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어 지난 10일 창원의 늘푸른전당에서 열린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강연 내용 중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화가 나서 교실에서 벌떡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전만큼 화를 내지는 않지만 여전히 제 안에 많은 상처와 분노가 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한테 겉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연락을 끊거나 인연을 끊고 지내왔습니다. 대학생 때는 제 성격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고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는데, 시어머니, 시아버지, 동서와 함께 살았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가 힘들 때마다 인연을 끊는 방법을 택했는데, 시댁과의 인연은 남편과 아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분가를 했지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게 심하게 상처를 받는 일이 생겼고, 그 스트레스로 유산했습니다.

유산 후 산후풍을 겪으면서 6개월 동안 집안에서만 지냈습니다. 그때 스님의 즉문즉설을 접하게 되어 법문을 듣고 명상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가진 까르마로 인해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은 불안하거나 화가 올라오면 ‘이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습관이다. 엄마 역시도 물려받은 습관이었을 것이니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감정 역시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명상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신체 건강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가 마주하고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문제가 뭐예요?”

“앞으로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하고 살아야 할까요?”

“과거에는 괴로웠는데, 법문 듣고 기도를 한 후로는 괜찮아졌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기도하고 살면 돼요.”

“다섯 살 아들이 있고 지금 임신 중인데, 제가 가진 까르마가 제 아들에게도 전해졌을 것 같아서 걱정도 되고 또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게도 전해질까 걱정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게 뭐가 문제예요? (청중 웃음) 자식이 부모를 닮는 건 당연하잖아요. 부모를 닮아야 제 자식이죠.”

“그렇긴 한데, 제가 제 까르마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물론 질문자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겨내고 지금 잘 살고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자식도 나중에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잘 살 거예요. 그러니 걱정할 게 없어요. 자기만 잘 살면 자식들도 잘 살아요.”

“그런데 제 마음 한쪽에서는 다섯 살 아들에게 지난 5년 동안 못 해준 것도 많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좀 잘해줄 수 있을까 하고요.”

“질문자는 부모로부터 까르마를 물려받아서 힘들었고 또 결혼 후에는 시집살이하느라 힘들었죠. 그런데도 지금부터 질문자가 행복하게 살면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도 행복해져요. 그렇지 않고 지금과 같이 계속 힘들게 살면 질문자가 아이에게 아무리 ‘너는 행복해라, 너는 커서 잘 되어라’라고 해도 아이는 힘들게 살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아주 힘들었지만 이제 좋은 법을 만났으니 지금부터라도 웃으면서 살면, 설령 아이가 내 까르마를 조금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까르마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나도 웃으면서 살고 있으니까 그걸 보고 앞으로 내 아이도 기꺼이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우선 나부터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거예요. 과거는 자꾸 들먹일 필요가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내가 행복하게 살면 내 아이는 어떻게 된다고요?”

“행복해진다.”

“네, 행복해져요. 아이가 내 까르마를 조금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보다는 적게 받았을 테니까, 내가 행복하게 살면 ‘까르마를 많이 받은 나도 행복한데 조금 받은 내 아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하고 생각하면 삶의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미 물려준 까르마를 어떡하겠어요? (질문자 웃음) 이미 물려준 건 도로 받아낼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여기 병에 잉크가 떨어져서 물이 흐려졌다면 그 잉크를 뽑아내야 해요, 맑은 물을 자꾸 부어야 해요?”

“맑은 물을 부어야 해요.”

“그래요. 맑은 물을 자꾸 더하면 잉크물이 차츰 희석되어서 결국 어느 순간에는 맑은 물처럼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 것처럼 ‘아이에게 물려준 까르마를 어떡합니까?’ 하고 아무리 걱정을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이미 섞여버린 잉크와 같은 거예요. 반면 지금부터 내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잉크물에 자꾸 맑은 물을 더하듯이 아이에게 계속 좋은 기운을 주는 거예요. 지속해서 아이에게 좋은 기운을 주면 아이가 물려받은 까르마도 차츰 희석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걱정하기보다는 내가 잘 살아야 해요. 아이 걱정할 게 없어요. 나만 잘 살면 돼요. 그러면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저절로 행복해져요.

