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님의 하루

"꼭 출가를 해야 해탈 열반을 할 수 있나요?" / 법륜스님의 하루 20171113

"꼭 출가를 해야 해탈 열반을 할 수 있나요?"

2017.11.13 가을 불교대학 특강수련 & 행복캠프


오늘은 강원 경기 동부와 경남 지부 가을 불대 특강 수련이 있는 날입니다. 이른 아침의 문경은 정말 추웠습니다. 새벽 6시부터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도 스님의 바쁜 일정을 아는 지라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총 10명의 학생들이 실천적 불교사상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과 수행, 개인 문제 등에 대해 질문지를 작성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출가를 해야 해탈 열발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던 질문과 스님의 유쾌한 답변을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스님들이 출가해서 절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여기서 사람들과 같이 열반과 해탈을 한 뒤에 중생들의 어려움도 구제해 줘야지, 왜 산으로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열반과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구나. 이 괴로움과 모든 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산으로 갔던 거구나.’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저도 여기 절에 와서, 스님이 되어서 열반과 해탈을 구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이 길이 굉장히 어려운 길 같아서 두렵습니다.”

“질문자는 여기 들어올 수 있겠어요?”

“못 들어올 것 같습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들어와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왜 해요?”

“저도 괴로움 없이, 열반과 해탈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모두 웃음)

“열반과 해탈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능히 들어올 수도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간절하지 않다는 얘기지요?” (모두 웃음)

“아니요, 그럴 생각도 있습니다.”

“공짜로 주어지면 얻겠지만 노력해서까지 구하고 싶진 않다는 것 아니에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요?”

“지금껏 살아온 제 자신을 봤을 때 그런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괴로워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런 인연을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할 건지... 그게 참 어렵겠다 싶어서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거거든요.”

“가능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모여서 얘기하고 있지요. (모두 박장대소) 다만 어렵지요.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건 다릅니다. 어렵다고 하면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거나, 가능하다고 하면 공짜로 먹으려고 하거나 그러지요. 그게 잘못된 거예요. 열반과 해탈의 성취는 가능하지만 어렵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될까요? 꾸준히 해야 됩니다. 질문자는 정말 괴로움 없이 살고 싶어요?”

“예.”

“괴로움 없는 삶, 그 말 자체가 ‘열반’의 뜻이에요. 질문자도 열반을 증득하고 싶다는 거지요. 그런데 열반이라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얘기는 아니에요. ‘괴로움 없이 살고 싶다’는 게 ‘나는 열반을 얻고 싶다’는 말과 같아요. 그러면 질문자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질문자는 건강합니까?”

“예, 건강합니다.”

“건강하다는 건 어떤 거예요? 100미터를 12초에 완주하고, 턱걸이를 50개 하고, 역기를 130킬로그램은 들어야 건강한 거예요? 아니면 그냥 안 아프면 건강한 거예요?”

“안 아프면 건강한 것이죠.”

“마약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야 행복한 거예요? 아니면 그냥 괴롭지 않으면 행복한 거예요?”

“괴롭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죠.”

“예. 그러니까 괴롭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건, 즉 행복한 경지에 이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건강한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듯이요.

출가한 스님만 행복한 게 아니라 세속에 살아도 행복할 수가 있어요. 출가한 스님만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세속에 살아도 열반을 증득할 수가 있어요. 어디에 사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다만 처지가 문제죠. 예를 들어 담배를 안 배운 사람은 담배를 끓을 필요가 없는데, 담배를 피운 사람은 담배를 끊을 필요가 있겠지요. 흡연자가 담배가 있는 데서 담배를 끊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면,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금연교실에 보내야 된단 말이에요. 그것처럼 여러분들이 세속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질문자처럼 ‘저는 사람만 보면 같이 괴롭고 그래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돼요’ 그러면 사람을 좀 끊어야 돼요. 질문자는 꼭 출가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모두 웃음)

왜냐하면 보고도 안 먹을 수 있으면 그 음식을 치울 필요가 없는데, 보기만 하면 안 먹을 수가 없다니까 그 음식을 치워야 되는 거예요. ‘나는 사람을 보면 도저히 같이 안 괴로울 수가 없다’ 하면 출가를 해야 되고, 보고도 능히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면 굳이 출가를 안 해도 돼요.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게 도력이 더 높은 거예요? 아니면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걸 안 보는 곳으로 가서 사는 게 도력이 더 높은 거예요?”

