 하는 아랫도리를 벗은 꼬맹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들판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갔는데 어느새 밭을 망쳐서인지 울타리로 막아두어서 지름 길을 갈 수 없어서 마을을 통해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스님은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색한 한글로 ‘푸르바람 비하르’라고 적힌 간판을 지나쳐 왔습니다.

“여기 원숭이가 거칠고 그러니까 원숭이가 먹을 거나 가져갈 만한 것을 밖에 꺼내놓지 마세요.”

“(순례객들) 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푸르바람입니다. ‘푸르’는 동쪽, ‘바나’는 숲이란 뜻으로서 동원정사(東園精舍)입니다. 동원정사를 누가 창건했습니까? 베사카(Vaisakha) 부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안거를 1번 지내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주로 비구들이 있었으니까 비구 사찰이었는데, 나중에 역사를 보면 비구니 사찰로 운영된 것 같습니다.

베사카 부인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있습니다. 베사카 부인의 할아버지가 거부장자, 즉 큰 부자였는데 할아버지가 부처님의 재가신자였으니까 부처님께서 베사카 부인이 어릴 때 그 집에 가셔서 공양접대도 받고 그랬나 봐요. 그러니까 베사카 부인은 7, 8살, 아주 어릴 때 벌써 부처님을 친견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부처님께 공양접대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베사카 부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신심이 돈독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지만 당시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자꾸 합병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나라도, 마가다국 옆에 있던 나라인데, 결국 마가다국에 합병이 됐나 봐요. 그런데 합병이 되면 장자들은 오히려 자기네가 장사할 시장이 넓어지는 격이 되니까 사업이 더 번창했대요. 그래서 왕사성의 부자가 됐는데, 베사카가 커서 열여섯 살 이 되자 사위성의 큰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냈나 봐요. 그때 베사카의 지참금이 시댁 재산보다 더 많았대요. 할아버지가 손녀를 워낙 아끼니까 지참금도 많이 줬지만 혹시 시댁에 가서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서 시녀 수 십 명과 8명의 현자, 요즘 말로 하면 고문단까지 파견을 보냈나 봐요. 과장인지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시집을 왔더니 시댁은 육사외도 중에 하나인 니간타의 신자들이었어요. 그래서 스님들이 탁발을 하러 오면 시댁에서는 스님들께 공양을 안 주는 거예요. 종교가 다르다고. 그리고 또 니간타의 제자가 늘 이 집에 머물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스님들이 베사카 부인의 시아버지가 밥을 먹고 있을 때 탁발을 온 거예요. 인도의 풍습은 밥을 먹고 있을 때 탁발을 오면 공양을 올리도록 되어있는데, 시아버지는 돌아앉아서 계속 밥만 먹는 거예요. 우리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모두 웃음) 우리도 길거리에서 밥 먹다가 애들이 밥 달라고 하면 돌아앉아서 계속 먹잖아요. 그러니까 남 욕할 게 못 되더라고요.(모두 웃음)

어쨌든 시아버지가 공양은 안 올리고 돌아앉아서 밥만 먹으니까 베사카 부인이 스님들께 민망해서 ‘지금 우리 시아버님이 식은 밥을 먹고 있다’고 변명한 거예요. 그런데 시아버지가 그 얘기를 들은 거예요. 그래서 엄청나게 화를 낸 거예요. 자기는 지금 금 그릇에 맛있는 걸 먹고 있는데, 며느리가 스님들한테 자기가 식은 밥을 먹고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시아버지 모독죄로 파혼, 즉 소박을 준 거예요. 그러면 베사카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재산을 다 차지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일이 시아버지를 모독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송사가 붙었어요. 그래서 결국 현인들이 도와서 ‘그것은 시아버지를 모독한 게 아니다. 만약 파혼을 하려면 베사카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만큼 배상을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시댁의 전 재산이 다 없어질 판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이게 무마가 됐어요.

대신 이 사건을 통해서 시아버지의 기가 한 풀 꺾인 거예요. 그러니까 베사카 부인은 처음 시집왔을 때는 눈치 보느라고 못 하다가 그 이후로는 스님들께 공양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부처님을 집으로 초대한 거예요. 배포가 대단하지요?(모두 웃음) 그래서 시댁사람들에게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시댁사람들이 외도의 신자들이다 보니까 아무도 공양을 안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만 올리고, 공양이 끝난 뒤에 시댁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시니까 들으시라’고 하니까 시아버지는 좀 듣고 싶었는데 집에 있던 니간타 제자가 못 듣게 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 이 시아버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병풍 뒤에 숨어서 들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듣다가 깨달아버린 거예요.(모두 웃음) 그래서 발심을 한 거예요. 그 이후부터 시아버지 미가라(Migara, 鹿子)가 며느리를 ‘법의 어머니’라고 불렀대요. 그래서 베사카 부인의 별명이 그때부터 ‘미가라의 어머니’, 즉 녹자모(鹿子母)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 동원정사의 별명도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입니다. 이렇게 해서 집안이 교화가 된 거예요.

실제로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많은 모함을 받았는데, 그 모함을 대부분 수닷타 장자와 베사카 부인이 후원함으로써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베사카 부인이 기원정사에 법문 들으러 갈 때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된 외투를 입고 갔다가 벗어놓고 법문을 듣고는 귀가할 때 깜빡 잊고 온 거예요. 집에 도착해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려서 베사카 부인은 하인을 시켜서 ‘가서 찾아오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다시 불러 세워서는 ‘혹시 그 외투가 그 자리에 그냥 있으면 가져오고, 아난존자가 그 외투를 이미 챙겨놨다면 보시하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인이 가보니까 아난존자가 챙겨놓은 거예요. 그래서 하인이 ‘베사카 부인이 보시를 하고 오라고 당부하셨다’는 말을 전하니까 아난존자가 ‘이런 건 우리가 보시로 받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하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베사카 부인은 자기가 한 번 보시하기로 했는데 상대가 못 받는다고 하니까 아예 그 외투를 팔아서 그 돈을 보시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외투를 살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돈을 주고 샀어요. 그 돈으로 지은 게 이 동원정사입니다. 그만큼 신심이 있었다는 거지요. 수닷타장사에 버금가는 스토리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부처님께서 한 철을 나셨고 마하가섭존자도 여기서 수행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 원래 아쇼카 석주가 있었는데 그게 부러졌어요. 그런데 거기다가 사람들이 링가를 깎아서 여길 힌두절로 썼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무도 여기가 동원정사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쇼카 석주가 부러진 것을 깎아서 링가를 만들어놓은 거였어요. 그래서 현재 인도 스님께서 원래는 힌두교였다가 출가한 뒤로 지금껏 여길 가꾸고 계세요. 그래서 아는 사람만 이렇게 방문을 하는 겁니다. 저도 동원정사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 전에 들렀던 앙굴리말라 스투파만 보고 돌아갔는데, 몇 년 전에 답사를 와서 거리도 확인하고, 동문도 확인하니까 기록 속에 동원정사와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정식 성지순례코스에 넣었습니다. 자, 경전독송해 보겠습니다.”

동원정사 작은 뜰(?)에 400대중이 열을 지어 앉아 경전을 펴들고 독송을 하였습니다. 상세한 기록과 세밀한 표현에 읽어가는 재미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대중들이 경전 독송의 재미에 빠져드는 동안 오른쪽 길목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줄을 지어 앉아 사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무리 하고 스님은 법사님들과 행자님들에게 동네 아이들 사탕을 나눠주라고 이르고는 대중들과 함께 반대방향으로 난 지름길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대중들이 가는 동안 법사님과 행자님들은 아이들 줄을 세워 앉혀 두고 차례차례 사탕을 나눠주었습니다.

천축선원에 돌아와 대중들이 저녁 공양을 챙겨 먹는 동안, 스님은 가까이에 있는 중국 절과 인도 절을 방문 하였습니다. 먼저 중국 절에 들러 지난 12월에 열반하신 ‘쁘라즈난다 스님’의 영정과 사리를 참배하고 영가축원을 하였습니다.

쁘라즈난다 스님은 수자타아카데미 설립 초기부터 인연을 맺어 함께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해 협력하셨고, 인도 불교 부흥의 혁명적 인물로 칭송 받는 암베드카르에게 수계를 해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수자타아카데미 설립 초기에 봉사를 했던 석가족 청년들의 스승님이시기도 하여 법륜 스님과 제이티에스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큰 분이십니다.
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 염송을 하고 해탈주 독송을 한 뒤 일어났습니다.
절 관계자 분들과 쁘라즈난다 스님의 부도탑 건립 부분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보시금을 전달한 뒤 인도 절로 갔습니다.


인도 절에 들어서서, 스님은 먼저 법당에 참배하였는데 법당에 있는 어린 사미승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습니다. 이어 속속 어린 사미승들과 스님들께서 나오셔서 스님께 예를 표했습니다. 스님은 주지 스님과 반갑게 인사 나누시면서 보시금을 전달하고 나왔습니다.
해마다 성지순례로 이 곳 쉬라바스티에 오게 되면 스님은 이곳 인도절에 잊지 않고 들러 꼭 보시를 하고 갑니다. 올해로 벌써 20년 째가 됩니다. 스님은
“처음에 이 인도절은 아주 작았는데 해마다 조금씩 불사가 되는구나.” 하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당에서 즉문즉설 법회가 열렸습니다. 어제 시간 관계상 미처 질문을 하지 못한 세 분과 오늘 이어서 질문하는 분이 모두 여섯 분이었습니다.

수행문과 참회문은 좋은데 진언, 신중단이 와닿지 않는다는 분의 질문, 부처님 열반 당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관하셨다고 하는데 스님은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 묻는 청년, 위파사나 수행으로는 궁극적인 도를 이루기 어렵다고 하는데 참선을 왜 가르쳐주시지 않느냐고 질문하시는 분,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청년의 질문, 부처님이 가필라성에서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출가하셨는데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부처님 성인의 가르침에 관심이 가질 것 같다는 질문 등이 이어졌습니다.

안개가 가득한 쉬라바스티의 밤이 법문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부처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기원정사에서 순례자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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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도 생을 마치실 때 아쉬움이 있었을까요?"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6

스님의 하루 2018.02.13 16:00

"부처님도 생을 마치실 때 아쉬움이 있었을까요?"

2018.1.16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1일째_쉬라바스티

오늘은 네팔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인도로 들어가는 일정입니다.

스님은 네팔에 들어올 때 가장 늦게 들어왔던 2호차, 10호차의 대중들이 이번에는 가장 먼저 국경을 통과하도록 하여 10호차, 2호차가 가장 먼저 국경 통과 수속을 하러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10호차 청년들과 함께 국경 통과 수속을 하여 다음 일정인 삐쁘라하와에서 대중들을 맞이하기로 하였습니다. 네팔 출국과 인도 입국 수속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삐쁘라하와에 여유있게 도착하였습니다.

유적지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여법하게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예불 공양을 한 후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삐쁘라하와는 석가족이 세운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입니다. 100년 전, 진신사리탑이 발견되었는데 1898년 이 탑 터를 발굴할 때,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이 찍힌 사리용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델리박물관에 가서 친견을 하게 될 사리 용기와 사리(뼈조각)는 지금 우리가 참배하는 삐쁘라하와,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오늘은 국경 통과 수속이 순조로와 각 차량 도착이 끊임없이 연이어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한 차량, 혹은 두 차량을 합쳐서 정근, 예불공양, 설명의 순서를 진행하였습니다.

한참 일정을 진행하고 있을 때, ‘명등 108 순례단’이라는 조끼를 입은 한 분이 스님께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남자분은 밝게 웃으며 “천축선원에서 법륜 스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기서 뵐 수 있을 줄은 몰랐다”며 너무나 기뻐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3세라고 소개하며 중국 최초로 공식적인 단체명으로 불교 유적지 순례팀을 이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자 분은 기뻐하며 자신의 그룹과 스님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요청하였습니다. 스님도 반갑게 응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중국 순례단을 만난다는 것이 생경하게 다가왔지만 반가운 움직임인 것 같았습니다.

모든 팀이 유적지 참배를 잘 끝내고 다음 유적지인 ‘천불화현탑 터’로 달려갔습니다.
5시간가량 긴 시간을 달려 쉬라바스티의 천불화현탑터에 도착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3년째 되던 해에 죽림정사에 계셨는데, 그때 사위성(舍衛城), 즉 쉬라바스티(Shrvasti)의 큰 부자인 수닷타장자가 왕사성에 사업하러 왔다가 친구 집에 갔을 때 부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은 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이 사위성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초청에 응하셔서 성도 후 3년째 되던 해에 이곳 사위성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수닷타장자는 부처님과 1250인의 대중을 초청해 놓고 이분들이 어디에 머무시는 게 좋을지 연구를 하다가 왕사성 밖 죽림정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위성 밖 한 숲을 발견하고 부처님이 그 숲에 머무시기 좋겠다며 마련한 절이 기원정사입니다.

부처님이 1,250인의 대중과 기원정사에 머무셨지만 이 사위성 사람들은 좀 물질적이었나 봐요. 왕사성은 오래된 도시라서 좀 문화적 도시인데 비해 이 사위성은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력은 풍부한 신흥강국이라서 문화적으로는 좀 수준이 떨어졌나 봐요. 그러니까 부처님 같은 성인을 존경하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면에서는 굉장히 약했는지 부처님의 법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나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법문을 들으려고 하는 게 별로 없이 좀 냉담했다 그래요. 복을 구하거나 기적을 행하거나 그러면 ‘우-’ 하고 모여들지,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는 좀 외면했나 봐요.

그래서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수닷타장자와 많은 분들이 부처님께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러니, 이 사람들에 맞게 부처님께서 뭔가 법의 위신력을 좀 보여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몇 번이나 간청을 했다 그래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응하셔서 사위성 밖인 이곳에 사람들을 모이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데, 부처님께서 망고 씨를 하나를 땅에 심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 기다리니까 거기서 싹이 텄다는 거예요. 그래서 쭉쭉 자라더니 순식간에 큰 고목나무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놀랐어요. 그런데 또 그 고목나무에 황금빛 망고가 가득 달리더니 조금 후에 다시 그 망고가 전부 부처님으로 화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천불화현(千佛化現), 즉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난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사위성 사람들이 너무 너무 신기해하며 부처님 법에 귀의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불화현, 이것이 사위성의 상징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식으로 묘사가 됐을까?’ 이건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하겠지요. 아무튼 왕사성은 코끼리가 부처님께 조복하는 걸로 상징된다면 이 사위성은 천불화현으로 상징됩니다. 나중에 아쇼카 왕이 그것을 기념해서 이 자리에 천불화현탑을 쌓았고, 후대 사람들이 또 쌓고, 또 쌓고 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보다시피 이렇게 완전히 큰 산처럼 되었어요. 탑 중에 케사리아탑이 제일 크고 이게 두 번째로 큽니다. 케사리아탑이 발견되기 전에는 이게 제일 큰 탑이었어요. 이건 밑에서 보면 잘 안 보이니까 올라와야 하는데, 올라오다 보면 마치 등산하듯이 숨이 찰 정도에요. 여기 올라와서 이렇게 주위를 돌아보면, 맑은 날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느낄 수가 있어요. 탑 주위가 이렇게 연못처럼 습지가 많은데, 이건 강이 흘러서 그런 게 아니고 이 탑을 쌓는다고 흙을 파서 벽돌을 굽다 보니까 주위가 다 이렇게 습지처럼 변한 거예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내일 기원정사에 가서 하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도착한 두 개 차량의 예불 공양을 마칠 때 쯤 나머지 여덟 대의 차량이 도착하여 천불화현탑 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을 향해서 유적지 안내를 하고 이어서 함께 저녁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자리를 잡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고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천축선원은 쉬라바스티에 있는 한국절입니다. 부처님 성지에 있는 흔치 않은 한국 절인데다가 순례자 숙소를 이용할 수 있어서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이 곳 절의 주지스님이신 대인스님과 총무 보살님등이 환대를 하며 맞이해주셨습니다.

저녁 공양 후, 스리랑카 절로 숙박을 하는 차량도 모두 모여 함께 저녁 예불을 드리고 천축선원 마당에서 400여 대중이 자리한 법회를 열었습니다.

차량을 뒤로 물리고 각자 자기 깔판을 가져와서 깔고 앉으니 바로 법회 공간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깔판이 있으면 정진도 법회도 못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법회 전에 천축선원 대인스님과 총무보살님의 인사말씀을 청해들었습니다.

대인스님께서는 짧지만 반가움을 가득 담아서 맞아주셨습니다.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법륜 스님과 정토행자들이 기다려집니다. .... 각자 자기 처소에서 참다운 불제자로서의 모습으로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는 정토행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체 모든 생명의 시봉을 잘 하겠다는 원을 세우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오시는 수행자님들의 시봉을 잘 하고자 합니다. 안개 자욱한 날, 몸은 괴롭지만 마음은 흐뭇하고 부처님 법을 만나 좋은 도반을 만나 모든 인연이 행복임을 알게 됩니다. 순례하기에는 요즘 시기가 좋지 않지만 와주셔서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특히, 총무 보살님께서는 이번에 된장 담그기에 성공해서 순례 대중에게 맛있는 된장국을 공양 올릴 수 있게 되었다하며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어, 즉문즉설 법회가 열렸습니다. 순례 중에 궁금한 내용들을 스님께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행복은 절대적인 것인지, 상대적인 것인지가 궁금하다는 분, 담마적 불교와 종교적 불교의 차이점에 대해서 물어보신 분, 부처님이 대중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르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 생멸이 없다는 뜻이 무엇인지 등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이후에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시려고 많은 행적을 이어가셨는데, 모든 것이 제게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시고 사랑하셨던 곳이 이곳 바이샬리였고, 릿차비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부처님께서 생을 마치실 때의 그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듯이 그렇게, 따라오는 릿차비족을 둘러보시는 모습’으로 묘사가 되어있거든요. 거기서 저는 굉장히 안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도 아쉬움이 있었을지, 어떤 마음이셨을지 그게 궁금합니다.”

“질문에 약간 수정을 해야 되겠는데요. 법문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까 헷갈리나 봐요. 부처님께서 오래 주석하셨던 곳은 이곳 사위성입니다. 성도하신 후, 45안거 중에 24안거를 이 사위성에서 했다고 되어있고요. 그 24안거 중에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는 경전의 절반 가까이의 배경이 사위성 또는 기원정사로 되어있습니다. 오래 머무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셨지만 가장 사랑했던 종족이나 나라로 후대에 기록되어있는 건 바이샬리의 릿차비족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릿차비족의 바이샬리는 절대왕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처럼 왕이 막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러는 절대왕국이 아니고, 아테네처럼 일종의 도시국가 형태로써 왕족들이 가능하면 회의를 해서 의사를 결정하는 일종의 공화정 체제였습니다. 우리 상가(sa?gha, 승가僧家)의 운영원리가 바이샬리 릿차비족들이 하는 그런 원리와 좀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의 사회시스템을 좋게 보신 것 같아요.

또 바이샬리는 당시에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풍요로웠다고 합니다. 또 굉장히 진보적인 도시였어요. 그래서 당시에 사회 조건에서는 비구니출가를 허용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래도 그 중에서 바이샬리가 가장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바이샬리에서 비구니출가를 허용했습니다. 후대에는 바이샬리에 사시는 출가스님들마저도 조금 개방적이어서, 당시는 화폐사용으로 경제시스템이 바뀌는 때였으니까 바이샬리의 스님들 사이에서 화폐를 보시로 받을 수 있느냐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바이샬리의 스님들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어요. 여기가 상업도시다 보니까 환경이 그래서 그런 건데, 이것이 2차 결집이 있게 된 동기이고, 보수적인 장로들이 ‘받을 수 없다. 그건 비법(非法)이다’라고 결정을 했거든요. 그런 걸로 봤을 때 도시가 그만큼 전통사회에서 좀 변화되어가는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까 이 바이샬리가 대승불교의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경전 중에 ‘유마힐경’, 즉 ‘유마경’이라고 있는데, 실존인물인지 가공인물인지 그것은 역사학자가 밝힐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 경전의 주인공인 유마거사가 바이샬리의 장자로 등장하거든요. 이런 여러 가지로 봤을 때 바이샬리는 굉장히 민주적이고, 진보적이고, 풍요로운 도시였다 싶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도솔천의 천인들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저 바이샬리 릿차비족의 모습을 봐라’고 하셨어요. 이어서 그들이 붉은 옷, 푸른 옷, 흰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마치 하늘나라 천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비유가 나오는 걸 보면, 바이샬리가 좀 풍요로운 도시, 진보적인 도시였다 싶어요. 그래서 암라빨리(Amrapali) 같은 분이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또 그분이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또 부처님께 자신의 망고정원도 기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불교의 운영원리, 상가의 운영원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상가를 구성하는 건 사부대중(四部大衆)이지요. 상가를 구성할 때는 수행자라야 됩니다. 신자는 상가의 구성원이 안 되고 수행자가 상가의 구성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네 부류의 수행자, 즉 출가수행자 중에 남녀 수행자, 재가수행자 중에 남녀 수행자, 이렇게 네 부류가 있었는데, 이걸 사부대중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신자와 개념이 다릅니다. 동격으로 쓰이긴 하지만 신자라 그러면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자라는 뜻이고, 수행자라 그러면 담마, 법에 귀의해서 그것을 향해 가는 자입니다. 목표가 복을 받거나 천상에 나는 게 아니고, 해탈과 열반을 추구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한 비구나 비구니만 아라한과를 증득한 게 아니라 재가수행자 중에서도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화하는 과정에서 이 출가수행자는 종교지도자인 브라만과 같이 사제 계급이 되고, 재가수행자는 점점 신자로 바뀌어서 점점 승속이 구분되었어요. 종교화되고 난 뒤에는 상가가 어떻게 구성이 되었느냐 하면, 출가승려만 구성원이 되는 거예요. 상가구성원은 출가오중(出家五衆)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불법승 중 승보에 들어가는 상가구성원은 출가오중입니다. 출가오중이란 비구, 비구니, 즉 20세 이상 성인 남녀수행자와 사미, 사미니, 즉 20세 미만의 남녀수행자, 또 식차마나를 말합니다. 식차마나란 처음 계를 받을 때 성인이라도 바로 비구니계를 안 받고 식차마나계를 받아서 그로부터 2년 후 비구니계를 받는 여자수행자입니다. 왜 이런 시스템이 필요했느냐 하면, 깨달음이라는 건 언제 올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도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고 법에 눈을 뜨면 ‘출가하겠습니다.’ 해서 출가가 허용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출가한 비구니가 아기를 낳는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런 사람도 출가는 할 수 있는데, 정식 출가승려인 비구니는 유보된 상태로 있다가 2년이 지났을 때 정식으로 비구니가 되게 한 제도입니다. 이렇게 해서 출가오중이 승보를 구성하게 됩니다.

