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울산 불교방송 개국 10주년 행사에서 즉문즉설을 하였습니다. 법륜스님이 온다는 소식에 울산 KBS홀에 600여 명이 강연장으로 모였습니다. 스님이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은 특유의 환한 미소로 관객들을 둘러본 후 첫인사를 건넸습니다.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서 특히 테라밧다의 위빠사나 수행 같은 것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만으로는 인간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이 가졌던 문제의식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문제의식과 동일해졌습니다.

첫째, 복을 구하는 종교로서의 불교는 유럽이나 미국인들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종교로는 기독교가 이미 있기 때문이에요. 둘째,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그들에게 굉장히 심오함을 주긴 하지만,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은 서양 철학도 이미 상당히 발달돼 있어요. 그래서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그들이 혹할 정도로 구미를 당기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셋째, 수행으로서의 불교, 즉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이 길은 그들로서는 정말 새로운 만남이고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종교로서의 불교나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수행으로서의 불교, 즉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고뇌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모든 고뇌가 사라진 경지를 불교용어로 '열반', '니르바나'라고 말합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경지를 해탈이라고 말해요.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생극락이 아니고, 복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생활 속 표현으로 쉽게 말하면 지속 가능한 자유와 행복을 증득하는 거예요. '과연 나는 행복한가?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

‘지속 가능한’ 자유와 행복이라고 제가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즉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일어나는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다시 욕구가 더 커지게 되면 불충족이 따르고, 그러면 다시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원하는 대로 될 수 없으면 다시 속박을 받게 돼요. 그래서 이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돌고 도는, 즉 윤회하는 거예요.

윤회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괴로움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욕구가 충족이 돼서 얻어지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돼서 이루어지는 들뜬 즐거움은 열반이 아니에요.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말로 '지속 가능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이 수행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경지로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잘 살피는 것’이에요. 부처님이 6년 고행하셨던 보드가야 근교에 제가 인도인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곳 학교 선생님 12명을 한국에 초청해서 견학을 시켰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 물어보았어요.

'한국에 와서 불편한 건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다 좋았습니다.' '먹는 것은 어땠느냐?' '좋았어요.' '자는 것은?' '좋았어요.' '날씨는?' '이 정도면 아주 시원합니다.' 지금 인도는 46도, 47도 이렇게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30도, 32도 이런 건 시원한 축에 들어가요.(웃음)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어요. '그래도 좀 불편한 게 있으면 한번 말해봐라.' 그랬더니 '화장실이 제일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어떤 화장실이 불편했을까요? 수세식 좌변기 화장실이 불편했다는 거예요. 문경 정토회 수련원에 있으면서 제일 좋았던 게 화장실이래요. 거기는 우리가 환경운동한다고 화장실을 재래식으로 만들어놨습니다.(웃음) 그러니까 거기가 제일 좋았다고 해요. 그런데 문경 수련원에 온 수련생들에게 제가 '여기 1박 하면서 무엇이 제일 불편했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1번이 화장실이에요.(웃음)

우리가 재래식 화장실을 쓸 때 불편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이 재래식 화장실에서 왔다고들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화장실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는 곳에 화장실을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하느냐? 사용도 불편하고 또 냄새도 많이 난다.' 이 불편한 마음이 화장실로부터 오는 것이고 화장실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불만이 생깁니다. 이 불평과 불만이 지속되면 결국은 미움이 되고 원망이 돼요.

그러면 이 불편한 마음이 정말 화장실로부터 오는 걸까요? 그러면 왜 인도 청년들은 우리가 말하는 수세식 좌변기가 불편하고 이 재래식 화장실이 제일 좋았다고 말할까요? 그러면 이들의 불편이 정말로 좌변기 화장실에서 오는 걸까요?

김해공항이나 인천공항에 가보면 화장실에 앉아서 앞을 한 번 보세요. 그림이 두 개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변기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고 하나는 변기 위에 올라가서 쪼그려 앉아 있는 그림이에요. 변기 위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림에는 X표를 그려놓고, 의자처럼 앉아 있는 그림에는 O를 그려놨어요. 변기 위에 쪼그려 앉지 말라고 그림을 붙여놨다는 것은 그렇게 앉는 사람이 있다는 거잖아요. 동남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일하러도 오고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오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신발을 신고 그 위에 올라가니까 가끔 변기에 신발 자국이 있는 경우도 생겨요.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변기가 불편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불편이 화장실로부터 오는 걸까요, 화장실을 사용하는 나의 습관으로부터 오는 걸까요? 나의 습관으로부터 온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예.”