(대중들)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도력이 높습니다.”

“그럼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도력이 높은 거예요. (모두 웃음)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은 굳이 산에 안 들어가도 됩니다. 그런데 수준이 안 되는 사람이 자기 처지도 모르고 세속에 살면 그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강제로 머리를 깎아서 전부 산에 들여보내면 좋겠지만, 그런데 그러면 인권침해라고 해서 그렇게 못 하게 하니까 그냥 놔두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경지로 가면 돼요. 그러면 머리 깎을 필요도 없고, 산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굳이 결혼 안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질문자는 뭐를 보면 도저히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서 힘들다는 얘기를 하면 저는 그 얘기를 듣고 공감이 되면서 같이 힘든 마음이 들어요.”

“그건 좋은 일이에요.”

“또 사랑하는 사람이 슬프면 저도 당연히 같이 슬퍼지고요. 그것 때문에 제 마음의 평정심을 잃게 돼요.”

“그건 문제예요. 상대가 울면 같이 울어주면 되는데 진짜 슬퍼버리면 문제지요. 상대가 어려우면 도와주면 되는데 그걸 두고 밤새도록 집에서 괴로워하는 건 왜 그럴까요? 도와주긴 해야 되는데 돈이 아까워서 도와주기는 싫고, 그러니까 괴롭지요. (모두 웃음) 그렇게 심보가 더러우면 괴로운 거예요. (모두 웃음)”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니고요.”

“그럼 도와주면 되지 왜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 잘 도와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그걸 왜 질문자가 결정해요? 상대에게 물어보면 되지요. 상대가 돈 달라고 하면 돈 주고, 일해 달라고 하면 일해 주고, 같이 있어달라고 하면 같이 있어주면 되지요. 같이 있어 달라는데 같이 있어줄 시간이 없으면 ‘미안하다’ 그러면 되고, 돈 달라고 하는데 그만한 돈이 없으면 ‘미안하다’ 그러면 되지요, 뭐. 그게 어려운 일이에요? (모두 웃음)

가만히 보면 그 속에 모순이 있는 거예요. 불쌍하게 여기면서 도와달라는 건 안 도와주고 ‘뭘 도와줄까’ 하고 머리만 굴리니까 복잡하지요. 상대가 원하는 걸 주면 됩니다.”

“상대의 어려움이나 힘든 마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질문자가 그걸 계속 생각한다고 상대한테 도움이 돼요, 안 돼요?”

“도움이 안 되지요. 그래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모두 웃음)

“도움이 안 되는 짓을 왜 하는데요? 쓸데없는 짓을 계속 하면서 합리화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보기만 하면 쓸데없는 짓을 하게 됩니다.’ 하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와야 된다는 거예요. (모두 웃음) 즉, 안 봐야 된다는 말이에요. 꼭 절에 올 필요 없이 ‘쓸데없는 생각이구나’ 하면 그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하면 되지요. 안 하려고 하는데도 안 된다면 그건 질문자의 병이지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상대가 질문자를 괴롭히려고 아픈 것도 아니고, 질문자를 괴롭히려고 가난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상대의 삶이 그럴 뿐이에요. 그럼 질문자는 산에서 다람쥐를 보고 집에 와서도 ‘아이고, 그 작은 게 겨울에 어떻게 살까’, 토끼 보고 ‘호랑이한테 잡혀먹기라도 하면 어떡하니’ 이렇게 계속 생각하는 수준이에요. (모두 웃음) 다람쥐는 다람쥐대로 토끼는 토끼대로 알아서 삽니다. 질문자 괴롭히려고 그렇게 작게 태어난 게 아닌데 말이에요. (모두 웃음)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질문자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건 자기 자유이지만 자기가 괴로워한다고 그 사람한테 도움이 안 됩니다. 다람쥐가 불쌍하면 도토리라도 하나 던져주든지, 겨울에 토끼가 불쌍하면 외투라도 벗어서 주든지 해야지, 계속 걱정만 한다고 해서 다람쥐나 토끼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거예요. 그런 걸 ‘감정 낭비’라고 합니다. 질문자는 지금 감정 낭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는 되는데요...”

