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길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오늘은 2600년 전 부처님이 깨달음을 증득하시고 수행의 길을 제시하신 그 법에 따라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정토불교대학 경전반 학생들의 입학식이 정토회 서초법당에서 전국 생중계로 진행되었습니다.

법당 가는 길에는 불교대학 안내판을 들고 봉사자들이 안내해주었고, 법당 안에서도 봉사자들이 경전반 입학식 진행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임무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생중계 촬영팀도 카메라를 적당한 위치에 장착하고, 마이크 상태와 영상을 점검하며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비 소리에 따라 산란했던 마음을 맑히는 입정이 끝나자 스님은 인사말과 함께 축하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경전반에 입학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귀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 중에 참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이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대학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정말 소수입니다. 그런데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한 사람 중에 졸업하는 사람은 현재 통계로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졸업한 사람 중에 연이어 경전반에 입학한 사람은 다시 절반 정도 됩니다. 입학 할 때 만난 사람 중 4분의 1, 네 명 중에 한 명 꼴로 1년 만에 보는 격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정말 귀한 사람들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 자유로워지는 것,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지고 근심걱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는 것도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수행은 죽음 자체가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죽음을 초월했다고 합니다. 안 죽는다는 뜻이 아니지요. 이게 수행의 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립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겁니다. 자립적인 존재가 붓다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존재, 비록 그것이 하늘 세계의 신이나 땅의 세계에서 왕이라고 해도 그들과 비교도 안 되고 스스로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길입니다.

이 수행자의 길에 여러분들이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불교대학 첫 번째 과목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기본적인 입장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내가 나의 무지를 깨치면 정말 편안해질까요? 예전에는 술 먹는 남편이 술을 안 먹어야 하고, 게임하는 아이가 게임을 안해야 편안해졌어요. 내가 편안해지려면 남편이 바뀌고 아이가 바뀌어야 했습니다. 내 힘으로 안 되니까 괴로워서 부처님, 하나님을 찾아서 빌었어요. 상대가 바뀌면 가피를 입었다고 하고 안 바뀌면 빌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행의 길은 상대가 바뀌든 안 바뀌든 내 삶에 큰 영향이 없습니다. 남편이 술을 안 먹으면 좋지만, 술을 먹는다고 내가 괴로울 일은 아니고, 아이가 게임을 안 하고 공부를 하면 좋지만 게임을 한다고 내가 괴로울 일은 아닙니다. ‘남편이 아직도 술을 마실 정도로 건강하고, 안 죽고 살아있고 아이가 게임을 하지만 학교를 잘 다닌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그것이 내 삶에 큰 괴로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제 어떤 젊은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걸 우연히 봤어요. 요즘 ‘1인 미디어 시대’라고 하잖습니까. 그렇게 변화된 세상을 얘기하면서 ‘내가 방송국이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잘 하게 됐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어릴 때 게임만 했다는 거예요.(모두 웃음) 또 영화만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상편집에 대한 기본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걸 제가 들으면서 ‘쟤 엄마는 쟤 어릴 때 고생 많이 했겠다.’(모두 웃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의 성공비결은 오히려 게임을 많이 하고, 보지 말라는 영화를 숨어서 몰래 많이 본 것 아니겠어요? 그게 그 사람의 자산이 되어서 젊은 나이에 벌써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그럼 게임 많이 하고, 영화 많이 보면 다 그렇게 될까요? 그건 아니지만, 그게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고집하기 때문에 공연히 자기 괴로움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 관점의 전환을 해서 내가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길로 가는 게 바로 ‘수행’입니다.

여러분들은 불교대학에서 일단 이 관점정리를 했어요. ‘나는 믿는 마음도 필요하고 사유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길은 믿는 자, 즉 신자(信者)의 길이 아니라 닦는 자, 즉 수행자(修行者)의 길이다. 절대자를 믿는 신자의 길이 아니라 내 무지를 닦는 수행자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이에요. 이런 좋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원래 인도에 브라만이라는 종교가 있었고, 우파니사드라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둘을 뛰어넘어서 수행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종교화, 철학화로 치우쳐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났습니다. 이 대승불교가 중국에서 또 종교화, 철학화의 길로 치우쳐지니까 다시 새로운 불교, 선(禪)불교가 일어났습니다. 지금 또 선불교가 종교화, 철학화의 길로 치우쳐졌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수행(修行)’이라는 새로운 모토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새로운 길인 동시에 ‘원래의 가르침,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입니다.

