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근교 구르가온이란 도시에 자리한 ‘자혜정사’. 델리 인근에 사는 한국인 교민들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포교당입니다. 스님께선 델리에 오시면 주로 이 곳에 머무십니다. 오늘 오전 법회는 자혜정사 회원들을 위한 법회로 준비되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이 넘어서니 회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습니다. 스님께선 환하게 웃으시며 자혜정사 가족들에게 2018년 정토회 달력과 스님의 신간책 ‘야단법석2’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가족들은 오는대로 법당에서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자그마한 법당에 20-30명이 서성대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니 활기가 넘쳐나 꼭 잔치집 같았습니다. 델리에 산 지 14년이 넘어가는 우정민 회장님 부부를 비롯해 이제 갓 델리에 정착한 신입 총무님 가족까지 인사를 나누고 9시 정각부터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선 종교로서의 불교와 진리로서의 불교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면서, 변화하는 이 시대에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그리고 괴로움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 일상에서 깨어 있기, 알아차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11시에 법회가 끝나자마자 자혜정사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짐을 모두 챙겨서 다음 강연이 진행되는 주인도한국문화원으로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델리는 교통체증이 심한 세계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교통체증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만 합니다. 오늘은 한 시간 삼십분의 여유를 두고 움직였더니, 다행히 15분전에 주인도한국문화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원에 도착하니 김금평 원장님 부부와 이번 강연 실무를 담당한 곽미라님이 반갑게 스님 일행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거의 매년 주인도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인, 인도인 대상으로 법륜스님의 강연을 진행해 왔습니다. 올 해는 자혜정사 회원을 대상으로 한국인 강연은 진행하고, 문화원에서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인도인 강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강연장에는 벌써 젊은 인도인, 한국 젊은이들로 북적북적 소란스러웠습니다. 오후 12시 30분, 격의없이 언제나 편하게 진행해 주시는 김금평 원장님의 소개로 법륜스님의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인들을 위한 강연의 서두에서 힌두사상과 불교사상의 차이점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신 후, 질문자와 질문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믿음(힌두)은 ‘까르마’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다고 봅니다. 전생의 삶에 의해서 정해져있다고 보든, 신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보든, 혹은 태어나는 생년월일시에 따라서 정해진다고 보든,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까르마가 정해져있다고 봅니다. 즉,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정신작용에 대해서 아주 많은 연구를 하셨는데 까르마가 정해져 있다고 가정을 했을 때의 모순을 발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고 해봅시다. 만약 까르마가 정해져있다면, 이미 정해져있는 까르마에 의해서 살인의 행동을 저지른 것이니 그게 죄가 될 수 없잖아요? 즉, 전생의 어떠한 일로 인해서 나는 너를 죽이도록 되어있고, 너는 나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있다면 이것은 까르마의 문제이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사람에게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 거의 자동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봐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응을 하는 그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느냐, 정해져있지 않느냐에 대해서, 전통적인 인도 사상에서는 그것이 정해져있다고 보는 것이고, 붓다는 오랜 탐구 끝에 그것이 정해져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즉, 까르마는 형성되어진 것입니다. 형성되어진다는 것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까르마’라는 용어는 인도의 전통적인 믿음에서도 쓰이고 불교에서도 쓰이지만,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믿음에서 쓰이는 까르마는 ‘운명 지어진’ 혹은 ‘정해진 운명’이라는 의미라면,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형성되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비록 같은 용어를 쓰지만 정해진 것이냐, 형성되어진 것이냐라는 관점에 따라 그 의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화를 잘 낸다고 해봅시다. 이럴 때 화를 잘 내는 것을 그 사람의 성격, 성질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질’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것이 잘 바뀐다는 거예요, 잘 안 바뀐다는 거예요?”

(인도인 참석자들) “바뀌기가 어려워요.”

