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5차 해외 정토행자 대회 마지막 지부인 북미 서부 지구에서 행자 대회가 열리는 첫 번째 날입니다. 해외 정토행자 대회의 시초인 미주 정토행자 대회가 2007년에 북미 서부 지구인 시애틀에서 처음 열렸었습니다. 또 제3차 해외 정토행자 대회가 2013년에 엘에이에서 열렸고, 이번이 북미 서부에서 열리는 3번째 행자 대회입니다. 5번의 행자 대회 중 2번을 북미 서부에서 열린 만큼 사실 서부에서는 행자 대회가 익숙합니다. 이번의 행자 대회는 엘에이 쿠야마밸리 수련원에서 개최됩니다. 쿠야마밸리 수련원은 2003년에 처음 개원해서 엘에이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수련을 전담하고 있는 수행도량입니다.

LA 쿠야마밸리 정토수련원 전경▲ LA 쿠야마밸리 정토수련원 전경

한편 스님은 전날 엘에이 강연을 무사히 마치고 김명례 님 댁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식사 후에 쿠야마 수련원을 향해 출발해 정확히 8시에 도착한 후 행자 대회 일정 중에 하나인 산책 프로그램을 위해 그 경로를 미리 탐방했습니다.

오전 9시가 되자 북미 서부 각 지역의 행자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습니다. 많은 행자들이 화상으로만 보다가 직접 만나게 되어 신기하고 반가워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행자 대회 접수 중인 엘에이 정토회 회원들

환영합니다. 자 수건도 한 장씩▲ 환영합니다. 자 수건도 한 장씩

북미 서부지구의 행자들만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원수가 무려 56명이나 됩니다. 이 정도의 인원을 한 번에 수용해 본 적이 없는 수련원에서는 갑자기 늘어난 물 사용량으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추가적인 이동식 화장실 준비와 고장 난 화장실의 수리로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 기간 동안 얼마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샤워 금지 및 5명 이상 화장실 이용 후 물 내리기 등의 대안이 안내되었고 모두 흔쾌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인사말을 하고 있는 선주 법사▲ 인사말을 하고 있는 선주 법사

10시가 되어 본격적인 행자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입재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북미 서부지구 장인 주상휴 님을 비롯해 선주 법사님, 묘덕 법사님, 이정인 해외 사무국장님의 소개 인사가 있었습니다. 선주 법사님은 ‘행복의 바람, 평화의 바람, 서부로부터’라는 서부의 슬로건대로 바람을 어디까지 일으킬 것인지 기대가 된다 했고, 묘덕 법사님은 이 행자 대회가 행복을 전하는 바람, 발심 발원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각 지역별 참가자의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56명의 참가자들 중 16명이 엘에이 지역에서 참가한 분들로 가장 많았는데, 소개를 위해 줄줄이 나오는 사람의 줄에 앉아 있는 다른 지역 참가자들의 감탄이 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구 사무국, 해외국, 국제국 팀장 및 한국팀과 JTS담당자를 소개하는 시간에 스님도 ‘한국에서 온 지도법사 법륜입니다’하고 자기소개를 해서 모두들 환호와 박수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가장 많이 참가한 엘에이 팀▲ 가장 많이 참가한 엘에이 팀

이어서 스님의 입재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원하는 모든 분들을 행자 대회에 받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하며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행자 대회의 취지가 ‘정토회는 수행자의 모임’이라는 정체성에 따른 해외사업의 진행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여서 참가자격을 제한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며 초창기 해외사업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주었습니다.

해외 정토회는 1990년대 초반 해외포교가 열악했던 당시에 스님의 법문을 듣고 미주에 거주하는 많은 불교신자들이 대거 정토회로 유입되면서 폭발적으로 회원이 증가하였으나 이후 스님이 북한 돕기 사업에 매진하게 되면서 해외사업의 열기도 사그라들게 되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사업의 확장이 더디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초기 해외 신도들은 기존 불교신자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활동의 전파가 원활하지 못했고 정토회의 취지대로 수행자 위주로의 정비가 어렵지만 꼭 필요하다고 스님은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정토회 초기에 법당에 찾아왔던 분의 비닐하우스를 빌려 초기 수행공동체의 발판을 마련했던 한국에서의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청년기에 스님이 불교개혁운동을 활발히 했을 때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스님이며, 그런 사람이 머무는 곳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야'라는 서암 큰스님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 비록 비닐하우스에 살았지만 괴로움이 없는 청정한 수행자가 머무는 도량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절이나 법당을 마련함에 있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유휴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수행공동체인 정토회의 취지에 맞다고 하며 수행자의 정체성을 잘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입재 법문을 하고 있는 스님▲ 입재 법문을 하고 있는 스님

스님과 참가자들은 엘에이 공양 봉사자들이 손수 준비해준 구수하고 맛있는 수제비 국으로 점심을 든든히 했습니다. 스님은 선주 법사님과 함께 잠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곧이어 해외사무국, 국제국의 현황 발표를 시작으로 지구 및 지역별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스님도 뒤에서 다른 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진중하게 경청하고 내용 중에 잘못된 연혁은 즉석에서 수정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분들이 모여있으니 실내온도가 상당히 높은 데도 불구하고 행자들은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하는 모습으로 발표를 들었습니다.