불교대학에서 근본불교를 배웠고, 앞으로 경전반에서는 대승불교, 선불교의 경전을 배우게 될 거에요. 경전을 너무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면 철학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럼 이해를 안 해야 될까요? 이해를 해야 되지만 이해에만 비중을 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금강경을 읽고 금강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면 엄청난 복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금강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걸 ‘수지독송한다’고 하는데, 그건 ‘늘 가지고 지녀 읽고 외운다’, 즉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지고 지녀 읽고 외운다’는 말에 집착해서 ‘금강경을 그냥 가슴에 품고 다니면 복이 된다. 이걸 하루에 10번 읽으면 복이 된다’고 한다면 이건 어느 쪽으로 흐른 겁니까? 종교로 흐른 거예요. 또 내용을 너무 지적으로 이해하는데만 치중하면 철학화, 학문화의 길로 흐르게 되는데,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수행의 길로 가는 겁니다. 이 공부를 하면 우리는 마음이 점점 넓어지고, 가벼워지고,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고, 괴로울 일이 별로 없어져서 남의 일도 선뜻선뜻 도와주는, 이런 사람으로 바뀌어가게 돼요.

그러니까 첫째, 수행자는 남한테 기를 못 펴고, 비굴하고, 쭈그러드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는 당당해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고 하셨지요. 비굴할 게 뭐가 있어요? 우리가 돈에 집착하면 돈 많은 사람한테 비굴해지고, 권력에 집착하면 높은 사람한테 비굴해지고, 인기에 집착하면 인기 많은 사람한테 비굴해지고 그러는 거잖아요. 한편 비굴해지고, 한편 질투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걸 놓아버리면 그 사람을 질투할 일도 없고, 그 사람에게 비굴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행을 하면 평소에 기를 못 펴는 사람한테도 떳떳하고 당당해지는 거예요. 수행자는 그렇게 당당한 거예요. ‘수행자는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교만해서 그런 게 아니고 당당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솔잎 뜯어먹고 살아도 되고, 남의 집에서 버린 음식 먹고 살아도 되니까 임금한테 얻을 게 하나도 없으니 당당할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도 돌아가실 때까지 임금한테 얻은 게 하나도 없었어요. 왕이 주겠다고 여러 제안을 했는데도 부처님께서는 필요 없다고 다 거절하셨어요. 그러니까 비굴할 일이 없잖아요.

두 번째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했어요. 우리가 왜 교만할까요? 내가 돈에 집착하면 나보다 돈 적게 가진 사람한테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내가 지위에 집착하면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는 괜히 폼을 잡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인기에 집착하면 나보다 인기가 못한 사람한테는 또 폼을 잡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나이에 집착하면 나이 어린 사람한테 공연히, 나이 많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폼을 잡잖아요. 그런데 수행자는 교만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해요. 지위가 높든 지위가 낮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하면 다른 사람이 나한테 ‘당당하다.’ 그러고, 내가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하면 ‘아이고, 저분 겸손하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당당한 것과 겸손한 것은 똑같은 거예요. 세상을 내가 평등하게 대하는 거예요.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면 한쪽은 비굴하게 나타나고, 한쪽은 교만하게 나타나는 이 두 가지 모순에 빠집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떤 세상사람 앞에서도 비굴해야 돼요, 당당해야 돼요?”

“(대중들) 당당해야 돼요.”

“어떤 세상사람 앞에서도 교만해야 돼요, 겸손해야 돼요?”

“(대중들) 겸손해야 돼요.”

“예, 그래야 수행자입니다. 그러면 수행자의 삶의 자세는 첫째, 편안해야 됩니다. 수행자가 늘 초조, 불안하고 근심, 걱정하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수행자가 사는 방식은 검소해야 합니다. 화려하면 안돼요. 셋째,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겸손해야 돼요. 교만하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계(五戒)는 기본으로 지키되 우리가 재가자로서 수행자의 반열에 들어가려면 세 가지를 더 지켜야 합니다. 거기에 ‘겸손하라’는 건 어떻게 표현이 되어있습니까? 첫째, ‘높은 평상에 앉지 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건 인도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요, 인도에서는 무슨 행사를 하면 반드시 초대 손님들은 높인 곳인 평상에 앉히고, 대중은 그보다 밑에 앉힙니다. 그런데 유지란 유지는 다 그 높은 평상에 엉덩이를 얹으려고 합니다. 인도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자기 잘났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높은 평상에 앉지 마라’는 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얘기입니다.

