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7회 지방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아침부터 평화재단 강당에서 법사 수계를 받는 26명의 행자 교육자들을 만나 한 명 한 명 수행을 점검하였습니다. 그리고 수행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수계식 때까지 교육 마무리를 잘 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 후 스님께서는 평화재단 연구원 운영위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면서 어제 있었던 북미 정상회담과 오늘 실시된 6.13 지방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북미 양정상이 오랜 불신과 적대관계를 내려놓고 평화를 위해 만났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와 공동성명에 이어질 평화의 로드맵이 주요 화제였습니다.

이후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평화와 공존의 방향으로 공고히 하기 위해 평화재단 연구원에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해나갈지 연구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유럽연합과 아세안의 경험 등을 참고하고 남북의 현실과 관계, 한반도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등을 두루 살피며 동아시아 신 안보질서 개편이라는 설계도를 마련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회의 일정만 있어, 지난 일요일 불대 특강에서 있었던 ‘내려놓는 법’에 대한 즉문즉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부끄럽긴 한데요, 불교대학에 와보니까 ‘놓아버려라, 놓아버려라’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놓으라는 건지, 그리고 좀 쉽게 놓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질문자 웃음, 모두 웃음)

“글쎄,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요. 그 사람들이 뭘 내려놓으라고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모두 웃음) 질문자가 어떨 때 놓아버리라고 해요?”

“그냥 도반들이 둘러앉아서 가정이며 남편 같은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놓아 버려라’라고 해요.(모두 웃음) 그런 얘기를 가볍게 하기도 하고, 진지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그런 건 지나가는 말로 들으세요.(모두 웃음) 놓아야 할 대상이 있을 때도 있어요. 예를 들어 아까 질문하신 분이 그렇죠. ‘남편이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 내가 어디 가자는데 같이 안 가준다. 그래서 지금 내가 괴롭다. 같이 살까 말까 망설여진다’ 이렇게 얘기했잖아요. 그럴 때는 남편이 나하고 얘기도 나누고, 나하고 산책도 좀 하고, 늙으면 나하고 여행도 같이 다녀주길 바라는 질문자의 욕구가 있어요. 그런데 질문자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에잇, 그러면 헤어져버리자’ 여기까지 생각이 가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또 헤어지려니까 자식도 있고 뭐도 있고 또 복잡하게 걸려 있어서 고뇌가 되는 거예요.

“남편이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다들 성실하다고 하지만, 집에만 들어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으면 그걸 보는 게 더 울화통이 터질 수도 있잖아요. 그걸 놓아주라고 하시면...”(모두 웃음)

자, 이분은 ‘놓아라’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셨어요. 여러분들, 자꾸 ‘놓아라’ 이런 소리 좀 하지 마세요.(모두 웃음) 처음 온 사람에겐 진짜 이상해 보여요. 무슨 말만 하면 ‘놓아라, 놓아라’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뭘 놓느냐’고 묻잖아요.(모두 웃음)

놓을 게 없으면 안 놓아도 돼요.(모두 웃음) 이전에 질문하신 분은 남편을 놓을 게 좀 있는데 지금 질문자 남편은 안 그렇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놓을 게 없는 사람한테 자꾸 ‘놓아라, 놓아라’ 하니까 저분이 지금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거예요.(모두 웃음)

여기 불덩어리가 있는데 내가 이걸 딱 쥐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뜨겁겠죠. 뜨거우면 어떻게 합니까?”

“놓아요.”(모두 크게 대답, 웃음)

“손이 막 타 들어가는데 불덩어리를 쥐고 있으면서 ‘어떻게 놔? 어떻게 놔?’ 이렇게 묻지 않아요. 쥐자마자 ‘앗, 뜨거워!’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놓았잖아요. 그런데 누가 물어봤어요. ‘어떻게 놓았니?’(모두 웃음) 질문자한테 마이크 다시 주세요.(모두 웃음) 어떻게 놓았어요?”

