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경의 하루 기온은 4계절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기온차가 큽니다. 오늘은 유난히 추운 아침이었습니다.


몸을 웅크리게 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 경전반에 재학 중인 400여 명의 학생들이 어제 특강수련을 하기 위해 문경정토 수련원에 모였습니다, 오늘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그동안 경전반 영상 강의를 들으며 의문이 들었던 점을 스님께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잘 주무셨어요?" 라는 인사 말씀을 시작으로 문경에 처음 오신 분들은 몇 분이나 되는지, 천일결사 입재는 하셨는지. 어제 저녁에 300배 정진은 했는지, 깨달음의장은 하셨는지, 안 하신 분들은 상반기 때 꼭 하시라는 당부 말씀을 하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특강수련은 그동안 경전반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용 중 궁금한 것에 대해 질의 응답을 하는 시간입니다. 학생 9명이 질문지를 써냈습니다. 상을 짓는다는 것에 대한 같은 질문이 많아서 전체적으로 말씀드리고 부분적으로 말씀드리겠다고 하며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금강경에 상을 없애라고 하는데 4가지 상 중 수자상에 대해 이해가 안 되고 아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해 궁금하다는 질문, 그 어떤 상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도덕적 규범이나 법률과의 차이점이 혼란스럽다는 분,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실제 나에게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분, 상을 가진 것은 나쁘다고 들었는데 상상력이 필요한 지금 시대에 역행하는 건 아닌지, 상을 가지는 게 나쁜 건지 옮은 건지 궁금하다는 분, 상을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기도할 때는 또 내면을 살피면서 떠오르는 것에 대해 지켜보면서 절을 하라고 하셔서 이것도 상을 짓는 것인지 궁금하다는 질문, 어릴 때 아버지께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씀을 책에 항상 써주셨는데 이 말이 상을 짓지 말라는 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분 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오늘은 상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 지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상을 짓지 마라’ 할 때 이 ‘상(想)’은 어떤 것을 상이라고 하느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물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컵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뚜껑이 있습니다. 다 보입니까?”

“(대중들) 예.”

“그러면 이 컵을 기준으로 해서 제가 물어볼 테니까 편안하게 얘기하세요. 이 컵은 이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작습니다.”

“이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큽니다.”

“이 컵은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작습니다.”

“이 컵은 뚜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큽니다.”

“자, 그러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웅성)”

“다시.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대중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이 컵을 가지고 ‘이 컵은 크다’, ‘이 컵은 작다’ 라고 할 때 이 ‘크다, 작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크다는 것은 객관적인 이 존재, 즉 컵이 크니까 크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보통 생각합니다. 또는 컵이 작으니까 작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즉 크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이 그 컵을 보고 큰 것을 크다고 인식을 하고, 작은 것을 작다고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죠. 나는 바깥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대부분 생각해요. 가령 ‘1킬로미터라는 거리를 길기 때문에 길다고 인식했다’ 하거나 ‘1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짧기 때문에 짧다고 인식을 했다’ 라고 인식합니다. 사실대로 인식을 했다고 여겨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했을 때 여러분들이 지금 느끼듯이 이 컵이 물병과 함께 있을 때, 즉 이런 조건에서 내가 이 컵을 인식할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컵이 이 뚜껑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러면 이 컵은 객관적으로 큰 것이고, 객관적으로 작은 것입니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이 컵은 인식 상에서 크다고 인식이 될 때가 있고, 작다고 인식이 될 때가 있는 거지요.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 사물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객관적 사물에 크고 작음이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인식 상에서 크다, 작다는 인식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컵 자체는 어떻습니까? 이 컵 자체는 크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작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질문자의 용어를 빌려서 제가 대답하는 방법이에요. 질문자가 ‘크냐, 작냐’고 물었으니까 제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고 답한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컵은 다만 컵일 뿐이다.’ 이거예요.

이렇게 ‘크다’ 라고 말할 때 우리가 ‘상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상을 지었다는 건 인식 상의 문제를 객관의 문제로 되돌린 것을 뜻해요. 내 눈에 크다고 보인 것을 존재 자체가 큰 것이라고 규정할 때 ‘크다는 상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용어를 이해하셨어요?”