해외 지부의 현황과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사무국장 이정인 님▲ 해외 지부의 현황과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사무국장 이정인 님

2시간 반에 걸친 긴 발표시간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 후에, 격렬한 몸풀기 체조와 스트레칭 시간을 가짐으로써 장시간 동안 앉아 있는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었습니다.

격렬하게 몸을 풀고 있는 참가자들▲ 격렬하게 몸을 풀고 있는 참가자들

이어서 선주 법사님의 JTS소개가 시작되었습니다. JTS는 정토회의 원칙대로 100% 봉사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인도 학교의 건축 사례를 들어 한 달에 걸쳐 지을 수 있는 인도 학교를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짓다 보면 1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JTS가 빠지더라도 지역 주민들끼리 운영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할 수 있다 하며 정토회의 원칙을 말씀해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저녁예불 후에는 식사를 한 후 각 지역별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애틀 팀은 장윤정의 ‘올래 올래’라는 노래에 맞춰 단체 활동에 함께하지 않는 심술쟁이를 함께 동참시킨다는 콘셉트를 넣어 귀여운 율동을 선보였고, 밴쿠버 팀은 각양각색의 가발과 선글라스를 쓰고 재밌는 율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고 있는 밴쿠버 팀▲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고 있는 밴쿠버 팀

바로 이어 수행에 어려움이나 궁금한 점이 있는 행자들을 위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시간이 늦어진 관계로 총 5명의 질문을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1)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지만, 불법을 배우면서 수행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나 부모님도 함께 수행을 했으면 좋겠는데, 같이 하지 않으니 좀 힘듭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명상할 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때 중간에 멈추고 노트를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고 계속 명상을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3) 저는 예전에 교회에 다니며 친구들에게도 열심히 전도를 해서 몇 명의 친구는 지금도 교회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튜브를 통해 스님을 알게 된 후 지금은 법당에 나온 지 5년이 됐습니다. 가끔 교회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은 정토회에 다니는 저를 비판하지 않을지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제 마음이 좀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4) 전에는 남편이 문제가 많아 보였는데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후부터는 너무 예뻐 보여요. 남편은 변한 것이 없는데,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바뀐 것인지, 어떤 상을 짓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5) 명상을 배울 때 호흡을 지켜보라, 느낌을 지켜보라... 이렇게 늘 지켜보라고 합니다. 항상 깨어 지켜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하고 있는 참가자와 답변하고 있는 스님▲ 질문을 하고 있는 참가자와 답변하고 있는 스님

그중에 깨달음의 장 수련 이후 남편이 예뻐 보이는 내 마음의 상태를 질문한 네 번째 질문자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저는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관점을 잘 잡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불법을 공부하기 전에 제 남편은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초에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하고 나서 저를 돌아보니 남편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부처님처럼 보이고 전에 갖고 있는 남편과의 문제가 단번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별문제 없이 지내다가 작년 11월 즈음에 제가 다시 굉장히 사로잡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환희심이 옅어지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너무 답답해서 스님 법문을 인터넷에 찾아보다가 법문에서 ‘남편 문제가 아니라 실은 다 내 문제였다’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큰 환희심이 있었고 남편과의 관계도 다시 좋아졌습니다. 올해 5월에 깨달음의 장에 다녀와서 또 기쁜 마음이 들었는데 다녀와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또 사로잡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음의 장에서 어렴풋하게 느꼈던 환희심이 굉장히 크게 일어났어요. 그 이후에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남편이 너무 예쁘고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몇 주 전부터 이것 또한 제가 또 다른 상을 짓고 있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닌데 제가 상을 짓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러다 스님의 책에서 ‘있다 없다를 뛰어넘은 세계로 갔다가 와서 다시 있다 없다를 논해야 한다’는 것을 봤어요. 그 말씀이 제 지금 상황에 맞는 건지 적용을 할 수 있는 건지 명확하지 않아서 질문드립니다. “

"질문자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저는 '내가 들뜨고 있구나' 알고만 있으면 되나요?”

“질문자는 지금 감정이 들떴다 가라앉았다 들떴다 가라앉았다 하고 있어요. 남편이 천사 같았다가 악마 같았다가 지금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깨달음의 장 다녀와서는 계속 좋은 감정만 있어요.”

“좋은 감정만 있는데 이것이 1년, 2년, 3년이 지나도 계속 좋은 감정만 있다면 어느 정도 수행에 들어섰다 할 수 있는데 그게 좋았다 또 나쁘다를 반복하면 그건 널뛰기하는 윤회일 뿐입니다 허공에 붕떠서 몇 달 지냈구나 하는 이런 수준이에요."

“그러면 남편이 예뻐 보이는 것은 제가 들떠 있는 감정이라고만 알아차리면 되는 건가요?”

