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석 목탁소리에 2월 1일 새벽 4시 30분에 깨어납니다. 어느새 새벽의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해진 인도입니다. 오늘은 스님과 함께 인도인 스텝, 한국인 스텝들이 함께 소풍을 가는 날입니다. 새벽예불을 마친 후 발우공양 대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6시 30분이 되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수자타 아카데미로 모입니다. 보리수나무 아래 미리 준비해둔 짜이를 한 잔 씩 마시고 각자에게 준비된 간식을 챙기고 점심 해 먹을거리를 차에 실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와 분교 스태프 15명, 지바카 병원 스태프 5명, 건축과 마을개발 스태프 3명, 상카시아에서 온 수바스와 쉬라즈, 그리고 스님을 비롯한 한국 활동가 13명 등 모두 38명이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전 7시. 차가 정시에 출발을 하자 스님은 “인도에서 늦어지지 않고 약속된 정시에 출발하네.”라며 웃으니 보광법사님이 그동안 버스를 사용할때는 무조건 시간을 지키도록 이야기 하니 어떤 때는 2시간 전에 오기도 했다면서 인도 스텝들도 많이 훈련되었다고 답했습니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제띠안입니다. 둥게스리에서 차로 약 1시간 20분을 달린 후 가벼운 차림으로 10여 분을 걸어 한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 탑은 부처님께서 1천명의 비구들과 빔비사라 왕을 만났다는 것을 기리며 2300여년 전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인데 그 이후에도 복원된 적이 없어 그 당시의 벽돌 그대로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잠시 벽돌에 손을 대고 당시의 기운을 느껴보았습니다. 이제는 거의 무너져 버린 채 스투파 것으로 보이는 벽돌 조각들이 산비탈에 그대로 굴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 서서 삼배를 드렸습니다.


“제띠안은 중요한 곳입니다. 앞에 보면 족마한 탑이 있는데 1km마다 1개씩 설치해 놨어요. 제띠안으로 들어오는 삼거리에서부터 여기 탑까지 1km이고, 여기서 손반다르 동굴까지 13km, 손반다르에서 라즈길까지 2km입니다. 그래서 총 16km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15km 정도를 걸었습니다. 그걸 ‘1유순’이라고 합니다. ‘유순’은 소가 짐을 싣고 삐그덕 거리며 하루에 걷는 거리입니다. 그게 현대적으로 보면 약 15km정도가 됩니다. ‘유순’과 같은 말이 힌디로 있어요?”

(대중) “벨가리~”

“부처님께서는 둥게스리에서 6년 수행하시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하시고 다시 보드가야로 오셨습니다. 당시 그 지역의 이름은 우루벨라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루벨라가섭과 그 제자 500명을 교화하고, 만코시 힐 건너 힌두템플 있죠? 나디가섭이 수행하던 곳에서 300명을 교화하고, 가야에서 만푸르 올 때 힌두템플 많잖아요. 지금 뭐라 불러요?”

(대중) “가야 쉬르~.”


“가야가섭 수행하던 그곳에서 200명을 교화한 후 모두 1천명을 가야산 중턱에 모으시고 탐진치 삼독을 멸하는 불의 설법을 하셨습니다. 원래 우루벨라 가섭은 불을 섬겼는데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을 피우는 제사의식등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밖의 불은 껐다, 그러나, 마음속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첫째가 욕망, 두 번째가 성냄, 세 번째가 어리석음이다. 이 세 가지 불을 꺼야 한다.’ 그리고 그 천 명을 데리고 라즈길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습니다.

라즈길에서 여기는 서쪽입니다. 서문 밖 1유순거리입니다. 빔비사라 왕은 여기까지 부처님을 마중 나왔습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는데 사실은 우루벨라가섭을 마중 나왔다 보는 게 맞습니다. 왜 그러냐면 왕이 1년에 한번은 우루벨라 가섭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었지만 아직 부처님이 누구인지 모를 때거든요. 우루벨라가섭과 부처님, 그리고 천 명의 비구가 앉아 있었는데 그때 왕이 인사를 올리고 물었습니다. ‘내가 듣기로 우루벨라가섭이 어느 젊은 수행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저는 그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80살 먹은 노인이 어린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내 할아버지요 하는 것과 같아 도무지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우루벨라가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을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고나서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제가 이분을 만나고 나서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빔비사라 왕이 사실을 알고 다시 부처님에게 예를 표하고는 법을 청했습니다.

부처님은 빔비사라 왕과 신하를 위해 법을 설했습니다. 법문을 듣고 빔비사라 왕은 법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예를 표하고, “제가 젊을 때 5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가 왕이 되는 것이고’, 그 당시에는 왕자라고 다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를 죽이고 나서야 왕이 되었습니다. 프라세나짓 왕은 형제를 100명이나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가 내 나라(마가다국)에 부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 것이고, 네 번째는 그 법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제가 왕이 되었고, 부처님이 출현했고, 부처님을 이렇게 뵙고 법문도 들었고, 법도 이해했고, 이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왕궁으로 드십시오. 공양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부처님이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부처님은 왕궁에 오지 않으려고 하시는 구나. 그러면 부처님은 어떤 곳에 머무르실까?’ 생각하다가 성 밖에 자신이 좋아하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곳에 머무시라고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승낙하셨습니다.

