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폭염경보가 내렸습니다. 극심한 무더위 속에서도 바른불교, 쉬운불교, 생활불교를 배우고자 입학했던 전국의 경전반 학생들이 졸업식을 하러 대전 충남대학교 정심화홀에 모였습니다. 요즘 열대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피곤할 텐데 졸업식에 참석하는 학생들도, 맞이하는 봉사자들도 함박웃음으로 서로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식을 알리는 타종에 떠들썩하던 식장 안은 금세 경건한 자세로 예불을 올리며 졸업식을 시작했습니다. 이어 정토회 대표 김은숙님은 불교대학에 많은 사람이 입학하지만 경전반까지 졸업하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적은 편인데 이렇게 졸업해서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했습니다.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니 졸업생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졌습니다.

전국 8개 지부와 공동체, 청년이 모두 지부별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 박수로 축하해주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바른 법으로 안내해 준 스님에게 ‘스승의 은혜’ 노래와 꽃다발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은 손을 흔들면서 대중에게 화답했습니다.

총1004명의 경전반 졸업생 대표로 광주법당 박현숙님이 스님에게 졸업장을 받고 이어 상임법사들이 지부별로 일일이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졸업장을 받은 학생들은 무대위로 올라와 스님과 악수를 하고 돌아가 자리에 앉아 졸업장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전국 개근상 대상자를 대표하여 안양법당 안향희님이, 정근상 대상자를 대표하여 흥덕법당 박민기님이 스님에게 상장을 받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경전반을 다니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그래도 조금은 더 행복해졌고, 가족간의 화목이 조금 늘었다는 졸업생의 대답이 왜 경전반에 다녀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사정상 건물 내에서는 음식물 반입이 어려워 덥지만 캠퍼스 잔디밭과 그늘에서 법당별로 모여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점심 공양을 하는 대중들을 스님이 살뜰히 둘러보았습니다.

1시 30분이 되자 수원정토회 소속 도반들이 ‘댄싱퀸’의 음악에 맞춰 2부를 신나게 열자, 이에 질세라 대전법당 경전반이 공부하면서 배웠던 내용을 소곡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어 대구법당 현외철 님께서 경전반을 다니면서 삶의 변화를 느꼈던 소감문을 발표해주셨는데요, 정토회를 만나 수행하는 본인을 행운아라 칭하며 앞으로도 불법 안에서 살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 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졸업생을 위한 즉문즉설 시간에는 총 6명이 질문했습니다. 그중, 지난 특강수련 때 질문했는데 그래도 모르겠으면 졸업할 때 다시 물어봐라 했던 질문자의 즉문즉설을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스님. 저는 작년 10월 경전반 특강수련 때 스님께 질문을 드렸는데요, 내 삶의 주인이 돼서 살라는 말씀과 기도문에 있듯이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되라는 말씀이 상충되는 것 같다’는 내용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좋은 약을 한꺼번에 많이 먹어도 부작용이 난다’고 하시면서 (모두 웃음) ‘안타깝지만 탐구를 더 하고 졸업식 때 다시 질문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졸업식 때 다시 질문 드립니다. (모두 웃음)

지금 한 7개월이 지났는데요, 제가 뭘 모르는지는 알겠는데 해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저는 ‘주인으로 살아가자’ 하는 순간 아상에 사로잡혀서 내 고집을 피우는 것 같고,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의 마음을 내어보자’ 하는 순간 남의 말에 휘둘리는 노예의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제자들처럼 스님께서 ‘탁’ 하시면 저도 ‘탁’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모두 웃음) 제가 어리석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다시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예, 더 탐구하면 더 좋겠는데요. (모두 웃음) 왜냐하면 탐구를 해야 자기 것이 되지, 들은 건 자기 것이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 하는 질문이니까 함께 풀어가 보죠.

내가 돈에 집착을 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돈! 돈! 돈!’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돈이 주인이에요, 내가 주인이에요?”

“돈이 주인입니다.”

“예, 돈이 주인이지요.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이나 영혼까지 팔고 그런단 말이에요.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에도 나가잖아요. 그렇게 되면 돈이 주인이지, 내가 주인이 아니잖아요. 이 정도로 내가 돈에 집착을 하면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떳떳할까요, 아니면 약간 비굴해질까요?”

“비굴해집니다.”

“예.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 또는 돈이 나보다 적은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요? 내가 비굴해질까요? 아니면 약간 교만해질까요?”

“교만해집니다.”

“예. 그러니까 돈에 집착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느냐? 나를 기준으로 해서 나보다 돈 많은 사람한테는 비굴해지고, 나보다 돈이 적은 사람한테는 교만해지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대중들) 예.”

“내가 만약 지위에 좀 욕심이 있어서 ‘장(長) 자 붙은 자리에 좀 올라봤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은 시장이나 도지사 등 자기보다 지위가 좀 높은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 마음이 괜히 비굴해지겠지요. 그런데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요? 자기도 모르게 조금 교만해지겠지요?”

“(대중들) 예.”

“실제로 심리가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비굴과 교만이 정반대 같은데, 이게 같은 거예요. 비굴과 교만, 이해가 되세요?”

