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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설

“평생 성경만 보고 살았는데, 불자가 되니 두려움이 생겨요.” 법륜 스님의 답변

2016.10.9 정토불교대학 경주 남산 순례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오늘은 정토회 불교대학생을 대상으로 열린 경주 남산 순례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원래 10월 8일 토요일과 9일 일요일, 이틀간 전국의 정토불교대학생들이 경주 남산 순례를 하려고 하였는데, 토요일 집중호우 예보로 토요일 일정을 취소하고 일요일에 주,야간 통합으로 새벽부터 다섯 코스로 나누어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법륜 스님은 청년 불교대학생들과 함께 삼릉골 코스를 순례하였습니다. 대학생, 직장인들로 이루어진 청년 불교대학생들은 대부분 정토불교대학을 통해 처음으로 불교를 접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투브나 책을 통해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먼저 접했고, ‘행복하게 사는 법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초심자들입니다.


새벽 6 30, 청년 불교대학생들은 부쩍 떨어진 기온에 옷을 여며 입고 표지판 앞에 모여 스님으로부터 오늘의 순례 구간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쌀쌀한 기운을 떨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땀이 스미기도 전에 도착한 작은 공간에는 머리 없는 부처상이 놓여있었습니다. 


       ▲ 냉골 석조여래좌상



법륜 스님은 스님의 학창 시절, 머리가 없는 이 불상의 머리를 찾는 운동을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정토회의 창립 취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 불상은 머리와 손발이 잘린 파괴된 불상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이 불상의 머리 찾기 운동을 했어요. 이 골짜기 어딘가에 머리가 있지 않겠느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가 제가 좀 깨달은 바가 있었어요. 

‘굳이 꼭 머리를 찾아서 복원하는 것이 중요할까. 머리가 없는 것은 불법이 사라진 한국불교, 손발이 없는 것은 실천이 없는 한국불교를 상징하는 것 아닌가. 진정으로 이 불상을 복원하는 길은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의 불법을 되살리는 것이고, 중생을 향한 자비의 행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정토회는 ‘바른 불교, 쉬운 불교, 생활 불교’와 ‘수행, 보시, 봉사’의 세 가지 기치를 내걸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것이 바로 머리를 복원하는 것이고, 보시하고 봉사하는 것이 바로 손발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영상 보기] “진정으로 머리와 손발을 복원하는 길은”


청년불교대학생들은 ‘머리 없는 부처님’의 교훈을 안고 경주 남산 순례를 하였습니다. 진리의 불법과 자비행의 실천, 그리고 바른 불교, 쉬운 불교, 생활 불교의 교훈을 안고 말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경주 남산의 각각 다른 다섯 코스에서 출발한 2천 여 명의 전국 정토불교대학생들은 순례를 마치고 통일암 너른 숲에 모두 모여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며 지역별 소개의 시간을 가진 후,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섯 분이 질문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으로 열렬히 살아오다가 새로이 진리의 불법을 접하며 기쁘기도 하지만 혼란스럽다는 불교대학생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저는 열다섯 살부터 마흔다섯 살인 지금까지 오직 성경만 보고 살아온 사람인데, 스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부터 ‘이것이 진리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려고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마음의 안정도 찾았어요. 그런데 제가 교회로 인도한 사람만 해도 몇 백 명은 되는데, 문득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거든요.” (모두 웃음)
 
“네. 좋은 일을 많이 해오셨네요. 두려움은 왜 일어날까요? 모를 때, 무지할 때 일어납니다. ‘신비하다’는 것도 무지에서 생깁니다.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신비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제가 여기 앉아서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을 외다가 갑자기 공중으로 붕 뜨면 여러분들이 무척 놀라겠죠. 이렇게 제가 30센티미터를 1분 동안 뜨는 것을 두고는 매우 신비하게 생각하면서, 300명을 태우고도 10시간 이상 떠서 몇 천 킬로미터 상공을 날아 뉴욕이나 런던까지 가는 비행기는 신비하게 보지 않아요. 왜냐면 비행기는 어떻게 뜨는지 그 원리를  아니까요. 원인을 모를 때 신비감이나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신비감과 두려움, 이 두 가지가 종교성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두려움이나 신비감이 다 무지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무지를 깨우쳐 지혜를 얻으면 두려움도 없어지고 신비감도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무지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눈 있는 자 와서 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 뜨고 있는 사람은 뭐든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쉽고, 분명한 가르침이라는 것이지요. 


인도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강가 강에서 성스러운 목욕을 하면 죄가 다 씻겨서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가미니라는 젊은이가 그에 대해 의문이 생겨서 “부처님, 저 브라만이 말하기를 ‘강가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업이 다 녹고, 천국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물었어요. 부처님은 “가미니야,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 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태어나겠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그 물음에 대해서 ‘그들의 말이 맞다면’ 하고 일단 수용한 후 말씀하신 겁니다. 사람이 강가 강에서 목욕을 한 번 한다고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면, 강가 강에 사는 물고기는 아예 거기에서 태어나 자라고, 강 속에 사니까 누구보다도 먼저 하늘나라에 태어나지 않겠느냐는 논리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가미니는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라고 답했어요. 이것은 누구의 말이 옳다 그르다의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알아차림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번뇌가 사라져버리는 경지이지요. 

