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님은 청년대학생들과 함께 낮에는 경주역사기행 안내를, 저녁에는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오전 9시 30분, 태종무열왕릉에 스님이 모습을 드러내자 230여 명의 청년들은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오늘 날씨 와이래 춥노?”

아침부터 강한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봄놀이 하자는데 한겨울에 오게 됐네. 벚꽃은 많이 졌지만 파란 나무 잎을 볼 수 있어 좋다”

스님의 말에 청년들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스님은 역사기행을 경주로 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오늘 역사기행의 취지와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오전에는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설명을 하다가 추위를 타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곤 “일어나서 걷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동 중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여동생의 재밌는 러브스토리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진흥왕릉에 도착한 청년들은 바람이 잦아든 언덕 위에 앉았습니다. 스님은 귀한 손님 한 분을 소개했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큰 민간단체인 ‘신라문화원’의 원장 진병길님이십니다.” 청년들은 경주의 문화를 알리는 데 힘써주심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신라와 가야의 통합에서 배울 수 있는 남북의 통일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서 김유신장군묘까지는 걸어서 이동할 예정이였으나 추운 날씨 탓에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11시 30분쯤 김유신장군묘에 도착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김유신장군묘의 뒤편에 둘러앉았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스님을 제외한 모든 청년대학생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휘날렸습니다. 흥무공원에서 도시락을 먹는 일정은 취소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버스 안에서 도시락을 먹은 청년대학생들은 스님과 큰 벚꽃나무 아래에서 서둘러 사진을 찍고 다음 일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다음은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황룡사 터에 선 스님은 저 멀리 있는 산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멀리 보이는 산은 선도산, 명활산, 남산, 소금강산, 낭산입니다. 이 다섯 개의 산을 서라벌 오악이라 불러요.”

소금강산에는 이차돈의 목이 나가떨어진 장소인 백률사가 있고, 낭산에는 선덕여왕릉이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황룡사지 역사문화관에 도착한 청년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에 관한 3D 영상 시청을, 한 팀은 황룡사 9층 목탑의 10분의 1로 축소된 모형을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청년들은 3D의 생생한 장면에 집중했습니다. 몽골에 의해 황룡사 9층 목탑이 불에 타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운 탄식을 뱉었습니다.

저녁 6시 50분부터는 개인 정비 및 식사를 마친 청년대학생들이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강당으로 하나둘 모였습니다. 먼저 감미로운 기타연주와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대강당을 가득 메운 230여 명의 청년대학생들은 스님이 무대 위로 오르자 큰 박수로 반겼습니다. 질문지를 받은 스님은 “청년들이 고민이 뭐 이래 많노.” 하며 웃었습니다.

오늘 스님은 18개의 질문지 중 10개의 질문에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불교의 오계 중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있는데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은 괜찮은지, 간호업무를 하면서 윤리 도덕적 문제에 부딪혀 마음이 불편하다는 분, 통일을 왜 해야 하며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변 친구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시겠다는 분, 손해 보는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면 좋을지 고민이신 분, 이성인 친구를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고도 만날 수 있을지 고민이라는 분, 학창시절에는 부모님의 눈치를 봤는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답답하다는 분,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음에도 아버지와 이야기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분, 36살인 지금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 수행하면서 여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분 등 많은 분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손해보는 일을 안하려고 하는 경향에 대해 질문하신 분과의 대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좋게 말하면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저한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거나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수행하는 데에서도 스님의 법문을 찾아 들어보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살아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 하며 그냥 한다’고 하시는데 아직은 그게 마음에 잘 와닿지 않습니다.

평소에도 내 마음을 돌이켜보는 등의 중요한 일보다는 급한 일부터 우선 처리하게 되고, 급한 일에 마음이 도리어 끄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수행, 보시, 봉사를 ‘그냥’ 할 수 있을까요?” (모두 웃음)

“인생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즉,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는 게 바로 인생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며 이 길을 제시하고, 불교에서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저 길을 제시하고, 또 세상에서는 그게 아니라며 또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길들은 모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념, 신앙,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가지 인생의 길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 중 한 두 가지만 알고 있으면 ‘이게 바른길인가, 아니면 저게 바른길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여러 가지 종교와 철학을 다양하게 접해보고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보면 결국 다양한 가치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길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된 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이렇게 수많은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가면서 ‘이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 망설이게 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런 고민은 옳은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찾고자 하는 고민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생겨나는 망설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 ‘돈을 빌려서 이 위기를 극복할까? 아니면 궁하지만 버텨볼까?’하고 고민을 한다면 둘 중 어느 길이 더 나은지를 몰라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렸을 때 갚아야 하는 책임 때문에 고민을 하는 거예요. 즉, 돈을 빌리고 싶기는 한데 갚기는 싫다는 마음입니다. 돈을 빌리고는 싶은데 갚기는 싫으니까 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떤 선택을 해도 좋아요.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돈을 빌리는 선택을 했을 때는 갚는 책임을 다해야 하고, 돈을 갚기 싫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빌리지 말고 지금 처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해요.

