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는지 날이 흐리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아침이었습니다. 선선한 바람까지 간간이 부는 날이니 농사일하기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스님은 새벽에 두북에 도착하여 휴식한 뒤, 기도 후 아침 공양을 하였습니다. 아침 공양을 하고 있는 중에 문수팀 행자님들과 선주법사님이 도착하였습니다. 여느 때보다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애호박, 완두콩, 치커리, 상추, 방울토마토 등 농작물이 한창 자라는 시기인 만큼 농사꾼이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일손을 도와주러 온 것입니다.

공양 후, 스님은 비가 내릴 것을 감안하여 모종해 둔 코스모스와 취를 가지고 웃밭으로 올라갔습니다. 대나무 숲 바로 옆에 마련해 둔 자리에 취를 심었습니다. 대나무 숲 때문에 그늘이 생겨 그늘에도 잘 자라는 취를 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지난 번 김은경 법우님이 모종을 만든 것이라고 일러주며 여리고 작은 취 모종을 조심스레 옮겨 심었습니다.

코스모스는 밭둑에 심었습니다. 모종을 해 두니 잔뿌리가 살아있어 심기가 간편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마다 스님은 코스모스를 밭둑과 밭으로 가는 길가에 심곤 했습니다. 그렇게 심은 코스모스는 온갖 풀 속에도 작은 키를 곧추세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작아보여도 이렇게 심어두면 꽃씨가 날려 코스모스가 퍼지게 되거든.”

올 가을에는 밭둑을 따라 코스모스 한들한들한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대나무 밭에 작은 삽을 가지고 가서 죽순을 캤습니다. 오동통하게 솟아 오른 죽순에 삽을 탁 넣어 올리면 하얀 속살의 죽순을 캘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나무를 잘라 낸 곳에 죽순이 많이 있다’고 하며 어디를 살펴봐야 죽순을 캘 수 있는지 알려주었습니다. 한창 죽순이 나오는 시기라 금세 한 바구니 가득 채워졌습니다.



방울토마토, 애호박, 오이, 옥수수 등의 곁순 따주기와 수박과 당근에 물주기, 브로콜리 한랭사 터널 고쳐주기, 상추, 치커리, 겨자채 수확하기를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스님은 공동체 식구들에게 맛보여 주도록 하자며 텃밭의 상추도 잘 골라 땄습니다. 특히, 텃밭 온실의 상추는 흙이 거의 묻어있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상추를 따며 말했습니다.

“어제 서울 공동체 아침 발우공양에 낸 상추는 신선하게 하려고 일부러 물기에 닿지 않게 해서 바로 보냈더니 공양당번이 씻은 것인 줄 알고 그냥 냈더라. 그런데 습기를 머금지 못해서 좀 시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낮에 땃기 때문에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씻어 물기를 머금은 채 포장했습니다. 행자님들이 상추를 큰 대야에 한꺼번에 넣고 건져내려고 하자, 스님은 “한꺼번에 상추를 넣어버리면 멍이 들고 잎이 부러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고 하며 씻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워낙은 신선하게 보내려면 따는 즉시 저온저장을 하면 신선도가 유지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저온저장고가 없으니 물기를 머금은 채 운송하는 방식으로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큰 대야에 물을 충분히 담고 상추는 너무 많지 않게 적당하게 넣어 한 장씩 줄기부분이나 흙이 묻어 있는 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씻어내고, 결을 맞추어 차곡차곡 쌓은 다음, 물기를 탈탈 털어서 포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웃밭의 상추, 치커리, 겨자채와 텃밭의 상추를 씻어 포장하니 큰 박스로 두 박스가 되었습니다. 구멍 뚫린 비닐에 차곡차곡 싼 다음 아이스 팩까지 넣어 포장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비가 흩뿌렸다 멈췄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스님은 점심 공양을 한 후, 텃밭의 배나무, 매실나무에 잔뜩 엉겨붙어있는 진드기를 제거하려고 농약 대신 소주를 구해다 뿜어주며 손으로 씻어내었습니다. 잎을 한 장 한 장 씻어내니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한 바구니 가득 따온 죽순도 둘러앉아 다듬었습니다. 도르르 말린 겉껍질을 벗겨내고 벗겨내서 큰 통에 차곡차곡 담아두었습니다. 죽순을 잘 몰라 묻는 행자님에게 스님은 “장아찌도 담고, 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수도 있다” 하며 어릴 때 먹곤 했던 죽순 요리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어 지난 16일 대전에서 열린 행복한대화 즉문즉설 강연 내용 중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눈치를 보거나 남들을 의식하는 편이긴 했는데 처음에만 그럴 뿐 금방 잘 적응해서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때 학교 폭력을 당한 경험 이후로 남을 의식하는 경향이 심해졌습니다. 낯선 사람 앞에만 서면 많이 떨리고, 내가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계속 의식하고, 상대가 화를 내는 게 무섭고, 있는 그대로의 편한 말투나 행동을 드러내면 싫어할까 봐 두렵고, 주위 사람들이 수군대거나 웃으면 저를 비웃는 것 같습니다. 또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제게 부당한 행동을 해도 말 한 번 제대로 못합니다.