또,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자를 규정하는 방법이 달랐어요, 그러니까 출가한 스님들도 점점 종교화되어서 사제 계급이 되고 이러니까 옛날에 브라만교와 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다시 수행자의 기준을 출가 여부로 안 따지고, 발심 여부로 따졌어요. 그러니까 해탈과 열반을 증득해서 부처가 되겠다고 발심했다면 그가 출가 모습이든 재가 모습이든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에 발심을 하면 그게 브라만계급 출신이든 어느 계급 출신이든 따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이름을 ‘출가사문’이라고 안 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수행자를 규정한 거예요. 그게 뭘까요? 부처님의 수행시절 이름이 보디사트바(bodhisattva)잖아요. 그래서 수행자의 이름을 출가사문이 아니라 보살이라고 정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보살 중에 출가보살이 있고, 재가보살이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소심경에 ‘대승은 보살승이다’라고 되어있어요. 보살로 상가를 구성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출가하신 남녀수행자, 즉 비구, 비구니, 재가한 남녀수행자, 우바새, 우바이, 이렇게 해서 상가를 구성한다는 거예요. 혹시 잘못 이해해서 스님들과 가자가 합해서 승단을 구성한다고 아시면 안 돼요. 승단은 아무나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승단의 구성원은 수행자라야 돼요. 수행자가 아닌 사람은 승단의 구성요소가 아니에요. 수행자가 아닌데 어떻게 대중이 공경을 하겠어요? 그런데 형식을 잘못 이해해서 ‘재가신자도 다 승단의 구성원이 아니냐’고 이해하시면 안돼요. 재가의 모습이 아니라 발심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살을 뭐라고 규정해 놨습니까? 보살이란 발심(發心)한 자예요. 어떤 발심을 했느냐면 발보리심(發菩提心)을 한 자입니다. 어떤 보리심을 발했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고 되어있지요. 그래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가 ‘보살’이라고 규정되어있습니다. 선남자 선여인 중 누구라도 해탈과 열반,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겠다고 발심을 한 자가 수행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승에서는 출가한 승려라도 그냥 제사나 지내주는 사제계급이라면 그는 상가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는 게 나아요.

학자들은 이런 상가의 모델이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또는 밧지족의 국가운영원리와 많이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특히 바이샬리를 좋아하셨는지도 모르지요.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 불교대학생으로서 정토회의 정회원이 아닌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정토회는 불교신자와 수행자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교신자로서 정토회에 와도 괜찮은데, 정토회는 원래 설립목적이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행집단, 그러니까 ‘신앙공동체 정토회’가 아니라 ‘수행공동체 정토회’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에서 공부하고 경전반 공부를 해서 ‘나도 수행을 해야 되겠다. 수행자가 되어야겠다.’고 하면 발심행자가 되는 거예요. 발심행자를 정토회에서는 정회원이라고 하거든요. ‘내가 수행자가 되겠다’고 발심하지 않고, 그냥 부처님 믿고 복만 빌고 그러면 그냥 일반 회원, 신자인 거고요.

그리고 한번 수행자가 되겠다고 발심했다면 수행은 의무가 됩니다. 신자일 때는 수행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고, 보시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고, 계율을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이지만 발심을 해서 수행자가 되겠다면 첫째, 계율을 지켜야 돼요. 안 지키고 어기면 반드시 포살(布薩)과 자자(自恣), 즉 참회를 해야 됩니다. 둘째, 매일 수행정진을 해야 됩니다. 정진을 안 하면 자격정지가 됩니다. 일주일에 1번은 꼭 법문도 들어야 해요. 1년 동안 참석률 통계를 내서 많이 빠진 사람은 또 자격정지가 됩니다. 셋째, 수행자는 승단을 유지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일정액의 보시를 정해 놓고 내야 합니다. 그걸 안 내도 자격정지가 됩니다. 신자로서의 자격은 정지시킬 수가 없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이런 시스템은 정토회가 수행자를 지향하는 모임이지, 일반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토회 설립 초기에는 그렇게 엄격히 구분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섞이기도 했어요. ‘신자는 나가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요. 기독교신자도 허용하면서 불교신자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신자도 포용은 하고 있지만 원래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됩니다.

수행자의 모임에서 회의를 할 때는 반드시 상가의 운영원리로 회의를 해야 합니다. 상가의 운영원리란 ‘소수의견의 존중’입니다. 다 평등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100명 중에 1명이 반대한다고 다수결로 결정하고 넘어가면 안 되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되는데, 만장일치제는 아닙니다. 만장일치로 해 버리면 소수의 횡포, 즉 1명이 끝까지 반대해 버리면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잖아요. 그렇다고 3분의 2, 다수결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결정할까요?

만약 10명의 멤버가 모여서 회의를 해 보니까 6명이 찬성하고 4명이 반대했다면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그냥 계속 회의를 해야 해요. 그런데 7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한다면 찬성의견이 3분의 2가 넘잖아요. 이게 절대 과반수예요. 이때는 3명이 소수자가 됩니다. 1차 표결을 해서 3 대 7이 됐다면 3이 소수자가 되니까 사회자가 소수자에게 ‘의견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어봐서 ‘철회하겠다’고 하면 결정이 납니다. 만장일치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장일치제이지요. 그러니까 3명이 ‘다수의견이 그렇다면 우리가 철회하겠습니다.’ 하면 결정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3명이 철회를 안 한다면, 다수라고 다 옳은 게 아니니까, 발언권을 누구한테만 주느냐? 소수자한테만 줍니다. 그래서 자기네 의견을 충분히 얘기하도록 하고 다시 표결에 부칩니다. 그런데 4 대 6이 돼버렸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앞서 논의는 아무 의미가 없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다시 표결을 했는데 8 대 2가 됐다면 두 번째 결정이 났잖아요. 그럼 역시 2가 소수의견이 됩니다. 그럼 또 사회자가 ‘의견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어봐서 ‘철회하겠다’고 하면 두 번째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철회를 안 하겠다고 하면 다시 소수자에게 발언할 기회를 줍니다. 충분히 얘기하도록. 그래서 만약 4 대 6이 됐다면 이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또 8 대 2가 되거나 7 대 3이 됐다면 소수의견이 몇 번이나 연달아 나왔어요? 3번 연달아 나왔지요? 그러면 사회자가 이때 ‘철회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 상가구성원은 ‘철회하겠습니다’라고 답해야 돼요. 이해되세요?”

“(순례객들) 예.”

“그때 ‘아닙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상가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상가구성원이 된다는 건 뭐냐면 자기 의견을 3번까지는 낼 수가 있는데 다수대중이 원하면 자기 의견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수행자의 자격이 있는 거예요. 고집하면 이 사람은 멤버가 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경전에 나오잖아요. 아난존자에게 ‘부처님을 시봉하라’니까 아난존자가 두 번 거절한 뒤에 대중들이 세 번째로 요청을 하니까 그때는 승낙을 했지요. 그래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옳고 그른 걸 너무 따지면 안 되고, 대중의 의사를 존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만장일치예요. 이해되시죠?”

“(순례객들) 예.”

“이런 식으로 소수의견을 존중하면서 상가를 운영합니다. 왜냐? 10명의 멤버가 다 소중하기 때문에, 또 9명이 의견일치 했다고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회의가 항상 조금 길어요. 그래서 외부인들이 정토회 회의하는 걸 보고 ‘공산당이냐?’고 하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 회의는 결정을 목표로 의견을 제시해서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끝내버리는 게 아니다 보니까 좀 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삼의제(三議制), 즉 3번 의견을 듣는 제도예요. 이런 게 바이샬리에서 운영되는 원리를 수용한 거예요. 밧지족 침공과 관련된 일화에서도 나오잖아요.

‘그들이 자주 모이느냐?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기투합하느냐?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자주 모여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건 민주주의이지요. 의논해서 결정하는 건데, 우리는 내 의견이 안 받아들여지면 결정난 뒤에 ‘말은 네 말이 맞지만 기분은 나쁘다’고 생각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결론이 나도 실천력이 동반되지 않습니다. ‘네가 알아서 해라. 그래, 너 잘났다.’ 이러니까요. 그러니까 결론에 대해서는 반드시 의기투합해야 됩니다. 일단 결론이 나면 내 의견, 네 의견이 없이 결론이 바로 구성원 모두의 의견이 되어야 합니다. 삼의제와 같은 거죠.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이 있었던 거예요. 결정에 대한 의기투합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빛이 나지, 그게 안 되면 민주주의는 분열되거나 중우정치(衆愚政治), 즉 포퓰리즘(Populism)이 되기 쉽습니다.

인도는 공화정의 시원을 바이샬리로 보기 때문에 옛날에 인도 국회가 개원할 때는 바이샬리의 사리탑 앞 연못에서 물을 떠가서 개원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거기 투어리스트 방갈로(Tourist Bangalow)도 있었어요. 그만큼 바이샬리는 부처님, 그리고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질문하신 분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지 멋쩍게 웃으며 질문하셨는데 스님은 오히려 풍부한 내용의 답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세 분의 질문자가 남아있었는데 안개가 밀려와 더 진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스님은 내일 시간을 가지도록 하자며 법회를 마무리하였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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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길은 무엇일까?’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5

스님의 하루 2018.02.12 16:00

‘함께 사는 길은 무엇일까?’

2018.1.15. 제29차 인도성지순례 10일째_네팔 카필라성

새벽 2시 30분, 기상을 알리는 송수신기 메시지가 울렸습니다. 한창 잠이 깊이 들 시간이지만 순례객은 벌써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오늘은 탄센으로 일출과 설산을 보러 가는 일정이라 더 일찍 잠이 깬 모양입니다.

스님은 ‘몸이 불편한 사람은 숙소에서 쉬고 계세요’ 라며 안내하였는데 숙소에서 쉬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가는 탄센은 부처님 성지와는 관계가 없지만 그 옛날, 부처님이 태어나신 카필라바스투에 속하는 지역이라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주변 환경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400 대중을 실은 버스가 열을 지어 한참을 달렸습니다. 꼬불꼬불, 절벽 같은 길을 큰 버스가 달리기를 한참, 어둠과 안개가 걷혀 주변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집과 나무와 푸른 잎들이 깊은 골짜기 길에 보였습니다.

“지금 이 곳은 해발 1800미터 높이에 있는 고산지대에요. 우리는 구름보다 위에 있어요. 경치가 참 좋습니다.”

스님은 안개 속을 다니다가 오랜만에 보는 햇빛의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 너른 공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400여 명의 순례객은 몸을 가볍게 하고 스님의 안내에 따라 걸어 올라갔습니다. 층층이계단식으로 집과 가게와 병원과 학교가 들어선 마을 골목길에 동네사람들이 나와 순례대중들을 구경(?)하였습니다. 스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쪽으로 붙어서 열을 지어 가도록 한다.”고 안내하였습니다. 30분 쯤 골목길을 오르고 올라 숲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마을길을 가는 동안 아침 해가 어느새 솟아올라 따뜻해져서 껴입었던 옷을 하나씩 벗어 메고 걸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설산이 보이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집을 지어 버렸네요. 해 뜰 때 잠깐 설산이 보이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보이나요?”

“네. 저기 어스름하게 보여요.”

“업장이 두터운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여요. (대중 웃음) 다 보이죠?”

“네!”

오랜만에 쬐는 햇빛을 기분 좋게 받고 조금 더 숲 속 길을 걸었습니다. 공터가 나오는 곳에서 뒷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겸 노래도 함께 부르며 기분을 내었습니다.

차가 주차해 있는 곳까지 내려와서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고 난 다음 순례 지역인 랑그람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수습하여 8개의 종족이 8분의 1씩 나누어 가졌는데, 그 가운데 부처님의 아버지 종족인 석가족도 8분의 1을 받아갔고, 부처님의 어머니 종족인 꼴리족도 8분의 1을 가져와서 현재의 이 위치에 사리탑을 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른 보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강 가운데 있는 섬입니다. 강물이 양쪽으로 흘러가는 여의도 같은 그런 섬입니다. 여기에 이 사리탑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아쇼카 왕이 사리 일부를 꺼내서 부처님의 8대 성지, 10대 성지에 새로 쌓은 탑에다 나누어 넣었는데, 이 사리탑에서 만큼은 사리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 용왕이 ‘당신이 나보다 사리를 더 잘 모실 수 있으면 가져가라. 그렇지 못한다면, 지금 내가 극진히 모시고 있으니 여기에는 손대지 마라’고 했다고 합니다. ‘용왕’이라는 게 뱀이에요. 아마 당시에 여기 뱀들이 많아서 발굴을 막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이 탑을 발굴하려는 사람들이 다 갑자기 죽고 그래서 여기는 손대면 죽는다는 징크스 같은 게 있어서 누구도 손을 안 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밑 부분만 이렇게 발굴을 했어요. 그래서 대강 이 탑이 어떻게 생겼는지 윤곽을 알기 위해 발굴한 뒤 다시 묻어놨어요. 그러니까 여기는 꼭 무덤 같지요? 탑이 이렇게 허물어져서 그 위에 잔디가 자라고, 나무도 이렇게 크게 자라 있습니다. 인도 벽돌은 오래 못 가고 이렇게 삭아서 도로 흙이 되다 보니까 그 위로 나무가 많이 자랍니다.

어쨌든 여기는 아직 발굴을 안 했기 때문에 사리가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주로 담마(曇摩, dharma), 즉 진리로서 불법을 만나지만 신앙으로 불교를 만나는 사람들은 최고의 공덕으로 사리친견 공덕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불교인, 또 신앙인으로서 이곳을 참배한 공덕은 엄청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리탑에 예불 공양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적지 앞에서부터 순례 대중은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400대중이 여법하게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동네사람도 함부로 떠들거나 하지 못하고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스님의 설명을 들은 뒤 고요하게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였습니다. 모여있는 아이들에게 법사님들이 사탕을 나눠주는 동안 순례 대중은 조용히 차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로히니 강을 차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꼴리족의 데바다하(Devadaha)라는 나라가 있었고요, 서쪽으로는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두 종족은 왕족끼리 서로 결혼하는 결혼동맹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다보니까 때로는 자존심 싸움, 감정 싸움이 많았다고 경전에 기록돼있습니다. 그러다가 두 종족이 전쟁을 할 뻔 한 적이 있어요. 어느 해 흉년이 들어서 가뭄이 몹시 심하자 로히니 강의 물이 아주 적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강물을 양쪽으로 나누어서 대니까 이쪽도, 저쪽도 다 부족했어요.

그래서 꼴리족이 먼저 석가족에게 ‘이렇게 물을 나누어서 대면 너희도 농사도 망하고, 우리 농사도 망한다. 어차피 망할 바에야 너희가 양보해라. 그럼 우리라도 농사가 잘 될 것 아니냐?’고 제안을 했더니 석가족이 ‘말 잘 했다. 너희가 양보해라. 우리가 잘 되어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해서 물을 가지고 시비를 하다가 나중에는 주먹다짐이 오갔고, 더 나중에는 패를 형성해서 서로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패싸움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져서 피가 나고 이러니까 자기 나라 군대에 가서 ‘석가족이 우리 물을 빼앗아가면서 우리를 때려가지고 이렇게 피가 났다’고 하소연을 했어요. 석가족도 ‘꼴리족이 우리 물을 빼앗아갔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농민들의 물싸움이었던 게 패싸움이 되고 결국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양쪽에서 군대를 동원해서 ‘이번에는 용서가 없다.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요즘 우리 남북관계랑 비슷하지요?

부처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이 어리석은 자들이 자칫 하다가는 전쟁을 하겠구나. 내가 가지 않으면 틀림없이 전쟁이 날 것이다. 내가 가봐야 되겠다’고 하시며 이 강가로 오셔서 강 가운데에 허공에 뜨시는 신통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중립적이었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처님이 오신 줄을 다 알고 부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들, 피가 소중하오? 물이 소중하오?’
‘그야 말할 게 뭐있습니까? 피가 소중하지요. 어떻게 하찮은 물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피를 강물처럼 흘리려고 하시오?’

하시니까 그들이 전부 감정에 북받쳐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아이고,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멈춰지고 그 전쟁을 할 힘을 수로를 개설하는데 씀으로써 그해 가뭄을 잘 이겨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남북관계와 똑같지요? 우리도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다가 지금은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다.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하고 있잖아요.

경전에 로히니 강물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까, 직접 강가에 차를 세우고 로히니 강을 보면서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하차했다가 다시 승차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차에 탑승한 채 강가에 차를 세우고 독송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1호차 기사님은 로히니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세워주세요. 차는 강을 천천히 지나 가주시기 바랍니다. 자, 경전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순례지역은 카필라성이었습니다. 원래는 어제 일정으로 준비가 되었는데 어제 국경 통과 수속이 예상치 못하게 길어지는 바람에 오늘 순례하기로 하였습니다.

서문을 통해서 들어갔는데 태자 궁터에 다른 일행이 있어서 동문자리까지 갔습니다. 동문자리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어린 싯다르타 태자가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죽어야 할까?’라고 의문을 품는 대목이 있어요. 우리는 보통 하나가 살고 하나가 죽는 건 너무 당연하고,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며 그런 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학문이라는 건데, 부처님께서는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어야 하는 이 모순을 보시고 ‘함께 사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품으셨습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법을 깨달으시고 나서야 그 의문을 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의문을 품고 세상을 보셨을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순투성이였습니다. 그런 모순에 대해 하나, 하나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참구하는 것, 이것이 그분의 젊은 시절 삶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주어진 삶을 그저 살고, 그런 중에 쾌락을 만끽하는데 몰두하지만 붓다는 오히려 모순에 더 큰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 왕이 되고자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왕위를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나셨고, 좋은 음식을 버리고 거친 음식을 드셨으며 좋은 옷을 버리고 누더기를 걸치시고, 좋은 집을 버리고 나무 밑에서 주무셨습니다.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서 좋은 옷, 좋은 음식, 높은 지위를 구하잖아요. 또 그런 것이 얻어지면 ‘부처님의 가피’라 그러고요. 굉장한 모순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일생을 알고, 부처님의 젊은 시절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면, 우리가 복을 구하는 건 도무지 불교와 어울리지도 않고, 불교에 합당하지도 않다는 걸 알 텐데, 이런 모순이 버젓이 우리 불교 안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이 깨달았다, 부처 됐다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분이 왜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에 그렇게 큰 혁명적 변화를 이루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주류가 브라만이었고, 거기에 반대해서 일어난 게 비주류인 사문으로 브라만이 추구한 게 쾌락주의라면 사문류가 추구한 건 고행주의인데, 그 쾌락과 고행을 떠난 제3의 길, 이것이 붓다가 가셨던 길입니다.

이것이 인도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인도를 넘어서 동아시아지역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의 시대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이때에 다시 새 희망으로써,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불교가 다시 조명되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정확히 봐야겠습니다.

특히 순례객들 중에는 청년들도 많은데, 우리는 그분의 젊은 시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왕궁을 추구하는데, 어째서 그분은 왕궁을 버리셨던 것일까요? 왕궁을 버리고 그런 고행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셨던 것일까요? 이런 문제의식들이 순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다가오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도 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이만하고, 경전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까 경전독송을 해 보겠습니다.”

북문 밖에 있는 정반왕의 탑▲ 북문 밖에 있는 정반왕의 탑

이 문으로 나서서 부처님은 삶의 현실을 보았구나. 이 문으로 나서서 삶의 현실을 보고 많이 아파했구나.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구나. 상세하게 기록된 경전을 읽어 내려가며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싯다르타 태자의 고민이 그대로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 하였습니다.

경전을 읽어 내려가며 때때로 스님은 젖은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훔쳐내었습니다. 카필라성 동문자리에서 스님도 싯다르타 태자의 고민을 함께 하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동문자리에서 명상으로 마무리 한 후, 북문을 거쳐 들판을 가로질러 주차장까지 가기로 하였습니다. 유채꽃이 만발하고 달 나무가 그득한 들판을 걸어오며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에서 싯다르타 태자는 아름다운 한 면만 보지 않고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삶의 양면을 꿰뚫어 보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이 먼발치 앞서 걸으며 ‘동구밖 논두렁길’ 하면서 동요를 흥얼거렸습니다. 순례대중들도 노래를 받아 ‘동구 밖 논두렁 길 유채꽃이 활짝 폈네~’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차에 오른 대중들에게 스님은

“어제 우리가 못 간 일정을 오늘 소화하려면 오늘은 탄센 일정을 취소해야한다는 의견을 스텝 측에서 강력하게 냈는데 그래도 좋았지요? 덕분에 좀 바쁘게 일정을 진행해야 합니다. 쿠단 유적지까지 보고 가려니까 순례대중은 서둘러주세요.”

양해 겸, 이해를 도와 스님은 다음 일정을 안내 하였습니다.

서둘러 달려온다고 달려갔지만 쿠단 유적지에 도착했을 즈음,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으로 가셔서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창건케 하시고, 수다타 장자의 초청을 받고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에 가셔서 기원정사를 창건케 하시고 그러니까, 요즘에 비유하자면 북경과 뉴욕에 가셨는데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교화된 거잖아요. 그래서 한 마디로 유명해지셨어요. 그 소문이 고향 카필라성에까지 들렸어요. ‘석가족 출신의 왕자가 도를 이루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됐다’고요. 그런데도 부처님은 고향을 찾질 않는 거예요. 정반왕은 아들이 보고 싶었거든요. 아들이 출가해서 마음 상했는데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니까 자랑스럽기도 하고 해서 빨리 아들을 봐야겠는데 아들이 고향에 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가서 부처님을 고향으로 좀 모셔오라’고 전갈을 보냈어요. 그런데 그렇게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전달하러 가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아서 출가한 스님이 되니 안 돌아간 거죠. 그러니까 꿈속에 어머니 심부름 갔다가 꿈 깨면 심부름 가요, 안 가요?”

“(순례객들) 안 가요.”

“예, 그와 같은 거예요. 사위성은 여기서 가깝거든요.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오신 게 성도 후 3년이었으니까 몇 년 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자 왕이 상심이 컸어요. 그때 우다이라는 대신이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이고, 가지 마라. 너도 갔다가 안 돌아오면 어떡하느냐.’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수행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까 걱정 마시고 저를 보내주십시오.’
‘그럼 다녀오라.’

우다이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어요. 우다이는 여자들한테 인기 만점인 플레이보이였거든요.(모두 웃음) 그래서 스스로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 거예요. 어쨌든 우다이가 기원정사에 이르렀는데, 천 명이 넘는 비구가 산다는 숲속이 조용한 거예요. 사람소리 하나 안 들려서 마치 사람이 없는 숲 같았어요. 그래서 약간 마음이 조심스러웠던 거죠.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천 명이 부처님을 둘러앉아 조용히 설법을 듣고 있는 거예요. 그 분위기에 자기도 동화되어서 뒤에서 듣고 있다가 깨달아버렸어요. 그래서 출가를 하고 스님이 됐어요.

쿠단 벽돌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 쿠단 벽돌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

그랬어도 우다이는 정반왕과의 약속은 지켰나 봐요. 부처님께 ‘정반왕께서 부처님을 오래도록 기다리고 계신다’고 전했더니 부처님께서 ‘고향으로 가겠다’고 승낙을 하셨어요. 그러니 우다이는 비구가 된 몸으로 먼저 카필라성으로 돌아와서 왕께 ‘앞으로 칠일 후에 부처님께서 오시기로 했습니다’ 하고 전했어요. 그래서 왕은 너무너무 기뻤어요. 아들이 집 떠난지 12년이 됐잖아요. 그때가 성도 후 6년째이니까요. 그래서 온갖 준비를 해 놓고도 카필라성에서 기다리지 못해서 성 밖에 나와서 6, 7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내려가서 거기다가 천막을 치고 태자를 맞을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그리로 오지 않으시고 가난한 동네에 가서 걸식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은 속이 상한 거예요. ‘내 아들인 태자가 어떻게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빌어먹는단 말인가?’ 그렇게 이미 준비한 공양은 때를 놓치고, 걸식을 마친 부처님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부인과 아들을 오래 만에 만난 곳이 지금 우리가 있는 쿠단(Kudan)입니다. 후대에 아쇼카 왕이 거기에 기념탑을 세운 것입니다. 오랜만에 정반왕이 부처님을 만났을 때 대뜸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놨는데, 어찌하여 여기 와서 먹지 않고 길거리에서 얻어먹었단 말이냐?’
이렇게 먹는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걸식은 우리 가문의 전통입니다.’
‘우리 석가족 가문에 걸식의 전통은 없다.’
‘출가사문의 전통입니다.’