인생에서도 어떤 길을 가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세가 중요해요. 절을 하는 문제에서도 ‘아침에 일어나서 절하면 좋다’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게을러서 아침에 못 일어난다든지, 평소 생활하면서 화를 잘 낸다든지 등 자기가 살면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만약 아침에 게으르다면 조금 부지런하면 되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있으면 지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돼요. 그런데 이게 말은 쉽지만 이미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알고 있어도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그냥 살아도 돼요.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대로 사는 것이 나에게 손실이 된다면, 이대로 계속 살면서 손실을 감수하거나 그게 싫으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습관을 바꾸어야 하는 거예요.

게으른 생활 습관으로 인한 손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가령, 직장에 자꾸 늦게 가면 욕을 먹게 되겠죠. 학교 다닐 때는 늦게 일어나면 부모님의 잔소리나 야단이라는 손실이 따릅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잔소리는 현실적으로 그리 큰 손실이 아니니까 잘 안 고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런 습관은 절에 들어와서 살면 금방 고쳐집니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안 일어나면 쫓아내 버리니까요. (대중 웃음)

군대에서도 이런 습관은 잘 고쳐집니다. 아침에 안 일어났다가는 큰 손실이 따르잖아요. 이렇게 주어진 상황에서 손실을 따져보고, 손실이 너무 크면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습관이 잘 안 고쳐지니까 그걸 극복하는 방법으로 절 수행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절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요. 그래서 습관을 바꾸려면 무의식이 바뀌어야 해요. 의식에서 아무리 결심을 해도 무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습관은 바뀌지 않습니다. 무의식이 바뀌려면 무의식에 암시를 주어야 해요. 자기 전에 아무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하고 결심을 해도 그건 잠들기 전의 이야기지, 일단 잠이 들어버리면 의식은 쉬고 무의식만 활동하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아무리 결심을 해도 다음 날 평소대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절은 무의식에 반복해서 암시를 주기 위해서 되풀이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따르릉 하면 싹 일어납니다, 따르릉하면 싹 일어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반복해서 하면 그게 새로운 습관이 되기 때문에 차츰 무의식에 영향을 주게 돼요. 그런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입으로만 ‘싹 일어납니다, 싹 일어납니다’ 이렇게 하면 무의식이 이걸 심각하게 안 받아들여요. (대중 웃음)

반면 절을 하면서 이걸 반복해서 되뇌면, 절을 하면서 다리가 아프고 힘이 드니까 무의식에서도 그만큼 많이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무의식에 자기 암시를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돌봐준다고 믿는 것은 종교예요. 수행은 하느님이나 부처님께 돌봐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움직이기 위해서 지속적인 자기 암시를 주고, 결국 무의식이 그걸 인지함으로 인해 습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도 습관을 극복해보겠다고 하면 이렇게 지속적인 암시를 통해 극복하고, ‘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도 괜찮아요. 습관을 고칠 때는 그만큼의 결정심이 필요하고 대부분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습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냐고 저에게 물어도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라는 대답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수행·보시·봉사 중 첫 번째인 수행입니다.

두 번째인 보시는 베푸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형제들이 많다 보니 자동으로 사회성이 많이 길러졌습니다. 아이들이 많아도 부모님 입장에서는 다 같은 자식이니까 사탕을 사와도 형제간에 하나씩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간혹? 막내들이 두 개 먹으려고 떼를 쓰기도 하죠. 그러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큰 아이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큰 아이 사탕을 막내를 주곤 합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밖에 나가면 큰 아이가 막내를 가만히 둡니까, 사탕을 다시 빼앗습니까?”

(대중 웃음과 함께) “뺏어요.”