“안 되면 절에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모두 웃음)

“스님 말씀하신대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쓸데없는 짓이 멈춰지나, 안 멈춰지나 점검해서 ‘이거 안 되면 내가 절에 들어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리가 좀 될 거예요. 계속 생각하면 절에 들어가야 되고, 절에 안 가려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TV를 틀어서 보든지, 다른 걸 하면서 그 생각을 지우면 절에 안 들어와도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쉬워요?” (모두 웃음)

“감사합니다.”

3시간에 거친 긴 법문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은 스님과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했습니다.

질문자에게 답변을 들은 후의 심정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질문자는 “가슴에 응어리 졌던 문제들을 풀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며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니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며 생활하면서 좀 더 정진을 해보겠다” 고 하였습니다.

같은 방향을 보고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찬 일입니다 1박2일 간 함께 정진하고 웃고 떠들며 학생 모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묘수법사님의 회향인사를 끝으로 불교대 특강수련을 여법하게 잘 마쳤습니다.

스님은 문경에서 불교대 학생들과의 수련을 마치고 오후에는 행복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행복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하였습니다.

캠프가 열리는 서울시청은 광장의 푸른 잔디가 그 여유로움을 더 만끽하게 합니다. 캠프가 시작되기 3시간 전부터 봉사자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시작 1시간 전부터 캠프 참가자들의 행복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보입니다. 어제부터 추워져 새벽에 살얼음을 볼 수 있는 날이지만 행복캠프의 열기는 처음부터 뜨거웠습니다. 오늘 캠프는 참가자 211명과 봉사자 94명 총 305명의 행복한 얼굴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김영주님의 사회로 시작된 행사는 행복캠프 참가자들이 함께한 ‘봉천 행복학교’참가자의 소프라노 노래, 인생의 여러 선택 중에 제일 멋진 선택이 행복학교가 될 것이라는 분당 행복학교진행자 박기범님의 환영사로 캠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행복학교를 다니며 소감을 듣고 대화하는 행복 톡톡은 주점란님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며 집사인 한 참가자는 행복학교를 다니며 행복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 있음을 알았고, 행복학교가 행복으로 가는 통로임을 알게 되었다는 명언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행복 실천과제로 남편 구두를 미워도, 싸워도, 좋아도 매일 꾸준히 닦아주었더니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남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뭉클하게 해 주었습니다. 엄마가 바뀌니 아이도 변화되었다는 분,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분, 관점 바꾸기를 통해 남 탓하는 습관에서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분 등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간 분들을 보게 되어 듣고 있는 동안 우리도 행복했습니다.

“지금! 행복하자”라는 힘찬 구호를 끝으로 1부 행사를 마무리하였고 점심 식사 후 참가자들의 열렬한 환호소리와 함께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시간 반 동안 11명의 다양한 고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화내고 않고 키우고 싶은데 화를 내지 않고 아이를 대할 수 있는 방법을 질문하신 분, 초등학교 2학년 딸의 교육문제를 고민하시는 분, 어머니의 부도덕한 행동으로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고민하시는 분, 남편과 항상 좋은 관계이고 싶다는 분, 30대 아들이 자기 말을 안 들어서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온다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스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민을 풀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스님께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 비전에 대해 질문하신 분의 고민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가 크면 클수록 교육이라는 게 저 혼자 잘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굉장히 많이 느끼거든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미디어, 스마트폰, 유투브 등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영상을 미리 접하게 되는 문제, 또 교육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의미 없는 경쟁만 계속 부추기는 문제, 이런 문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 친구 몇 명은 교육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갔어요. 대안학교나 사립학교 말고 서민들이 사는 동네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을 지요? 저 혼자 ‘내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지’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싶어서요. 스님께서는 혹시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에 대한 비전 같은 게 있으신지요?”

“그런데 질문자가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제가 조언을 할 수 있는데 ‘공교육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첫째, 제가 교육전문가도 아니고, 둘째, 제가 대통령이나 시장도 아닌데 어떻게 답을 하겠어요? 시장이 와서 묻거나 교육부장관이 묻거나 하면 제 생각을 얘기해 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지금 질문자의 질문은 너무 광범위한 질문이에요.”

“그러면 질문을 수정할게요. 저는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를 정서적으로만 편안하게 키우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마치 통일을 위해서 정부가 할 일도 있지만 개인이 할 일도 있는 것처럼, 엄마인 저 개인, 또는 제 또래 엄마들이 아이 교육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혹시 스님께서 저에게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겠다고 제안하실 게 있으신가요?”