즉 부처님은 ‘나는 석가족이다’ 하는 걸 이미 다 떠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출가사문으로서 자신의 본분만을 지키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부처님은 카필라성으로 돌아오셨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많은 카필라성의 석가족이 출가를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출가가 유행이다시피 했어요.”

“그렇게 가족이 만났을 때 아버지 정반왕도 부처님께 가서 인사하고, 어머니도 인사를 할 수 있고, 아들도 인사를 할 수 있는데, 출가수행자가 된 부처님과 인사하기가 제일 껄끄러운 사람이 누구예요? 부인이지요. 야소다라공주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진짜 얄미운 사람이겠지요. 숫제 죽어버렸다면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서 태후가 되어 잘 살든지, 아니면 남편이 왕이 됐다면 자기가 왕후가 되든지 했을 텐데, 남편이 출가해서 고행하고 있으니까 부인이 되어서 잘 먹고 살 수도 없었을 것 아니에요? 재혼도 할 수없고요. 그러니까 야소다라공주는 억지춘향이 된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이 왔다고 다가가서 인사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는 쿠탄에는 정반왕의 탑, 마하파자파티의 탑, 라훌라의 탑은 있는데 야소다라의 탑은 없어요.

어둠 속에서 차분히 명상을 하는 순례 대중과 스님▲ 어둠 속에서 차분히 명상을 하는 순례 대중과 스님

부처님이 출가하실 때 아들 라훌라를 낳았으니까 그 아들이 이제 12살쯤 됐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라훌라는 아버지를 처음 보니까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어요. 그러니 야소다라 공주가 아들 라훌라한테 말했어요. ‘저기 계시는 저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고, 상속물을 달라고 해라’고요. 말에 뼈가 있지요. 출가수행자는 거지형편이니까 상속물이랄 게 없잖아요. 야소다라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야속해서 좀 심술궂게 군 거예요. 라훌라는 어머니가 시킨 대로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 저한테 상속물을 주십시오.’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옆에 있던 사리푸트라에게 ‘이 아이를 출가시켜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출가’라는 상속물을 준 거죠.(모두 웃음) 야소다라가 가만히 있었다면 나중에 라훌라가 왕이 되어서 자기는 태후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지요. 또 정반왕은 부처님이 돌아와서도 왕을 안 한다고 하면 손자를 왕위에 앉히려고 했는데 손자까지 출가시켜버리니까 상심이 컸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미성년자를 출가시킬 때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얻도록 해 주십시오.’ 하니까 부처님께서 합당하다며 승낙하셨어요. 그러면 라훌라의 출가는 ‘미성년자는 부모의 승낙을 받아야 출가할 수 있다’는 기준에도 합당 안 합니까?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인 부처님께서 결정하신 거니까요. 그래서 라훌라는 최초의 사미가 됐습니다.

그래서 성년은 출가를 스스로 결정하면 되지만, 미성년자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 즉 ‘동의서’가 첨부되어야 출가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미성년자가 출가하면 ‘사미’라 그러고 성년이 출가하면 ‘비구’라 하는 데, 사미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미는 예비승려죠. 그러다가 성년이 되면 정식 승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처음 출가해서 들어오면 예비승려라고 하고, 예비승려가 4년 과정의 강원을 거쳐서 드디어 강원을 졸업하면 비구계를 주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년이면 누구나 다 바로 비구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당시 비구와 사미의 차이는 성년과 미성년의 차이 밖에 없었어요.”

어두워진 탑 앞에서 대중은 손전등을 켜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언제 부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 다시 올까요. 지금 이 순간,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느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부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고 가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400 대중을 싣고 온 차량도 불을 밝혀 순례대중을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꽉 채워 잘 살았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글 문수팀
사진 배성한 문수팀
녹취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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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탄생 이야기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4

스님의 하루 2018.02.11 16:00

부처님의 탄생 이야기

2018.1.14 제29차 인도성지순례 9일째_룸비니

새벽 2시 30분. 한창 잠에 취해 있을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날이어서 좀 서둘러 가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아 1, 4호차는 새벽3시, 그 다음은 3시 20분, 그 다음은 3시 40분으로 2대씩 20분간의 시간차를 두고 출발합니다.

스님은 가장 먼저 인도 국경을 통과해 네팔로 들어가 순례지인 룸비니에서 순례객을 맞이하는 것이 시간 지체 없이 일정을 진행할 수 있겠다는 스텝회의에서 제안으로 가장 먼저 국경을 통과하는 차량에 올랐습니다.

새벽 3시, 예정대로 차는 국경으로 출발하였고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차 안에서 올렸습니다. 안개길을 가르며 열심히 차가 달렸습니다. 4시간 뒤, 인도-네팔 국경인 소나울리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직원이 아직 출근 전이다, 담당 직원이 출근하려면 기다려야 한다, 한 사람씩 통과해야한다, 아니다 단체로도 가능하다 등 갖가지 이유들이 있은 다음, 한 사람씩 직접 여권을 들고 가야 가능한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4호차 먼저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여권을 들고 가서 스탬프를 받고 다시 네팔 출입국 사무소로 가서 한 사람씩 과정이 마쳐지기를 기다렸습니다.

11시쯤 4호차 인원이 네팔 입국 수속을 마치게 되어 바로 룸비니로 출발하였습니다.

룸비니에 도착하여 주차장에서 점심 공양을 하였습니다. 어차피 다른 차량이 룸비니에 도착해야 하므로 여유가 있겠다 싶어 4호차는 명상, 절 등 정진 시간을 가지고 이어 도착한 1호차와 함께 사진촬영 시간도 가졌습니다. 룸비니에 도착해 스님은 10대의 차량이 모두 도착하였을 때를 준비해 400여명이 함께 예불 공양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봐두고 1, 4호 차량은 맨 안쪽에 자리를 깔고 준비하였습니다.



▲ 스님은 10개 차량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 두 개 차량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다음 팀이 도착하지 않자, 1, 4호차는 예불을 올리고 유적 설명을 충분히 한 후, 숙소로 들어가서 정비를 하도록 보냈습니다.

1시간 쯤 뒤, 두 개 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다시 예불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다시 룸비니에 도착한 팀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다시 룸비니에 도착한 팀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다시 1시간 쯤 뒤, 한 개 차량이 도착하였고 이어 다시 한 개 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두 개 차량을 묶어 함께 예불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오늘은 룸비니를 거쳐 카필라바스투, 쿠단까지 참배를 하는 일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적관리 측에 문의해 보니, 마야데비 기념 관 안은 7시, 외부 유적은 8시까지 개방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한 개 차량씩,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미 6시를 넘어가고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상황이었습니다.

밝았을 때 도착한 팀들은 경전 독송도 하였습니다▲ 밝았을 때 도착한 팀들은 경전 독송도 하였습니다

6시 20분, 2호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마야데비 관이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오니 먼저 마야데비 관을 둘러보고 와서 바로 예불과 유적 설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6시 40분, 20분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이미 해가 지고 주변이 깜깜해져 사진으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10호 차량이 6시 46분, 뛰어서 도착하였습니다. 얼른 마야데비 관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나와 대열을 정비하였습니다. 이어 스님은 잠깐 명상을 한 뒤,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여기가 룸비니 동산이에요.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정황에 대해 경전에는 굉장히 신비스럽게 기록이 돼있습니다.

마야데비 관 왼쪽에 400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두었지만 400여명이 다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야데비 관 왼쪽에 400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두었지만 400여명이 다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출생과 관계되는 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인 믿음,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역사적 사실’이란 실제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모습이고, ‘종교적인 믿음’이란 부처님의 전생 얘기와 관련된 거예요.

부처님은 사실 인도에서 태어나셨지만 좀 비인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도인들은 믿음을 굉장히 중시해서 앞뒤 안 맞는 얘기도 많이 하는데, 부처님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잖아요. 그러나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하는 사람은 역시 인도인이니까 인도식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지요. 인도인들이 생각하기에 어떻게 사람이 6년 수행한다고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지,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도인들은 과거생으로부터 한량없는 수행공덕을 쌓았으니까 이 세상에 잠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생에 대한 많은 얘기가 부처님 사후에 생겨난 거예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그런 보살행을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중에 있는 재밌는, 짧은 옛날 얘기를 차용해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래서 이 ‘전생’ 스토리가 서로 연결되어있는 게 아니라 하나씩 다 독립되어있어요. 현재 547개가 남아있는데, 그 547개를 묶어놓은 경전을 빨리 어로 ‘자타카(JATAKA)’라 그러고, 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본생담’, 즉 부처님의 전생 얘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 출생의 역사적 사실은 뭐냐 하면, 부처님의 아버지가 정반왕인데, 아버지의 종족은 석가족, 인도말로 샤끼족이에요. 그러고 아버지의 나라이름은 카필라 바스투(Kapilavastu)예요. 근데 어머니의 종족은 꼴리족이에요. 나라이름은 데바다하(Devadaha)이고요. 꼴리족 여자는 석가족 남자한테 시집가고, 석가족 여자는 꼴리족 남자한테 시집가는 이런 결혼동맹관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뒤쪽이 서쪽인데, 서쪽으로 28킬로미터를 가면 카필라 성이 나오고, 앞이 동쪽인데, 동쪽으로 28킬로미터 가면 데바다하, 천비성(天臂城)이 나와요. 그러니까 여기가 그 중간쯤 위치예요. 땅은 카필라 성 땅이고요.

스님은 모임 장소를 아쇼카 석주 앞으로 옮기고 명상하며 대중을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모임 장소를 아쇼카 석주 앞으로 옮기고 명상하며 대중을 기다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하마야 데비((Mahamaya devi) 사이에서 태어나셨는데, 인도말로 ‘데비’란 부인이란 뜻이에요. 인도 당시에는 보통 15, 6세에 결혼해서 18, 9세에 첫 애기를 낳았는데, 마하마야 부인은 40이 되도록 애기가 없었어요. 거의 애기가 없을 확률이 높았는데, 40이 넘어 애기가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애기를 낳게 되기를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날은 축제날이라서 보시도 많이 베풀고, 몸도 정갈히 했어요. 그러다가 살포시 잠이 들었는데,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서 나와 보니까 저기서 빛이 반짝반짝 하며 다가오는 거예요. 뭔가 싶어서 이렇게 보니까 상아 6개짜리의 흰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 하는 사이에 코끼리가 마하마야 부인의 오른쪽 갈비뼈를 헤집고 확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깨보니 꿈이었어요. 태몽이었지요. 코끼리 태몽을 꾸고 부처님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안개가 밀려왔습니다. 안개 속에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안개가 밀려왔습니다. 안개 속에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547가지 본생담 가운데에는 원숭이 왕으로 태어났을 때, 코끼리 왕으로 태어났을 때, 수행자로 태어났을 때 등 온갖 얘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게, 연등부처님이 계시던 시절에 ‘선혜’라고 불리는 한 수행자가 부처님께 발심을 해서 출가하는 얘기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너는 미래세에 부처를 이루리라. 너의 이름을 석가모니불이라 하리라’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게 전생 얘기 중에 첫 번째 얘기라고 보고 있고, 547개 중에 마지막은 뭐냐 하면, 꼭 순서가 있는 건 아닌데, 수많은 공덕을 쌓아서 욕계의 네 번째 천상, 도솔천의 천주가 됐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하나님 중에 하나님’이라는 건데, 어쨌든 도솔천의 천주 이름은 ‘호명보살’이에요. 거기 있을 때 세상에서 ‘부처가 출현할 시기다.’ 하니까 천인들이 ‘부처가 출현한다면 그건 호명보살밖에 없다’ 해서 ‘호명보살이여, 부처로 출현하소서.’ 이런 천인들의 요청이 있었어요. 그래서 호명보살이 세상을 쫘악 보면서 ‘어떤 어머니의 몸을 빌릴까?’ 하다가 ‘마하마야 데비의 몸을 빌려야 되겠다’며 코끼리로 변해서 갈비뼈를 뚫고 들어가는 전생 얘기가 거기 나오고, 현생 얘기는 태몽을 꾸는 걸로 나오고, 이렇게 해서 이게 연결이 돼있습니다.

어두워지자 보리수 나무의 조명이 더 밝게 빛났습니다▲ 어두워지자 보리수 나무의 조명이 더 밝게 빛났습니다

어쨌든 마하마야 부인은 애기 낳을 때가 되자 당시 풍속에 따라 친정으로 가서 애기를 낳으려고 아침 일찍 동이 트자마자 데바다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 중간쯤인 이곳 룸비니에 정오쯤에 이르렀는데, 그때 아쇼카나무에 아주 아름답게 꽃이 피어있어서 마하마야 부인은 ‘좀 쉬었다 가자’며 가마에서 내려서 그 꽃구경을 하려고 오른손을 들어서 꽃가지를 잡으려는 순간에 산기를 느끼고 애기를 낳았다는 거예요. 그때 남편이 있었으면 남편 바짓가랑이를 잡았을 텐데 남편이 없어서 나뭇가지를 잡고 용을 썼다고 이해하셔도 되지요. 어쨌든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셨고, 길에서 도를 이루셨고, 길에서 설법하셨고,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도(道), 즉 길과 인연이 있었던 거예요.(모두 웃음)

그런데 태어나실 때의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있지요.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천왕들이 황금그물로 받았고, 용왕이 더운 물, 찬물로 몸을 씻기자 몸이 황금색으로 빛났고, 그러자 아기는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었고,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고, 또 한 손은 하늘,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했다는 게 태어나실 때의 정황이지요.

‘부처님처럼 위대한 분이 어떻게 여자의 사타구니로 태어날 수 있겠느냐? 당연히 옆구리로 태어나지.’ 이런 게 신앙적 믿음 아니겠어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거랑 같지요. 그런데 믿음으로 볼 때는 그렇게 말하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는, 신의 입에서는 브라만이라는 계급이 창조됐고, 신의 옆구리에서 왕족이 창조됐고, 신의 배에서 바이샤가 창조됐고, 신의 발바닥에서 노예계급 수드라가 창조됐다는 내용과 비교해 보면 부처님께서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건 왕족 출신임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 했는데, 여섯 발자국은 육도윤회를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넘어서 해탈했다는 걸 상징합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룸비니 유적지 안에는 우리들 일행 밖에 없었습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룸비니 유적지 안에는 우리들 일행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의 일생을 보면, 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셨잖아요.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천하는 인간의 세계를 말해요. 그러니까 ‘신들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존귀한 존재다’ 하는 말은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다’는 말과 같고,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도 같은 말이에요. 다 ‘신들과 사람을 통틀어서 부처님과 비교할 분이 없다. 가장 존귀한 분이다’라는 얘기예요. 이건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상징이지요. 이걸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표현하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일성으로, 부처님의 삶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마야 부인은 친정에 갈 필요가 없어서 도로 카필라 성으로 돌아갔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첫 애기를 너무 나이 들어서 낳으면 좀 위험합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노산이라 돌아가셨다고 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보면 성인을 낳았기 때문에 한 알의 밀알이 썩듯이 진을 다 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마야 부인이 40이었으니까 둘째 동생은 서른일곱 살쯤이고, 셋째는 서른다섯 살쯤이고, 이럴 거 아니에요? 옛날엔 10명씩 낳았으니까, 부인의 막내동생이 아직 시집을 안 간 거예요. 시집을 안 갔다는 건 20살 이하라는 걸 뜻하지요. 그래서 언니가 죽은 후 그 막내 동생인 마하파제파티가 정반왕과 결혼을 한 거예요. 우리에게는 좀 이상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매가 한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라시대에도 그랬어요. 김춘추는 김유신의 두 누이동생과 모두 결혼을 했잖아요.

새벽 4시에 출발해 네팔 입국 절차를 거치는데 하루 종일을 보내느라 지친 대중들에게 스님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맞이하였습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해 네팔 입국 절차를 거치는데 하루 종일을 보내느라 지친 대중들에게 스님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커서 새 어머니를 맞으면 영향을 받지만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됐고, 또 이모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말하는 계모의 차별 같은 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경전에도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양모로서 부처님을 참 잘 키운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애기가 자라니까 이름을 지어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모든 것이 원만성취 하여지이다’란 뜻으로 살바다라 싯다르타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시타 선인(仙人)을 불러서 관상을 보게 했더니 선인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길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리라. 그런데 부처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은데, 나는 이미 120살이라서 그 미묘한 법문을 듣지 못할 것이 아쉬워서 운다’면서 자기 시자(侍子)에게 ‘너는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면 바로 가서 제자가 돼라’고 했답니다.

그러면 이런 얘기는 왜 나올까요? 당시 인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였어요.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에 16대국이 있고, 그 다음에 2대 대국이 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세계에는 200개의 나라가 있고, G20개의 중강국이 있고, 그 다음에 G2, 옛날에는 미.소, 요즘에는 미.중이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합병해 가는 상태예요. 그래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부처님 열반 200년 후에는 아쇼카 왕이 전 인도 대륙을 하나로 통일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라가 나라를 침공해서 합병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고, 형제 100명을 죽이고 왕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렇게 세상이 혼란스러우니까 백성들의 염원은 ‘세상의 평화’였어요. 위대한 왕이 나와서 세상을 하나로 평화롭게 한다고 해서 전륜성왕이라 그럽니다.

저녁 6시 48분, 마지막으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다섯 번째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저녁 6시 48분, 마지막으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다섯 번째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중국의 백가쟁명, 제자백가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는데, 주류인 전통사상가들이 만든 브라만이고 신흥사상가 들이 사문입니다. 사문은 비주류이죠. 부처님은 비주류에 합류해서 수행을 시작하셨잖아요? 그런데 이 수많은 사상가들의 주장이 서로 달랐어요. 경전에만 보아도 육사외도(六師外道)가 있잖아요. 경전에 보면 62 견해가 있고 360 견해가 있거든요. 바로 이럴 때 이 사상을 통일할, 일체를 깨달은 이인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전륜성왕의 길을 간 게 아니라 붓다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고행할 때도 마왕이 항상 부처님께 뭐라며 유혹했습니까? ‘너 이 고행 안 하면 전륜성왕의 길을 갈 수 있는데, 왜 이 고생을 하느냐’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당시 세속에서는 ‘전륜성왕’, 사상계에서는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붓다’로서 응답을 하셨다고 볼 수 있어요. 비록 부모는 전륜성왕의 길을 원했지만요.

오늘 우리가 늦어도 여기에 낮 1시 반까지는 와서, 카필라 성으로 가서 부처님의 어린 시절 얘기도 하고, 동문에 가서 ‘출가의 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전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올 때마다 새로운 일이 생긴다고 그랬지요?

성지순례 25회 만에 처음 생긴 일이에요. 처음부터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4, 5시간을 잡아놨거든요. 그런데 실제 몇 시간이 걸렸습니까? 아침 8시 반, 9시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엄청난 시간이 초과되었어요. 그제는 또 우리 실무자가 절에 방 점거하러 갔다가 개한테 물리는 일도 있었어요.(모두 웃음) 그것도 25회 만에 처음 생긴 일이에요. 매회 이렇게 항상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 생깁니다. 기차가 연착하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 전에 480명이 왔을 때 보다도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두운 룸비니 유적지에서 마야데비 관과 아쇼카 석주의 조명이 마지막 도착한 성지순례팀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어두운 룸비니 유적지에서 마야데비 관과 아쇼카 석주의 조명이 마지막 도착한 성지순례팀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일정에 있던 가야산을 못간 일이 있어서 이튿날 보충했지요?”(모두 웃음)

“(순례객들) 예.”

“그래서 내일 카필라 성을 보아야 하니 설산을 포기할까요?”

“(순례객들) 설산도 봐요.”

“욕심도 많네요.(모두 웃음) 그럼 자정에 일어나야 해요.(모두 웃음) 하기야 가면서 자니까요. 자,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래도 예불 공양은 올리고 가야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부처님의 탄생성지 룸비니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경전독송은 내일 하겠습니다. 지금 밤이라 글씨가 안 보이니까요.”

“(순례객들) 예.”

스님의 밝고 힘찬 목소리가 듣는 순례객들의 지친 마음을 밝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 태어나신 룸비니에서 스님은 다섯 번의 예불과 4번의 경전 독송을 하였습니다. 지루하고 지칠만 한데 시간이 늦어질수록 스님 목소리가 밝아지고 힘찼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참 수고 많았어요.”하는 그 말.

스님은 마지막 10호차 청년들과 함께 어두워진 아쇼카 석주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얼굴이 안 보이는 걸 감안해서 아쇼카 석주 조명이 얼굴 빛이 향하도록 서서 함박 웃음을 웃으며 사진을 찍었지요.

아쇼카 석주의 조명으로 마지막 도착한 10호차 청년들과 스님은 함박웃음을 웃으며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쇼카 석주의 조명으로 마지막 도착한 10호차 청년들과 스님은 함박웃음을 웃으며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일정은 오직 룸비니만을 위해 있었던 일정이었습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정이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글 문수팀
녹취 정란희
사진 배성하, 문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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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3

스님의 하루 2018.02.10 16:00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

2018.1.13. 인도성지순례 8일째_쿠시나가르

연일 계속되는 안개에 이제는 아침에 단단히 옷을 챙겨 입게 됩니다. 4시 20분, 송수신기의 아침인사가 시작되기 전에 스님은 먼저 일어나 숙소에서 아침 예불과 기도를 올렸습니다.

4시 50분이 되자, 차량별로 인원 점검이 시작되었습니다. 송수신기에서 1호차부터 차례로 인원점검 내용을 알렸습니다. 각 차의 차장님들이 하루하루 일과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송수신기 사용이 영 어색해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던 4호차 차장님도 이제는 여러 번 연습이 되어 “4호차, 34명 전원탑승!” 하는 알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5시, 1, 4호차가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먼저 하였습니다. 1시간 동안 기도가 끝나자 휴식 안내가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출발 준비하느라 잠이 올만도 한데,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달려가는 차가 걱정되어서 몇몇 분은 잠을 청하지도 못 하는가 봅니다. 특유의 경적 소리를 내며 달리던 차가 한 시간 반가량 뒤, 멈춰 세운 곳은 오늘의 첫 순례지, ‘케사리아 탑’ 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탑, 케사리아 탑은 안개에 가려 그 위용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도착한 4호 차량의 순례객들과 함께 한 줄로 서서 정근을 하고 조용히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뒤 이어 도착한 순례객들이 먼저 돌고 있는 탑돌이 행렬을 이어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였습니다.


420여명의 순례객이 한 줄, 한 팔 간격쯤으로 돌고 돌고 돌아도 그 둘레를 다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둘레가 424미터, 현재 높이는 16미터, 원래 돔의 높이를 51미터 정도라고 추정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시나라로 마지막 여정을 하려는 붓다를 리차비족들은 계속 뒤 따라갔습니다. 존경하는 붓다를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었지요. 붓다는 그들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붓다가 칸타키 강을 건너 간 후에도 그들은 강 언덕에 서서 붓다를 배웅하자 부처님은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물에 띄워 강 저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이 스투파는 붓다께서 발우를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순례객 전체는 탑을 바라보며 예불을 올린 뒤 조용히 돌아나왔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음 순례지인 쿠시나가르 ‘춘다의 공양터’로 향했습니다. 케사리아 탑을 지난 지 20여분 쯤 뒤, 칸타키 강을 지나 갔습니다.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하기 전, “동네가 험하니 앞 사람과 간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주의사항이 안내가 되었습니다. 마을을 통과하는 좁은 골목으로 걸어갔습니다. 400여 명의 인원은 길게 줄을 늘여서 조용히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현재 동네 사람들의 신성구역으로 가꿔지고 있는 힌두 사원 구역을 밟지 않도록 하되, 순례객들이 자리를 펴고 예불과 경전 독송을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황금색 가사를 수한 순례객 400여명이 ‘춘다의 공양터’를 가득 메우자 동네 사람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몰려왔습니다.