지금은 노력해서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버릇이 남아서, 조금이라도 평가를 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머릿속으로는 끝없이 ‘나를 싫어해도 괜찮다, 이게 내 모습이다’라고 되뇌지만 그 속에서도 계속해서 남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을 너무 많이 받아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 한 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질문자가 방법을 모르면 제가 방법이 틀렸다거나 이치를 모르고 있다고 지적을 해주겠지만, 질문자는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를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데 안 된다면 계속 연습하는 것밖에 없어요. 뾰족한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내가 어릴 때 뱀을 보고 놀랐다고 해봅시다. ‘뱀은 나를 해치려는 것도 아니고 뱀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뱀만 보면 자꾸 나도 모르게 움찔하게 돼요. 이게 트라우마, 즉 마음의 상처라는 거예요. 과거에 경험했던 것이 상처가 돼서 나도 모르게 현재에 작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움찔 하면서도 ‘아, 이거는 뱀 때문에 오는 문제가 아니고 나의 트라우마 때문에 그렇다’라고 계속 되뇌지만 그렇다고 긴장이 안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질문자가 전문의한테 찾아가서 자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라는 게 의학적으로 알려진 것은 베트남전쟁 이후예요. 이걸 치유를 해야 합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우리 속담도 있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이게 트라우마라는 거예요. 우리가 뱀한테 한 번 물리면 그 트라우마로 인해 그 다음에 풀을 베거나 산에 갈 때 더 놀라지요.

트라우마의 정반대가 뭘까요? ‘교훈’입니다. 뱀을 겁냈는데 뱀한테 한 번 물려보니까 의외로 그렇게 겁낼 일은 아닌 거예요. 물린 곳이 좀 붓기는 해도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면 죽는 병은 아니니까 그 다음부터는 겁낼 필요가 없어요. ‘뱀에게 물리면 그 때 좀 따끔할 뿐이고, 붕대 감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된다. 별거 아니구나.’ 이게 경험이라는 거예요. 이러면 이게 나의 자산이 돼요. 경험함으로 해서 더 거기에 적응력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트라우마가 되면 이걸 경험함으로 해서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이 현실에서 장애가 돼요.

지금 질문자에게는 학교폭력이 트라우마가 됐어요. 우리는 대부분 그런 걸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과거의 사건이 트라우마가 됐다는 걸 알았으니까 치료하면 돼요. 불교용어로 까르마다, 업식이다 하지만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이건 정신질환에 속하는 병이에요. 우리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정도가 크고 작게 다를 뿐이죠. 질문자는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조금 큰 편이고요. 우리는 트라우마가 좀 있어도 사는 데 크게 지장 없는데 질문자는 지금 이 정도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게 핵심이에요.”

“네.”

“그런데 치료라는 것은 병원 치료만이 다는 아니에요. 저 정도로 조금 심하면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해요.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자가 치료도 병행해야 하는데, 수행이라는 것은 자가 치료거든요. 질문자는 병원 치료도 받고, 동시에 자기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 수행도 해야 해요.

예컨대 뼈가 부러지면 깁스해서 응급 치료를 받지만, 깁스를 푼다고 해서 치료가 모두 끝난 게 아니잖아요. 계속 재활치료를 해야 해요. 뼈가 부러졌던 손을 바로 구부리면 얼마나 아파요? 몇 개월 동안 계속 재활치료를 해야 정상적이 되는 것처럼, 질문자도 계속 수행을 해야 해요.