“미래를 생각했을 때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과거와 현재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교육은 뭐가 중심이었을까요?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후진국이었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선진국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선진국을 모방하면 됐거든요.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 산업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지식과 기술이 있는 노동자’였어요. 그런 지식과 기술을 습득시키는 게 학교였고요.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이제 지식은 인공지능이, 기술은 로봇이 대체하는 시대에 임박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단순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초등학교 6년, 중 고등학교 6년, 대학 4년을 투자해 왔고, 그렇게 투자를 하면 또 투자를 안 한 사람보다 사회에서 월등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에 투자하는 게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훨씬 도움이 됐지요. 예를 들어 교육투자를 1억 원어치 했다면 그 아이가 그 교육투자를 기반으로 사회에 나가서 10억 원을 벌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투자를 하는데, 그 투자금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졌어요. 그런데 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사람이 이걸 활용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굉장히 적어졌고, 그나마 그 기간도 짧아졌어요. 전에는 공업고등학교나 상업고등학교 졸업하고, 즉 12년을 공부하고 20살에 취직을 하면 60살까지 40년을 써먹을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학원을 나오거나 외국유학까지 다녀오면 공부한 기간만 20년이 넘어서 이 사람이 30살에 비로소 그 지식과 기술을 써보려고 해도 일단 일자리가 없고, 또 취직을 한다 해도 20년을 써먹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교육투자의 효율이 많이 떨어졌고, 이건 날이 갈수록 더 떨어질 것입니다.

이제 모방은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주산왕, 암기왕을 뽑았어요. 저도 그런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게 별 쓸모가 없어요. 전자계산기만 터치하면 되듯이, 대학까지 16년간 배운 지식과 기술은 네이버 검색만 하면 다 나오기 때문에 그런 걸 습득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이제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되겠지요. 기본교육, 즉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 10년 정도만 기본교육을 시키고, 나머지는 다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되겠지요. 지식을 다 머리에 담을 필요가 없고, 밖에 담아놓고 찾아 쓰면 되는 시대가 됐다는 거예요.

이제는 미래를 위해 무엇이 훈련되어야 할까요? 창의력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어릴 때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를 어릴 때부터 훈련시켜야 되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교육을 안 시키고 있지요. 현재는 학교공부를 잘하는 것과 창의력은 아무 관계가 없는 구조입니다. 지금 초등학생이 자라서 직업을 갖게 될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걸리는데, 20년 후에는 현재 있는 직업의 절반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어떤 사회가 도래할지 지금은 예측하기 어려운, 빠른 변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회가 되든지 거기에 적응해서 살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이런 사회가 되면 땡잡고, 저런 사회가 되면 꽝인, 그런 교육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든 거기에 적응해서 살 수 있는 탐구력, 적응력을 훈련시키는 게 제일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훈련을 공교육에서 구하는 건 어렵습니다. 공교육이 그렇게 바뀌기는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도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건 만들어가야 하는 거지, 교육받은 걸 익혀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방식으로는 안 되거든요. 이미 공교육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것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기본 교육은 세상에 살려면 해야 되는 기본기이니까 그냥 중,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게 해 주고, 등수 이런 건 신경도 쓰지 말고, 그저 인간관계를 맺고 세상사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곳 수준으로 다니도록 하면 됩니다. 물론 집에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어떤 문제를 탐구하고, 사색하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훈련을 시킬 수 있다면 좋지요. 그걸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어요. 그건 엄마 손을 떠나는 문제라고 보면 돼요. 엄마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엄마 역할을 너무 크게 생각해도 안 됩니다. 애 젖먹이고, 밥 해 주고, 옷 입혀주는 건 엄마의 역할입니다. 또 엄마가 화내고 짜증내는 걸 안 하면 아이의 심리 안정에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아이가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는 엄마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엄마가 크게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을 보면 그저 아이 낳아서 젖먹이고, 밥 먹여 주셨고,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엄마의 역할을 너무 넓혀서 생각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과잉보호’에 속합니다. 능력도 안 되면서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저를 밥만 먹여주셨듯이 여러분도 아이 밥만 먹여주면 되지, 그 이상의 문제는 그 아이들 스스로 변화된 사회에서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봐야 됩니다.