가난해도 내가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으면 아이는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 없이 자랍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늘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사니까 그 속에서 자란 아이도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는 거예요.

또 여러분들이 늘 아이를 안고 남편 욕을 하니까 아이가 부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고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남편 없이 지냈지만, 열등의식 없이 오히려 아들에게 늘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야, 너는 천제 해모수의 자식이야’라고 말하며 키웠어요. 그래서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주몽은 훌륭하게 자라서 고구려 나라를 건국하잖아요. 따지고 보면 주몽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처녀를 하루 농락하고 도망가버린 사람이에요. 우리 같으면 배신이니, 사기당했느니 하며 살았겠지만, 유화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분은 훌륭한 분인데 무슨 사정이 있어서 못 오시나 보다’하고 생각을 하니까 유화부인에게 해모수는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이 모든 것이 마음이 정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은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는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어떤 모습이 진짜인가?’하고 묻는데, 진짜 모습이라는 건 없어요.

여러분들이 부처님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에게 부처님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부처님이 훌륭한지 아닌지 실제로는 모르잖아요. 제가 절에 들어와서 산 지 이제 50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난 50년 동안 법당에서 기도해도 지금까지 한 번도 부처님이 제 기도에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어요. (청중 웃음) 그런데 여러분들은 절에 1년 정도 다닌 다음에 ‘부처님, 이것 좀 해주세요’ 해놓고 부처님이 해주신다, 안 해주신다 말들이 많아요. 저는 50년 동안 아무것도 안 주셔도 제 마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분께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에요.

법당에 불상으로 앉아있지만 그 불상을 돌로 만들었든 금으로 만들었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분이 살아생전에 이 좋은 법을 깨달으시고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열어주셨기 때문에 ‘당신은 나의 등불입니다’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내가 벌면 되지 그걸 왜 부처님한테 벌어달라고 해요? (청중 웃음) 그리고 결혼할 상대가 필요하면 내가 구하면 되지 그걸 왜 부처님한테 구해달라고 해요? (청중 웃음)

내가 내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빌 일이 뭐가 있어요? 내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내가 알아서 결정하면 되지 다른 존재에게 빌 일이 뭐가 있어요? 어디까지나 자기 인생이잖아요. 자기가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질문자도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다는 건 이해가 가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건 다행이잖아요?”

“네.”

“지금은 그 다행인 게 중요한 거예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있다는 것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예요.

우리 모두 살면서 온갖 경험을 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모든 게 다 나한테 도움이 돼요. 질문자도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 누군가 자기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요즘 학교 선생님들이 어려움을 겪는 게 이런 부분이에요. 학교 다닐 때 담배를 피우고, 연애하다가 걸리고, 사고를 치고 걸려서 정학을 당하던 문제아가 되었던 학생이 반성해서 공부한 후 선생님이 되면 문제아들을 볼 때 금방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해를 넘어서서 자기가 그걸 극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인도할 때 말과 행동에 힘이 실립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고 말을 잘 듣던 착한 아이들이 주로 선생님이 돼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공부 안 하고 나쁜 짓 하는 걸 선생님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해를 못 하니까 야단치거나 학교에서 내쫓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자꾸 자기가 학교 다닐 때의 경험만 떠올리면서 ‘아이가 왜 저러지?’하고 이해를 못 합니다.

살면서 우환을 겪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부러 어려운 경험을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자기에게 좋은 경험이에요. 자기가 경험이 있으니까 아이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엄마는 더한 어려움도 겪었는데 지금 이렇게 잘 살잖니, 그러니 너도 잘 살 거야’ 이렇게 격려할 수도 있어요.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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