예전에 공양물을 차렸다가 예불도중에 아이들이 공양물을 덮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공양물을 따로 차리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파바마을에 있는 춘다의 공양터입니다. 이렇게 큰 탑을 세워서 춘다의 공양을 찬탄한 겁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께서는 인도전역을 유행하시다가 성도 후 45년, 세상나이로 80세 되던 해에 왕사성 영축산에서 출발하셔서 죽림정사를 거치고, 암라티카 동산을 거치고, 날란다를 거치고, 파탈리푸트라를 거쳐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 땅으로 들어오셔서는 암나빨리의 공양을 받으시고 바이샬리에서 그해 우안거를 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우안거 기간에 큰 병을 앓으셨고, 낡은 수레가 삐그덕거리며 겨우 가듯이 늙은 육신을 이끄시며 쿠시나가라를 향해 한 발, 한 발 북상하셨습니다. 바이샬리에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하시고,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자등명(自燈明),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법등명(法燈明)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중을 끌고 바이샬리를 떠나서 오늘 우리가 건너온 칸타키 강을 건너셨어요. 칸타키강을 건널 때 바이샬리 사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강변에서 떠나지 않자 부처님께서는 증표로써 가지고 계시던 발우를 물에 띄워 강 저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처님이 건너셨던 것보다 조금 더 상류 쪽으로 해서 다리를 건너 강을 건넜습니다.

이후 부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거쳐서 이곳에 도달하셨습니다. 이곳의 지금 이름은 파질나가르(Fazilnagar)인데 당시엔 파바마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파바마을에 이르러 망고나무 숲에 앉아계시는데 그 망고나무가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소유였습니다. ‘대장장이의 아들’이란 천민이라는 얘기입니다. 춘다는 부처님께서 자기 망고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위해 법을 설하셨고, 춘다는 그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그 기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부처님께 ‘내일 아침에 부처님과 승중들을 다 식사초대하겠나이다.’ 이렇게 공양초대를 했더니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습니다. 춘다가 떠나고 아난다가 걱정스럽게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춘다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특히 올해는 흉년이 들어서 부자도 이 승중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못하는데 어찌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공양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아난다여, 너무 걱정하지 마라. 춘다는 능히 할 것이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때가 되었사옵니다’ 하고 알리니 부처님과 제자들은 발우를 들고 춘다의 집으로 갔는데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져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다 놀랐습니다. 부처님부터 시작해서 발우에 음식을 담는데 그 중에 한 음식, 스카라 맛다바(sukara maddava)라는 음식을 부처님의 발우에 담을 때 부처님께서 보시고

‘춘다여, 이 음식은 아무도 소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 대중들에게는 주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 음식은 누구도 소화시킬 수 없으니 저 흙을 파고 묻어라.’

‘알겠습니다.’

공양이 끝난 후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격려하는 설법을 하시고는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배가 몹시 아프구나. 어서 길을 떠나자’라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몹시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대중들이 걱정했습니다. 얼마 가자 부처님께서 ‘좀 쉬었다가 가자. 배가 너무 아프다’ 하셔서 잠시 쉬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목이 몹시 마르구나. 물을 좀 다오.’ 하시니까 아난다는 ‘부처님 조금만 더 가면 카쿳타강이 나오는데 거기 물이 아주 맑습니다.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지금 개울물은 흐려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조금 후에 또 ‘아난다여, 목이 몹시 마르구나. 물을 좀 다오.’ 하니까 아난다는 다시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물이 몹시 흐려져 먹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가면 카쿳타강이 나오니 그 맑은 물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물을 좀 다오.’ 그래서 아난다는 발우를 들고 작은 개울로 갔다가 놀랐습니다.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물이 흐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요청을 2번이나 거절했는데 막상 냇가에 가보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거든요. 아난다는 참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물을 떠와서 부처님께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을 드시고 원기를 회복하셔서 다시 일어나 사자처럼 당당히 대중 앞에서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카쿳타 강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목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물으셨습니다.

‘지금 춘다는 어떤가?’
‘춘다는 몹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은 어떤가?’
‘대중들은 춘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부처님을 몹시 아프게 했기 때문에 아무런 공덕도 없다며 춘다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면 점잖은 표현이고 솔직히 ‘자기 처지를 좀 알지. 식량이 없으면 공양을 올리질 말지, 부처님께 아무 거나 드려가지고 병이 나시게 하다니. 저러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래?’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겠지요. 물론 수행대중이니까 점잖게 ‘춘다는 아무런 공덕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경전에 기록돼있습니다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앞으로 오라고 하셔서 옆에 앉혀놓고 아난다에게 물었습니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여래에서 올리는 공양이다.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 중에서도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무상정등정각을 얻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

이게 뭡니까? 수자타의 공양이지요. 수자타의 공양은 이미 유명한 공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난다여, 그와 똑같은 공덕이 있는 공양이 있으니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

그 마지막 공양이 결국 누구의 공양입니까? 춘다의 공양이지요. 그러니까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춘다가 부처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며 춘다가 마치 기독교의 가롯 유다처럼 될 소지가 있었는데, 부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춘다는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자가 되어서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수자타와 더불어 ‘2대 공양’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이 이렇게 탑을 쌓고 춘다의 공양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이것이 여래의 위신력입니다.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 토해 버릴 수도 있고,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고, 독성이 있는 줄 미리 알고 안 먹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신통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을 수 있지만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그 음식을 올린 자를 걱정해서 그를 편안히 하고, 세상 사람이 그를 비난할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 법문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춘다는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공양을 올린 건 아니었으니까요.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였지만 결과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 ‘스카라 맛다바’는 어떤 음식일까요? ‘스카라’가 돼지라는 뜻이라서 돼지 버섯, 돼지 고기라고 해석하는데 돼지 감자처럼 야생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뱅갈어로 ‘맛다바’가 토란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니, ‘스카라맛다바’는 야생토란이라고 볼 수 있어요.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은 야생의 풀뿌리를 많이 캐어 먹잖아요. 춘다는 천민이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먹어왔을 거예요. 그래서 자주 먹어본 사람들은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토란은 약간 독성이 있는 식물이잖아요. 특히 야생토란은 더 하겠지요. 당시 부처님의 건강도 좋지 않으셨으니까 아마 야생토란의 독성이 급성식중독을 일으킨 것 같아요.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피가 섞인 대변을 보셨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꼭 이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다기보다는 거의 돌아가실 때가 된 연세에 마침 또 이런 음식을 드셔서 열반에 드시게 되었다고 봐야 되겠지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런 걸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째, 아무 것도 없는 춘다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공양을 올린 것을 봤을 때, 우리도 춘다 같은 마음을 내어서 아무리 없다 해도 무슨 공양이든 올릴 수 있다는 마음을 내야 되겠지요? 물질만 아니라 봉사도 공양이니까요. 두 번째,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했지만 춘다의 공양은 오히려 부처님을 위대하게 했습니다. 붓다의 인격, 붓다의 위신력을 더 높인 사건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셨어도 이런 마음을 내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붓다를 더 위대하게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예불과 경전 독송을 마치고 스님은 ‘춘다의 공양’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춘다의 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기리는 탑 앞에서 듣는 ‘춘다의 공양’의 그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마음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스님은

“서두르지 말고 조용히 한 줄로 걸어 나가 주세요. 우리가 바쁜 마음을 내고 서두르면 이 곳 사람들도 같이 부산하게 됩니다. 한 줄로 차례로 조용히 걸어가나면 이들도 들뜨지 않을 겁니다.”

400여명의 순례객은 스님의 이야기를 수신기를 통해 들으며 한 줄로 조용히 골목길을 따라 나왔습니다. ‘상대 때문에~’하고 탓을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 안으로 돌려’ 나로부터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을 갖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한 후, 일행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하시고 춘다에게 설법하셨다는 카쿳타 강으로 갔습니다. 카쿳타 강물은 지금도 맑았습니다. 강물에 손을 담근 후 강변에서 아침 공양을하였습니다. 아침 공양 후, 열반당으로 향하였습니다. 열반당 앞에서 가사를 수하는 마음이 떨려왔습니다. ‘이 곳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 사라쌍수 그늘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그 곳이구나.’ 벌써부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넓은 열반당을 400여명의 순례객은 천천히 돌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르(Kushinagar), 열반당입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탑, 저것이 부처님의 열반을 기념하는 탑이고요, 지붕이 둥근 건물에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모셔져있습니다. 그러고 부처님의 사리탑 오른쪽으로 허물어진 탑, 저것이 아난다의 탑입니다. 저 열반당 앞에 잎이 약간 누런, 아주 잎이 넓은 나무가 있지요? 저것이 사라수(沙羅樹, sala tree)입니다. 이 지역에는 사라수 숲이 아주 많습니다. 보리수는 둥그렇게 크기 때문에 한 나무 밑에 그늘이 있는데, 사라수는 위로 크는 나무이기 때문에 한 그루가 그늘을 이루기 어려워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사라수숲에 들어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라쌍수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말이 경전에 나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부처님께서는 파바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카쿳타 강으로 오셔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후 그날 저녁 무렵에 이 쿠시나가르의 숲에 도착하셨습니다. 사라수가 빼곡한 숲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일 네팔에 가면 사라수 숲이 우리나라의 미루나무 숲처럼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저 나무가 가구용으로 좋거든요. 어쨌든 부처님께서는 사라수 숲속으로 들어가셔서 아난다한테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라고 말씀하셨어요. 부처님이 입고 계시던 가사를 4겹으로 접으면 한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눕는 모습이 어땠느냐 하면,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왼발은 약간 구부려서 포개고 사자처럼 누우셨다고 기록돼있습니다.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면서 누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당에 들어가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경전에 묘사되어있는 것과 똑같은 모습의 열반상이 누워있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누우시고 부처님께서는 ‘오늘 저녁에 내가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면서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귀인이 오면 꽃을 뿌려서 환영하는 문화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수자타아카데미에 가면 아이들이 우리한테 꽃을 뿌려주는 거예요. 아무튼 부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시자 사라수가 학처럼 하얘졌다고 합니다. 사라수 잎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는 게 아니라, 사라수꽃이 필 때가 아닌데도 피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아난존자가 그런 기이한 현상을 보고 매우 놀라서 부처님께 여쭸더니 부처님께서는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의 열반을 맞아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이 꽃과 음악을 공양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그런데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부처님다우신 말씀이시지요? 아무리 기적 같은 공양을 올린다 해도, 그것은 수행자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인도사람들은 뿌자(Puja)할 때 귀한 향을 피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불할 때 거기에 빗대어서 ‘오분향 예불문(五分香 禮佛文)’을 하는 것입니다. ‘계향(戒香)’이란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향기, ‘정향(定香)’이란 선정을 닦는 향기, ‘혜향(慧香)’이란 지혜를 증득한 향기, ‘해탈향(解脫香)’이란 해탈을 증득한 향기,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향기를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귀한 향이 아니라 그런 5가지 수행의 향을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는 거지요. 열반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런 예불형식이 나온 거예요.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나는 이곳에서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겠다. 그러니 저 쿠시나가르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전해라. 여래가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드니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와서 친견하라고 알려라.’
‘부처님이시여, 왜 하필 이곳입니까? 부처님의 제자와 재가신자가 많은 바라나시도 있고, 쉬라바스티도 있고, 왕사성도 있는데, 왜 하필 이 외진 쿠시나가르입니까?’
‘아난다여, 그런 소리하지 마라. 이곳은 먼 미래에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고귀한 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숲입니까? 저 쿠시나가르 성 안으로 가셔서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열반에 드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난다여, 그런 얘기하지 마라. 누구나 여래를 친견하고 싶다면 다 올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부처님께서 성안의 왕궁으로 가서 열반에 드신다면 천민들은 부처님을 뵙고 싶어도 뵐 수가 없잖아요. 짐승들도 올 수가 없고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 걸림 없는 열린 공간인 숲에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신분계급, 남녀노소 차별 없이 누구나 다 올 수 있도록 하신 거예요. 아난다는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돌아와서는 너무나 슬퍼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아난다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의 곁에 남아있으리라. 여래의 가르침인 계를 너의 스승으로 삼아라. 그리고 너는 지난 25년 동안 입안의 혀처럼 나를 잘 시봉했느니라.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하라.’

‘부처님이시여,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수행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사성지(四聖地)를 생각하라. 사성지를 순례하며, 이곳에서 여래가 태어나셨다. 태어나실 때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여래가 도를 이루셨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다. 그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열반의 모습은 이러하다.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그는 수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가 발우공양을 할 때 읽는 경이 소심경(小心經)입니다. 그 첫 구절이 이렇습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타, 설법바라나, 입멸쿠시라.’ 발우를 펴면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거지요. ‘부처님은 카필라성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시었고, 부처님은 마가다국 보드가야에서 도를 이루셨고, 부처님은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시었고, 부처님은 쿠시나가르 사라숲에서 열반에 드시었네.’ 이렇게요. 그래서 우리도 지금 이렇게 순례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어서 아난다는
‘부처님,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수행을 했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수행, 정진해 왔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사념처에 의지하라.’ ’

사념처(四念處)라는 것은, 관신부정(觀身不淨), 몸이라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관수시고(觀受是苦), 우리가 기분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괴로움의 뿌리다. 관심무상(觀心無常), 마음이라는 것은 늘 일어나고 사라지는 등 변화무쌍한 것이다. 관법무아(觀法無我), 존재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이 네가지를 의미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바로 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아난다가 의문이 있는 것들을 여쭈면 하나씩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중생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서 큰 공덕을 쌓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면 중생은 그런 큰 공덕을 쌓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공양이 네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병든 이에게 약을 공양하는 것이고, 셋째는 가난한 이를 돕고 외로운 이를 위로하는 것이고, 넷째는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이게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이십니다. 우리 제이티에스(JTS)의 이념이 3가지인데, 부처님의 이 마지막 말씀 중에서 3가지를 뽑은 것입니다. 그것이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병든 이는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때에 배워야 합니다.’ 이것인데, 이것을 인도주의 원칙에 맞추면 옮기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가 기아, 둘째가 질병, 셋째가 문맹에 대한 것이 되지요. 그래서 기아, 질병, 문맹퇴치기구가 Join Together Society, 즉 JTS입니다. 인종, 종교, 민족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위 세 가지에 해당되는 사람은 도움 받을 자격이 있고, 이 세 가지를 돕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함께 일할 수가 있도록 한 겁니다. 그래서 ‘함께 만나서 일하자’는 의미에서 Join Together Society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Jungto Society와 이니셜이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정토회, 밖으로 나가면 JTS로 불리는 겁니다.”

스님은 다시 한 번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이어 열반당에 함께 갔습니다. 400여 명이 들어가기에는 좁은 열반당이었지만 발디딜 틈이 없어도 조금씩 원을 그리며 행렬은 모두 함께 열반당에 들어가 예불을 올리고 발원문을 읽었습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 성문스님네께 지성귀의하오며 발원하옵나니,
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종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르나트,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를 거쳐
이곳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에 이르러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고 공양 올리며 예배하오며
부처님을 길을 따르고자 발원하오니
오늘 이와 같이 순례하고 발원한 인연공덕으로
이 순례대중들이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순례한 인연공덕으로 육근은 강건하고 정신은 영롱하여 자비와 복덕이 구족하고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그런 복덕자가 되게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순례한 인연공덕 한반도에 회향하오니
이 공덕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대화하고 화해하여 통일이 속히 오도록 발원하옵나니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순례한 인연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유주, 무주 모든 고혼들도
다함께 왕생극락하여지이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열반당을 나와 스님은 대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교화, 설법하시다가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그런 부처님께 아들 대학 가는 것까지 부탁해야겠어요?(모두 웃음) 이제 그러지 마세요.”

“(순례객들) 네.”

“우리 일은 누가 알아서 해야 합니까?”

“(순례객들) 우리가.”

“예,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해요. 한반도의 평화라든지 우리의 힘만으로 좀 부족하다 싶은 것, 공익을 위한 것까지도 부처님께 부탁하기보다는 ‘우리가 하겠습니다. 이제 안온하게 계십시오.’ 이래야지요.(모두 웃음)
늙은 부모한테, 80 먹은 노인한테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라면 ‘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부처님, 편안히 계십시오. 이제 남은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고, 전법하는데 필요한 일들은 우리가 부처님의 분신이 되어서 하겠다’는 큰 원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순례객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열반당에서 조금 더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정진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부처님 열반하신 그 그늘에서 부처님 마음을 좀 더 느껴보기로 말입니다.
각자 일정을 가진 후 다시 차량을 타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라마바르 총’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시신을 다비했습니다. 원래 쿠시나가르 말라족 족장의 대관식을 하던 곳이었으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자기 나라에서 제일 성스러운 곳인 여기에 부처님의 다비장을 차리고 전륜성왕과 같은 장례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아까 지나온 카쿳타 강물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하신 물이고, 이 히란야바티 강물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신 물입니다. 이 물은 아까 열반당 옆으로 해서 이렇게 흘러 내려와서 또 이렇게 흘려 내려갑니다.


히란야바티강을 한 번 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문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울타리를 돌아가면 사당 같은 게 있는데, 그 뒤에 강변이 있습니다. 지뢰(똥)가 많으니까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폭이 한 10여 미터 되는 조그마한 개울입니다.”

라마바르총에서 저녁예불과 경전 독송을 마치고 순례객은 모두 히란야바티 강으로 갔습니다. 작은 개울에 불과했지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다비장이 있었던 곳, 부처님의 마지막 목을 축였던 이곳이 그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스님은 ‘다 함께 사진찍자’ 고 제안하여 400여명의 얼굴이 그득하게 담긴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국 절인 ‘대한사’에 들러 참배하고 주지스님을 뵈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일정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바삐 일정에 좇아가던 마음들이 차분하게 될 무렵일 뿐인데 순례 일정은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까지 가 본 오늘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글 문수팀
사진 배성한, 문수팀
녹취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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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 바이샬리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2

스님의 하루 2018.02.09 16:00

인류 역사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 바이샬리

2018.1.12 제29차 인도성지순례 7일째_바이샬리

새벽 4시, 송수신기의 아침인사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스님은 숙소에서 아침 예불과 기도를 하고 칠엽굴에 오르기에 간편한 복장으로 나섰습니다. 칠엽굴로 오르는 입구 앞에 도착하고 보니 청년들이 탄 10호 차량과 5호 차량이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해 뜨기 전이라 주위가 어두웠지만 손전등을 켜지 않고 어스름한 빛에 눈을 적응하여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지금까지 성지순례 동안 새벽에 칠엽굴로 가는 것은 없었던 경우라, 새로운 기분이라고 선주 법사님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한 낮에 그늘 없이 계단길을 40분 정도 걸어가야 해서 매번 칠엽굴에 다녀오면 땀으로 범벅이 되기 일쑤였는데 새벽 일정으로 조용하게 산책을 하듯 가는 것도 좋은 것 같았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부터 차례로 칠엽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도록 하고 안쪽부터 차례로 자리를 잡도록 하였습니다. 스님도 바위 위에 적당하게 자리를 마련해서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일곱 장의 나뭇잎사귀처럼 되어있는 동굴이라고 해서 칠엽굴(七葉窟)이라고 합니다. 인도말로는 ‘삽타파르니 굽타(Saptaparni Kupta)’라고 합니다. 지금은 오래 되어서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는 낮아서 엎드려서 기어들어가야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들어가면 안에 조금 더 넓은 데가 나와요. 저쪽은 거의 다 무너져서 입구는 넓은데 안은 거의 다 막혀있습니다.
어제 저희가 걸어온 종착지, 손반다르 굴이라고 있었지요? 칠엽굴은 자연동굴이고, 손반다르 굴은 인공동굴입니다. 인공적으로 파거나 조각을 해서 거기서 수행하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이곳은 왕사성으로 말하면, 외성 밖, 성 밖이니까 외진 곳이지요. 그러니까 수행자들이 당시에 이런 곳에 머물렀다 그래요. 우리 인원이 420명 정도 되는데 지금 앉은 자리에 빈 공간이 좀 있네요. 당시 수행자들은 하루에 한 끼 먹어서 말랐기 때문에 여기에 500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었겠지요?”

“(순례객들) 예.”

“예. 여기는 부처님이 정진한 곳은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이 출가하셔서 가야로 가기 전에 여기서 스승을 만나서 수행할 때는 아마 이 산에 올랐을 거예요. ‘판다바 산에서 내려왔다’ 하는 기록이 있으니까 부처님이 여기를 방문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이 부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곳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29살에 출가를 하시고 35살에 깨달음을 얻으셔서 붓다가 되신 후로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교화하러 다니셨는데, 그렇게 유행을 하시다가 우리가 내일 가게 될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지요. 열반에 드실 때 많은 제자들이 스승이 떠나시는 것에 대한 굉장한 슬픔과 허전함을 맛봤습니다. 그런데 일부 젊은 승려들 중에서는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스승은 늘 ‘그건 해야 된다. 그건 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말을 하게 마련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더 이상 안 들어도 되니까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제자가 많다 보니까 온갖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출가할 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입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요.

어쨌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마하가섭존자가 굉장히 우려했다고 합니다. 스승이 돌아가시자마자 벌써 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면 온갖 사람이 다 나올 거 아니겠어요? 제 멋대로 행동하면서 ‘부처님이 나한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하셨다’고 다 내세운다면 증명할 길도 없잖아요. 그래서 ‘붓다의 교법을 후대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서 결집을 해야 되겠다’, 즉 ‘법문을 다 모아서 편집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붓다가 열반에 드시고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처님께서 지금껏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가 다 정리해보자’고 마히가섭존자가 제안하자 전부 동의를 했습니다.
보통 부처님의 10대 제자라고 하면 ‘지혜제일 사리불, 신통제일 목건련, 두타제일 마하가섭...’ 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분들은 부처님 생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남은 제자 가운데 수행력도 가장 높고, 사람들로부터 덕망도 두텁고, 부처님 생전에도 인정받은 가장 대표적인 분이 마하가섭존자인데, 대중들은 이 마하가섭존자한테 ‘당신이 상수제자로서 이 결집 업무를 총괄하시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마하가섭존자가 이 결집의 책임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결집에 참여시켰을까요? 테라밧다(Theravada)에서는 수행을 네 단계로 나눕니다. 그러니까 크게는 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이 있는데, 깨달은 사람은 다시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 거예요. 법문을 듣고 이치를 확연히 깨친 사람을 수다원(須陀洹), 이치는 깨쳤지만 아직 행이 다 되는 건 아니니까 그 단계별로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이렇게 나눈 겁니다. 아라한은 모든 이치를 깨쳤을 뿐만 아니라 행이 이루어지는 사람, 즉 마음에 번뇌가 없는 사람인데, 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 결집에 참여시키기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나 모여서 편집을 한 게 아니에요. 그때 아라한으로 인정받아서 이 결집에 참가한 사람이 50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500명이 앉았던 거예요. 500명이 결집을 하려면 돌아다니면서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500명이 결집할 동안에는 누군가가 공양을 제공해야 이들이 하루 종일 집중할 수 있을 거 아니겠어요. 그걸 아자타삿투왕이 지원한 거예요. 아자타삿투는 원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됐을 뿐만 아니라 데바닷타(Devadatta)의 제자였어요. 데바닷타는 ‘아자타삿투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니, 나는 부처님을 죽이고 새 부처가 되겠다’는 계획을 했다는데, 아자타삿투는 성공을 했을지라도 데바닷타는 실패를 했지요. 아자타삿투왕도 초기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러는 과정에서는 부처님을 굉장히 거부했지만 나중에 병이 나서 지바카한테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에게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 마음의 병도 크다는 걸 알고 결국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의 사리 중 8분의 1을 가지고 와서 여기다 탑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결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모든 재정지원을 다 한 거예요. 즉 500명의 아라한에게 하루에 한 번 공양을 제공한 거죠. 그렇게 아자타삿투왕의 후원을 받아서 여기서 500명이 3개월간 결집을 한 겁니다.