“그래요, 우리가 그건 그 사람의 성질이야, 그 물건의 성질이야라고 표현을 할 때는 그것이 잘 안 바뀌기 때문에 성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반면 잘 안 바뀐다고 할 때도 그것이 절대 안 바뀌느냐, 아니면 잘 바뀌지는 않지만 바뀔 수는 있느냐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처럼 안 바뀐다고 하면 인도 전통(힌두)에서 말하는 ‘까르마’이고, 후자처럼 잘 안 바뀌지만 바뀔 수는 있다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까르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가 필요한 쪽으로 바꾸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수행에서는 까르마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잘 안 바뀌는 까르마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꾸준함’입니다. 꾸준히 수행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신 것이 바로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한국말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어요. 어떤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삼일을 넘기지 못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버린다는 의미인데, 인도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인도인 참석자들) “하려고 했는데 사일만 하고 나머지는 남들이 다 도와줬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이 까르마를 바꾸는 데에는 우리의 정신작용 중 어떤 게 필요할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신작용은 자극이 주어지면 까르마에 의해서 자동 반응이 나오는데, 대체 우리에게는 어떤 정신작용이 있기에 까르마를 바꾸는 게 가능할까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상황에서 화를 내며 욕을 한다고 해봐요. 비록 ‘내가 화를 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했다기 보다는 프로그램에 의한 자동 반응에 가깝습니다. 상대방도 욕을 듣고 같이 화를 냅니다. 그렇게 둘 다 화를 내면 결국 싸우게 돼요. 싸우면 둘 다에게 손실이 많아요. 이것을 ‘과보(果報)’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보로 인해 손해를 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화가 나지만 손해를 안 보려고 참습니다. 자동으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고, ‘이것은 손해다’하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생각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성에 의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참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면 속에 쌓이는 앙금이 점점 더 커집니다. 그걸 다른 말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세 번 이상 참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게!’ 하면서 세 번째 터지거나, ‘보자 보자 하니까’ 하면서 세 번째 터집니다. (모두 웃음)

그렇게 터지면 또 과보가 따르고, 과보에 의한 손해가 생기면 그제서야 ‘내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됐는데’ 하며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 참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걸 못 참고 터뜨리면 가슴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참았다가 터뜨렸다가 참았다가 터뜨렸다가를 반복하게 됩니다.

자기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을 따르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반면 감정을 억누르거나 참는 것을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이 둘 중에는 어느 것을 선택해도 평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사례처럼 결국 이 둘 사이를 계속 돌고 돌게 됩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인도의 전통(힌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그것을 윤회라고 표현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아까 ‘까르마’처럼 같은 용어를 쓰지만 그 의미에 차이가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에서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니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더이상 안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수행에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라고 하니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더이상 되풀이 하지 않는다 즉,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解脫)’을 의미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말로, 어떻게 하면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붓다가 발견한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란 어떤 것일까요? 화가 날 때 그것을 바깥으로 내면 쾌락주의가 되고, 그것을 참고 억누르면 고행주의가 됩니다. 우리는 대개 이 둘 중 하나 밖에 선택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붓다가 발견한 제 3의 길, ‘중도’는 화를 내지도 않고 참지도 않는 길입니다. 이 길이 무엇일까요?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화가 날 때 ‘지금 화가 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구나’하고 자기를 알아차리니까, 이건 다만 알아차릴 뿐이지 밖으로 화를 내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고 참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알아차리는 겁니다.

우리의 정신작용 중 이 알아차림은 아주 독특한 작용입니다. 우리의 신체작용에도 팔을 들어 올리거나 원하는 장소로 걸어가는 등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작용이 있고, 위장이 소화를 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 중 호흡은 조금 독특합니다. 호흡은 기본적으로 자율적인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의 의지로 인해 약간의 통제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원하면 잠깐 멈출 수도 있고, 숨을 크게 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심장의 경우에는 내가 빨리 뛰도록 하고 싶다고 빨리 뛰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호흡만은 심장처럼 자동으로 하지만 우리의 의지로 약간의 통제가 가능합니다.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은 ‘무의식’이고 조절하는 것은 ‘의식’인데, 호흡은 기본적으로 자동이지만 약간의 조절도 가능하기 때문에 ‘의식’이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을 신체 작용에서는 호흡을 통해서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호흡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작용에서도 이성적인 작용과 감성적인 작용은 서로에게 영향을 거의 주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아무리 결심을 해도 잠이 들고 의식이 작동을 멈추면 다음 날 아침에 못 일어나잖아요. 그만큼 ‘의식’이 ‘무의식’에 거의 영향을 안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의식’을 가지고 감정 혹은 무의식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해봐야 일시적으로 참는 정도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마음을 컨트롤하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정신작용 중 ‘알아차림’은 이성에서 출발하지만 지속적으로 하면 무의식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의식이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통로입니다.

