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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설

“남편이 성기능 장애.. 부부 관계를 안 하니 너무 힘들어요.” 법륜 스님의 답변

행복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어제에 이어 노원구에서 열린 행복한 대화 현장 소식을 전합니다. 강연장마다 스님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한결 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동성애에 대한 질문과 스님의 답변이 이 말씀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느끼도록 해주었습니다.  


#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이 살 때



“동성애 축제도 열리고 사회가 많이 변했는데, 동성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할까요?”


스님은 질문지함에서 질문지를 읽고 바로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윤리적 문제입니다. 유교와 기독교는 윤리적 가치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겠죠. 한국과 일본은 윤리적 가치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겠죠. 기독교와 이슬람교는요? 다르겠죠. 


지금은 한국, 일본, 중국, 서양 사람도 섞여 살고 불교, 기독교, 이슬람 신자도 섞여 사는 세계화의 시대인 열린 사회가 됐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다보니 가치관이 서로 달라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긴 ‘이렇다’ 하고, 저긴 ‘저렇다’ 해서 충돌할 때, 보편적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하면 좋을까요?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할 때는 생태 윤리에 기초해서 인간 윤리의 보편성을 찾으면 됩니다. 


새끼를 낳은 개나 닭은 사람이 새끼를 가져가려고 하면, 새끼를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덤빕니다. 이처럼 어미는 새끼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요. 이걸 ‘종족 보존의 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새끼가 어느 정도 크면 사람이 잡아가든 말든 어미닭이나 어미개가 저항하지 않습니다. 새끼가 어느 정도 크면 어미도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만 있어요. 이것을 ‘개체 보존의 본능’이라고 해요. 모든 생명에게는 개체 보존의 본능이 있는데 어린 새끼를 둔 어미에게만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습니다. 



‘결혼을 아직 안 했다’, ‘신분이 다르다’, ‘알려지면 손해다’, ‘아직 살림을 덜 갖췄다’ 등의 이유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버리는 것은 생태 윤리에 어긋납니다. 다른 생물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새끼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생겼든 어미는 새끼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종족보존의 본능이에요. 이것이 생명의 한 현상이자 흐름입니다.


어미는 늙고 새끼는 컸을 경우도 생각해 봅시다. 늙은 어미를 돌보는 새끼를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 생태계에는 각자 자기 생명을 지키는 개체 보존의 본능만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늙은 부모를 돌보는 경우가 있죠. 이것을 ‘선(善)’이라고 합니다. 생태계에 없는 현상이에요. 새끼를 버리는 것도 생태계에 없는 현상이에요. 이것을 ‘악(惡)’이라고 합니다. 선악은 생태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작용의 문제예요. 그래서 ‘선한 마음’, ‘악한 마음’ 이렇게 부릅니다. 


악한 마음에 따른 악한 행동은 멈춰야 해요. 그래서 ‘지악(止惡)’, 즉 ‘악을 멈춘다’라고 말해요. 반대로 선행은 권장사항입니다. 하면 좋고, 안 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권선(勸善)’ 또는 ‘수선(修善)’이라고 하지요. 악을 멈추고 선을 권장하는 것을 ‘지악수선(至惡修繕)’이라고 합니다. 


선행은 선택사항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부모를 돌보는 것도 선택사항이에요. 부모를 돌보면 선행이지만, 부모를 안 돌본다고 악행은 아니에요. 그러나 어린 자식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악행에 들어갑니다. 그건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선행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태 윤리에 기초해서 인간 윤리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교적 윤리에서는 자식은 버리더라도 부모는 반드시 봉양해야 한다고 하지요. 이런 윤리는 생태 윤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거예요. 



흰 개가 교미를 할 때 상대편 수캐가 검은 색인지 흰 색인지를 두고 차별할까요? 그리고 새끼를 낳았는데 흰 털인 새끼도 있고, 검은 털인 새끼도 있다면, 털 색깔을 두고 차별할까요? 안 하겠죠. 마찬가지로, 사람의 피부 빛깔이 검거나 희다고 차별하면 이것은 생태 윤리에 어긋납니다. 그것은 악습이에요. 


또 개, 말, 소 어떤 동물이든 성이 암컷이라고 차별하는 걸 봤어요? 못 봤죠? 마찬가지로 사람도 여자라고 차별하는 것은 생태 윤리에 어긋납니다. 인간 윤리 중 이 생태 윤리에 어긋나는 것은 보편성이 없는 거예요.


질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죠. 사람의 몸을 볼 때 우리는 남자, 여자 두 종류만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즉, 성이 남성, 여성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네 가지 성이 있습니다. 생식 기관으로 구분해보면 남·여의 생식기관만 가진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 여 생식 기관을 동시에 가진 ‘양성’, 양쪽 생식기관이 다 없는 ‘무성’이 있습니다. 다만 두 가지가 다 있거나, 다 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양성 또는 무성의 신체구조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차별받아서는 안 됩니다.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났고, 자연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차별한다면 인간 윤리 이전에 생태 윤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다수가 ‘남성’이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나머지 소수를 병신이라고 차별합니다.  