그냥 죽림정사에서 하지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했을까요?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거죠. 수행자라면 누구나 그 결집에 참여하고 싶을 것 아니겠어요? 그 중요한 결집에. 그래서 통제가 힘들었다는 거예요. 여기 참여를 안 시키니까 1만 명이 따로 모여서 결집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또 어떻게 결집할 것이냐는 것도 만만치 않은 문제잖아요. 부처님이 45년간 설법을 하고 가셨으니까 법문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했던 거예요.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 존자는 늘 부처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을 제일 많이 들었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난이 진리에 대한 말씀, 즉 경(經)에 대한 초안을 내기로 한 거예요. 그리고 계율에 대해서는, 가장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 우파리존자가 초안을 내기로 했습니다. 원래 우파리는 이발사로써 천민출신입니다. 10대 제자 중에 천민출신이 우파리존자 한 명인데, 우파리는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까 고지식하게 부처님이 하라는 것만 잘 듣고 그대로 했기 때문에 가장 계율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하가섭존자가 사회를 보고, 두 분의 초안자가 초안을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이 초안을 내면 500명이 다 검토를 해서 어떤 사람은 그 내용에 대해서 ‘나도 그렇게 들었다’며 동의하거나 ‘거기에 이런 내용이 빠졌다’며 첨가하거나 ‘그 내용은 거기에서 얘기한 게 아닌데 거기에 들어갔다’며 삭제하는 등 오류 수정을 거쳐서 500명이 다 동의하면 하나의 경전이 완성되는 방식이었어요. 그러고 그것을 500명이 같이 암송을 했습니다. 그렇게 2, 3번 확인을 한 뒤에 다음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500명이 검증하고, 500명이 다 암송했으니까 처음부터 책을 500권 찍었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했대요. 초기에는 결집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고 해요. 다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들은 사람만 모였으니까요. 내용에 대해서 별 이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도 검증과정을 다 거친 후에 외워야 되니까, 외기 쉽게 앞부분에 반드시 신문기사처럼 육하원칙이 들어가게 한 거예요. 예를 들어 아난다가 초안을 냈기 때문에 아난다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이어서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쭉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설명을 한 앞부분을 ‘서분’이라 그러고, 경전의 주 내용인 본문을 ‘정종분’이라 그러고, 그것을 다 듣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적은 부분을 ‘유통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결집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으로 아라한이어야 된다는 조건이 붙는 바람에 아난다가 결집에 참가를 못 할 상황이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난다는 많이 듣기만 하고 부처님 시봉만 했지, 아라한과를 증득을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난다만 예외로 할 수가 없어서 마하가섭존자가 아주 냉혹하게 아난다를 참가시키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아난다는 백척간두에 선 마음으로 결집이 있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을 때 용맹정진을 해서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이 결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경전이 하나하나 결집이 되었어요. 경전이 결집되었다는 게 문자로 했다는 게 아닙니다. 전부 외워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 경전을 결집했을 때는 경과 율만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교화에 대한 얘기를 경, 수행자의 실천에 대한 지침은 율, 이렇게 두 가지만 가지고 결집을 완성시켰는데, 그것을 공표했더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아, 거기 빠진 게 있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정을 못 받아서 경전에 못 들어간 거예요. 그런 문제로 논란이 계속 되자, 어쨌든 1결집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에 제2결집이 있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오늘 우리가 갈 바이샬리였습니다. 그때는 왜 결집을 했느냐면, 700명의 장로, 즉 큰스님들이 계율에 대한 해석문제로 결집을 한 거예요. 바이샬리는 여성출가가 처음 있었을 정도로 자유로운 도시였고, 또 풍요로운 도시다 보니까 ‘돈을 보시물로 받을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 거예요. 그래서 그 결집에서 그 지역의 진보적 비구들이 행하는 계율의 10가지를 비법(非法)으로 규정하고, 또 그동안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 인정을 못 받았던 것들 중에 소위 바깥에서 계속 경전으로 읽혀온 것들을 재검토해서 경전으로 다시 추가인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100년이 지난 뒤에 파탈리푸트라, 즉 파트나의 아소카 왕궁에서 1000명의 장로가 모여서 제3결집을 했는데, 이때는 논장이 결집됐습니다. 경과 율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인데,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부처님 말씀에 대한 시대적 해석이나 요약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그 해석이나 요약을 쓰신 대스승들의 글 중에서 부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걸로 인정하는 것, 그것을 논장이라고 합니다.”

또아리가 풀어지듯 재미있는 스님의 이야기가 송수신기를 타고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칠엽굴 아래로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집중하였습니다. 스님은 설명을 마치고 다 함께 경전의 결집에 참여한 아라한들처럼 조용히 들숨날숨을 관찰하며 명상하도록 하였습니다.

칠엽굴에서 내려와 먼저 인원이 확인된 차량부터 출발하여 바이샬리의 원후봉밀터로 갔습니다.

“제가 경주에 살았는데 경주에도 ‘봉황대’라는 게 있어요. 거기에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자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봉황이 앉는 곳이라고 해서 봉황대라고 불렀지, 그게 무덤이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나중에는 발굴이 됐지만요. 이곳도 마찬가지예요. 평지에 그렇게 산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큰 흙더미가 있는데 거기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라고 있으니까 이걸 탑이라고 생각을 안 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탑이라고 밝혀지게 된 곳입니다."

간단하게 원후봉밀터의 에피소드를 설명하며 스님과 먼저 도착한 4호차 일행은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아침 공양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다 같이 모여서 예불을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둘러보았습니다. 매 번 예불 올리던 자리에는 현지인 단체가 먼저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 자리를 피하되 4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햇빛도 피하고 여법하게 경전을 독송할 수도 있는 곳으로 적당한 곳으로 찾았습니다. 공양물을 올릴 곳을 봐두고 순례객이 열을 지어 앉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정해서 안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곳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든 부처님 이후에든 일화가 많은 곳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이샬리에서 있었던 일들 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여기는 여인이 처음 출가한 곳입니다. 사르나트에서 이미 사부대중(四部大衆) 중에 삼부대중(三部大衆)이 완성되었지요? 즉, 출가남자수행자, 재가남자수행자, 재가여자수행자는 완성이 됐는데 출가여자수행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성도 후 20여년쯤에 부처님의 아버님인 정반왕이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홀로 된 거예요. 남편이 죽었으면 아들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그 아들이 출가해버렸잖아요. 그런데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양모잖아요. 그래서 그 양모와 정반왕 사이에서 난 아들 난다가 있긴 했는데 그 난다도 출가했거든요. 그러니까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없이 홀로 된 거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부인도 마찬가지였어요. 부모는 돌아가셨고, 남편은 출가했고, 아들 라훌라도 출가했으니까요. 그런데 석가족에는 그런 처지의 여인들, 즉 남편이 출가하거나 아들이 출가한 여인들이 500명이나 있었어요. 그래서 한 때는 이런 노래도 있었어요.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고,
내일은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갈 건가?’

그러니까 결혼한 남자도 출가를 하고, 젊은 남자도 출가를 하고, 또 남의 제자였던 사리푸트라 등도 출가를 하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부처님께서 남의 남편이나 아들이나 제자를 빼앗아 간다며 부처님을 비난을 했다는 거죠.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화를 받아서 출가한 사람들이 다양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실제 석가족 남자들이 출가를 많이 하다 보니까 마하파자파티 부인처럼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여인들이 많이 생긴 거지요. 정반왕이 돌아가시자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유선언을 한 거예요. ‘나도 출가를 하겠다!’ 한 나라의 왕후가 출가를 하겠다고 하니까 이에 따르는 여인들이 500명이나 됐어요.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청을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승낙을 안 하셨어요. 그래서 얼마 있다가 또 가서 청했는데도 또 승낙을 안 하셨어요. 그리고 또 얼마 뒤에 가서 청했는데 또 승낙을 안 하시고는 부처님께서 이곳 바이샬리로 와버리셨어요. 그러니까 그 500 대중이 부처님께서 허락을 안 했는데도 여기까지 부처님을 따라 걸어서 온 거예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회 시스템이나 조건이 여성들은 출가를 못할 상황이라 부처님께서 허락을 안 한 건데, 여성들이 여기까지 직접 스스로 걸어왔다는 건 이미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스스로 버렸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건 출가할 수 있는, 자립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다 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무튼 여인들이 여기까지 걸어왔으니까 그 몰골이 형편없었어요. 그런 몰골로 부처님께 가서 다시 청을 했는데도 부처님께서는 또 거절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울면서 물러나왔어요. 그 모습을 본 아난다존자는 마음이 너무 안 돼서 아난다존자가 부처님께 여쭸습니다.

‘부처님, 여인의 몸으로는 출가수행해서 열반을 증득하지 못 합니까?’
‘아니다. 능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허락을 안 하십니까?’

이어서 아난다존자는 부처님이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그 많은 공덕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 여인들을 출가시켜라’고 승낙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 사건은 어렵사리 여성이 출가하게 된 사건이기도 하고, 나중에 여성출가를 폐지하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봐라.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승낙하지 않으려고 하셨는데, 아난다존자 때문에 승낙하신 것이다’라며 부처님한테 책임을 물을 순 없으니까 아난다존자한테 책임을 물으면서 여성출가를 폐지를 했습니다.
당시 부처님은 두 가지를 고려하셨던 거예요. 첫째, 사회가 여성출가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거고, 둘째, 여성들은 의지하려는 까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않는 이상 출가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장소를 이곳으로 선택하셨고, 또 여인들도 여기까지 스스로 옴으로써 이곳에서 출가를 승낙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작용은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여성출가자들은 누구에게 속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즉 주인이 없기 때문에 나무 밑에서 수행한다고 앉아있으면 남자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거나 납치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 비구니들이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곳 바이샬리가 인류 역사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가 아닌가 싶어요. 여자가 자기 이름을 가진 첫 케이스도 여기서 나왔거든요. 당시 비구니는 ‘누구의’라는 수식어 없이 자기 이름만 단독으로 가졌거든요.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비구니 스님이 되겠다고 한국에서 비구니 계를 받아가지고 남방으로 가면 남방에서는 그걸 인정 안 합니다. 왜? 그 사람들은 대승을 비불설(秘佛設), 즉 사이비라고 생각하는데 거기 가서 계를 받아와봐야 인정하지 않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바이샬리에 비구니템플을 세워서 비구니가 되고 싶은 남방 사람들을 전부 이 바이샬리 비구니템플에서 계를 받게 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그러면 역사적으로 좀 해명이 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남녀차별의식 때문에 비구니를 허용하지 못했더라도,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허용을 해야 되는데, 지금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건, 즉 부처님 당시에 허용한 것을 지금도 안 한다는 건 훨씬 후퇴한 거죠.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스리랑카의 한 고승에게 ‘여성도 교육을 받아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게 세상의 추세인데, 이 문제를 빨리 개선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면 똑똑한 여성들은 불교를 성차별적인 종교라고 비난하면서 불교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해소해야 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통 때문에 남방에서는 여성의 출가문제가 굉장한 큰 사회적 쟁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당시에는 얼마나 어려우셨겠어요? 당시 사회에서 계급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한다는 게 얼마나 큰 사회적 저항을 받았겠습니까. 더구나 유녀, 즉 기생 500명을 출가시킨 일도 있었잖아요. 그때도 사회적 저항이 엄청났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하러 가면 사람들이 아예 음식을 안 줬을 정도였어요.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켰을 때도 엄청난 사회적 저항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많은 비난이 따를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일주일만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 즉 일주일만 굶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모두 웃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부처님의 사리, 부처님의 유골을 서로 가져가려고 각 나라에서 왔는데, 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도 8분의 1을 가져와서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유골을 당시 8개의 부족이 나눠가져가서 탑을 쌓았는데 그 8개 중에 현재 3개가 발견된 상태예요. 하나는 석가족이 가져가서 쌓은 거고, 하나는 부처님 어머니의 종족인 꼴리족이 가져가서 쌓은 거고, 하나는 부처님이 제일 사랑했다는 릿챠비족이 가져가서 쌓은 탑, 3개만 지금 딱 발견이 된 상태인 거예요. 우리는 성지순례 기간 동안 그 3개의 탑을 10대 성지와 관계없이 다 참배할 예정입니다.

아쇼카 석주는 부처님이 이곳에서 원숭이에게 꿀을 공양 받은 일을 기리는 건데요, 부처님이 이 마을에 계실 때 누가 초대해서 수행자 500명과 함께 갔다가 발우 500개를 쭉 놔두고 잠깐 자리를 비운 일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그 사이에 원숭이가 그 500개의 발우 중에 부처님의 발우를 알아보고는 거기에 꿀을 공양 올렸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원숭이들이 모여 땅을 파서는 부처님이 세수하고 발 씻을 연못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진짠지, 거짓말인지...(모두 웃음) 그런데 무슨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런 얘기도 전해지는 거겠지요. 어쨌든 그것이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얘기가 되어서, 아쇼카 왕이 여기에 석주를 세우고 탑을 모셨습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탑은 8개였어요. 그런데 200년 후에 태어난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면서 스토리가 있는 곳마다 ‘여기는 첫 번째, 설법한 곳이다’, ‘여기서 쓰러지셨다’, ‘여기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셨다’면서 기념탑을 쌓은 거예요.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 하면, 8만 4천개를 쌓았대요.(모두 웃음) ‘8만 4천개’라는 건 많이 쌓았다는 뜻이지 구체적인 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벽돌로 탑만 쌓은 게 아니라 그 8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서 거기 몇 개 놔두고, 나머지는 가지고 다니면서 유적지마다 몇 개씩 집어넣어서 탑을 쌓은 거예요.”

아쇼카 석주와 탑을 배경으로 스님은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듯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주었습니
다. 한 낮의 햇빛이 적당하게 내리 쬐이고 있어서 아침 안개에 얼었던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졸릴만도 한데 순례객들은 경전을 읽을 때도 스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집중을 하고 들었습니다.

각자 사진도 찍고 짧으나마 정진도 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진신사리탑터로 향했습니다. 10대의 차량이 움직이려면 10대 차량의 모든 사람들이 타야지 가능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유적지에 가서도 내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서 우선 먼저 준비가 완료된 차량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이 탑 터는 8개의 진신사리탑 중에 바이샬리(Vaishali)의 릿챠비족이 세운 탑입니다. 여기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즉 진짜 유골은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참배하게 될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Piprahwa)탑의 사리는 현재 델리박물관에 보관되어있어서 저희가 나중에 델리박물관에 갔을 때 친견할 예정입니다.
이곳에서는 부처님의 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며 명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는 상관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코끝에 따악 모아서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는 나가는 줄을 압니다.”

명상▲ 명상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제법이 공하다는 가르침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가르침대로 늘 수행을 중요시해 왔지요. 그런데 믿음을 중요시하는 신앙에서는 부처님의 법보다도 부처님의 육신의 결정체로 남아있는 이 사리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해서 순례하잖습니까. 이곳도 세계의 불자들이 와서 이렇게 탑을 돌고, 복을 비는 등 해서 각자의 신앙심을 깊게 합니다. 우리는 법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불교인, 종교인으로서도 각자 여러분들의 신앙을 여기서 더욱 깊게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공양물을 올리는 차량부터 먼저 도착하여 공양물을 올릴 준비를 하는 동안 스님은 순례 행렬과 함께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진신사리탑터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탑터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순례객들은 자리를 깔고 저녁 예불을 올렸습니다. 한 낮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녁 예불을 하는 순례객의 얼굴에 지는 햇빛이 비쳐 예불을 소리와 함께 고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녁예불을 마친 뒤, 경전을 독송하고 각자 정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하는 사람, 절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등, 짧은 시간이지만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숙소로 왔습니다.

여행 일정도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갑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글 문수팀
사진 배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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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죠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1

스님의 하루 2018.02.08 16:00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죠

2018.1.11 제29차 인도성지순례 6일째_라즈길

안개 낀 새벽, 순례단은 라즈기르(라자가하Rajagraha, 왕사성王舍城, 라즈기르Rajgir)로 출발할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아직 주변이 컴컴한데다 안개까지 끼어 스산한 느낌이었지만 송수신기를 귀에 꽂고 차량 주변을 다니는 순례객들의 움직임은 바빴습니다. 모두 열 대의 버스가 수자타아카데미 교문 주변으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각자 차량에 짐을 싣고 인원 확인을 하면서 소리없이 바쁘게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길을 아침 예불을 하며 달려갔습니다. 출발한지 두 시간 가량 지났을 때 제티안에 다다랐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의 일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이틀이 추가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제티안 도보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400여명의 대중이 천천히 걸었습니다. 20분 쯤 걸어가서 포장된 길에 언덕이 나왔을 때, 멈춰서서 자리 잡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안개 낀 제티안, 도보 순례를 시작하며▲ 안개 낀 제티안, 도보 순례를 시작하며

“여기 제티안은 나중에 검색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산이 이렇게 둥그렇게 있는 게 아니고, 폭은 한 1킬로미터로 좁고, 길이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마치 길쭉하게 줄을 쳐놓은 것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둥게스와리에서 본 산도 길쭉했지요? 그게 쭉 이어져서 여기까지 연결이 됩니다.

지도로 보이는 제티안의 모습▲ 지도로 보이는 제티안의 모습

제가 이 길을 자전거 타고 논길로 죽 따라와 봤는데요,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이 길을 걸어서 오셨습니다. 버스 내린 데에 보면 ‘라즈길(Rajgir, 왕사성王舍城) 16킬로미터.’ 그러니까 부처님의 하루 이동거리는 약 16킬로미터, 즉 40리였습니다. 평균 그랬어요. 인도에서는 그 정도를 ‘1유순’이라고 합니다. ‘유순’이라는 건 큰 소가 수레에 짐을 싣고 삐그덕, 삐그덕 거리면서 하루 동안 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그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1시간에 4킬로미터는 걸으니까 16킬로미터를 가려면 4시간 걸리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우리 속도의 절반 정도로 느리게 걸으셨어요. 걸음걸이에 깨어 계셨으니까 천천히 걸어서 이동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로부터 왕사성까지 1유순 정도의 거리가 남았던 건데, 부처님께서 여기 제띠안(Jethian, 杖林)이라는 숲에 머물고 계시니까 왕이 ‘부처님 일행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에서 기다리지 않고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직접 마중을 온 거예요. 경전에는 ‘왕이 부처님을 뵈러왔다, 마중하러 왔다’고 쓰여 있지만 역사적인 이런 저런 사실을 살펴보면 그때 왕이 부처님을 마중하러 왔다기보다는 우루벨라가섭을 마중하러 왔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루벨라가섭은 당대에 위대한 스승이셨기 때문에 빔비사라왕이 1년에 1번은 꼭 우루벨라가섭을 찾아서 뿌자(Puja), 즉 큰 제를 지냈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왕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 마중을 온 거죠. 이 평평한 인도평원에 왕사성만 이렇게 산이 삥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길 천연 요새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라 왕사성 있는 데만 좀 동그랗게 되어있고, 나머지는 다 길쭉한 골짜기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쪽으로 쭉 가면 왕사성 서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시 왕은 서문 밖으로 나와서 여기까지 마중을 온 거였어요.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앉아있는데 왕이 와서 우루벨라가섭에게 인사를 하고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스승 우루벨라가섭이시여, 제가 듣기로 우루벨라가섭이 어떤 젊은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가 되었다고 하던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80 먹은 노인을 보고 자기 손자라고 하는 것만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우루벨라가섭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부처님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합장공경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을 만나고는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제티안 도보 순례 시작▲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제티안 도보 순례 시작

당시 부처님은 서른대여섯 세셨고, 우루벨라가섭은 팔십이었어요. 그런데 ‘윤회의 씨앗을 심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복을 빌었다’는 거예요. ‘복’이라는 것은 윤회의 씨앗을 심는 것이지요. 복을 받으면 천상에 가고,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하고, 그런 식으로 도는 것, 즉 윤회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윤회의 씨앗을 심었다’는 건 ‘윤회 안에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구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부처님을 만나서 윤회를 벗어났다, 즉 해탈과 열반을 얻었다는 거지요. 그렇게 빔비사라왕은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경전이라는 것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금씩 내용이 첨가되거나 섞여서 달라지지요. 그래서 경전에는 처음부터 왕이 부처님을 마중 온 것으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읽는 경전을 봐도 앞뒤가 안 맞는 게, 대중이 앉아서 우루벨라가섭과 부처님을 번갈아 보면서 ‘저 젊은 사문이 우루벨라 가섭의 제자인가? 우루벨라 가섭이 저 젊은 사문의 제자인가?’ 이렇게 의문을 가졌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당시 대중들이 부처님을 확실히 몰랐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니까 우루벨라 가섭이 일어나서 조금 전과 같은 얘기를 했다는데, 제가 볼 때 그건 인도가 불교국가가 된 뒤에 아마 부처님을 미화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실제는 당시 왕이 우루벨라 가섭을 마중하러 왔다고 보는 게 맞다 싶어요.

죽림정사. 여법하게 시작▲ 죽림정사. 여법하게 시작

빔비사라왕과 부처님은 이렇게 만나기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부처님이 출가 후 왕사성에서 스승을 만나서 수행했을 때 부처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모습이 너무 여법했대요. 왕이 왕궁에서 이렇게 내려 보니 저기 멀리 한 수행자가 걸어가는데 그 위의가 여법한 거예요. 그래서 신하를 시켜서 그 수행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대요. 그러니까 신하가 ‘저 북쪽의 왕족인데 출가를 하셨답니다’ 했대요. 그러니까 그때 빔비사라왕도 왕족이 출가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거지요. 그래서 왕이 나와서 그 수행자를 찾아와 인사를 하면서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의 성은 뭡니까?’하고 씨족, 종족을 물은 거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나는 저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태양의 후예, 석가족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해서 빔비사라왕이 소문을 확인한 거예요. 그런데 빔비사라왕은 이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수행자가 된다는 건 너무 아깝고,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된다 싶었나 봐요. 그래서 ‘당신과 같은 사람이 이렇게 수행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한 거예요. 당시에는 아버지인 왕이 오래 살면 아들인 왕자가 못 견뎌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게 다반사였거든요. 그래서 ‘차마 아버지를 해치고 왕이 될 순 없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셨어요. 그러니까 더욱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내 나라를 같이 다스리면 어떻겠소?’라는 제안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거절하셨어요. 같이 다스리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나 싶어서 다시 ‘그렇다면 나보다 당신이 나아보이니, 당신이 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시오.’ 하니까 부처님께서 또 거절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미안해서 거절하는 줄 알고 ‘그럼 내가 군대를 줄 테니까 그 군대를 이끌고 다른 나라를 쳐서 제국을 건설하시오’라고 제안하니까 결국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입속에 있는 가래를 탁 뱉었는데 다른 사람이 더 굵은 가래를 뱉었다고 그걸 주워 먹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모두 웃음)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순례객들) 없어요.”