둘째, ‘수행자는 얼굴에 치장을 하지 마라.’ 여러분들께 적용해서 말하자면 귀걸이, 목걸이하고, 화장하고, 머리에 꽃을 꽂고,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는 분소의(糞掃衣)를 입었던 거예요. 셋째, 춤추고 노래하는 가무를 즐기지 마라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들뜨게 되거든요. 수행자는 차분하고, 조용하고, 편안해야 되니까 그런 걸 즐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수행자는 첫째, 마음이 편안해야 되고, 두 번째, 생활방식이 검소해야 되고, 세 번째, 자세가 겸손해야 됩니다. 그러면 비록 머리를 기르고 세속에 살아도 수행자라고 할 만 하지요.

그런데 수행자가 머문 처소를 우리가 도량, 즉 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와집이 절이 아니에요.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 절입니다. 그래서 서암 큰스님께서 저한테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편안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제가 ‘우리 조계종이 문제가 많으니까 개혁해야 되고, 혁신해야 된다!’며 흥분해서 얘기하니까 그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머리 깎은 사람이 스님이 아니고, 기와집이 절이 아니고, 그런 게 불교가 아니고, 마음이 고요한 자가 수행자고, 그가 머무는 곳은 거기가 어디든 그게 바로 절이다’라는 뜻이지요. 실제로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잖아요. 부처님 당시에는 건물을 지은 적이 없어요. 수행자들이 숲에 머물면 그곳이 절이었습니다. 대나무 숲에 머물면 그곳이 죽림정사이고, 제따라는 사람의 숲, 제따바나에 머물면 그곳이 기원정사이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한 사람들이 머무니까 바깥에서 보기에 거기가 조용할까요, 시끄러울까요?”

“(대중들) 조용해요.”

“수행자가 머무는 처소인 도량, 즉 법당은 조용해요. 어디 가서 조용하면 사람들이 ‘아이고 절간 같네.’ 라고 합니다. 그런 평가하는 건 세 가지 요소 때문입니다. 첫째, 조용합니다. 두 번째, 깨끗합니다. 세 번째, 물건이고 방석이고 정리정돈이 잘 돼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아이고, 여기는 절도 아닌데 절간 같네.’ 이럽니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수행자는 첫째, 편안하기 때문에 조용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두 번째, 수행자는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한 거예요. 마당도 깔끔하고, 뭐든지 깔끔하게 돼있어요. 세 번째, 수행자가 사는 공간은 모든 게 질서가 딱 잡혀있어요. 절에 가보면 장작도 차곡차곡 쌓여있고, 신발도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빗자루도 제 자리에 놓여 있고, 걸레도 빨아서 딱 각이 잡혀서 접혀있지요. 이렇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것은 보기 좋으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달리 조용하라, 정리정돈을 잘하라, 깔끔하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게 수행자의 마음자세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편안하니까 조용하고, 마음이 깨어있으니까 정리정돈을 착착착착 하고, 생활태도가 기본적으로 검소하니까 비록 떨어진 옷이라도 깔끔하게 기워서 입고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자의 자세는 첫째 편안해야 되고, 두 번째 검소해야 되고, 세 번째 겸손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머무는 절은 조용하고, 깨끗하고, 모든 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좋아요, 안 좋아요?”

“(대중들) 좋아요.”

“좋은데 왜 안 하려고 그래요?(모두 웃음) 이런 걸 배우는 게 수행자이지, 경전만 많이 읽는 게 수행자가 아닙니다. 이 경전을 공부하면서 그런 마음을 배우고, 그런 자세를 배우고, 그런 삶을 사는 게 수행자입니다. 이번 가을학기 경전반은 ‘특별한 경전반’이 되도록 한번 해 보세요.(모두 웃음) 알았죠?”

“(대중들) 예.”

“예, 다시 한 번 입학을 축하드립니다.”(모두 박수)

먼저 종교와 철학, 수행의 차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스님은 특히 수행자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해야 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주변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정리정돈을 잘해서 절도 있게 생활하는 것이 수행자라고 당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경전반이 되기를 바란다며 다시 한 번 입학을 축하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곧이어 정토불교대학 2강 <수행자의 삶> 주제 강의를 녹화하기 장소를 이동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이 이번 가을학기부터는 생활 속에서의 수행을 체험하도록 교과 과정이 대폭 개편되었는데요. 스님은 입학생들이 수행자의 관점을 갖고 일상에서 생활하는 태도를 갖도록 안내하는 주제 강의를 녹화했습니다.

오늘 녹화한 강의는 내일 수행법회를 통해 전국 정토법당에서 상영되며, 오늘 입학한 불교대학 학생들은 다음주 2강에서 이 수업을 됩니다.

녹화를 마친 스님은 오후 일정을 더 가진 뒤 저녁에는 두북으로 이동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할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바다, 조태준, 전은정, 이준길, 김미정

아직 입학할 수 있어요 정토불교대학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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