예수님도 똑같아요. 유대교에서는 ‘유대인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천국은 오직 유대인만 갈 수 있으므로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하셨어요. 이방인에게는 그 말이 복음일지 몰라도 유대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예수님 이전, 구원의 기준은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인종적인 것이었다면, 예수님 이후, 구원의 기준은 ‘불행을 겪은 사람에게 자비심을 내서 사랑의 마음으로 보살펴줬느냐, 아니냐?’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보편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신 거예요.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지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과도 같지요.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이야말로 모든 고뇌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나 불교는 스승들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많이 어긋났듯이 기독교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많이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지인들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한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예요. 질문자가 기독교 신자라서 문제가 아니라 질문자가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난 기독교를 배운 게 문제였던 거예요. 오히려 질문자가 ‘지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혜로워졌고, 그래서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예수님도 따르고, 부처님을 따라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여기는 지혜의 세계, 진리의 세계이니까요. 진리에 어긋난 사람들이 불교니, 기독교니 하면서 서로 싸우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면서 서로 싸우는 거예요. 

질문자가 기독교에 있다가 불교로 왔다고 훌륭한 게 아니고, 진리에 어긋난 상태에 있다가 진리로 돌아왔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불교라도 부처님 법에 어긋난 불교라면, 불교에 간다고 진리의 세계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질문자가 교회에 있다가 절에 오든, 절에 있다가 교회로 가든, 절에도 가고 교회에도 가든 진리의 세계로만 나아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고, 어리석음의 세계로 간다면 그게 어디든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교냐, 기독교냐를 중시할 게 아니라  진리의 세계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중시해야 합니다.“ (모두 박수)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고, 제가 기독교로 인도한 많은 영혼이 있는데, 그들 앞에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자는 그들한테 ‘나 절에 간다’, ‘교회에 간다’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저분은 저렇게 믿는구나. 저분은 저래서 저런 행동을 하는구나. 남편은 오늘 저래서 화가 났구나’ 하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욕망이지요. 그를 이해하는 게 바로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는 겁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는 거예요. 그분들은 우리의 어리석음까지도 이해하면서 보살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안 들면 상대를 이해 못 합니다. 이해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남편이나 자식을 이해하고, 그들의 신앙을 이해하면서 그들이 뭔가 주장을 하면 ‘아, 그렇게 믿는구나.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공부를 해 나가면 됩니다. 

만약 질문자가 그들을 깨우쳐주려고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질문자가 볼 때 ‘나는 깨우쳤고, 그들은 못 깨우쳤다’고 하겠지만 그들이 볼 때는 반대로 보이거든요. 객관적인 평가가 안 됩니다. 그러니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려 하지 말고, 질문자가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질문자는 겨우 몇 개월 불교를 배워서 ‘불교가 최고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더 공부해 보고, 수행을 더 해 보면 교회 다니든, 절에 다니든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하는 마음이 없어질 겁니다.“(모두 박수) 


막 진리의 불법에 들어선 수행자는 기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남산 아래 통일암 너른 숲에 모인 전국의 정토불교대학생은 수신기를 통해 나오는 법륜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웅크린 몸을 비추어 주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높은 하늘이 소나무 숲 위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즉문즉설이 진행될수록 처음에 약속하였던 사람들 외에 질문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는데, 법륜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오랜 시간 웅크리고 앉아 있어 추워진다” 하며 양해를 구하고 즉문즉설 시간을 마무리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불교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우리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내가 힘드니 도와 달라는 마음이 생기는데, 대부분 그럴 때 종교에 기대게 되지요. 두 번째는 이 어려움은 나의 어리석음, 나의 무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무지를 깨우치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을 ‘수행’이라 합니다. 그러니 불교의 가르침은 종교라기보다는 수행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불교신자’가 아니라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신자가 되면 절대 안 될까요? 아닙니다. 불교 신자이면서 수행해도 되고, 기독교 신자이면서 수행해도 되고, 무교로서 수행해도 됩니다. 상관없어요. 그러나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서 천당 가고 싶은 사람은 교회 가고, 극락 가고 싶은 사람은 절에 가면 됩니다. 그건 각자 알아서 할 일이에요. 저는 천당이나 극락을 보내줄 능력이 없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저는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말하지 거짓말은 안 합니다. (웃음) 

 


우리의 목표는 ‘수행을 통해서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복하길 원하세요?“


“예.” (대중 함께)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잖아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부모 때문에, 자식 때문에, 돈 때문에, 상사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의 목표는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 상사를 그대로 놔두고도, 또 돈 없는 가운데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병이 나아야 행복한 게 아니라, 병이 없으면 좋겠지만 병을 앓는 가운데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기 환자라서 불행하다’고 하면 안 되지요. 수행자라면 내일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진리를 공부하는 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수행자의 ‘정체성’이에요. 



그 다음에는 ‘도대체 이렇게 위대한, 이렇게 좋은 법을 누가 이 세상에 처음 내놨을까?’ 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 법을 법륜스님이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안 됩니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법을 세상에 처음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은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수행하다가 이걸 깨달았는지 배워야 합니다. 인도의 저 북쪽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기성 사회에 의문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탐구하기 시작한 끝에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움, 즉 불교용어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셔서 당신만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법을 세상에 전했으니, 우리도 그 법을 배우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은 죽어서 좋은 데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행복해 지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죽어서 좋은 데 안 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좋은 데가 있다면 먼저 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좋은 데가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오늘은 종교로서의 불교, 맹목적인 불교인이 아니라 참다운 수행자로의 길, 그래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행복한 인생을 사는 수행자의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게 되는 하루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 국민행복 프로젝트 2016년 즉문즉설 강연이 '법륜 스님과 행복한 대화' 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10월 4일부터 12월 1일까지 전국 30여 개 도시를 찾아갑니다. 우리 동네 강연 일정 확인하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