이게 사람들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 내 트라우마 때문에 오는 거니까 내가 사람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때 ‘저 사람 때문이다’라고 밖을 탓하지 말고, ‘또 내 트라우마가 작동하고 있다. 저 사람은 아무 관계가 없다. 내 업식이, 내 까르마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늘 자기를 봐야 해요.

자기를 보면 이게 증폭이 안 돼요. 불안은 있지만, 불안이 증폭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 또 시작이다. 또 내 트라우마가 작동하구나’ 이렇게 자기를 봐야 해요. 병이라는 건 내가 컨트롤이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벌써 긴장부터 되니까요. 그걸 두고 긴장하지 말라고 얘기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긴장하지 말라고 하고, 본인도 안 하겠다고 결심해도 보면 이미 무의식적으로 긴장이 돼버리잖아요. 그렇게 긴장되는 것은 내가 못 막지만 ‘아, 이건 저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라고 자기를 봐야 해요.

이렇게 질문자가 자꾸 연습을 해야 해요. 기도할 때도 ‘저는 편안합니다. 저는 편안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세요. ‘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렇게요.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건 아예 없을 수가 없어요. 여기 한 번 물어봅시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 손 들어봐요. 내리세요.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 손 들어봐요.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봐요.

이것 봐요. 다 같이 앉아 있는데 이중에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절반 좀 넘고,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절반 좀 안 돼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반이 좀 안 되고,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절반 좀 넘고요.(모두 웃음)

개가 낫다, 고양이가 낫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이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걸 내가 싫어하고, 이렇게 서로 다른 거예요. 내가 상대를 좋아해도 그 사람은 ‘난 너 싫어’ 이럴 수가 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데 상대도 ‘나도 좋아’ 이러면 오케이, ‘난 너 싫어’ 하니까 상대가 ‘나도 싫어’ 이래도 오케이예요. 그러나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가 ‘난 싫어’ 이러면 문제가 생기고, 나는 싫다고 하는데 상대가 좋다고 해도 문제가 생겨요.

내가 싫다는데 상대는 좋다며 자꾸 날 따라다니면 어때요? 옛날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고 했지만 요새는 두 번만 찍으면 성추행범이에요.(모두 웃음) 의사 표현을 두 번, 세 번 해봤을 때 상대가 싫다고 하는데도 더 이상 계속하면 상대를 괴롭히는 거예요. 누가 나를 계속 따라오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 것처럼, 내가 상대를 좋아하더라도 상대가 싫다고 하면 딱 거둬야 해요.

그런데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질문자는 굉장한 과대망상증이에요. 질문자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상 사람이 다 질문자를 좋아해야 하잖아요. 그건 부처님도 그렇게 안 돼요. 부처님을 욕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의 최소 절반 이상은 나를 싫어한다’ 이렇게 봐야 해요.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 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질문자는 열에 아홉이 질문자를 좋아하고 한 명이 싫어해도 문제 삼잖아요.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게 정상이에요. 아까 고양이 싫어하는 사람, 개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아요. 내가 아무리 돼지고기가 맛있다고 해도 돼지고기 싫어하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나오는 게 당연해요. 사람을 전부 자기 같이 생각하는 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질문자가 지금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인생이 피곤해지는 거예요.

오늘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와서 법륜스님 강의 듣는다고 좋아하는데, 강의 듣고 나갈 때 ‘도움이 많이 됐다.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지만 ‘그걸 뭐 강의라고 하나?’ 이런 사람도 있어요.(모두 웃음) 아까 앞서 질문자들과 얘기한 것도 나중에 인터넷에 어떻게 올라오는지 보세요. ‘괴로워서 질문했는데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냅다 야단만 친다!’(모두 웃음)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까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 비판을 안 받으려면 제가 강의를 안 해야 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하고 안 만나야죠.

그런데 질문자는 또 사람을 안 만나면 만나고 싶잖아요. 만나면 이런 부딪침은 늘 생기는 거예요. 이게 부작용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에요. 질문자가 좋아하는 사람의 비율을 조금 높이는 것은 노력하면 돼요.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한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까 물어봤을 때 고양이보다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조금 많았죠? 비유를 들자면 내가 고양인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반도 안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절반이 넘어요. 그런데 개는 좋아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고 싫어하는 게 절반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고양이에서 개가 한 번 되어보겠다, 이 정도는 노력하면 가능해요.(모두 웃음)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애초에 그런 건 헛된 생각이라는 이야기에요.”

“네,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여러분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신가요? 트라우마가 교훈이 되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손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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