“네, 아이들끼리니까 큰 아이가 다시 막내의 사탕을 뺏어요. 이렇게 형제들이 많은 환경에서 자랄 때는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 그 속에서 응징이 가해지기 때문에 (대중 웃음) 자연스레 질서가 잡힙니다. 부모님은 막내가 귀여우니까 봐주지만, 형제들끼리는 몇 살 차이가 나도 다 어린아이들이니까 그 속에서는 그런 게 용납되지 않아요. 이렇게 가정 안에서든 동네에서든 또래들끼리 있을 때 개인 이익만 추구하면 자연히 따돌림을 당하고 고립되는 경험을 하게 돼서 그 속에서 사회성이라는 게 길러집니다. 그렇게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웁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누구든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부모님이 아이들을 무조건 돌볼 수가 없고, 어린아이들도 어른 만큼은 아니지만 방 청소를 하든 나무를 자르든 자기 몫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하는 걸 배웁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하나 아니면 둘 낳아서 기르니까 부모는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돌봐주기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훈련을 받을 기회가 그만큼 없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이런 생활이 습관이 되니, 학교에 가고 직장에 나갔을 때 사람들과의 갈등도 많고 여러모로 많이 부딪칩니다. 또 각자가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옛날보다 서로서로 더 이기적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부모로부터 보호받는 환경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 습관이 그렇게 든 거예요. 내가 원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사회성, 타인에 대한 배려, 자기 역할에 대한 책임 등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이런 걸 개선하기 위해서는 절에 다니거나 하면서 남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서 새로운 습관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합니다. 절에서 백일출가를 하면 남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는 활동을 계속 하잖아요? 가만 보면 밥 짓고 청소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누군가 늘 해오던 일입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살면서 누군가 그걸 대신해주면 받아서 쓰기만 했지, 직접 해본 적은 없었던 거예요. 백일출가에서는 그런 걸 직접 해보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늘 누가 해준 밥을 먹기만 했는데 직접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늘 누군가 옷을 대신 빨아주면 입기만 했는데 직접 빨래를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늘 누군가 청소를 해주면 그 안에서 지내기만 했는데 직접 청소를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것을 연습함으로 인해 차츰 사회성을 익히게 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그다음에 취직도 전보다 수월하게 합니다. 백일출가를 하고 난 후 노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왜 그럴까요? 백일출가를 했으니까 부처님의 돌봐줘서 직장을 얻게 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에서 백일동안 지내면서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건 뭐든지 다 했어요. 돈도 안 받고 일을 한 거예요. 예전에는 아르바이트하러 가도 거기 있는 사람들하고도 안 맞고 하니까 오래 하기가 힘들었는데, 백일출가를 하고 나면 백일동안 돈 한 푼 안 받고 온갖 일을 다 했는데 이제는 월급을 80만원이나 주니까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는 거예요.

백일출가 하는 동안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예불부터 시작하잖아요? 아무리 회사에서 일을 많이 시킨다고 해도 절에서 행자 생활하는 것보다는 쉬워요. 일이 아무리 많아도 새벽 4시부터 일 시키는 회사는 없잖아요? (대중 웃음)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 시키는 회사도 없고, 자기 전에 300배 시키는 회사도 없어요. (대중 웃음) 심지어 군대도 행자 생활보다 쉬워요. 아무리 군대라도 새벽 4시부터 훈련을 시키지는 않잖아요. (대중 웃음)

그러니 백일출가해서 일을 하는 동안 그만큼 자기도 모르게 사회성이 키워지는 거예요. 밥이면 밥, 청소면 청소, 뭐든지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또 남을 위해 밥을 짓고 청소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부모나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만 했지 자기가 다른 사람을 도와준 경험은 많이 없잖아요. 절에서 살아보면 밖에 나가서 같이 밥을 먹어도 늘 돌아가면서 비용 지불을 하지, 밥 먹고 그냥 일어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유럽 문화만 봐도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내고 일어나는데, 여러분들은 자라면서 늘 부모님이나 누가 대신 내어주니까 그냥 밥만 먹고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대중 웃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보시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거예요. 큰 비용을 내라는 게 아닙니다. 법회가 끝나면 1,000원이라도 내고, 회의가 끝나면 자리 정리라도 해서 자꾸 베풀고 남을 위한 봉사가 몸에 배도록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그 속에서 자연스레 사회성과 남을 배려하는 자세가 익숙해지게 돼요.

나중에 여러분들이 결혼생활을 해도 절에서 이런 생활이 익숙해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기가 수월합니다. 남자, 여자 관계없이 이런 습관이 있으면 아이도 같이 돌보고 밥 먹고 나면 설거지나 다른 집안일도 같이 거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습관이 없으면 결혼생활을 해도 하루아침에 이런 습관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를 하나, 둘씩 낳으니까 누구나 다 왕자 아니면 공주로 자라게 돼요. 여러분들도 몸에 밴 습관들을 보면 모두 다 왕자 아니면 공주처럼 자란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습관이 밴 겁니다.