“자동으로 놓아졌습니다.”(질문자 웃음)

“앞의 질문자 얘기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남편이 엄청 뜨거우면 자동으로 놓아질까요, 안 놓아질까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이게 아직 좀 뜨겁기는 하지만 쥐고 있을 만하니까 저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모두 웃음) ‘뜨겁다’ 하는 것도 있고, ‘갖고 싶다’ 하는 것도 있고, 두 가지가 다 있는 거예요.

갖고 싶은데 너무 뜨거우면 갖고 싶은 것보다 뜨거운 게 더 강하니까 탁 놓아버려요. 그런데 뜨거운 것보다 갖고 싶은 게 더 강하면 뜨거워도 쥐고 있어요. 쥐고 있으면서 자꾸 뜨겁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놓아라’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또 이렇게 물어요. ‘어떻게 놓는데요?’(모두 웃음) 이 말은 놓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예요, 덜 뜨겁다는 거예요?”

“덜 뜨겁다는 거예요.”(모두 크게 대답, 웃음)

“그러면 이게 방법의 문제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놓는데요?’ 이 말은 갖고 싶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의 욕망은 ‘가질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는 거예요.(모두 웃음)

이걸 욕심이라고 해요. 뭘 많이 갖겠다는 게 욕심이 아니라, 상호 모순되는 걸 동시에 갖겠다는 걸 욕심이라고 해요. 그래서 선(禪)에서는 ‘어떻게 놓습니까?’ 하면 ‘그냥 놓아라’ 이래요. 질문자가 자동으로 놓는다고 한 말이 바로 그냥 놓는다는 뜻이에요. 한자로 ‘그냥’을 ‘방(放)’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냥 놓아라’ 이걸 한자로 하면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냥 어떻게 놔요?’ 또 이렇게 물어요. 이걸 두고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요. 놓아지지 않는 것은 불덩어리가 뜨거운 것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이걸 알아차리면 딱 놓게 돼요. 이걸 못 알아차리니까 자꾸 ‘어떻게 놓는데요?’ 하고 자꾸 방법을 묻는 거예요.

이 걸 소승 교리로 얘기해 볼게요. 이걸 쥐고 ‘뜨겁다’ 하는 것이 고(苦)예요. 괴로움이죠. 그런데 ‘이게 정말 뜨겁다, 이게 정말 괴로움이구나’ 하는 걸 알면 놓겠죠. 고의 본질을 꿰뚫으면 바로 고의 멸(滅)이 바로 됩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에요. 방법을 찾는 것은 문제의 지엽, 말단을 쫓는 거예요.

선에 이런 말이 있어요. ‘개는 사람이 던지는 흙덩이를 쫓고 사자는 사람을 쫓는다.’

흙덩이를 쫓으면 흙덩이는 계속 날아오겠죠. 그런데 사람을 확 덮쳐버리면 단박에 끝이 나요. 이 표현이 바로 본질을 보라는 거예요. 말단을 보지 말고, 지엽을 쫓지 말고, 근본을 보라는 거예요. ‘어떻게 놓는데요?’ 이 말은 말단을 쫓는 거예요. 근본을 쫓는 게 바로 방하착이에요.