“(대중들) 예.”

“비굴과 교만은 정반대인데 동일한 거예요. 동전의 양면이에요. 그러니까 대상에 따라 이렇게 되면 비굴해지고, 저렇게 되면 교만해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돈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어떨까요?

‘내가 노력해서 밥벌이만 하면 되고, 필요하면 내가 일해서 벌면 되는 거지, 돈이 많다고 내가 다 쓰는 것도 아니잖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실제 돈이 많아봤자 은행에 넣어놓잖아요. 은행쓰레기통에 담아놓는다고요. (모두 웃음) 그런데 굳이 은행쓰레기통에 담아놓을 게 뭐 있어요? 필요하면 일당 받는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사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먹으면 되지, 굳이 많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또 집은 커서 뭐하겠어요? 청소하기만 힘들지요. 집이 넓다고 내가 다 차지하고 자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 중에 작은 방 하나 차지하고 잘 건데, 큰 집이 굳이 필요 없지요. 큰 방 차지하고 싶으면 문경수련원 대강당에 가서 자면 되잖아요. (모두 웃음) 거기 방이 얼마나 넓습니까. 180평짜리 방이니까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자는 거는 몸만 누이면 되고, 시장이 반찬이니까 있는 거 먹으면 되고, 옷은 더위 피하고, 추위 피하고, 몸만 가리면 되지요. 옷 잘 입어서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요? 옷을 잘 입으면 나 좋은 일 시켜요, 남 좋은 일 시켜요?”

“(대중들) 남 좋은 일이요.”

“남 좋은 일만 시켜요. 이해가 되세요? (모두 웃음) 남이 나를 봐주고, 내 옷을 봐주고 ‘야, 예쁘다’ 하니까 돈은 내가 내고, 남 좋은 일 시키는 거잖아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먹는 건 배 안 굶을 정도면 되고, 입는 건 추위를 피할 정도면 되고, 자는 데는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 정도 돈은 요즘 얼마든지 벌 수 있어요. 그럼 필요한데 가서 일하고 벌면 되지, 남한테 부탁할 게 뭐 있어요? 이런 관점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을 만나도 비굴해질까요?”

“(대중들) 아니요.”

“예. ‘돈 많은 건 네 사정인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비굴해질 이유가 없지요. 나보다 돈이 좀 적다고 해서 그 사람한테 내가 교만할 이유도 없지요.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상관이 없지요. 그건 노란 옷 입었든 빨간 옷 입었든, 여자든 남자든, 시장이든 일반인이든, 애든 어른이든 따지지 않는 거랑 같아요.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잖아요. 똑같이 대하면 되지요. 이 사람이 가난하니까 불쌍히 여겨서 특별히 대해 주고, 높은 사람이니까 미워하고, 이러라는 게 아니라 똑같이 대하는 거예요. 평등하게. 그 사람이 한국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상관없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상관없고, 검은 옷을 입었든 흰옷을 입었든 상관없이 똑같이 대하면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돈 많은 사람한테는 비굴하고, 적은 사람한테는 교만하니까, 똑같이 대하는 나한테 세상 사람은 뭐라 그럽니까? ‘당당하다’ 그러지요. 그렇게 표현하지요? ‘저 사람은 대통령을 만나도 당당하더라.’ 이런 말을 하지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나 어린애를 만나도 똑같이 대하면 뭐라 그럴까요? ‘저 사람은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만났는데 겸손하더라’는 말을 하지요. 그러니까 ‘내가 겸손해야 된다’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면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한다고요? ‘당당하다, 겸손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당당하려고’ 하잖아요. 당당하려고 하니까 교만에 빠지는 거예요. 또 ‘겸손하려고’ 하니까 비굴에 빠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 질문자는 돈에 집착해서 ‘돈! 돈! 돈!’ 하면서도 당당하려고 하니까 돈 많은 사람한테는 저절로 비굴해지고, 돈 없는 사람한테는 저절로 교만해지는 모순이 생기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그 집착을 놓아버리면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게 되니까 저절로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저 사람은 참 당당하더라. 저 사람은 참 겸손하더라.’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겸손하려고, 당당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저절로 주인이 되는 거예요. 돈에 노예가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돈에 집착해서 ‘돈! 돈!’ 하면 돈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돈은 필요하지요. 그런데 ‘돈이 필요 없다. 돈은 마귀다’ 해도 돈의 노예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돈을 보면 도망가야 되고, 돈을 누가 많이 주면 갖다버려야 되니까요. 그런데 돈이 필요하면 벌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돈이 많이 들어온다면 보시하기 좋잖아요. 그걸 굳이 불에다 태울 필요가 있어요? 돈이 무슨 죄가 있다고요?(모두 웃음) 나는 뭐 높은 지위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직장을 다니다 보면 ‘당신이 부장 맡아라’ 이럴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굳이 안 할 필요가 있어요? 그냥 맡아서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직장에서는 그렇게 맡아서 부장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면 동료들과 똑같이 밥 먹고 노는 거예요. 왜냐하면 ‘부장’은 직장에서 맡은 역할일 뿐이지 ‘나’, 내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 같이 친구처럼 놀다가 회사에 오면 맡은 역할은 해야 되니까 부장 노릇을 하는 거죠. 그런데 회사에서 역할이 부장인데 친구처럼 해 버리면 되나요, 안 되나요? 그건 부장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반대로, 회사에서 부장 역할이라고 밥 먹으러 가서 ‘부장질’ 하면 돼요, 안돼요? (모두 웃음) 안 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만하거나 비굴해지는 문제가 자꾸 생기는 거예요.