평화로운 죽림정사▲ 평화로운 죽림정사

“있을 거예요, 여기에도.(모두 웃음)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니까요.(모두 웃음) 부처님께서는 왕을 가래에다 비유한 거예요. ‘이미 내가 내 나라도 필요 없다고 왕위를 버렸는데 하물며 어떻게 남의 나라를 갖겠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빼앗아서 가지겠느냐’는 거지요. 그러니까 빔비사라 왕이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왕이 ‘좋소! 내가 보기에 당신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 같소. 만약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면 오늘의 인연을 잊지 말고 꼭 나를 다시 만나서 그 좋은 법을 나에게 들려주시오’라고 약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빔비사라왕이 어쩌면 우루벨라가섭을 마중하러 왔던 것일 수도 있지만 약간은 고타마 붓다를 생각하며 마중 나왔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부처님께 경배하고 법을 청하니 부처님께서 중도(中道)와 사성제, 팔정도를 설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그 법을 듣고 깨달았어요. 마치 마음을 꽉 누르고 있던 어둠이 사라진 것 같아서 왕은 너무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그 기쁨을 노래할 때 아까 그 소원 얘기를 한 겁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 소원이 다 성취되었다’고. 그러면서 ‘부처님이시여,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했는데 부처님께서 거절을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수용을 할 때는 답이 없으셨습니다. 침묵으로 응하셨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거절할 때는 반드시 ‘아니다’라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침묵을 많이 하셨을까요, 말을 많이 하셨을까요?”

“(순례객들) 침묵.”

“그렇다면 부처님은 대중들이 요청하면 대부분 받아들이셨다는 거예요? 거절하셨다는 거예요?”

“(순례객들) 받아들이셨어요.”

“예. 제가 이런 법문을 했더니, 우리 행자 중에 어떤 분이 나한테 뭐라고 물었는데 제가 대답을 안 한 일이 있었어요.(모두 웃음) 저는 더 생각해 보려고 빨리 대답을 못했던 건데, 행자가 그대로 해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왜 허락도 안 받고 했니?’ 하니까 ‘스님이 침묵을 하셔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저 자신을 보니까, 저는 침묵을 하는 건 대부분 승낙을 아직 안 한 거고, 승낙할 때는 ‘오케이’하고 대답을 하더라고요.(모두 웃음)

어쨌든 왕이 식사초대를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왕이 ‘아, 왕궁은 아니 오신다고 하니까,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머물 곳으로 적당한 곳이 어디일까?’ 살펴봤어요. 그러니까 성 밖에 아름다운 자기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것을 드리면 좋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부처님께 기증을 했어요. 이곳은 위치가 좋아요. 즉 마을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습니다. 멀면 탁발하기 어렵고, 가까우면 번다하지요. 죽림정사는 성문 밖으로부터 한 1킬로미터 이내, 7, 800미터 정도 떨어져 있거든요.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지요. 그래서 죽림정사가 표준이 되어서 기원정사도 성 밖 고요한 곳에다 짓는 등 절의 표준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죽림정사는 빔비사라왕이 기증을 해서 마련된 절이에요.


오늘 우리는 왕사성으로 걸어서 차를 타고 궁 옆을 지나 죽림정사로 가겠습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거리가 13킬로미터 정도 되니까 3시간 반 정도 걸릴 거예요. 그래서 가다가 밥 먹겠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은 아까 버스에서 내린 자리에서 버스를 다시 타고 저쪽 반대편으로 오셔서, 거기서부터 힘이 되시는 분은 거꾸로 이쪽으로 걸어오세요. 그러다가 만나서 같이 죽림정사로 가면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는 위험하다고 반드시 경찰을 동반해야 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100명씩이나 되는 경찰을. 그런데 요즘은 도로가 다 닦여서 차가 다닐 수도 있을 만큼은 됐어요. 왜냐하면 1년에 1번씩 세계의 불교도들이 여기서 ‘피스 마치(Peace March)’, 즉 걷기를 합니다. 그래서 걷다 보면 1킬로미터마다 각국의 탑을 제 나라 식으로 쌓아놓은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비교적 안전해 졌고요, 또우리가 지금 400명이나 되니까 누가 총을 들고 온다고 해도 몇 명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 되겠지요?(모두 웃음)”

제띠안 길을 걸으며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1킬로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작은 탑을 세어가며 평평한 길을 걸으니 마음이 편안하였습니다. 손반다르 동굴까지 걸어서 13km를 걸은 후, 차를 타고 죽림정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절의 표준이 된 죽림정사에서 조용히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워 정근하며 들어갔습니다. 연못을 한 바퀴 돌아 자리에 앉아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였습니다. 조용히 이어지는 명상에 긴 산책의 피로도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영축산에서▲ 영축산에서

이어서 영축산에 올랐습니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뵈러 자주 올랐던 영축산의 길, 무장해제를 하고 오로지 홀로 부처님의 뵙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자 찾아갔던 그 길, 반야심경의 무대가 된 곳. 영축산을 오르면서 빔비사라왕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 있다는 것,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니까 말입니다. 400여명의 순례단은 영축산 정상부터 계단까지 이어져서 자리를 잡고 앉아 경전을 독송하고 참배하였습니다. 다른 순례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한쪽으로 붙어서 다니고 다른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배려하도록 스님이 각별히 안내를 하였습니다.

이어진 곳은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였습니다. 너른 터에 성벽이 둘러쌓여 있는 곳을 영축산을 바라보며 앉아 스님은 위제히 부인의 간절함을 담은 ‘관무량수경’의 이야기를 함께 해 주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스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경전 속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였습니다.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에서▲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에서

다음 순서는 나란다 대학과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표를 미리 사 둔데 비해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서둘러야했습니다. 400여명이 서둘러 나란다대학과 박물관을 둘러보자 하니 대부분은 나란다 박물관 관람은 포기하고 나란다대학을 보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늘 제티안 도보 일정을 넣으면서 시간이 많이 촉박하게 되었어요. 많이 피곤하시지요? 오늘은 저녁 공양을 먹고 일찍 쉬시기 바랍니다.”

제티안 도보순례와 영축산, 나란다대학 등 거의 모든 일정이 걷는데 있어서 피곤하였지만 새로운 순례길을 다녀올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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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10

스님의 하루 2018.02.07 16:00

욕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

2018.1.10 제29차 인도성지순례 5일째_수자타아카데미

수자타아카데미에서의 삼일째 날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아침 기도를 마치고 순례대중들과 함께 전정각산 산책에 나섰습니다.

“아침에 여러분이 일정 없다고 빈둥거릴 까봐 제가 일부러 잡은 일정이에요.”

수신기 속 스님의 농담에 다들 웃으며 전정각산에 올랐습니다. 첫날,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 갔던 칼산 등반이 아니라 또 다른 코스, 부처님께서 정진하셨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는 안개도 적어 쌀쌀함이 덜하였습니다. 20분 쯤 돌산 길을 걸어 작은 연못(?)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곳은 ‘고타마의 샘’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당시 고타마 싯다르타를 비롯하여 이 곳 온갖 동물들이 물을 마시던 곳입니다. 건기 때는 이곳 물도 다 말라버리는데 지금은 아직 물이 있습니다.”

이어 도착한 곳은 바위 사위로 오목한 공간이 참 안온한 자리였습니다.

“이 곳에서 붓다께서는 명상을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거나 괴롭거나 힘들 때,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봅니다. 우리들도 붓다의 모습을 생각하며 잠시 명상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400여명의 순례 대중은 각자 자리를 잡아 명상을 하였습니다. 지난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관찰하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더 없이 편안해진 마음을 안고 전정각산을 내려오는데 다시 안개가 밀려들어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대중들은 바로 설성봉 거사님의 추모제에 참여하였습니다. 매년 개교기념식에 앞서 설거사님의 추모제가 열립니다. 수자타아카데미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노고와 헌신을 기리며 또 수자타아카데미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순례 대중들은 설거사님 추모비 앞에 차를 정성껏 올렸습니다.

순례대중의 음성공양 ‘빛으로 돌아오소서’▲ 순례대중의 음성공양 ‘빛으로 돌아오소서’

아침 공양 후, 학교 전체가 시끌벅적 하였습니다. 매년마다 개교기념식을 겸하여 마을잔치도 함께 하였는데 올해는 순례단이 400여명이나 되어 공간이 여의치 않아 마을 잔치를 겸하지 못하였습니다. 스님은 아쉽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마을 어르신들과 동네 사람들과의 시간을 마련하자 하였습니다.

인도제이티에스의 현지 이사이신 쁘리야팔 스님과 법륜스님▲ 인도제이티에스의 현지 이사이신 쁘리야팔 스님과 법륜스님

쁘락보디 홀에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 순례단, 내빈들이 자리를 꽉 채웠습니다.

초등학생들의 판차실 의례로 시작하여 태권도 공연, 여학생들의 춤 공연, 인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영화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춤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에 순례객들의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공연 중간 중간에 내빈의 인사말씀도 덧붙여졌습니다.

제이티에스의 이사장이신 법륜스님의 인사말씀을 청하는 사회자의 안내가 있자, 박수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스님은 단상에 올라, 먼저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인사말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 6년 수행하신 둥게스와리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요?”

“네!”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손을 드는 아이들, 대중들의 박수소리)

아이들이 맑은 눈망울로 대답합니다.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오겠습니다!


▲ 아이들이 맑은 눈망울로 대답합니다.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오겠습니다!

동전과 먹을 것을 구걸하던 아이들의 작은 손에 연필과 공책이 대신한지 하루하루가 쌓여 24년이 된 둥게스와리의 수자타아카데미. 스님의 질문에 우렁차게 대답하며 웃는 아이들의 조그만 얼굴에 순례대중들은 격려의 박수를 힘차게 쳐 주었습니다. 순례대중들의 박수소리에 말 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이 묻어남을 느낍니다.

다채로운 공연을 마치고 공양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도식 뿌리, 샐러드, 미타이, 유미죽이 학교 학생들, 순례객 용으로 1,000명분이 마련되었습니다. 싯다르타 하우스 앞에는 순례대중들을 위한 공양물이, 망고가든 앞에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공양물이 차려졌습니다. 순례대중은 새롭게 경험하는 이 모든 상황과 새롭게 맛보는 인도식 공양에 기뻐하며 함께 하였습니다.

개교기념식 후 순례 대중들은 마을 방문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400여명의 대중들이 다섯 팀으로 나누어 현지 활동가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저녁 공양 후 스님은 학교 스텝들에게 선물을 전하였습니다. 그 동안 성지순례 준비를 비롯해 학교 개교기념식 준비에 눈코틀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 학교 선생님 및 스텝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겨울 파카를 전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를 다니고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자라면서 이제는 어엿한 활동가가 되어가는 그들의 모습에 스님도 함박웃음을 보였습니다.

“다들 수고 많았어요!” 스님의 인사와 수줍은 스텝들▲ “다들 수고 많았어요!” 스님의 인사와 수줍은 스텝들

스텝들은 입어보고 감사하고 뿌듯해 하며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스님께 선물받은 옷을 입어보고 즐거워하는 스텝들, 다함께 찰칵!
▲ 스님께 선물받은 옷을 입어보고 즐거워하는 스텝들, 다함께 찰칵!

저녁 예불 후에는 사흘간의 수자타아카데미에서의 시간에 대한 소감문 발표와 스님의 법문 시간이 있었습니다. 각 차량별로 한 명씩 발표자가 있었는데 청년들이 탄 10호차량에서는 ‘이번 생에 수자타아카데미에 와서 봉사하겠다’는 원(?)을 발표하기도 해서 순례객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스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내용은 ‘연기법’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은 진리의 기준이 뭘까요? ‘그건 비과학적이야.’ 이러면 진리가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진리의 기준, ‘참’의 척도가 되는 기준은 과학이에요. 그러니까 현재 종교는 진리의 세계에서는 멀어져서 그냥 하나의 이권집단, 이익집단의 역할만 할뿐 세상의 진보에는 아무 기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의 믿음이지, 불교의 가르침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불교신자라고 더 진보적이고, 불교신자라고 더 평화적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어요. ‘전국에 있는 살인범, 절도범, 사기꾼들을 조사했더니 불교신자가 특별히 더 적더라’거나 ‘불교신자는 없더라.’ 이런 통계가 나올까요? 전국에 있는 성추행범, 성폭행범을 잡아서 조사했더니 ‘불교신자는 확실히 적다.’ 이런 통계가 나올까요? 욕설하거나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사람들을 잡아서 조사하니까 ‘불교신자가 별로 없다.’ 이런 통계가 나올까요? 그러니까 요즘 ‘종교’는 더 이상 삶의 지침이 아니에요.

‘나는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평화주의자이다’, ‘세상이 뭐라든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하는 건 반대한다’는 개념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때리지 않는다.’ 이런 게 없다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어떤 견해, 즉 좀 더 의식이 깨이고, 민주화되고, 미래지향적이고, 자비로운, 그런 견해들이 불법을 만나서 이루어졌다면, 그때 불교는 굉장한 가르침인 거지요. 붓다의 가르침의 근본이 그런 거니까요.

저학년 학생들의 판차실, 악기 연주 선보이기▲ 저학년 학생들의 판차실, 악기 연주 선보이기

부처님 당시에는 불법을 만남으로써 삶이 바뀐 사람들이 무척 많았어요. 당시에는 수드라가 브라만의 그림자만 밟아도 죽임을 당할 정도로 신분차별이 엄했는데, 브라만(Brahman)이든 수드라(Sudra)든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한 승단에서 같이 먹고 살았거든요. 그러면 밖에서는 ‘저 브라만은 더러운 천민과 같이 산다’며 손가락질을 했어요. 그래도 그런 데에 구애를 안 받았습니다. 계급이나 신분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임을 알고 극복을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연기법(緣起法)이 뭡니까? ‘세상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거죠. 물질세계에서든 생명세계에서든 정신세계에서든, 그 어떤 것도 단독자(單獨者), 즉 단독의 알갱이로써 존재하거나 불변하는 존재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불변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작동은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화학법칙으로서 질량보존의 법칙이 성립하지요? 수소 원자, 산소 원자가 각각 단독으로 존재하고, 또 작동도 합니다.

중등 여학생들의 공연, 남녀평등의 뜻을 춤에 담아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 중등 여학생들의 공연, 남녀평등의 뜻을 춤에 담아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핵변화 단계에 들어가면 그 원자들은 질량이 약간 다른 원자로 바뀝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서도 각자의 까르마가 여러분들의 성격을 규정짓거나 해서 여러분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고정불변도 아니고, 그것이 여러분 자신도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여러 프로그램이 융합된 존재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감정에 너무 놀아나면 안 됩니다. ‘이건 내 감정이다’라고 너무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건 사실이고, 여러분들이 각자 판단한다는 것도 사실이고, 각자 ‘내 주장’과 ‘내 견해’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 감정, 판단, 주장, 견해가 옳다고 고집할 건 없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다를 뿐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전제에 따라 서로 인정해야지, 각자의 감정에 너무 치우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남학생들의 춤공연, 유명 영화의 OST를 배경으로 꾸민 춤극. ▲ 남학생들의 춤공연, 유명 영화의 OST를 배경으로 꾸민 춤극.

붓다가 연기법을 발견하시고는 이 세상의 현상 중에 지금까지 이해 안 되던 걸 다 이해하셨어요. 세상을 이해하던 기본 틀, 칸막이 쳐져 있던 틀이 탁 무너지면서 붓다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대화하실 수 있었어요. 부처님을 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마저도. 여러분도 누가 여러분을 욕하거나 비난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저 사람은 자기 프로그램에 의해서, 제 감정에 의해서 화를 내고 있으니까 내가 거기에 동화되어서 끼어들 필요는 없다. 저 사람은 저런 프로그램이 깔렸구나.’ 하면서 웃어 보세요.(모두 웃음) 그럼 그 사람은 ‘왜 웃느냐?’며 시비를 걸지도 몰라요. 막 화가 나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한테는 살짝 화제를 바꿔서 말을 던지는 게 효과적이거든요. 그래서 부처님은 욕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태권도 공연,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로 나누어 높은 수준의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태권도 공연,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로 나누어 높은 수준의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당신 집에 가끔 손님이 찾아와요?’
‘오지!’
‘그럼 그 손님이 올 때 선물을 가져와요?’
‘가져올 때도 있지!’
‘가져온 그 선물을 당신이 안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 거예요?’
‘가져온 사람 것이지!’

영리한 사람은 이때 탁 깨달아야 되는데 이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건 왜 물어?’ 하니까 부처님께서 ‘당신이 나한테 욕을 했는데 내가 욕을 안 받으면 그건 누구 건가요?’ 하신 거예요.(모두 웃음) 이게 바로 붓다의 방편(方便)이에요. 붓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지혜도 있지만 그 지혜로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중생을 깨우치는 방법이 자유자재 했다, 즉 방편이 자유자재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팔만사천가지 법문을 하셨습니다. 하나의 원리를 상황에 따라서, 즉 질문하는 사람의 감정과 그 사람의 상황 등 조건에 맞게 법을 설하신 거죠.

그럼 붓다의 얘기를 들은 사람은 다 깨달았을까요? 아니에요. 경전에는 다 깨달았다고 되어있던데, 그건 깨달은 것만 기록하니까 그렇지요.(모두 웃음) 못 깨달은 사람들 얘기는 기록할까요, 안 할까요?(모두 웃음) 깨달은 사람들 샘플만 모아서 자료를 만들려고 해도 넘쳐나는데, 못 깨달은 사람들 샘플을 굳이 기록할 필요는 없겠지요. 굳이 시간이 좀 걸려서 깨달은 사례도 기록을 하려면 짧게 기록했을까요? 길게 기록했을까요?”

남학생들의 춤공연▲ 남학생들의 춤공연

“(순례객들) 짧게요.”

“예.(모두 웃음)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시면 들은 사람은 다 깨닫고, 단박에 깨달은 것처럼 생각되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럴 수는 없어요. 예를 들어 보면, 한 제자가 ‘오늘 날 누구나 운전을 배우면 한두 명을 빼놓고는 다 운전을 할 수가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도 그렇습니까?’라는 식으로 질문을 했어요. 참 좋은 질문이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렇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 제자가 ‘그런데 왜 쟤는 못 깨닫고 아직도 저래요?’라는 식으로 말했어요.(모두 웃음)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도 못 깨달았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반문하셨어요.

‘너 지금 어디 사니?’
‘사위성에 삽니다.’
‘너 원래부터 사위성에 살았니?’
‘아니요, 원래는 왕사성에서 살았습니다.’
‘그럼 너는 가끔 왕사성에 가니?’
‘예, 갑니다.’
‘너 왕사성으로 가는 길을 잘 아니?’
‘잘 압니다.’
‘그래. 그럼 누가 너한테 왕사성 가는 길을 물으면 네가 가르쳐 줄 수 있니?’
‘그럼요. 제가 수백 번을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잘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럼 네가 가르쳐 준다고 그 사람들이 다 왕사성에 도달하니?’
‘아니요, 제가 가르쳐준 곳으로 안 가고 엉뚱한 데로 가는 사람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도 그와 같다.’
‘아...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중등 여학생들의 춤 공연▲ 중등 여학생들의 춤 공연

이런 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처지나 조건에 적절한 예를 들어서 설법하셨어요. 그건 부처님이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기보다는 부처님께서 경험이 많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러분들도 명상할 때 이걸 명심하세요. 운전면허시험에 단박에 걸린 사람이 운전하는 법을 잘 가르칠까요? 20번쯤 떨어져서 겨우 걸린 사람이 운전을 잘 가르칠까요?”

“(순례객들) 많이 떨어져본 사람이요.”

“예. 많은 실패를 해 본 사람일수록 운전면허증 취득까지는 더뎠을지 몰라도, 가르치는 건 한 번만에 취득한 사람보다 더 잘 가르칠 거예요. 왜?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를 훨씬 더 잘 아니까요.(모두 웃음) 아마 자기보다 더 안 되어본 사람은 없을 거니까 안 되는 사람을 보면 야단치기보다는 ‘나도 그랬다. 그런데 그때 난 이렇게 해 봤다’고 얘기해 줄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더디게 가는 게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아셔야 돼요. 그건 게으른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재능이나 능력과 관계가 없습니다.

여학생의 멋진 발차기. 큰 박수를 받았다.▲ 여학생의 멋진 발차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설법하는 것, 즉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약간의 재능이 필요합니다.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것은 재능, 능력, 나이와 아무 관계가 없는데, 가르치는 건 약간의 재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수학이나 과학을 잘한다면 학생들에게 뭔가를 깨우쳐줄 때 수학이나 과학 용어를 써서 가르칠 수가 있는데, 그런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은 그런 방법으로는 깨우쳐주질 못 하겠지요. 그러니까 왕자로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왕자를 깨우치게 하려면 어렵겠지요. 왕자들이 어떤 고집이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생활하거나 사고하는지를 잘 모를 테니까요. 그런데 부처님은 본인이 왕자로 태어나서 살아봤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교만이 있고, 어떤 고뇌가 있는지를 잘 아시니까 나중에 왕들을 깨우치는데 훨씬 용이하셨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깨달음은 능력이 아니에요. 깨달음은 어떤 경우에도 내 마음이 안온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고, 방편은 내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많은 이에게 다양하게 설법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내가 교화를 얼마나 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거나 그런 계획을 달성하려고 걱정할 일은 없잖아요.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다 인생을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안온해지는 그 수준에서 교화할 영역이 각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그 기능을 익히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모두 박수)”

Heal The World. 피날레를 장식한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4 주년 기념 공연.
▲ Heal The World. 피날레를 장식한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4 주년 기념 공연.

사흘째, 수자타아카데미의 밤이 깊어갑니다. 순례대중들은 그 동안 사용했던 공간을 청소하고 뒷마무리 하였습니다. 눈코뜰새 없이 지나간 수자타아카데미에서의 시간들이 가슴 가득히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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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 ‘보드가야’에 도착했습니다.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09

스님의 하루 2018.02.06 16:00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 ‘보드가야’에 도착했습니다.

2018.1.9 제29차 인도성지순례 4일째_보드가야

짙은 안개가 자욱하였습니다. 4시 30분, 쁘락보디홀에 모여 함께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드린 뒤, 보드가야로 걸어갈 채비를 하여 대문 앞에 모였습니다. 안개 속이라 추위가 더 느껴지는 날씨였습니다.

스님은 대문 앞에서 오늘 도보로 보드가야에 가지 못하는 사람을 다시 한 번 더 체크하고 선두, 중간, 후미를 배정한 뒤 출발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두르가푸르, 방갈비가, 만코시힐, 라훌나가르 마을을 차례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아침 볼일을 보러 밖에 나온 마을 사람들이 우리들 일행을 보자 어쩔 줄을 몰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건기라 마른 네이란자라 강을 건넌 뒤, 한참을 걸어 ‘부처님께서 강가에 쓰러졌던 곳에 도착하여 서서 경전 독송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아 모르는 사람은 찾아 올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JTS명상센터에 도착하여 싸온 도시락으로 아침공양을 하였습니다. 공양 후 나서면서 문 밖에서 줄을 지어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고 스님은 사탕을 세어 아이들에게 쥐어주었습니다.

수자타 공양터에 이르러 경전을 펼쳐들고 독송을 하다 보니 걸인이나 마찬가지였을 쓰러진 부처님에게 유미죽 공양을 올린 어린 수자타의 자비로운 마음이 새삼 느껴져 왔습니다.