“마음이 불편한 건 맞지만 '이 불편함이 밖에서 오는 거다. 화장실 때문에, 너 때문에 오는 거다' 할 때는 불편한 마음에서 불평과 불만으로 옮겨갑니다. 이게 괴로움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나의 습관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이 불편한 마음을 살피면서 '아, 이게 내 습관으로부터 오는 거구나. 이게 나로부터 일어난다'하고 알아야 해요. 이때 '나'라는 것은 나의 습관이에요.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업식’, 인도 말로는 ‘까르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알면, 불편한 마음은 일어나도 이 불편한 마음이 불평이나 불만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불편한 마음이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냥 사라져요. 이렇게 눈을 밖으로 돌리지 않고 눈을 안으로 돌리게 되면 불편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게 수행으로서의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안심입명의 도는 밖으로 찾아 헤매서는 안 돼요. 다른 말로 하면 부처를 밖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안으로 찾으라고 하니까 내 안에 부처가 어딘가에 있어서 찾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또 있어요. 바로 자기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스님은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비교하며 수행으로서의 불교의 관점에 대해 다양한 비유와 예시를 통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청중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 “수행을 통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질문을 통해 한번 공부해보겠습니다.”라는 말씀으로 질문을 받기 시작하였고, 청중들의 눈빛에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오늘 강연에는 총 다섯 명이 질문했습니다. 중학생 아이가 휴대폰에 너무 빠져 고민이라는 40대 여성, 결혼하고 싶은데 내가 좋으면 상대가 싫어하고 상대가 좋아하면 내가 싫다는 30대 남성, 스트레스가 많은 30대 아들을 힐링을 못 해줘서 고민이라는 70대 여성, 퇴직 후 분노조절장애 치료받으러 가야 하는데 어찌할지 고민이라는 70대 남성, 밥벌이하게 된 후에는 ‘사람 구실’을 하라고 하셨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20대 남성, 이렇게 소소하지만 남에게 꺼내놓지 못한 고민을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24살 직장인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일을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학교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비를 모았고, 학비를 천만 원 정도 모아서 경희대학교를 졸업했어요.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냈고,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울산에 있는 좋은 회사에 취업하게 됐습니다.(모두 박수)

박수를 받고 싶어서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질문자 웃음, 모두 웃음) 저 같은 경우엔 어렸을 때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까 그게 저한테 참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 집, 제 차, 생활비, 공과금, 보험료 이런 걸 다 스스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 같은데,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면 제가 지금은 여유가 좀 되니까 앞으로 뭘 하면 더 좋을지도 궁금합니다.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 20대 청년들에게 먼저 자기 밥벌이를 먼저 하라고 하시는데, 그걸 하고 난 다음에는 뭘 하면 좋을지 여쭤보려고 이 자리에 처음 나왔습니다.”(모두 박수)

“예, 자기 밥벌이를 하고 있는 건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내가 내 밥벌이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에요. 그건 새도 하고 토끼도 하고 다람쥐도 하고 다 하니까요.(모두 웃음) 그건 기본 수준이에요. 동물로서의, 생명체로써의 기본을 해야 하는 거예요. 한편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자기 밥벌이를 못한다면 그건 다람쥐보다도 토끼보다도 못한 수준이에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지금 잘못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무슨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먹고사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생태계라고도 하는 자연계를 기준으로 해서 자연계보다도 못한 삶이 있고, 자연계 수준의 삶이 있고, 이 자연계보다 높은 수준의 삶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제 밥벌이를 제가 해요. 그렇다고 동물들이 남을 도와주거나 이런 건 없습니다. 제 밥벌이도 제가 못하면 동물보다 낮은 수준이고, 제 밥벌이를 제가 하면 동물 수준이에요. 동물 수준이란 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남을 돕는 수준이 되면 동물보다 나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늘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해요. 이걸 종교적으로 얘기하면 이렇게 도움을 받고 살면 죽어서 인간계 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아귀, 축생, 지옥, 이렇게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어요.