바로 베누반 비하르(죽림정사), 첫 번째 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많은 법을 설했습니다. 사리푸트라, 목갈리나, 마하가섭도 그때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라즈길, 그 당시에는 라자그라하라고 불렸는데, 그곳에 많이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시내에 있지 않고 주로 성 밖 숲이나 산의 동굴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고 싶으면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곳이 그리드라 쿠타입니다. 길이 잘 나 있는데, 부처님 때문이 아니라 왕이 가기 위해 길을 닦은 곳입니다. 그래서 왕이 어디까지 마차를 타고 갔다, 그 다음에 경사가 지니 걸어갔다. 그리고 신하들을 두고 혼자서 부처님을 만나러 갔다, 하여 나중에 아소카 왕이 스투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 뿐 아니라 부처님이 머무신 곳은 많습니다. 이곳 서문밖에도 동굴이 있고, 지금은 거기는 아무도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계단이 있습니다. 그것은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방문할 때 신하들이 길을 닦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리악에도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도 지금은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이 있다는 것은 왕이 방문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두 군데를 가려고 합니다. 가본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을 여러분과 함께 가려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오늘 소풍 온 곳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그 두 곳의 동굴을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까나홀 분교장인 까필데우지가 가져온 님끼(과자)를 나눠 먹으며 5분여 동안 차를 타고 가서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동굴은 라즈길 서문 밖 동굴입니다. 흙길을 걸으며 나중에 올 때 지표가 될 바위와 버스가 어디로 들어올 수 있는지 살펴보고, 걷던 중에 만난 주민들에게 동굴의 위치도 물어가며 산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앞장서서 숲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길이랄 것이 없는 길을 가시나무에 찔리고 긁히며 허리를 숙여 바닥을 기고, 소와 염소가 지나간 흔적인 배설물을 피해 위로위로 올라갔습니다. 길을 찾아 산을 오르면서 스님께서는 “항상 길을 물을때는 세세하게 물어야 해요. 여기사는 사람은 대충 저 앞 바위에서 산으로 가라고 했지만, 와보니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할때도 잘 모를때는 세세하고 물어보고 조사해야 합니다.”라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충 처리하는 일들에 대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또다시 길을 찾아 산의 바위 위로 올랐습니다.



저만치 희끗희끗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스님을 따라가는 길은 등산이든 순례든 수행이든 쉽지 않구나, 그렇지만 멈출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구나, 그냥 따라갈 수 밖에…’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손을 잡아주고 얽히고 설킨 가시덤불을 치워주며 서로서로 도와 1시간 여 동안 길을 찾아 산으로 오른 끝에 빔비사라 왕의 코끼리가 다녔다는 산위에서는 볼 수 없는 조금 넓은 길을 만났습니다. 그 길을 따라 간 끝에 만난 동굴. 모두들 “와~!”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꽤 큰 동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세계 공통예불문인 ‘빤즈실’을 함께 하며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두 개의 불상이 모셔진 동굴 뒤쪽으로 다시 작은 동굴이 아늑하게 이어졌습니다. 박쥐 냄새가 심했고 뜨거운 공기가 가득했지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산을 내려올 때는 선발대였던 인도인 스태프들이 길을 찾아내 오가는 주민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수월하게 왔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배가 고팠던 일행은 평지에 자리를 깔고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38명의 스태프들이 물을 길어오고 배식을 하고 설거지와 정리까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다함께 가져온 간식과 라면을 나눠 먹은 후 다시 기리악의 동굴로 이동하였습니다. 버스로 30여분을 달린 후 다시 라즈길의 상징인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6.5km를 40여분 가서 도착한 곳은 ‘고라 카토라(Ghora Katora)’ 호수입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인 스태프들을 위하여 일부러 마차를 태우고, 또 호수로 와서 배를 타며 재밌게 보내라고 권하신 후 한국인 활동가들과 기리악 동굴을 가보고 싶은 인도인 활동가 일부와 함께 함께 동굴로 향했습니다.

기리악의 동굴은 제띠안 서문 밖 동굴에 비해 높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입구는 깎아지른 절벽처럼 되어 있어 마치 암벽 등반을 하듯 올라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욱 조용하고 세상과 격리된 또 다른 세계인 듯 느껴졌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2개의 동굴을 다 본 후 호수로 돌아오니 인도인 활동가들도 배를 다 탄 후 다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스님은 ‘카자(튀긴 미타이)’로 유명한 지역인 ‘실라호’에 들러서 인도인 활동가들에게 돈을 주면서 집에 선물로 사 갈 것들을 사오도록 시간을 주었습니다. 인도인 활동가들은 삼삼오오 카자 가게에 들러서 집에 가져갈 까자를 신나게 사서는 다시 차에 타고 수자타 아카데미로 향했습니다. 어둑해진 가야를 지나 오후 7시가 넘어서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모두들 피곤한데도 밝은 얼굴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최말순 보살님이 준비해주신 저녁 공양을 맛있게 먹은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델리를 거쳐 한국으로 출국하기 떄문에 인도사업 책임자인 보광법사님과 앞으로 할 일 들에 대해서 늦게까지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이원정(글) 심규선(사진) 손명희(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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