“예.”

“내 눈에 빨갛게 보인 것이지 실제 그 색깔이 빨간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만약 빨간 색깔의 안경을 끼고 바깥 사물을 보면 흰 벽이 빨갛게 보이겠지요. 빨간색이기 때문에 내가 빨갛게 인식한 건지, 무색인데 내가 쓴 안경 때문에 빨갛게 보인 건지, 내가 현재 상태에서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럴 때 ‘내 눈에는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나한테는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라’ 라는 말의 뜻은 큰 건 크다고 보고, 작은 건 작다고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예.”

“내 눈에 크게 보였다고 아는 게 사실대로 아는 겁니다. 이걸 ‘공이다’라고 아는 게 사실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눈에는 빨갛게 보입니다’, ‘내 눈에는 크게 보입니다’, ‘내 관점에서는 작게 보입니다.’ 라고 아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작기 때문에 작다고 했지’, ‘크니까 크다고 했지’, ‘비싸니까 비싸다고 했지.’ 이렇게 주관을 객관화시킵니다. 이런 것을 ‘상을 지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식 상 오류입니다.

‘금을 은이라고 착각을 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큰 걸 작다고 내가 인식을 잘못했다.’ 이런 의미가 아니예요.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인 존재가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인식이 될 때 인식 상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그 객관적인 존재가 크다거나 작다고 잘못 알고 있어요. 이것을 ‘상을 지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아까 ‘상을 짓는 건 나쁩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건 나쁘다, 좋다는 도덕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이 오류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크니, 작니, 비싸니, 싸니,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갈등하는 거죠. ‘어떻게 이 큰 걸 저 사람은 작다고 말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이 작은 걸 저 사람은 크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동네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이렇게 남한테도 물어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상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예.”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는 그대로 가져가야 되겠어요? 아니면 개선을 해야 되겠어요? 개선을 해야 되겠지요. 오류니까요.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인식을 개선하면 번뇌가 없어집니다. 어떤 분이 ‘우리 남편이 나쁜 인간이에요.’ 한다고 했을 때 그 남편은 실제로 나쁜 인간일까요, 그냥 존재일까요?”

“(대중들) 존재.”

“예, 그냥 하나의 존재예요. 그리고 술을 마신다는 것도 그냥 하나의 행동이에요. 그런데 내가 ‘술을 안 마셨으면 좋겠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니 나쁜 행동인 거예요. 이해되세요?”

“(대중들) 예.”

“그러니까 ‘나쁘다’는 것은 나한테서 일어난 인식이지, 존재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나는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남편이 안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때 남편은 멋도 모르고, 풍류도 모르고, 답답한 인간이고, 그래서 나쁜 존재로 인식돼요. (모두 웃음) 그러니 여러분들에게 온갖 갈등, 미움, 원망, 슬픔, 이런 게 있었다면, 이 제법의 본질을 딱 꿰뚫어 알게 되는 순간 슬퍼할 일도 없고, 기뻐할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목석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모두 웃음) 이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 인연을 살펴봐야 됩니다. ‘컵이 큽니까, 작습니까?’ 그랬을 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답을 외우면 안 됩니다. ‘이 물병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라고 물으면 ‘공(空)입니다’ 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또 법상에 빠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물으면 ‘무조건 공입니다’ 라고만 답하는 거예요.

‘제법이 공한데, 좋고 나쁨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분들이 있는데, 여기도 그런 병 걸린 사람 많을 거예요. 이런 분들은 대부분 책으로 불법을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아내한테 ‘절에 뭐하러 가노? 부처가 따로 있나? 내가 부처다. 그 스님이 부처가 아니고, 그 돌이 부처가 아니고, 내가 부처다, 내가!’ 이런 소리나 하고, 아내가 뭐라 하면 ‘공이다. 좋고 나쁜 게 어디 있나? 본래 없다는 거 안 배웠나?’ 이런 소리나 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는 뭘 좀 안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건 병이에요. 그런 병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아집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고, 법집은 진리라는 잣대를 만들어서 자기 변명하는 데에 써먹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은 부처님 말씀이라는 잣대 하나를 가지고 내내 써먹는 사람들에게 ‘그 법에도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집을 타파하고, 동시에 법집도 타파하는 힘이 있지요. 크다, 작다는 걸 타파하는 게 아집을 타파하는 것이라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는 정답을 하나 만들어서 움켜쥐고 있는 게 법집입니다.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예.”