왕자, 공주의 습관이 배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옛날보다 지금이 세상 살기가 훨씬 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처음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요즘 세상을 살아가기가 쉽지만, 여러분들은 처음부터 부모님이 다 해 준 편한 환경에서 생활한 것이 습관이 되어서 바깥세상을 살아가기가 힘이 든 거예요. 객관적으로 보면 세상은 살기가 더 좋아졌는데도 여러분들이 체감하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바깥은 약간 추운 날씨인데도, 늘 따뜻한 곳에서만 지내다 보니 추위를 많이 타는 거예요. 객관적으로는 옛날보다 덜 추운데도 이 날씨에 적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다 보니 옛날 사람들보다 더 어려워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한 방에 형제가 7명, 8명씩 같이 잤어요. 그런 데서 자라다 보니 결혼해서 분가하면 한 방에서 두 명이 지내니까 아무리 못해도 어릴 때 자라던 그 환경보다는 좋아집니다. 즉, 결혼 후 생활환경이 좋아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자기 방을 갖고 자란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응접실까지 있는 집에서 자란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부모님이 해주는 밥을 먹고, 부모님이 청소며 빨래며 다 해주는 환경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대부분 자기가 살던 집보다 작은 데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아요. 게다가 집안일도 누가 대신해주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가 직접 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결혼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거예요. (대중 웃음)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연애는 괜찮지만, 결혼은 안 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결혼까지는 몰라도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고 해요. 직장 다니는 것도 힘든데 아이까지 키우고 싶지는 않다는 거죠.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동거생활도 귀찮아서 안 하고 연애만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요.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건 요즘 사람들이 성적 욕망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보다 더 나은 환경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결혼 후에는 그렇지 않으니까 선뜻 내키지 않는 거예요. 혹여 부모가 경제력이 뒷받침돼서 집을 장만해주거나, 한쪽이 돈을 잘 버는 경우에는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결혼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그렇게 생활환경을 너무 생각하면 결혼하기가 힘듭니다. 결혼하려면 둘이 눈 맞았을 때 그냥 하는 게 좋아요. 작은 방이라도 같이 지내면 되고, 아이가 생기면 업고라도 직장 생활을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해요. 아주 기본적인 것만 되면 괜찮다고 생각을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을 할 수 있지만, 무언가 갖추어놓고 하기를 바라면 5년, 10년이 지나도 어려워요. 지금 스무 살이면 스물다섯이면 바라는 게 다 갖추어질까요? 서른이면 갖추어질까요? 서른이 아니라 서른다섯, 마흔이 되어도 잘 안 될 거예요. (대중 웃음)

요즘 청년들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백일출가나 청년법회 활동은 이러한 습관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회적으로 이런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못해요. 남자들의 경우에는 예전에 군대가 이 역할을 많이 해준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군대에서도 자칫 사고가 나거나 하면 장교들의 승진에 지장이 있으니까, 장병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한 면이 많아서 예전만큼의 역할을 못 하고 있어요. 물론 안 가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예전만큼은 못하니 요즘 정토회에서는 군대보다도 센 백일출가를 만든 거예요. (대중 웃음)

청년 정토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돈 내서 봉사를 많이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짓처럼 보일 수 있어요.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자기 돈을 내어가면서 남을 위한 일을 하니까요. 그런데 그런 활동을 통해서 습관이 바뀌면 결국 나의 세상살이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늘 수행, 보시, 봉사하는 거예요.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제가 하기 싫은 것은 아니고 업식을 바꾸어보고자 참회 기도도 많이 하고, 또 스님께서 무주상보시에 대해서 하신 말씀 중에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기대를 하지 말라기보다는 ‘기대를 하면 실망이 따른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는 원리를 말하는 거예요.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이 따르지 않으니 그로 인한 괴로움이 없습니다. 반면 기대를 하게 되면, 그 기대가 충족되면 만족이 있지만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이 따릅니다. 그러니 괴롭지 않으려면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이치예요. 무조건 기대를 하지 말라는 당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살면서 ‘아, 기대하니까 괴로움이 따르는구나’하고 느꼈다면, 앞으로 괴롭지 않으려면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오랜 습관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늘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기대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 기대에 따른 실망감이 생겨날 때 보통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롭다’며 그 괴로움을 정당화하는 반면 이런 이치를 알면 그 실망감의 원인이 나의 기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즉, 괴로움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잠시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금방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이런 이치를 알고, 현실 속에서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중 박수)

스님과 청년들은 추운 날씨에서 역사 기행을 하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많은 이야기를 밤늦게까지 나눴습니다.

내일은 남한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새터민들 200여 명을 위해 경주 불국사 안내를 해준 후 그동안 남한에서 살면서 힘들었던 점에 대해 대화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보미, 이재희, 권성준, 조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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