그러니 아이와의 신뢰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아이를 야단 치고 할 게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앞으로 살 세계가 어떤 사회가 되든지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교육이 없었던 원시시대처럼 아이들의 적응력을 키워주는 게 제일 좋을지도 몰라요.

최고 학군에 보낸다고 과외 시키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부모가 경험한 거라고는 서당밖에 없기 때문에 여전히 아들을 서당에 보내서 과거급제 시켜보겠다고 했던 것과 비슷해요. 조금 지나보면 아무 소용없는 거라는 얘기예요. 그렇다고 지금 학교를 안 보내면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그러니 학교는 그냥 다니게 놔두고, 다만 아이가 집에 왔을 때 적어도 공부 독촉은 하지 마라는 정도는 제가 조언해 드릴 수 있어요.

만약 이런 생각을 갖는 엄마들이 몇 명 된다면 그런 엄마들끼리 모여서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훈련에 대해서 공부하면 좋지요. 그렇게 외국의 사례 등을 공부해서 집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창의력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면 되지요. 집에서도 아이한테 ‘잘했다, 잘못했다’로 얘기하지 말고, 아이가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엉뚱한 얘기를 해도 허용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부모가 된다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박수)

저는 여러분들보다 학교교육을 훨씬 적게 받았어요. 저는 고등학교 다니다가 절에 들어갔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세계 강연을 다닐 때는 통역이 항상 필요해요. 제가 영어로 강연을 못 하니까요. 그런데도 제가 새로운 문명에 대한 비전이나 전망에 대해서 여러분들보다 조금 앞서서 볼 수 있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저한테는 어릴 때 교육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어요. 여러분들은 부모가 준 돈으로 좋은 장난감을 사서 재밌게 놀았을지 모르지만, 우리 때에는 장난감을 스스로 만들었어요. 아주 어릴 때는 형들한테 싹싹 빌어서라도 장난감을 하나 얻어서 갖고 놀았다지만 결국은 스스로 만들어야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으니까 자기 형이든 이웃집 형한테 가서 어떻게 만드는지 구경하면서 배워 와서 직접 만들었어요. 또 실제 만들어보면 팽이는 안 돌고 연도 안 날아요. 그럼 또 가서 물어보고 와서 다시 고쳐보면 또 겨우 돌기만 하지 잘 되지가 않는 거예요. 그렇게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이 되기까지 계속 겨울만 되면 팽이 만들고, 썰매 만들고, 연 만들고, 구슬 만들고, 그렇게 또 만들다 보면 이제 본인이 동생들한테 가르쳐 줄 수 있는 정도로, 동네에서 제일 잘 만드는 아이가 되기도 한단 말이에요. 그게 연구라는 거예요. 팽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잘 만들기 위해서 재질은 뭘 쓰고, 밑은 얼마나 깎아내고, 위는 얼마나 베어내고, 밑에는 또 뭘 박아야 되고, 채찍은 뭘 가지고 만들어야 되는지, 끊임없이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연구를 했단 말이에요.

이게 제가 받은 조기교육인데, 이런 게 오늘날 아이의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과정과 똑같습니다. 이미 저는 어릴 때 다 했던 것을 지금 최첨단 교육이라면서 서양에서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이미 제가 어릴 때 다해 봤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전 세계를 다니면서 다양한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든, 저런 질문을 하든, 제가 다 적절히 대응하는 건 지식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통찰력, 즉 사물을 총괄적으로 내려다보는 능력 덕분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떤 사물을 보라고 하면 위에서만 보고, 옆에서만 보지요. 그게 편견이에요. 자기 나름대로 보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먼 거예요. 어떤 사물을 볼 때 위에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고, 밑에서도 보고,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고, 이렇게 해서 전체를 파악하는 힘, 그게 통찰력이에요. 지혜는 곧 통찰력이에요. 통찰력이란 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얘기예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통찰적으로 잘 못 보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남편, 자식, 이렇게 한 면만 보기 때문에. 나하고 관계가 나쁘면 ‘나쁜 놈’이라고 해요. 그건 내가 본 한 측면, 즉 부부관계의 측면에서만 봤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밖에 나가서 사회적 능력이 있는지, 친구관계가 좋은지,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나하고는 나쁘지만 친구관계는 좋고, 회사에 가서 일도 잘하고, 부모한테는 효자이고, 애한테도 잘하는 아빠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여러분은 늘 자기 관점에서만 보고 접근하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손실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쪽에서 보고 얘기하면 늘 ‘저쪽도 한번 보세요’, 위만 보고 얘기하면 ‘아래도 한번 보세요’, 왼쪽만 보고 얘기하면 ‘오른쪽도 한번 보세요’, 제가 지금 하는 역할이 그거예요. 특별한 게 아니에요. 저는 여러분들이 물으면 지금 위만 보고 얘기하는구나 싶어서 ‘아래도 한번 보세요’, 왼쪽만 보고 얘기하는구나 싶어서 ‘오른쪽도 한번 보세요’, 앞만 보고 얘기하는구나 싶어서 ‘뒤도 한번 보세요’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들이 ‘아, 문제가 아니네. 괜찮네.’ 하게 되는 거예요. 문제가 있어서 문제를 삼는 게 아니라 문제가 없는 걸 문제로 삼아서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보니까 저와 대화를 하다 보면 ‘문제가 아니네.’ 하게 되는 거예요.