공양터를 지나 우루벨라 가섭 교화터까지 왔습니다. 스님은 400명이 넘는 인원이다 보니 바깥 공터에서 경전 독송과 설명을 하고 한줄로 지나오면서 화룡이 가두어져 있었다는 우물을 보는 것으로 했습니다. 마을 길을 걸어가며 여광 법사님이 스님께 달려와 아사나 나무를 발견했다하며 알려주었습니다. 아사나 나무는 부처님이 네란자라 강에 몸을 씻었을 때 휩쓸려 떠내려간 부처님이 아사나 나무 가지를 붙잡고 올라왔다는 나무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사나 나무를 알게 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사나 나무

논두렁을 지나 수자타 마을에 들어서니 큰 탑을 만났습니다. 바로 수자타 탑 터였습니다. 정상부위까지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시 쌓기를 반복하며 거대해진 수자타 탑을 보며 사람들의 수자타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조금 가다 보니 멀리 보드가야 마하보디 대탑의 뾰족한 탑 꼭대기가 보였습니다.


마하보디 대탑에 도착하여, 426명의 우리 일행은 입구 공터에서 신발을 벗고 휴대폰을 걷어 두고 가사를 수한 뒤, 조용히 열을 지어 대탑 동편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불교의 수도, 서울이 이곳 보드가야(Bodh Gaya, 또는 부다가야)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불자들이 1년 내내 끊임없이 몰려들고, 심할 때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바깥에서 기다려야 될 정도로 늘 붐비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 조용히 앉아서 명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각국 불자들이 와서 다 자기네 식대로 마이크에 대고 온갖 염불을 하기 때문에 시장보다 더 시끌벅적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 1년 내내 이렇게 공사가 진행되는 혼잡스런 곳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사르나트는 한가하고 조용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이곳을 거의 티벳스님들이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을 때는 10만 명 정도가 몰려오니까요. 그럴 때는 이 보드가야 전체 시가지가 붉은 가사의 물결로 가득 찹니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오실 때는 더 굉장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어제까지 계시다가 오늘 다른 데로 가셨다가 삼일 후에 돌아오신다고 하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라도 앉아있는 거지, 안 그러면 여기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 부처님께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건강을 회복하신 뒤에 다시 둥게스와리 쪽으로 가서 마지막 정진을 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으로 이 강을 건너와서 이곳 보리수 밑에서 성불할 것인지 망설인 것처럼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경전에는 그 부분에 대해 ‘여기 나무신은 이리로 오라 그러고, 둥게스와리 산신은 저쪽으로 오라 그랬다’고 묘사되어있습니다. ...... 이 탑은 300여 년간 힌두템플이 되어서 많이 부서졌어요. 그런데 미얀마의 왕이 브라만한테 엄청난 돈을 주고 이 탑을 관리, 수리할 권리를 얻어서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재정비를 했고요. 또 부처님께서 앉아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장소를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라 그러거든요. 이 보리수와 탑 사이에 가보면 네모난 돌, 큰 반석이 있습니다. 거기에 태국사람들이 금을 입히고 그래서 보기가 좀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리수의 이쪽과 저쪽에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절을 할 때 머리를 이 기둥에 댑니다. 이게 인사법이니까 여러분들이 조금 후에 자유롭게 차별로 참배를 할 때 여기에 참배를 하세요. 또, 이쪽으로 보면 부처님 발바닥 무늬가 있는데, 그 무늬는 불상이 나오기 전에 부처님을 상징했던 표식입니다.

성도 후 49일간 부처님이 무엇을 하셨을까요? 핵심은 ‘전법’이에요. 다시 말하면, 본인이 깨달은 걸 아직 법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조리 있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는 것과 가르치는 건 좀 다르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리 있게 깨우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성제와 12연기의 원리를 구상하셨습니다. 그것이 경전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런 것을 아시고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경전 독송을 여법하게 하고 명상에 들었습니다. 각국의 언어로 염불하는 소리가 시끄러운 것 같았지만 명상에 드니 그 소리마저도 어느새 하나로 어울어져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자율 시간을 가지는 동안 스님은 마하보디 대탑의 주지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보리수 앞에 자리를 빌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신 주지 스님께 감사함도 전달하고 왔습니다.

사람들의 자율시간이 마치겠다 생각했을 무렵 예전에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오랜 기간 봉사하면서 지냈던 김정준 법우와 이수진 법우가 찾아와 스님께 인사드렸습니다. 그리고 대탑 주변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수자타아카데미 출신 우다이 꾸마르 군도 찾아와 스님께 인사드렸습니다. 해를 더할수록 반가운 인연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각자 사진도 찍고 짧으나마 정진 시간도 가졌던 자율시간을 마치고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어제 들르지 못한 가야산에 함께 오르기로 하였습니다. 열 대의 차량이 코끼리 머리 산 앞에 정차하였습니다.

“이 산줄기를 따라 쭉 가세요.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아침에 걸어갔던 길을 가셔서 목욕하시다가 쓰러지신 후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강을 또 하나 건너셨어요. 그게 같은 네란자라강입니다. 강이 이렇게 Y자로 갈라져서 그래요. 그리고는 오늘 우리가 참배한 보드가야 그 강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어요. 깨달음을 얻고는 다시 다섯 친구를 위해서 사르나트까지 가셔서 그들에게 초전법륜을 하시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에 갔던 터에서 우루벨라가섭을 교화하시고, 또 아까 오다가 제가 오른쪽에 나무 한 그루 있다고 했는데, 그 두 강이 Y자 형식으로 만나는 지점에 있던 나디가섭을 교화하시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후에 이 방향으로 지나가는 버스, 즉 강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보면 왼쪽 밑으로 힌두템플이 많이 있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서 화장도 하고 그러는 데가 보일 텐데, 거기가 가야가섭이 수행하던 데입니다. 거기서 또 가야가섭을 교화하셨어요.


▲부처님이 앉았던 바위라고 알려져 있는 움푹 패인 바위.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천 명의 제자와 함께 이 산 중턱에 앉아서 부처님의 ‘불의 설법’을 들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가야산(伽揶山)이라고 하면 원래는 거기를 말하는데, 여기도 가야산이라고 합니다. 그 산 이름은 가야산, 가야마운틴이고, 이 동네에서는 가야시르사라고 하거나 지금은 힌두템플이 있기 때문에 브람조니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한문경전에는 상두산(象頭山), 즉 긴 코가 달린 코끼리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두산이라고도 하는데, 천여 명이 여기 둘러앉았던 거지요. 지금은 사람들이 땔감용으로 나무를 다 베어가서 나무가 없지만 원래 이 산에도 나무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어제 우리가 갔던 전정각산에도 산 위까지 나무가 많이 자라 있었잖아요?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자꾸 나무를 베어가서 중턱까지는 나무가 없는 거예요. 가섭형제는 원래 배화교도들이었는데 깨달음을 얻고는 그렇게 제사지내는 것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고 제구(祭具-제사에 쓰이는 기구)를 다 버렸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밖에 있는 불은 껐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제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고 하신, 그 유명한 ‘불의 설법’을 하신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거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은 없어요. 왜냐하면 2500년 동안 그대로 보존이 됐으면 모르겠는데 중간에 한 700년 동안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불교 유적이 힌두템플이 되어서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역사가 전부 신화가 돼버렸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동네마다 다니면서 그 전설을 채취해서 다시 복원한다면 다시 역사적 사실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제가 경주에서 살았는데,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전설이나 설화를 기록한 것으로 치부했는데, 지금은 그게 다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되어서 삼국유사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됐거든요. 그런 것처럼 인도도 산업화가 되면 이런 흔적들이 다 없어질 거예요.

제가 인도에 와보고 하나의 원을 세웠다면, 제가 죽기 전에 인도에 아직 남아있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걸어 다니면서 동네마다 들러가지고 노인들로부터 그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채취해서 경전과 하나하나 맞춰가지고 복원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힌디어를 할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힌디어랑 한국어를 다 할 줄 아는 사람을 한 명 만들어내기까지 20년이 걸렸어요. 그 사람이 바로 쁘리앙카 선생님인데, 지금 쁘리앙카 선생님은 또 학교를 운영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청년들과 자전거를 타고 순례하는 걸 계획해 보기도 했는데, 인도의 교통이 워낙 복잡하니까 순례하는 중에 한두 명은 사고로 죽을 걸 각오해야 되는데,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냥 시비에 휘말려서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끝나버리기 때문에 시행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버스를 타고 중간, 중간에 걷는 이런 정도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 모두 산에 잘 올라오시네요.(모두 웃음)

자, 우리여기까지 왔으니까 ‘저기 부처님께서 계신다’고 생각하고 반야심경 일편 독송하겠습니다.”

(모두 함께 반야심경 독송)

“반야심경의 핵심은 ‘제법(諸法)이 공(空)하다’는 겁니다. 즉 정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 반야의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걸림 없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부분은 ‘가세, 가세. 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세.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여 열반을 이루세’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을 독송할 때는 힘 있게 해야 되겠어요? 죽어가는 소리로 해야 되겠어요?(모두 웃음)”

“(순례객들) 힘 있게 해야 돼요.”

“그런데 가기 싫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힘없이 하면 되겠어요?(모두 웃음) 자, 이제 다시 내려가겠습니다.”

다시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갔습니다. 해 지면 돌아갈 집으로 가듯, 둥게스와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돌아와서 저녁 공양을 조별로 지어먹고 저녁예불 후 스님과 함께 마무리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저녁은 인도JTS의 현재 활동을 각 부분별로 자세히 브리핑 받고 질문도 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등학교 등 교육파트, 병원파트, 마을개발파트, 건축파트로 나누어 인도, 한국, 활동가들의 소개와 사업현황 소개에 순례객들은 열렬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순례객들이 10km도 더 넘는 길을 걸어서 피곤할거라며 스님은 저녁 법문 없이 일찍 끝내고 휴식하도록 하였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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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수행자’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08

스님의 하루 2018.02.05 16:00

우리는 ‘우리가 수행자’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2018.1.8. 제29차 인도성진순례 3일째_전정각산

 오늘은 이틀 묵었던 바라나시를 떠나 수자타아카데미로 가는 날입니다.

 부처님이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자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누렸고, 야사와 야사의 부모, 야사의 친구들까지 60명의   승가가 형성되자 부처님은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이미 그것이 천계의 것이건 인간계의 것이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였다. 그대들도 또한 천계와 인간계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수행자들이여, 이제 모든 천인과 인간들 속에서 그들을 제도하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안락을 주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하여 속히 떠나가라.

마을로 들어갈 때는 홀로 스스로 갈 것이요,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라.

수행자들이여, 유행할 때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애민하여 섭수하고자 법을 전하되, 항상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올바르게 설해서, 의미가 분명하고 어구가 명료하도록 의심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수행자들은 항상 원만 구족하고 청정한 범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세상의 많은 중생들은 업장이 두텁지 않고 마음이 더러움에 적게 물들었으며 번뇌가 엷어서 선근이 성숙되어 있으나, 바른 법을 듣지 못하여 고통 받고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에게 법을 전하라.

수행자들이여, 나도 이제 곧 우루벨라로 가서 병장 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라.”
_불본행집경

이렇게 부처님도 전법을 위하여 떠난 그 길을 오늘 우리 순례단은 버스를 타고 가게 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 버스 출발 시간은 4시 30분이었지만 30분 서둘러 내려오는 순례객들이 있었습니다. 차량별로 짐을 담당하는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숙소에서 짐을 내리고 내린 짐을 차량 트렁크에 싣는 일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제 성지순례 일정을 막 시작한 순례객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는 짐만 실어 내리고, 내린 짐을 차량 트렁크에 싣고, 공용짐을 모두 정리해 차량의 옆 트렁크에 실어서 일을 마무리하자 얼추 출발하기로 한 새벽 4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여행객이 아니라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순례객으로서 ‘내 할 일은 내가 하고 수행자로서 임하는 일’은 일상에서부터 챙겨야 하는 것임을 생각하였습니다.

안개 속에서 차량이 출발하자,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서투르지만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고 휴식시간을 가졌습니다.

2시간 넘게 달리자 어둠이 살살 걷히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많이 막히는 곳을 지나 화장실도 다녀올 겸, 아침 공양을 할 곳을 찾았습니다. 새벽 내내 일정에 맞추어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인도인 기사와 조수가 아침 먹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순례객들도 함께 도시락을 꺼내 들고 내렸습니다. 작고 허름한 간이식당 옆에 볏짚을 쌓아둔 풀밭도 있어서 차량 두 대가 함께 아침 공양을 하기에 적절해보였습니다.

올해 새롭게 시도한 ‘도시락’ 공양법이 간편하고 부담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밥솥에 밥을 해서 밥통 자체를 들고 다니며 밥과 반찬을 조별로 나누어 먹었는데 올해부터는 각자 도시락에 담아서 밥통을 들고 다니는 불편을 줄이고 공간에 구애받지 않게 혼자서든, 조별이든 먹을 수 있도록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데 어제 사르나트에서, 그리고 오늘 아침 공양을 도시락으로 먹어보니 간편하고 적절한 것 같았습니다.

조별로 모여 도시락을 풀밭에서 나눠 먹으니 순례길의 맛과 멋이 느껴졌습니다.

“도시락으로 하니 참 간편하다. 밥통을 무겁게 들고 다니지 않아도 좋으니 수고를 덜하고 부담이 없네. 어디를 가도 공양하는데 어려움이 없겠다.”

밥통 아이디어에서 도시락 아이디어까지 스님이 낸 순례길의 아이디어가 점점 더 정갈하고 여법한 순례길로 만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공양 후 서둘러 출발했지만 정체구간이 길어서 계획했던 시간보다 두 시간 가량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 가야산에 오르기로 일정을 잡았는데 순례단의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오전 내내 밖에서 기다릴 것이 눈에 밟혀 스님은 일정을 조정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가야산 일정은 내일로 미루고 바로 수자타아카데미로 향했습니다. 자그디스푸르 마을에 들어서자 벌써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색깔 풍선과 불교 깃발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을 환영하는 학생들▲ 순례단을 환영하는 학생들

종이로 만든 코끼리를 탄 아이가 꽃을 뿌리고 타악기를 신나게 두드리는 고학년 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흥을 돋우고 꽃목걸이를 만들어 아이들이 열을 지어 스님과 순례객을 맞이하였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이 걸어주는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먼저 법당으로 가서 꽃목걸이 공양을 올리고 삼배로 예를 갖추었습니다. 바로 이어 설성봉 거사님의 기념 스투파로 가서 꽃목걸이 공양을 올리고 삼배로 올렸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에게 법당과 설지 스투파에 이어 지바카 병원과 싯다르타 하우스, 쁘락보디홀을 지나 학교 운동장까지 한 바퀴 둘러 보며 안내를 하였습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높게 매달린 반짝이는 장식물이 바람에 날리면서 잔치 분위기를 더하였고 들어오는 순례단에게 짜이와 쿠키를 대접해 주어 다들 반갑고 고마움에 기뻐하였습니다. 교문 입구 쪽에는 학생들이 줄을 지어 계단에 앉아 들어오는 순례단을 환영하였습니다.



특히, 창작 댄스팀 두 팀이 순례단을 환영하는 댄스 공연을 선보여 더욱 흥을 돋우웠습니다.



스님은 맞이해 준 학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이어 안내하였습니다.

“순례단이 온다고 이렇게 맞이 준비를 해 준 학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목적지는 전정각산까지 가는 것이니까 순례단 여러분은 지체하지 말고 준비해서 다녀오도록 합시다. 몸을 간단하게 하고 바랑셋트를 가지고 입구에 모여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에 매달려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에 매달려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

학교 교문 바로 앞에는 전정각산으로 오르는 길이 널찍하게 있었습니다.

전정각산 봉우리들이 바로 바라보이는 널찍한 자리에서 순례단은 자리를 깔고 예불과 경전독송 명상을 하였습니다. 이어 스님의 말씀을 청하여 들었습니다.

“....... 불교를 상징하는 장면,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입시일에 기도하는 모습이잖습니까? 불교 자체는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불교는 복을 비는 종교라고 세상에 알려져 있어요.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오게 됐을까요? 참 기가 막힙니다. 경전을 한 줄만 읽어보면, 또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 해 보면 불교가 2600년 전에 나타났는데도 오늘날의 그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 얘기하는 철학보다 더 근본적인 탐구를 하는 합리적 종교라는 것을, 그것도 단순히 머리로 사색한 게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실천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붓다는 스스로 경험하고 그것을 대중과 함께 나눈 위대한 수행자이자 위대한 스승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정말 존경하고 따를만한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하는데, 실제 불자라는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모른다는 거예요. 경전 한 줄만 읽으면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방식이 전혀 불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이에요. 승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은 불교가 종교화되어서 붓다의 삶이나 가르침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내용은 경전인데 그 결과는 ‘복을 받는다’로 갑니다. 붓다의 수행 과정을 살펴보면 늘 장애로 등장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을 비는 것 아닙니까? 마왕이 ‘이러지 말고 네가 복을 빌면 너는 전륜성왕도 될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유혹했잖아요. 그게 붓다에게도 늘 한쪽에 번뇌로 남아있었지만 결국 그런 유혹을 극복하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지요.

우리는 ‘우리가 수행자’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성지순례에 참가하고 싶다는 일반인들을 데려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제한 때문에 밖에서는 불만이 많습니다. ‘왜 정토불교대학 졸업자만 데리고 가느냐’ 이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신자를 데리고 오면 그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 합니다. 성지순례가 정법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막상 여기 와서 들어보거나 여기 와서 내내 경전을 읽으며 순례하다 보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던 불교와 너무 다르니까 오히려 헷갈려서 혼란스러워 하거든요. 이왕에 좋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을 굳이 혼란스럽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갖고 있는 분은 그런 신앙대로 사시도록 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반드시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한 사람만 이 성지순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게 된 겁니다.

우리끼리만 오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처음에 일반신자들과도 같이 와봤는데 성지순례하면서 신심이 깊어지고 정진의 원이 생기는 게 아니라 가면 갈수록 더 헷갈려서 혼란스러워 하는 부작용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현상을 쭉 보니까 ‘이게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꼭 불교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부처님의 일생을 독파한 사람이라면 참가자격을 줬어요.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도 안 되어서 현재는 불교대학을 졸업해야만 참가자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시간과 돈을 내어서 왔는데, 또 스님도 이렇게 애를 많이 써서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데, 오히려 여러분을 헷갈리게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떤 것이 불법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종교로서의 불교가 잘못된 건 아니에요. 불교는 종교로서도 훌륭해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진리를 탐구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수행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6년 고행,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한 시간, 부처님의 삶에 있어 중요한 그 시기의 순간이 바로 이곳 둥게스와리, 수자타아카데미 앞에 위치한 이곳이라는 것이 소중하게 다가 온 만큼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자부심’에 대해서 거듭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내일은 여기서부터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갑니다. 그 길은 평지이지만 거리가 8킬로미터는 되니까, 내일도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버스를 타고 보드가야로 바로 오시고, 건강한 분들은 새벽 5시부터 걸어서 가겠습니다. 그리고 모레는 수자타 아카데미(Sujata Academy) 개교기념식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제이티에스(JTS) 사업도 보고 그럴 텐데요, 제가 여기 샘터가 있다고 했지요?”

“(순례객들) 예.”

“그 샘터, 탑터로 해서 모레 아침에 다시 한 번 산책을 할 거예요. 그때도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학교에서 쉬시고, 건강하신 분들은 산책하고 내려가서 아침을 먹은 뒤에 개교기념식에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3일이나 있을 거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근처에 오는 순례객들은 대부분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드가야만 가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곳이고, 내일 가게 될 곳은 또 부처님께서 우루벨라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을 교화하신 자리입니다. 이렇게 여기에는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곳, 성도하신 곳, 교화하신 곳이 모두 모여 있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배정해서 여유 있게 돌아보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보통 한국 불교인들은 보드가야 대탑에 가서 기도만 하고 가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일은 아주 드문 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학교를 지은 건, 여기가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한 성지라서가 아니에요. 제가 25년 전에 이 유영굴에 한번 와보려고 이 근처에 와서 사람들한테 ‘마운틴! 마운틴!’이라고 하면서 찾았거든요. 그랬더니 저를 브람조니(Bramyoni), 즉 가야산(伽揶山, 또는 상두산象頭山)에 데려다 준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 올라가서 딱 보고는 ‘야, 좋다. 그런데 굴은 어딨지?’ 하면서 굴을 찾아보았는데 없었어요. 다녀와서는 ”나 유영굴에 다녀왔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어땠냐?”고 하기에 “이렇게, 이렇게 생겼더라.”고 했더니 그들이 “그게 무슨 유영굴이냐? 그건 브람조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즉시 다시 가보지는 못 했고, 그 이듬해에 다시 와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유영굴을 찾아가겠다’고 해서 여길 와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길이 없어서 저 강에서 이렇게 4킬로미터를 가로질러서 걸어 왔습니다.

여러분들, 아까 오던 길옆으로 할머니들이 앉아계셨지요? 그때는 아이들이 쭉, 작은 오솔길에 앉아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했더니 일요일도 아닌 거예요. 도대체 애들이 왜 학교 안 가고 여기 와 있느냐?’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갈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영굴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아이들이 몇 백 명이나 되는데 학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해서 마을사람들과 의논하게 됐어요. 원래는 학교를 하나 작게 지어주고 가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진 거지 처음부터 계획을 했던 건 아니었어요.(모두 박수)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그 코흘리개 아이들이 자라서 선생님이 된 거에요. 처음 사탕 얻어먹으러 학교를 오게 된 거예요. 일주일마다 평가해서 5일 다 출석했으면 사탕 5개 주고, 4일만 출석했으면 4개 주고, 그런 식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사탕 얻어먹으러 오다 보니 학교가 이렇게 커진 거예요. 어쨌든 그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정착하여 선생을 하거나 봉사를 하고, 시험을 봐가지고 공무원이나 군인을 하고, 또 나름대로 돈 벌러 간 아이들도 있게 되었습니다.(모두 박수)

자, 이제 유영굴을 향해서 가보겠습니다. 그 옆으로 가면 제2의 유영굴이라고 작은 게 또 있습니다. 유영굴은 제법 굴이 깊고, 제2 유영굴은 그냥 움푹 파인 정도예요. 그냥 지나가면 모를 수도 있으니까 제2 유영굴도 있다는 걸 알고 보시고요, 저 칼날능선으로 해서 이렇게 돌아오면서 유영굴에 참배하고 학교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꼭 모두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셨죠?”

스님의 안내에 따라 순례 대중은 전정각산을 다녀왔습니다. 전정각산 위에서 수자타아카데미와 주변을 내려다보며 스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부처님이 가신 지 2600년이 지난 지금, 저 멀리 한국에서 다시 부처님의 깨달음의 장소를 찾아 온 순례대중.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는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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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지역을 순례했습니다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07

스님의 하루 2018.02.04 16:00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지역을 순례했습니다

2018.1.7 제 29차 인도성지순례 2일째_사르나트


새벽 4시 반, 켜 둔 송수신기에서 아침을 알리는 멘트가 들렸습니다. 이미 4시 반이 되기 전부터 순례단의 방은 불이 켜지고 있었습니다. 각자 방에서 송수신기에 맞춰 아침 예불과 천일결사기도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오늘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달은 바를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하여 법이 전해질 수 있음이 증명되고 이후 야사에게 깨달음의 기회를, 또 야사의 부모님, 구리가 장자 부부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재가 수행자로 탄생한 ‘사르나트(Sarnath)’를 순례하는 날입니다.
특히, 본격적인 순례를 시작하면서 수행자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수계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순례 버스를 타려고 나와 보니 짙은 안개에 버스 앞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전날 오전에 인도인, 한국인 스텝들과 함께 사전답사를 해 두었는데 막상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안개가 짙어 아무래도 너무 일찍 나서서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날씨인 것 같았습니다. 우선 출발시간을 10분 늦추고 짙은 안개속에 사람들이 긴 시간 서 있으면 추위에 떨게 되어 최대한 밖에서 대기시간을 줄이고 차에서 있다가 내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스님과 염불하시는 무변심 법사님을 선두로 400명의 순례단은 짙은 안개 속에서 조용히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다르마라지크 탑터를 돌고 다메크 탑을 세 번 돌아 다메크 탑을 바라보고 오른쪽 한 쪽에 자리 잡았습니다. 안개로 으슬으슬 추위는 있었지만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으로 들숨날숨에 집중하니 그대로 평온해졌습니다.