그건 허상입니다. ‘부장’이라는 직책이 역할로 주어졌기 때문에 회사 안에서 역할은 해야 하고, 그 역할이 끝나면 보통의 사람으로 돌아와야 돼요. 밥 먹을 때는 부장과 직원이 밥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서 밥을 먹는 거예요. 관점을 이렇게 딱 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을 사는데 항상 당당하고, 겸손한 거예요. 그래서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거예요.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은 뭐예요? 당당하라는 거지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비굴하게 굴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게 주인이고, 이 세상 어떤 사람 앞에서도 교만을 떨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게 뭐예요? 그게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거예요.”

“스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더 어려워졌어요. (모두 웃음) 제 질문의 시초가 된 일이 뭐였느냐 하면, 제가 법당을 다닌 뒤에 남편도 법당에 다니고 있는데요.”

“남편이 법당에 다니지 말라고 해요?”

“그건 아니고요, ‘적절하게 다녀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 하면 되지요.”

“그래서 ‘예, 알겠습니다’ 하고 법당에 안 가봤거든요.”

“그럼 남편의 노예지요.”

“예, 그래서 제가 다시 ‘저는 가야겠습니다’ 하니까 남편이 화를 냈어요.”

“그건 질문자가 남편한테 대항을 하는 거지요. 남편을 거역하는 거지요. (모두 웃음) 남편이 ‘가지 마라’ 하면 ‘예’ 하고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고, 그래도 질문자가 갈 일이 있으면 가면 되지요. 갔다 왔을 때 ‘왜 갔냐’고 하면 요구에 수순해서 ‘죄송합니다’ 하면 되고, 이튿날 가고 싶으면 또 가면 되지요. 질문자는 자기 삶의 주인이니까요. 남편의 노예가 아닌데 왜 못 가요.”

“… (모두 웃음) 오늘 들은 말씀을 탐구해서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모두 박장대소)

“이걸 원리적으로 말씀드려보면, 남편이 가지 마라는 건 남편의 마음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돼요, 안 돼요?”

“(대중들) 돼요.”

“이해가 되니까 ‘예’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가고 싶으면, 내 인생이니까 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왜 나한테 가지 마라 그래!’ 하는 건 남편의 요구에 수순하지 않는 거예요. 남편은 질문자가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는데, 질문자는 ‘그 말도, 그렇게 말하지도 말라’고 남의 입을 막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남편한테 대항을 하는 게 되지요. 수순하는 게 아니고요. 남편이 가지 말라고 하면 그 입장을 이해해서 ‘예’ 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질문자는 남편의 노예가 아니니까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남편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갔다 왔으니까, 남편 입장에서는 화가 나니까 고함을 지를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입장을 이해하면 ‘죄송합니다’ 하면 되잖아요. (모두 웃음) 또 ‘내일은 안 갈 거지!’ 하면 이는 ‘안 갔으면 좋겠다’는 거니까 ‘예’ 하면 되지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별로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면 되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요.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요?”

“제가 느끼기에는 ‘예’ 하면 마음으로는 가고 싶은데 입으로만 ‘예’ 하는 거니까 비굴한 것처럼 느껴지고, 제가 안 간다고 해 놓고 갔다 오니까 남편 입장에서는 제가 교만한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아요.”

“질문자는 거꾸로 하는 거지요.”

“스님께서 거꾸로 말씀하셔서요.”(모두 박장대소)



“그러니까 질문자는 거꾸로 하니까 노예 역할을 하는 거예요. 바르게 하면 주인 역할도 하고, 남편한테 수순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탐구해 보겠습니다.”(모두 박수)

스님은 정토회는 수행의 불교로 평상시에는 평온하게 풀 뜯는 소처럼 살되 더불어 타인을 위해 행할 줄 아는 대승불교로 여러분 모두가 모자이크 붓다임을 알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길 당부하며 즉문즉설을 마무리했습니다.

마지막 축하공연으로 졸업이 곧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은 대구법당 도반들의 ‘앗싸 시작이다’ 댄스공연이 있었습니다. 흥겹고 시원한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공연이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전국 178개의 경전반 교실 담당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박수를 보냅니다. 선배이기도 하고 도반이기도 하면서 내일처럼 힘써 주신 담당자들이 있었기에 이 자리가 더욱 빛났습니다. 끝으로 산회가를 부르면서 졸업식을 마무리했습니다.

식이 끝난 후에는 지역별로 단체사진을 찍으면서 스님은 미소로 마지막까지 함께 했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스님은 스텝들과 내일 있을 불교대학 졸업식 좌석배치 문제로 현장을 돌아보며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신명옥, 김광섭,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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