왜 내 인생을 내가 못 살고 하느님, 부처님에게 도와 달라 그래요? 토끼도 제 짝 찾아서 새끼 낳는데, 사람이 결혼하는데 왜 그걸 부처님한테 해달아 그래요? 부처님은 결혼 생활을 하다가 떠난 분인데 그분께 왜 결혼 생활을 하도록 도와달라고 해요? 부처님은 왕위를 버린 분인데 왜 나도 왕처럼 되도록 도와달라고 해요? 그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치에 안 맞아요. 왜 우리가 거지처럼 자꾸 도움을 얻으려 할까요?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을 얻어서 사는 사람이 돼서는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받으려 들고, 남에게 의지하려 들고, 도움을 받으려 해요. 이게 범부 중생입니다. 이게 짐승보다도 못한 수준이에요.

질문자는 이제 자기 삶을 자기가 살고 있으니까, 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려면 다른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줘야 해요. 재정적으로 베풀어주든, 남을 사랑해주든, 남을 이해해주든, 남의 의지처가 되어주든,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해주세요. '저 사람은 저래서 저렇구나, 저래서 화를 내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상대를 이해하고,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내가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때 나는 사람으로서 괜찮은 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대통령이 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돼야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때 그게 잘 사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관점은 그래요. 질문자가 못난이가 아니니까 더 이상 누구한테 동정을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남을 동정해줘야지, 왜 동정을 받습니까? 남을 도와줘야지, 왜 내가 손을 벌립니까? 내가 남을 좋아하면 되지, 왜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기다립니까?

우리가 산에 가서 산을 좋아하고 바다에 가서 바다를 좋아하면 바다나 산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잖아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내가 좋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해서 괴로운 게 아니라 사랑 안 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사랑을 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날 사랑해라' 하는 요구 때문에 괴로운 거지, 사랑하는 데는 부작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미움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미움이 생깁니다. '내가 사랑했는데 너는 내가 한 것보다 덜하지 않느냐' 이렇게 장삿속으로 계산해서 섭섭해하고 미워지는 거예요.

그러니 사랑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랑하세요. 이해받으려 하기보다는 이해하세요. 도움받으려 하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의지하기보다는 의지처가 되어주는 사람이 되세요. 이게 바로 보살입니다. 이것은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누굴 위해서 하는 길이 아니에요. 이게 바로 진정으로 나를 위해서 하는 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을 도와주고, 또 대가를 받으려 하지 마세요. 그게 무주상보시에요. 이건 나를 위하는 길이에요.

지금 질문자가 자립해서 산다니까 아주 좋아요. 그러나 자립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산다면 사람 이상의 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재미있었어요?”

“예!”

“유익했습니까?”

“예!”

“예, 재미가 있다는 말은 지금이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가 없으면 졸려요. 애들이 게임을 하는 건 재미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미있어하는 걸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런데 재미는 있는데 유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 놓고 보면 허전해요. 나중에 손실이 생긴다 이 말이에요. 반면, 유익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으면 지금 지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지금을 희생해도 안 되고, 지금을 위해서 나중을 희생해도 안 돼요. 그 둘을 함께 가져가야 해요.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으려면 재미도 있고 유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너는 좋은데 내가 손실이면 내가 오래 못 참습니다. 반대로 나는 좋은데 네가 손실이면 상대가 오래 못 견딥니다. 우리의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해요. 이것이 상생이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길' 이게 붓다가 가르친 길이고, 이것이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내에게나 남편에게나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바라는 마음을 내기보다는 이렇게 관점을 가져보세요.

'그래도 내가 당신 남편이 됐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나를 안 만난 것보다는 당신이 날 만나서 조금 도움이 됐다고 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이 이런 관점을 갖는다면 보람 있는 삶이 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오늘 행사는 불교방송 10주년 행사라 불교인들이 많이 참가해서인지 스님의 한 말씀 한 말씀에 아주 집중해서 듣는 분위기였고, 자주 폭소가 터졌습니다. 실생활과 밀접한 사례 속에 불법이 쉽고 재미있고 녹아나 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가는 청중들은 “스님께서 재치가 있으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많이 웃었어요.”, “정년퇴직한 분의 질문이 내 상황 같아서 와 닿았어요.”, “지난번에도 들었는데 지난번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생활형 답변이에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질문들이라 좋았어요.”라고 소감을 전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과 환한 웃음을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진리는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 쉽고 재미있는 것. 오늘도 함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정월향, 손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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