점점 안개가 짙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메크 스투파가 안개 속에 사라졌다 드러났다를 반복했습니다. 경전 독송까지 마친 뒤, 숙소에서 지은 밥과 가져온 반찬으로 도시락을 먹으니 꿀맛이었습니다. 공양을 하고 나니 그때서야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공양 이후에는 수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수행자로서 계를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수계식‘을 전법이 시작된 이곳 ‘사르나트’ 다메크 스투파 앞에서 거행한다는 것이 감격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연비의식을 거치고 오계수계를 약속한 다음, 가사까지 받는 것으로 수계식을 잘 마쳤습니다. 이제 스님은 가사를 여법하게 수한 426명의 수행자들과 다시 다메크 스투파를 세 바퀴 돌았습니다. 다메크 스투파를 돌고 있는 가사를 입은 수행자들의 행렬이 사뭇 여법하고 경건하게 보였습니다.

스님은 다메크 스투파를 돈 뒤, 기러기 행렬이 움직이듯이 차례로 행렬을 이끌었습니다. 그 행렬대로 바라보는 방향만 바꾸어 다메크 스투파를 배경으로 426명이 함께 사진촬영을 하였습니다. 진행 측에서 400여명의 단체사진을 어떻게 원활하게 찍을지를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자연스럽고 여법하게 자리할 수 있어 놀라웠습니다.

순례객은 전체 차량 촬영과 차량 별 촬영, 조별 촬영이 끝내고 차량별로 법사님들과 함께 사르나트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아쇼카 석주, 물간다꾸띠터를 차례로 돌아보고 사르나트 박물관에서 아쇼카 석주 위의 4사자 상과 초전법륜상을 찾아본 뒤, 신물간다꾸티를 방문하고 각 차량 별로 영불탑에 참배를 하고 강가강으로 갔습니다.

산스크리트 대학 앞에서 순례객들은 삼삼오오 어울려서 릭샤를 타고 다사수와메드 가트까지 오라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릭샤를 타고 클락션 소리, 많은 사람들, 소, 염소, 자전거가 한데 어울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곳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강가강에서 배를 타고 강변을 바라보니 한 쪽에서는 화장터가, 그 바로 아래에는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도라는 곳, 그 속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복잡하고 꽉 막힌 거리를 겨우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정리 법문에서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오늘 저희는 두 가지 순례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 지역을 순례했고요, 두 번째는 불교와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의 최대 성지인 바라나시 강가강, 즉 갠지스강을 우리가 한번 둘러봤습니다. 강가강을 둘러보는 것은 인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왜 부처님이, 새로운 가르침을 펴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즉, 이런 인도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가르침이 나왔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냥 ‘이것이 진리다’라고 법을 설하신 게 아니라 온갖 모순이 있는 데서 그 모순을 극복하는 바른 길을 제시했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바른 길’은 모순을 느끼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빛이 됐고, 모순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헛소리’라고 치부되어 오히려 붓다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빌미가 됐습니다. 지금도 인도인들은 강가강에서 목욕하면 성스러워진다는 신앙을 갖고 있는데, 하물며 260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이렇게 믿음이 아주 깊고 견고한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불교 같은 종교, 즉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 생겨나 대중을 깨우고 한 때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입니다.

불교는 어떻게 보면 가장 비인도적인, 인도적 성향이 적은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주요한 법문이 마무리 되고 즉문즉설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 명의 순례객이 질문을 하였는데 그중에 한 분의 내용을 싣습니다.

“오늘 스님 법문 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 때문에 수행이 어렵다. 그 뿌리는 육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부처님이 제3의 길인 중도라는 길을 안내해 주셨다’고 하셨는데, 저도 제 자신을 굉장히 바꾸고 싶어서 정토회의 여러 프로그램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바람만큼 잘 바뀌지가 않아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좀 힘들더라고요.

제가 궁금한 건, 저는 한 달에 한 번 문경에서 3000배 수련을 하는 소임을 맡고 있는데, 가끔 제가 수행을 하는 건지, 극기훈련을 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겁니다. 저는 별로 바라는 게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해 보는 게 수행이고, 또 하기 싫어도 한 번 해 보는 게 수행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하고는 있는데, 가끔 ‘몸을 혹사시키는 것과 수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게 궁금하더라고요. 거기에도 중도의 길이 있는 건가요? 그리고 또,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자신을 바꾸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행복해지는 길과 자신한테 손해가 너무 크면 한 번 변해 보려고 노력하는 길, 그 두 가지 길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던데, 제 나이가 이제 서른여덟이거든요. 저는 아직까지는 저 자신을 바꾸고 싶은데, 이대로 그냥 사는 게 더 좋은 건지,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바꾸는 게 더 현명한 건지,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얘기를 들어봐서는 바꾸기가 어렵겠네요.(모두 웃음)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어요. 왜? ‘바꾸는 게 좋을까? 안 바꾸는 게 좋을까?’ 이래서는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청중들) 안 바뀌어요.”(모두 웃음)

“저한테 ‘바꾸는 게 좋아요? 안 바꾸는 게 좋아요?’라고 묻는 수준에서는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청중들) 안 바뀌어요.”(모두 웃음)

“예, 안 바뀌어요. 저한테 물을 게 아니라 제가 말려도 ‘저는 바꾸고 말겠습니다’, 제가 말려도 ‘저는 죽었으면 죽었지, 바꾸고 죽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이렇게 해도 잘 안 바뀌는데,(모두 웃음) 저한테 바뀌는 게 좋겠냐고 묻는 수준이라면 바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3000배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 말은 하기 싫다는 얘기 아니에요?(모두 웃음) 하기 싫으니까 안 하면 되지요. ‘내가 3000배를 해 보겠다’면 그게 극기훈련이 됐든 뭐가 됐든 그냥 3000배를 하는 거지요. 3000배가 수행인지, 극기훈련인지 모르겠다고요? 당연히 극기훈련이지, 그게 무슨 수행이에요?(모두 웃음) 그런데 극기훈련도 수행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어요. 극기훈련을 하면서 자기가 그만두려고 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뛰어넘는, 이런 훈련의 관점을 가져야지요. 여러분들은 조금 힘들면 ‘이거 고행주의 아닌가?’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다 부처님의 고행상을 보셨지요?”

“예.”

“그 정도가 아니면 고행주의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모두 웃음) 여러분들은 지금 쾌락주의가 문제이지, 고행주의는 문제가 안돼요,(모두 웃음) 전혀!(모두 웃음) 하기 싫으니까 부처님의 중도를 핑계 삼아 쾌락을 쫓으려고 중도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가만히 보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먹고 싶어도 안 먹는다, 아무리 피고 싶어도 안 피운다, 아무리 졸려도 안 잔다는 건 정해졌는데, 수행을 하려면 참고, 이를 악다물고 안 자는게 아니라 안 참고 편안하게 안 자야 ‘중도’가 되는 거예요. 자는 건 수행에 전혀 해당이 안 됩니다.(모두 웃음) 자는 거하고 안 자는 거하고, 먹는 거하고 안 먹는 거하고, 담배 피우는 것과 안 피우는 것 사이를 적당히 오가는 게 중도라고 생각하면 전혀 안 맞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청중들) 예.”

“다리가 아픈데 펴면 이건 무조건 쾌락주의예요. 참고 안 펴면 고행주의이고, 알아차리고 안 펴면 뭐라고요?”

“(청중들) 중도.”

“예, 중도를 지금 연습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자꾸 참아지지요? 그러니까 ‘참았어’ 이러면 고행주의이지만 중도로 가려는데 자꾸 안 되가지고 펴버리면 이건 괘락주의이고, 자기도 모르게 참아지는 건 연습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거란 얘기예요. 그럼 펴도 돼요. 그럴 때 ‘아, 내가 싫은 건 못 견디는 습관이 있구나.’ 이렇게 자기를 아는 거예요. 그런 내가 ‘나쁘다’거나 그런 내가 ‘참았으니 장하다’고 보지 말고, 그런 게 ‘현재의 나’라는 걸 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연습을 더 해야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수행을 욕심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그 습관이 드는 데에 10년이 걸렸으면 그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에도 10년 걸릴 예상을 하고 연습을 해야 되는데, 10년간 습관을 들여놓고 1년만에 자유로워지려고 하니까 순전히 수행도 욕심으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꾸준히 해라’고 하신 거예요. 여러분들은 욕심으로 하기 때문에 바짝 애썼다가, 안 되면 ‘에잇, 모르겠다’고 포기했다가, 이걸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단박에 되는 게 아니니까 애쓰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꾸준히 해 나가셔야 돼요. 이런 관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여러분들은 지금 뭐든지 다 욕심으로 하는 거예요. 돈을 버는 것도 욕심으로 하고, 공부도 욕심으로 하고, 수행도 욕심으로 하는 거예요. 백리 길을 가려면 한 발, 한 발 걸어서 가야 되는데, 한 열 발쯤 가놓고 ‘아직도 못 왔나? 에잇, 이래 갈 바에야 안 가는 게 낫겠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공부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인도 현지까지 온 거예요, 연습하려고. ‘부처님께서 더위도 피하지 않고 추위도 피하지 않고’ 이런 말이 경전에 많이 나오는데, 그 추위가 어떤 추위인지 오늘 보셨죠?”

“(청중들) 예.”

“또 여름에 와서도 그 더위가 어떤 건지를 봐야 부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런 추위와 더위에 부처님이 어떤 자세를 가졌기에 부처님은 추위도 피하지 않고, 더위도 피하지 않으셨을지 이해가 조금이라도 되지요. 우리는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 되잖아요. 잘 안 되니까 우리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사는 건데, 그것을 넘으려면 연습을 해서 넘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야구선수 보면 야구하고 싶고, 농구선수 보면 농구하고 싶고, 이런 식으로 사는데, 한 선수가 그러한 역량을 발휘하려면 무릎이 까지고, 발등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공짜로 먹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너무 욕심을 내지 마세요. 지금 상태도 괜찮아요. 그 정도도 다 괜찮아요. 그러나 조금 더 개선하고 싶다면, 꾸준히 그런 쪽으로 나아가세요. 그런 만큼 변하니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욕심으로 하니까 기대만큼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포기하죠. 왜? 여러분들은 원인을 짓는 것과 결과가 ‘언발란스’예요. 노력은 10쯤 해 놓고 결과는 100을 바라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도 다 지금 잘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기대가 너무 큰 거예요. 여러분들이 한국에 살다가 이 인도로 와서 공항에서 자고, 오늘 같이 추운데 가서 줄 서고,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닌데 나이가 육십이 되어서 줄 서서 다니고, 쫓아가고, 기다리고, 이러는 것도 여러분들한테는 굉장한 일이에요.(모두 웃음) 제가 봤을 때 잘하지는 못 하더라만.(모두 웃음) 그래도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하는 그 자체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에 따른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볼 땐 여러분들이 잘은 못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특한 거예요. 제가 원하는 만큼은 안 돼도요.(모두 웃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특해요. 요즘 한국인들이 이런 데 와서 이런 식으로 다니겠어요? 아무도 안 그래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잖아요. 제가 하도 ‘너희들은 수행자다’고 세뇌를 시켜서(모두 웃음)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라도 연습을 해 보는 거지, 안 그러면 벌써 불만을 터뜨리는 등 난리가 났을 거예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이렇게 한 번 연습을 해 보는 거예요. 이렇게 한 열흘 지나고 보면, 지금은 이게 굉장히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폭신한 데 자나, 의자 깔아놓고 자나, 처마 밑에서 자나, 잘 때, 그때의 문제지, 자고 나면 똑같아요.알았어요?”

“(청중들) 예.”

“음식 먹을 때 그때 입맛이 문제지, 먹고 나면 옥수수 먹으나 빵 먹으나, 먹고 나면 배부르고, 다음 날 되면 다시 배고파지는 건 다 똑같아요. 인생이라는 게 그래요. 호텔에서 보름 자나, 순례자 숙소에서 보름 자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 안 죽고 살아만 있으면 다 똑같아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이런 걸 보면서 여러분들이 교훈을 얻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왜? 첫째, 지금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지금 힘든 게 반드시 나중에 나쁜 게 아니거든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여러분들이 이걸 극복해 보려고 하겠어요? 안 하지요. 저랑 같이 와서 이렇게 하니까 극복을 하지, 자기네끼리 와서 하라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모두 웃음) 안 하지요. 그 다음에, 지금 좋다고 나중까지 좋은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편한대로 호텔에서 묵으며 돌아다니면 갈 때 아무 것도 자각한 게 없을 거예요. 왜? 여기서도 한국에서 살 듯이 살다 가면 무슨 자각이 되겠어요? 다른 걸 보고, 다른 환경에 부딪쳐 봐야 자각이 되지요. 여러분들은 자기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사는 남자들 꼬라지를 보니 ‘아이고, 우리 남자가 저들보다는 낫다’든지,(모두 웃음) 하다못해 이런 자각이라도 생기는 거예요.

여기서 좋으면 좋은 대로 모범이 되고, 나쁘면 나쁜 대로 반성이 되기 때문에 관점만 잘 잡고 있으면 환경이 좋으면 좋은 대로 경험이 되고, 나쁘면 나쁜 대로 경험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온갖 사고가 나도 저한테는 그게 다 경험이에요. ‘아, 이건 내가 고려를 못 했구나’, ‘아, 이럴 수도 있구나’, ‘다음에는 이 체크해야지’, ‘이런 건 먼저 체크해야지’ 이런 걸 알게 되니까요. 잘 되면 잘 되어서 좋고, 잘못 되면 우리의 역량이 늘어나게 됩니다. 잘못된 걸 체크해서 시정하면 역량이 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든 상황에 처하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갔더니 그런 상황이 벌어진 거고, 그걸 통해서 내가 상처를 입을 거냐, 거기서 경험적 교훈을 얻을 거냐 하는 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예요.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안개가 끼는 걸 내가 선택할 수는 없잖아요. 날씨가 추울 걸 대비하거나 안개가 끼니까 내가 어떤 대비를 할 거냐, 하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있지요. 보름동안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여러분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계속 살아야 돼요. 그런데 그 환경 속에서 행복할 건지, 불평만 할 건지는 여러분들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거예요. 호텔 등 숙소는 지금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가 없잖아요. 이 여행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내일 수자타아카데미를 가게 될 텐데, 숙소가 교실로 배정되면 배정되는 대로, 1명 숙소에 배정되면 배정되는 대로, 10명 숙소에 배정되면 배정되는 대로 지내야지, 이건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 조건 속에서 나를 위해 어떤 교훈을 얻을 거냐는 건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거예요.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선택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걸 지금 이렇게 다니면서 연습하는 거예요. 부다가야를 가느니, 룸비니를 간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는 지금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런 핑계라도 없으면 연습이 되겠어요? ‘내일 당장 한국으로 가자’고 할 텐데.

여기까지 왔는데, 성지는 다 돌아봐야 될 거 아니에요. 돌면서,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괴로움도 맛보고, 기쁨도 맛보고, 성질도 내는 등 이런 저런 걸 다 경험하면서 자기를 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며칠 살다보면 남은 나를 금방 알아요. ‘아이고, 저 사람성질 더럽네’, ‘저 사람 성질 급하네’, ‘저 사람 봐라. 밥 먹을 때는 딱 숟가락만 들고 나타나네.’(모두 웃음)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아는 건 조금 더 어려워요. 자기는 늘 자기와 함께 있기 때문에 잘 알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는 자기에게 속고 살거든요. 그래서 타인의 눈에서 내가 나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열흘 같이 다니면 내가 저 사람에게 투영이 되고, 저 사람으로부터 반사되어서 나에게 돌아옵니다. 저 사람은 나를 알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나에게 틱틱 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분 나쁜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상대를 통해서 내가 조금씩, 내가 나한테 속은 부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몰랐던 부분도 알게 된다는 거예요. 내가 몰랐던 부분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처음에는 좀 억울하지요. 기분도 나쁘고. 그런데 결국 시간이 흐르면 나를 조금씩 더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저녁에 나누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야 돼요.

성지를 다니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거야 다른 여행사를 통해서 와도 돼요. 그러면 이보다 훨씬 더 편하게,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이 다닐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는 짜인 프로그램에 따라 다니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보는 연습을 해서 자기가 자기를 더 많이 알아야 됩니다. 자각해야 됩니다. 누가 ‘네가 어떻다’거나 ‘너는 성질이 더럽다’라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모두 박수).”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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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만 보지 말고 마음의 풍경도 보는 순례가 되세요." / 법륜스님의 하루 20180106

스님의 하루 2018.02.03 16:00

"바깥만 보지 말고 마음의 풍경도 보는 순례가 되세요."

2018.1.6 제 29차 인도성지순례 1일째_오리엔테이션

오늘은 드디어 대한항공, 아시아나, 에어인디아, 타이항공으로 각각 나누어져 출발했던 제29차 인도 성지 순례객들이 바라나시에서 함께 모입니다.

각 항공편에 따라 인천에서 바라나시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조금씩 다른 일정을 1박 2일 동안 가졌는데, ‘인도’라는 나라를 몸으로 조금씩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항공사의 오버부킹으로 순례팀과 떨어져 겨우 마련한 다른 비행기 편으로 바라나시에 도착한 다섯 명의 순례객, 호텔에서 공항 간 예약한 단체버스를 타려고 보니 ‘스쿨버스’가 도착해 있었다는 순례팀, 인도인 운전사가 차를 마시러 입구를 잠가 두고 가버려 잠깐이나마 버스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는 순례팀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한껏 체험하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스님은 전체 순례객 중 가장 먼저인 12시 30분, 바라나시 공항에 도착한 75명의 순례객들과 뒤를 이어 도착한 100명의 순례객들을 맞이하여 사르나트 박물관을 안내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아쇼카 왕이 만들었던 석주의 꼭대기 부분에 있었던 네 마리의 사자상이 유명하여 사르나트를 찾는 사람들이 꼭 들르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순례객들은 내일 사르나트 일정 중에 방문하게 되는데 스님은 오늘 일찍 도착한 순례객들과 함께 조금 여유를 가지고 둘러 보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저녁 6시 50분, 400여 명의 순례객이 모여 인도식으로 마련된 저녁 식사를 시작으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습니다.

“...... 이곳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계산 방식이 다릅니다. 택시를 탔는데 기사아저씨가 길을 잘 몰라서 돌아가면 우리는 돈을 깎아주든지 할텐데, 이곳에서는 더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돌아오는 만큼 기름이 더 들었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내가 볼일이 있어서 아저씨를 기다리게 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돈을 더 주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을 쓴 건 비용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중 웃음)


참가자들의 지역별 소개 순서가 먼저 있었습니다. 일본, 하와이, 독일, 영국, 미국 등에서 순례를 함께 하기 위하여 온 도반들의 소개에 서로 박수로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 참가자들의 지역별 소개 순서가 먼저 있었습니다. 일본, 하와이, 독일, 영국, 미국 등에서 순례를 함께 하기 위하여 온 도반들의 소개에 서로 박수로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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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문화차이가 있으니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화가 많이 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한 편인데, 이곳은 우리와 문화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언어습관도 우리와는 다릅니다. 이곳 사람들이 ‘노 프라블럼’이라고 하면 우리식대로 ‘문제없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여기의 ‘노 프라블럼’은 ‘내가 한 번 해보겠다’는 뜻이에요. (대중 웃음) 그리고 뭔가 잘못했을 때에도 죽을 죄를 짓지 않고서는 ‘쏘리’라는 말을 잘 안 합니다. 그냥 변명을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도 계속 우리 방식으로 생각하면 화나기 쉬워요.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도 계획대로 되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속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는 사뭇 달라요. 장소 이동을 하기 위해서 차를 빌렸는데 처음에는 100루피로 하기로 했다가 가는 도중에 150루피를 달라고 하기도 해요. (대중 웃음) 그럴 때는 가는 도중에 ‘아까 100루피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하고 따질 것 없이, 그냥 목적지에 내려서 100루피만 주고 가면 됩니다. (대중 웃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장사꾼들은 밑져야 본전이니까 계속 찔러봐요. 그럴 때는 아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가는 도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고 따져서 인도 사람들과 싸우는 경우가 많아요. 그걸 미리 알고 조금 느긋할 필요가 있어요. 가는 도중에 찔러봐도 ‘알았다 알았다’ 해놓고 나중에 주기로 한 만큼만 주고 가면 됩니다. (대중 웃음)

웬만한 경우에는 한두 번 찔러보고 그냥 관둡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 그냥 찔러본거구나’하고 알면 돼요. 그런데 어쩌다가 끝까지 따라오는 경우가 있어요. 주기로 한 만큼만 주고 떠나려고 하는데 집 앞까지 쫓아와서 더 달라고 하는 경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까 택시 이야기에서처럼 내가 보기에는 내가 준 것이 합당한 것 같은데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비용이 더 들었거나 하는 뭔가 이유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이나 문화가 많이 달라요. ‘노 프라블럼’이라고 해서 마음을 너무 놓지 말고, 또 가다 보니 우리가 가려고 한 곳이 아니면 거기에서 새로 출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인도 여행에서는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계획을 안 세워도 되느냐하면 우리가 단체로 움직이는 만큼 계획 없이 움직일 수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계획대로 진행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지치게 되고, 그렇다고 인도 현지에 맞추면 진행이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춰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현실에서 부딪치는 상황들은 인도식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제가 인도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방법입니다.

인도성지순례 기간을 함께 할 버스 드라이버와 조수(컨덕터) 소개도 있었습니다. 17일간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분들의 역할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박수를 보냈습니다. ▲ 인도성지순례 기간을 함께 할 버스 드라이버와 조수(컨덕터) 소개도 있었습니다. 17일간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분들의 역할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박수를 보냈습니다.

준비는 한국식으로 하고, 현장 상황은 인도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내일 아침 5시에 출발하기로 했으면, 인도에서는 5시에 맞춰서 차가 오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대중 웃음) 지금까지의 경험을 비추어보면 5시에 맞춰서 온 경우는 열에 한두 번이 채 안 되고, 대부분 6시 즈음에 와요. 그렇다고 우리도 ‘나가봐야 추위에 떨기만 하니 6시에 나가자’고 하면 계획 추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획에 맞춰서 5시에 나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차가 늦어지는 것은 현지 사람들의 사정이고 우리는 5시에 출발하기로 했으면 5시까지 나가는 거예요.

일단 시간 맞춰 나간 다음 밖에 차가 없으면 전화를 해요. 1시간 전에 전화를 하면 대개 곧 나간다고 하고, 30분 전에 다시 한 번 전화를 하면 이미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로 1시간을 기다려도 잘 안 옵니다. (대중 웃음) 중국집에 음식을 시키면 음식을 하는 동안에도 조금 전에 출발했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곳의 문화는 이곳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나가봐야 차도 안 올텐데’ 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정토회는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빈틈없이 진행을 하고, 현지 사정상 생기는 일들은 또 그대로 수용합니다. 차 가격이나 시간 약속 등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거의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서로 서명한 서류가 있어도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우기는 정도예요. (대중 웃음) 학교를 짓는 곳에는 예전에 서명한 서류가 다 있는데도 아직까지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