“남편이 예뻐 보이는 것을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그럴 때 자기감정이 들떠 있나 살펴보세요. 들떠 있으면 반드시 가라앉을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의 들뜬 감정을 지켜보면 그땐 사라지게 됩니다. 감정이란 것이 영원히 들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들떠 있다면 그게 가라앉을 때 다시 미워지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너무 들뜨면 안 됩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좋아요?" (모두 웃음)

“남편으로부터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고 고마운 사람인데 제가 그걸 모르고 다른 한 면만 보고 있었나 해서요."

“그래요. ‘고마운 사람이구나', '남편이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구나’ 하고 느끼는 건 좋은 거에요. 살아있을 때는 내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고마움을 못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내가 100의 이익을 얻었는데도 200을 얻으려고 했다면 부족을 느끼니까 늘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지금까지 있었던 100의 이익이 같이 없어져 버리니까 아쉬움이 생겨서 내가 남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고 있었던 것이 자각이 돼서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남의 말 안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하거나 성격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저런 사람은 법당에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성격은 강해도 공양간 일은 책임지고 맡아서 잘해요. 그런데 늘 신경질을 내니 저런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싶지만, 막상 없어서 내가 부엌일을 해보면 그런 마음이 안 들어요. 숫제 신경질을 좀 받아 주는 게 낫죠. 그래도 공양간에 밥이라도 지어주는 사람이 필요하구나 느끼게 됩니다.

있을 때는 없는 게 낫겠다 싶은데, 또 없어 보면 전화라도 받아주는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드는 겁니다. 인생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다 보면 사람들이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맞아요.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상대가 피해를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서로서로에게 조금씩 이익을 주고 사는 거예요. 상생하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늘 실망하는 것은 기대가 커서 그래요.

자식은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는 존재예요. 그런데 자식들이 대부분 부모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부모가 자기 원하는 만큼 안 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식은 오토바이 사 달라고 하는데 부모가 자전거를 사주면 자전거 사주는 것도 굉장히 고마운 일인데 오토바이를 안 사줬다고 불만을 갖는다는 거죠. 그래서 자녀들은 늘 혜택을 입고 살아도 부모한테 불만이 많은 겁니다.

그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맺고 살 때 얻어지는 이익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안 얻어지면 늘 불평을 합니다. 그러다 상대가 죽거나 헤어지고 나면 그 고마움을 알게 되는 거죠. 깨달음의 장은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나중에 헤어진 뒤에 알 것을 헤어지기 전에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참 고마운 사람이구나', '내가 원망할 일은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예뻐 죽겠다, 좋아 죽겠다, 이건 좀... (대중 웃음) 뭐가 그렇게 예쁠 것이 있겠어요? 그건 또 들뜬 거지요. 너무 들떠 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가라앉을 위험이 있습니다. 항상 차분함 속에서 ‘당신이 살아만 있어도 참 고맙다', '집 지켜주는 것 만도 해도 고맙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술 마시지 말라는 데도 술 마시는 것은 술 마실만큼 건강하다는 것 아니겠어요? 만약 이 사람이 병원에 누워서 술도 못 마실 수준의 건강 상태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술을 마시든지 말든지 자기 발로 걸어 다니고 자기 손으로 밥을 먹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그제야 알 수 있는 겁니다. 꼭 그런 경우를 안 당해도 미리 아는 게 깨어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남편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들뜨면 어떻게 될까요? 남편이 내일이라도 갑자기 죽으면 질문자는 또 울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내일 남편이 죽는다고 해도 울 일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수행입니다. 남편이 술 먹고 왔다고 해도 괴로울 일이 없어야 되고, 남편이 내일 죽는다 해도 슬플 일이 없는 게 수행인데, 질문자가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건 약간 부작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스님 책에서 읽은 ‘내가 상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는 뜻인가요?”

“지금 저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책 얘기를 꺼낼 이유가 뭐가 있나요?”

“지금 제가 처한 상황에 스님 말씀을 대입시켜 본 건데요.”

“스님이 없을 때는 책에 대입을 하지만 스님이 여기에 와 있잖아요? 부처님이 와 계시는데 금강경 내용을 꺼내서 ‘부처님, 금강경 사구게가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니에요?”

“네, 맞아요.”

“그건 지식을 논하는 겁니다. 부처님한테 직접 자기 괴로움을 이야기하면 되지, 부처님이 옛날에 남하고 이야기했던 것을 가져와서 ‘부처님, 그때 그 사람한테 말씀하셨던 그게 무슨 말 이예요?’ 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님이 여기 와 있으니까 고민이 있으면 스님에게 직접 물으면 되는 거예요. 스님을 앞에 두고 스님 책에 나오는 내용을 묻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본인이 지금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책에 나오는 문구에 매여서 번뇌하는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즉문즉설을 끝으로 행자 대회 첫날을 마무리했습니다. 내일도 모둠별 토론 및 발표와 지역별 과제 및 궁금한 점에 대한 스님의 즉문즉설 등 탄탄한 프로그램이 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박근애, 박점옥, 김소희, 조은영, 김윤진, 백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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