“누가 부처님께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간다.’ 이러는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어디 사는 사람인지를 먼저 살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인천 사람이라면 ‘동쪽으로 가세요.’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이 인천 사람인 건 고려도 안 하고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는 것만 외워서 법칙을 만듭니다. 그래서 누가 또 와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면 ‘내가 압니다.’ ‘어느 쪽인데요?’ ‘동쪽이에요!’이러는 거지요.

그런데 그때 부처님께서 ‘서쪽이다.’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또 ‘부처님도 틀렸다!’고 하든지, 아니면 ‘아, 내가 잘못 알았네. 한 가지 길만 있는 줄 알았더니 두 가지 길이 있구나.’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 ‘서울 가는 길이 서쪽이다’라고 말씀하신 건 그 사람이 춘천 살기 때문인데, 법집을 만든 사람은 그걸 또 외우는 거예요. 교리를 외우는 거죠. ‘서울은 동쪽과 서쪽으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구나. 그런데 방금 남자가 물으니 동쪽이라 했고, 여자가 물으니 서쪽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동쪽으로 가야 되고, 여자는 서쪽으로 가야 되는 거구나.’ 이렇게 규정을 짓는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남자가 물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이번엔 ‘북쪽으로 가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남자는 남자인데 어린애인 거예요. 그래서 ‘아, 어린애가 물으니까 북쪽이라고 대답하는구나.’ 이렇게 또 해석을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 사람이 어린애여서가 아니라 수원에 살기 때문에 북쪽이라고 대답하신 거예요.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서 질문하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서울 가는 방향을 정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걸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합니다. ‘정할 수가 없다’는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또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면 서울을 갈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것도 치우치는 거예요. ‘없다’를 단견(斷見), 무견(無見)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무수히 많다.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는 게 상견(常見), 유견(有見)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은 인연을 따라 가라는 말입니다. 인천이라면 동쪽이지요. ‘인천인데도 세 방향으로 가도 된다.’ 이런 건 없어요. 인천이면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고, 춘천이면 서쪽이에요. 그 인연에서는 그렇게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 인연에서 그렇게 정해졌다고 해서 그것을 ‘동쪽’이라고 확정 지으면 안 돼요. 우리는 왜 이렇게 자꾸 치우치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자꾸 뭘 확정짓고 싶어 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늘 정답을 만들어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정답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무유정법’이란 인연을 따라서는 만 가지 길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 인연을 따라서 가야지 그냥 만 가지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가면 안돼요. 예를 들어 늘 옷을 입어야 됩니까, 벗어야 됩니까? 그 중에 어느 하나라고 말할 수 없어요. 옷은 입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벗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거죠. 목욕탕 안에서는 벗어야지요. 밖에서는 입어야 되지요. 그런데 그것도 또 세세하게 들어가면 딱 안 맞아요. 인도 여자들은 목욕탕 안에서도 옷을 입거든요. 어릴 때부터 평생 옷을 입고 목욕을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을 따른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걸 법성계에서는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이라고 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크다, 작다, 동쪽이다, 서쪽이다, 하는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공(空)하다. 정한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연성(隨緣成)’, 즉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이걸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합니다. ‘동쪽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연을 따라 동쪽이라 이름 할 수 있다’는 건 금강경 식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상(四相),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子相)이 뭐냐?’ 하는 것은 지식에 속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네 가지가 본질이 아니고, 또 그 네 가지는 학자에 따라 규정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울타리를 작게 치든, 크게 치든 ‘울타리를 친다, 모양을 짓는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울타리를 치든, 아상을 치든, 중생상을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울타리를 치면 그건 이미 보살이 아니니 그 네 가지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는 거예요. 이해하셨어요?”

“(대중들) 예.”