어떤 사람이 갖고는 싶고 손은 뜨겁다고 해서 제가 놓으라고 하니까 ‘어떻게 놓아요? 어떻게 놓아요?’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오른손에 있는 걸 왼손으로 옮기세요’ 이랬어요.(모두 웃음) 그러면 이 사람은 이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른손 뜨거운 건 없어졌잖아요. 그리고 물건은 아직도 자기한테 있으니까 해결된 것 같아요.
조금 있으면 다시 왼손이 뜨거워집니다. 또 아우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무릎 위에 올리세요’ 이래요. 왼손 뜨거운 것도 없어졌고 물건은 아직도 자기한테 있으니까 해결됐다며 좋아라 해요. ‘야, 그런 방법이 있었네!’
그런데 조금 있으면 오른쪽 무릎이 뜨겁다고 또 아우성이에요. 그러면 ‘왼쪽 무릎으로 올리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해결이 됐어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또 뜨거워요. 그래서 이제 ‘땅에 내리세요’라고 했어요. 오른손에서 왼손 갔다가, 왼손에서 오른쪽 무릎 갔다가, 오른쪽 무릎에서 왼쪽 무릎 갔다가, 왼쪽 무릎에서 땅에 내려가니까 그때는 무릎에서 땅에 내리기가 조금 쉬워서 무사히 내려 보냈어요. 이제 해결이 됐죠? 그러면 ‘아, 그러니까 적어도 네 단계는 거쳐야 되는구나!’라고 해요.
네 단계가 원래 필요합니까? 필요 없어요. 욕망을 버리지 못하니까 약간의 방편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소승은 이런 단계론이 있고, 대승은 그 단계론을 부정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침에 5시에 일어나겠다고 알람을 맞춰놨어요. ‘따르르릉’ 하는데 누워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벨이 울리는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기도해야지, 일어나서 기도해야지’ 이러면서 못 일어날 때 대부분은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이렇게 말해요.(모두 웃음)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말은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거예요. 일어나고 싶은데 못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이렇게 자꾸 얘기하니까 뭐가 보여요? 일어나기 싫구나 하는 게 보이잖아요.(스님 웃음, 모두 웃음) 그러면 이 사람이 못 일어나는 건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거예요.”(모두 크게 대답)

“그래요. 일어나고 싶은데 못 일어난다고 하는 건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고, ‘내가 지금 일어나기 싫어하는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는 게 본질을 본 거예요.
‘일어나기 싫어하는구나’ 하고 본질을 보면 그다음 선택은 간단해요. 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자면 돼요. 즉 욕망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과보가 따라요. 아침에 지각을 해요. 야단을 맞아요. 잘못하면 잘려요.(모두 웃음) 그랬을 때 지각을 해서 야단을 맞아도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해요. 과보를 받아야 해요. 잘려도 ‘고맙습니다’ 해야 해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보가 손실이 너무 커요. 대가 지불이 너무 크단 말이에요. 그러면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야 해요. 어떻게 일어나느냐?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모두 웃음) 어떻게 일어난다고요?”

“벌떡!”(모두 크게 대답, 웃음)

“그게 방하착이에요. 그게 ‘놓아라’ 이 말이에요. 싹 일어나버려요. 벨이 울리면 싹 일어나버려요. 그렇게 일어나버리면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라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수행에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노력한다’ 이 말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한다는 말이에요. 이해하셨어요?”
“예!”(모두 크게 대답)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마음을 딱 내서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싹 일어나버려요. 일어나버리면 일어난 뒤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각오도, 결심도, 노력도 필요 없어져버려요. 그런 것들은 다 일어나기 전에 하는 행동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보았자 안 일어났잖아요. 그런 사람은 자는 것보다 훨씬 손해예요. 자는 거는 잠이라도 자지만, 이건 잠도 못 자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과보는 과보대로 받아요.(모두 웃음)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이 사람은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안 일어나도 괜찮아요.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은 자고 과보를 받아버립니다.

그러니까 ‘5시에 기도한다’ 이렇게 정해놨으면 몸이 피곤하든지 안 피곤하든지, 어제저녁에 늦게 잤든지 일찍 잤든지, 비가 오든지 안 오든지 일어나야 해야 해요. 이 것 저 것 자꾸 핑계대면 못 일어나는 거예요. 이왕 정했으니까 5시가 되면 4시에 잤든지 12시에 잤든지 따지지 말고 ‘따르릉!’ 하면 싹 일어나서 기도해버리고, 그래도 졸리면 자면 됩니다.(스님 웃음) 그러면 끝까지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깼다가 또 자는 거니까 손해지 않느냐?’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면 3일 하고 그만두게 되는 거예요.

하기로 했으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날도 하고, 하기 싫은 날도 하고,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나고,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고, 절하고 싶어도 하고, 하기 싫어도 하세요. 잔머리 굴리지 말고요.

그래서 100일이면 100일, 1년이면 1년 정해놓고 해본 뒤 판단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한다’ 이렇게 정하면 안 돼요. 어디까지라고 정해놓고 딱 해보고, 평가를 그때 가서 딱 하는 거예요. 해보고 ‘어, 이건 아니다.’ 하면 그만둬버리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유미경, 손명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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