엄마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심리적 안정입니다. 아이가 앞으로 뭐가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행복해야 될 거 아니에요? 행복할 수 있는 바탕은 엄마만이 마련해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엄마는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될 수 있도록 해 줘야 돼요. 아이의 자아가 형성될 때 심리가 편안하도록 아이에게 엄마가 선물을 해줘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애 키울 때 엄마가 짜증내거나 성질내거나 미워하거나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두 번째, 아이가 대통령이 되거나 뭐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줘야 합니다. 적어도 아이를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것, 그게 부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건 남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려면 3살 때부터 엄마가 방청소할 때 옆에서 같이 걸레 가지고 놀게 하고, 설거지할 때 숟가락 갖고 놀게 하고, 밥할 때 밥그릇 갖고 놀게 하고, 아빠가 못 박을 때 못 갖고 놀게 해야 돼요. 아이에게 일이라는 건 없어요. 뭐든지 놀이거든요. 그래서 아빠, 엄마 옆에서 그런 걸 갖고 놀다가 손도 다치고 하면서 그걸 배우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아이가 뭐든지 할 수 있게 되면, 비록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라도 엄마 없이 혼자서 밥도 찾아먹을 줄 알고, 방청소도 할 줄 알고, 옷도 빨아서 입을 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아이는 인도 갖다놔도 살고, 미국 갖다놔도 살아요. 말 못해도 손짓, 발짓 해가면서 살아요.

이렇게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을 여러분들은 지금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놓고 이웃집 아줌마나 남이 해도 되는 그런 일,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되느냐’ 갖고 난리잖아요. 요즘 같이 특히 어떤 방향으로 교육을 시켜야 되는지 알 수가 없는 이런 시대에는 기초만 딱 해 주고, 나머지는 아이들끼리 하도록 둬야지요. 저도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면서 중학교 어디로 갈 건지, 나중에 뭘 할 건지는 아이들끼리 의논해서 했어요. 형들 따라가기도 하고요. 그런 관점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기본기만 갖출 수 있도록 해 주고, 거기서 좀 더 역할을 해 보려고 하는 건 좋아요. 그러나 아이에게 행복의 바탕을 심어주거나 생존력도 안 키워주고 자꾸 아이를 걱정하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이에게 집착하는 거지요.”

스님은 다양한 고민들을 다양하고 따뜻하게 풀어주었습니다. 행복학교 4강을 모두 참석한 개근 학생들에게 스님이 직접 장미꽃을 한분 한분께 주는 시간을 가졌고 오늘을 기억하는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오늘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함께 보면서 다음 만남을 기대하며 마무리하였습니다.

행복캠프를 마치고 스님은 진관사로 이동하였습니다. 진관사에서 외국인 손님과 저녁 공양 약속이 있었습니다. 진관사에서는 스님을 위해 극진히 사찰 공양을 마련해 주셨고 스님과 손님은 진관사의 아름다운 가을풍취 속에서 편안한 가운데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정명숙, 신혜주(글), 이준길(사진), 정란희(녹취), 박효정(편집)

<스님의 하루>에 실린 모든 내용, 디자인, 이미지, 편집구성의 저작권은 정토회에 있습니다. 허락없이 내용의 인용, 복제는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