자연현상에서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생물과 무생물, 식물과 동물, 이렇게 우리가 나누는 분류 외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의 중간, 다시 말해 식물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동물성이라고 할 수도 없거나, 식물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동물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요. 모든 분야, 모든 존재에는 다 이런 중간 존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조새는 파충류라고도 할 수 있고 조류라고도 할 수 있잖아요. 


#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게 성애를 느낀다고 해서 괴롭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는 육체를 기준으로 이야기한 것이고요. 정신작용이 가미되면 어떨까요? 육체적으로 남성인 사람은 대부분 여성에 대해 성적 호기심을 가지고, 육체적으로 여성인 사람은 대부분 남성에 대해서 성적 호기심을 가집니다. 이걸 ‘이성애(異性愛)’라고 해요.  그렇고요.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육체는 남성인데 여성에 대해서는 성애가 없고 남성에 대해서 성애가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여성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동성애(同姓愛)’라고 해요. 이런 현상은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겁니다. 천성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죄악시 하니까 숨기게 되고, 숨기고 살자니 고통이 됩니다.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게 성애를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은 괴롭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난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성애’에는 이 두 종류밖에 없을까요? 아닙니다. ‘양성애(兩性愛)’가 있고 ‘무성애(無性愛)’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양쪽 모두에 성애를 느끼는 사람이 있고, 남자든 여자든 성애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이렇게 네 종류가 있는데 다수가 이성애자에요.

 

그런데 왜 ‘동성애’만 문제가 될까요? ‘양성애’에는 ‘이성애’ 성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볼 때 눈에 잘 안 띕니다. ‘무성애’는 표가 안 납니다. 무성애자는 스님이 되거나 신부가 되면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러나 무성애자는 결혼하면 결혼생활에 파탄이 생기기 쉽습니다. 만약 여자가 무성애자라면, 생물학적으로는 아기를 낳을 수 있는데 남편에게 아무런 성적 호기심이 없으니 남자 쪽에서 ‘딴 남자가 있나?’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무성애자일 때는 아내가 늘 ‘딴 여자를 숨겨놨나?’ 이런 오해를 하게 돼요. 그래서 결혼생활이 평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애가 별로 없는 사람은 결혼하면 많은 문제가 생기지만, 종교인이 되면 아주 좋아요. (모두 웃음)


이런 차이를 차별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생태 윤리에 어긋납니다. 기독교에서 동성애 반대를 많이 하는데, 그건 기독교 신앙에도 어긋난다고 봐요. 기독교의 논리대로 하느님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동성애자도 하느님이 그렇게 창조한 거예요. 그게 잘못됐다고 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실수했다는 뜻이잖아요. (모두 웃음) 


하느님이 전지전능하고 우리가 정말로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믿는다면 동성애도 하느님의 창조물이에요. 그러니 존중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오해가 생길 수는 있어요. 군대처럼 특정한 상황에서 성애를 표현하지 못 하는 가운데 일어난 이성애자의 동성애 표현은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과 신체를 다방면으로 조사해보면 동성애자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3000년 전 기록에도 남아 있을 만큼 역사적으로도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무지해서 잘 몰랐어요. 그러므로 동성애자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온 사람들입니다. 피부가 검다고 차별받는 것보다, 여자라고 차별받는 것보다도 인간의 무지로 인해 더 차별받고 고통 받아 왔습니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야 이들이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라고 하면서 세상 속으로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 다만 다른 것일 뿐입니다



굳이 불교적으로 따져보지 않아도 생태적으로만 봐도 인종 차별이니 성 차별이니 계급 차별이니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장애에 대한 차별도 마찬가지예요. 장애는 불편할 뿐입니다. 팔이 하나 없으면 그만큼 불편할 뿐이지, 그것이 열등한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자신을 ‘열등하다’ 라고 생각하면 열등한 자기를 죽여 버리는 자살을 하든지, 차별하는 상대를 죽여 버리는 살인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런데 ‘다만 불편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면 의족을 하거나 의수를 하면 됩니다. 불편함을 극복하는 기술을 개발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장애를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뿐만 아니라 키가 작다고 열등한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열등한 것도 아니고, 피부가 검다고 열등한 것도 아니에요. 다만 다른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관점을 딱 가지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윤리도덕 중에도 생태 윤리에 어긋나는  게 많아요. 그런 관점에서 정리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반론도 있을 거예요. 오늘 강의 끝나고 글이 올라가면 ‘뭐, 동성애를 지지해?’ 이렇게 욕을 하는 댓글이 숱하게 달리고, 정토회 건물 앞에서 시위도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물었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중 웃으며 박수)



관점을 잡아주는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청중들도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개도, 소도, 짐승도 안 하는 차별을 우리들은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오늘(20일) 새벽 6시부터 9시까지는 문경정토수련원에서 정토불교대학 입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불교대학 학생들은 평소 가지고 있던 다양한 고민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중에서 한 여성분은 남편이 성기능 장애를 갖고 있어서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해 고민이라며 스님에게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스님은 앞서 동성애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4가지 종류의 성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한 후 질문자의 고민을 하나씩 해소해 주었습니다. 