“그러니까 ‘내가 너를 구제했다’, ‘내가 너한테 줬다.’ 이런다면 이미 ‘나’니 ‘너’니 하는 울타리를 쳤다는 거예요. 그게 아상으로 치든, 인상으로 치든, 중생상으로 치든, 수자상으로 치든, 뭐라고 치든 이미 울타리를 쳤다, 모양을 지었다는 거예요. ‘모양을 지었다면 이미 너는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다. 번뇌가 없어졌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가 없다. 보살이 아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울타리를 치거나 모양을 지으면, 여러분들이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도 모르게 크니, 작니 상을 지었다면 번뇌나 미움, 또는 괴로움이나 슬픔 등이 생깁니다.”

이렇게 법문을 마친 후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지난주 일요일에 SBS 집사부일체 방송 프로그램에서 스님이 출연했을 때 스님의 출가 동기가 소개되었는데요. 한 경전반 학생은 스님께 출가할 때의 그 의문이 과연 지금은 풀렸는지 물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에 학생들 모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스님 책을 보니까 스님께서 처음 출가를 하게 된 동기가 스님의 스승님께서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느냐?’ 하고 질문을 했는데 그에 대해 스님께서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알고 싶어서 출가를 하셨다고 되어있더라고요.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그에 대한 답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모두 웃음)

“어디서 ‘톡’ 소리가 나면 울밑에 호박 떨어지는 소리다, ‘척’하면 삼척이다, 이런 센스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방금 질문한 것과 똑같은 얘기잖아요.(모두 웃음) 궁금하면 탐구를 해야지요. 제가 뭐라고 한들 질문자가 알겠어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탐구를 하세요. 이 수행의 핵심은 탐구입니다. 알았지요? 제 스승님께서 탐구하는 자세, 즉 밖을 향한 마음을 안을 향하도록 돌려주셨던 건데, 이 말을 ‘답이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다’고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결론, 정답’을 찾는 자세에서 탐구하는 자세로 바꿔주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찾았다’고 말하면 질문자는 뭐라고 할 거예요?(모두 웃음) 제가 ‘못 찾았다’고 하면 또 뭐라고 할래요?”

“그래도 스님께서는 정토회를 이끄시는 지도 법사님이신데 저는 ‘찾았다’고 말씀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모두 웃음)

“못 찾았다면 정토회를 이끌 능력이 안 됩니까?(모두 웃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스님이 그것을 탐구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있다’고요. 제가 답을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를 묻기보다는 그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스님의 답변에 학생들 모두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학생들에게 “이 법은 이웃에게 전해도 나에게 아무 손해가 나지 않아요. 늘 얼굴에 미소를 갖고 사세요. 이 좋은 법을 널리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면 좋겠습니다” 하고 당부하면서 특강을 마쳤습니다.

경전반 특강을 마치고 스님은 문경공동체 상주대중, 33기 백일출가 행자님들과 조촐한 스승의날 행사를 가졌습니다. 수행자가 가져야할 관점에 대해 법문하고 단체 촬영을 했습니다.

이어 2수련장에서 21차 정기수련을 하고 있는 화엄반 행자님들과 시간을 가졌습니다. 화엄반 행자님들은 최근에 육조단경, 신심명, 법성게 학습을 마친 터라, 학습 때 궁금했던 것들을 스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의 차이, 계•정•혜에 있어서 정과 혜의 관계, 해탈향과 해탈지견향의 의미 등 주로 용어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많았는데 스님은 질문에 대한 답과 더불어 부처님의 가르침, 수행자로서 가져가야 할 불교에 대하여 총괄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니 뿌듯함과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듭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법사가 된다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의 영역으로 분명해져야 내 안의 열등의식도 없어지고 당당해진다는 말씀이 많이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가볍고 기뻐요.”

법문을 들은 행자님은 환한 얼굴로 대답하였습니다.

스님은 2시간 30분가량 집중된 시간을 가진 후, 화엄반 행자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서울에서 안보 문제를 주제로 평화재단 연구위원들과 모임을 가진 후 저녁에는 부처님 오신 날 전야제 점등식 기념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이승민,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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