# 우리 남편은 출가했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성기능 장애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아이가 생겨 결혼하게 됐습니다. 아이 둘은 쉽게 생겨서 낳았지만 몇 년째 부부관계를 안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제가 적극적으로 시도를 해서 생긴 건데, 그것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시작과 동시에 끝났어요. (모두 웃음)  


남편은 아이들에게 잘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30대 청춘이고,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어요. 오로지 육아만 하고 지내니 심적, 육체적으로 힘듭니다. 남편은 치료할 생각도 전혀 없어요. 그런 남편이 미워 이혼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참고 살자’ 하고 생각해 봤지만 ‘젊은 청춘을 왜 과부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 몰래 애인이라도 만들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경우에는 관점을 잘 잡아야 돼요. 먼저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생식기관을 기준으로 네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남성, 여성, 무성, 양성’입니다. 여러분은 남성과 여성 밖에 없는 줄 알죠? 양성과 무성은 아주 극소수예요. 이렇게 양성이거나 무성인 사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네. 이게 중요한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갖는 위대함이에요.” 



“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성적 욕구를 느끼는 대상에 따라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이렇게 네 종류가 있는데 다수가 이성애자에요.


질문자의 남편은 무성애자일 가능성이 있어요. 무성애자는 성적 호기심이 없을 뿐입니다. 남자 동성애자도 여자하고 결혼하면 아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무성애자도 마찬가지에요. 생물학적으로 남자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성과 관계를 하면 아이가 생겨요. 그러나 여성에게 성적으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남편이 성적 욕구가 없으니 아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힘들겠죠. 


무성애자가 스님이나 신부가 되면 잘 맞겠지요.(모두 웃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체가 큰 수행이거든요. 그런데 결혼을 하면 질문자의 남편처럼 결혼 생활이 참 어려워요. 아내는 성적 욕구가 있는데 남편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첫째, 남편을 이해해야 해요.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바람을 피운다면 남편의 잘못일 수가 있어요. 또 성기능 장애와 무성애는 달라요. 성기능 장애는 성애는 있는데 성기능이 작동을 안 하는 것이에요. 남편은 성애 자체가 없는 것이라면 무성애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무성애자라면 본인 스스로 성기능 장애라고 생각 안 하니까 치료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니 생각을 딱 바꿔보는 겁니다. 아이도 있고 아빠로서 역할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니 질문자가 ‘우리 남편은 출가했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두 웃음) 



나도 출가수행자라고 생각하면, 남자가 와서 맨날 치근대지 않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스님도 잘 사는데 나라고 왜 못 살겠어요. 질문자는 젊은 청춘이니까 물론 성욕이 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극복을 해나가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은 성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질문자도 이혼을 하고 성애를 누릴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어리면 엄마로서의 의무가 더 중요합니다. 아이를 다 키워 놓고 이혼을 해야 돼요. 성애를 더 우선시하면 엄마로서 자격이 없는 거예요. 스님도 수행을 할 동안에는 성애가 있더라도 제어해야 합니다. 그것처럼 아이를 키울 동안은 성애를 제어해야 해요. 이걸 숨어서 해소하려고 하면 괴롭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성애를 누릴 권리보다 엄마의 책임이 더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클 동안은 내려놓아야 해요.


어느 정도 아이가 크고 난 후에는 남편과 의논을 해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 하지 말고, ‘여보, 나는 성적 욕망이 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렇게 대화를 해보면 되죠. 이걸 가지고 싸울 일은 아니에요. 남편이 잘못 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부인을 두고 밖에서만 성애를 즐긴다면 잘못이지만 이건 남편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또 남편이 성애가 있는데 성기능이 장애일 때는 치료를 해야 되지만 성애가 없는 것이라면 치료할 이유가 없어요. 서로 욕구가 다른 겁니다. 남편을 존중하는 게 필요해요. 



남편도, 질문자도 각자 삶의 권리가 있으니까 자기 권리를 찾아서 떠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 대한 책임을 마치고 떠나야 해요. 이 상황에서 무조건 참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데, 참는 게 아니라 이치를 알고 대응하는 게 필요합니다. 


성애를 가진 질문자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성애가 없는 남편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각자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더 우선입니다. 자기가 처한 책임은 다 해야 해요.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일정한 책임을 다 하고 자기 길을 갈 수는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 권리만 주장할 게 아니라 남의 권리도 존중해야 합니다.” (모두 박수)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스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귓가에 멤돌면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그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다른 꽃을 피워내고 있지요. 차이가 존중되고 서로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을 꿈꿔봅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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