화가 날 때 ‘화가 났구나’하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감정이 저절로 누그러집니다. 감정을 억제하면 바깥으로 표출만 되지 않을 뿐 속에 쌓이는 압력은 점점 커집니다. ‘알아차림’은 한 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할 때 감정은 저절로 가라앉게 되어있습니다.

특별히 수행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에게 ‘알아차림’이라는 현상은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바로 ‘자각(自覺)’이라는 것입니다. ‘내 성질이 더럽네, 내가 욕심이 많네’ 하고 스스로 알아차릴 때가 있잖아요? 그것을 ‘자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 무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줍니다. 결심은 무의식을 억압할 뿐 무의식의 변화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데, 자각은 무의식의 변화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이 ‘너 정말 게으르다. 너 그렇게 게을러서 어떡하니?’라고 야단을 치고, 스스로도 ‘그래, 이제부터는 부지런해져야지’라고 아무리 결심을 해도 며칠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야단을 쳐도 변하지 않으니까 ‘게으른 건 그 사람의 천성이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본인 스스로가 ‘내가 조금 게으른 거 아닌가’하고 ‘자각(알아차림)’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인생에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안 하던 아이나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확 변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혹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런 계기는 외부에서 온 게 아니라 대부분 자기가 무언가 자각할 때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원리를 알고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자발성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발적이라는 것, 즉 자기가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심(發心)’인데, 수행자가 되려고 하면 스스로 발심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식 교육을 시킬 때도 아무리 야단을 친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호흡을 참으려 해도 잠시밖에 참을 수 없고 화를 참는 것도 며칠밖에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억지로 어느 정도 끌고 가는 것이지 그것이 아이의 삶을 바꾸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자기 스스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하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강제로 참고 견디는 방식의 교육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학습의 효과를 내어왔습니다. 그 방식으로 창조적인 의식은 생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필요한 인간은 창의적인 인간이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을 만들려면 자발성에 기초해야 합니다.

수행자도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자발적으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고행에는 상처가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이 억지로 하는 고행에는 고통이라는 트라우마가 남게 돼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당시에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지나고 나면 경험으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강제로 하는 행동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되면 무의식이 작동을 하여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한다’는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인도문명사에 있어서 인도의 가장 큰 기여는 수학에서 ‘0’의 발견과 붓다의 ‘알아차림’의 발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조금 어려웠어요?”

(인도인 참석자들) “아니요.”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의 시대에는 더욱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점점 발달 될텐데, 아무리 인공지능의 기억 기능이 증진되고, 인공지능에게서 감정의 기능이 나온다고 해도 이 ‘알아차림’의 기능이 나오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게 ‘알아차림’의 기능이 생기면 인공지능의 업그레이드를 굳이 사람이 하지 않아도 인공지능 스스로 할 수 있는 단계가 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시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에 대한 핵심사상을 일러주시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을 하고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쁘리앙카 교장 선생님의 통역도 힘이 있고 당당했습니다. 스님도 대중들 가까이에 서서 직접 호흡하며 온 몸으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욕구란 무엇입니까?”
“부모님에게 누구나 존중하고 존경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를 존중하지않는 사람을 보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에 답이 있습니까?”
“화가 났을 때 알아치리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전적으로 수행을 할 수가 없는데 그러면 하고싶은 것들을 다 그만두어야 합니까?”

질문하는 사람들이 젊고 진지하면서도 활기찼습니다. 한 번 질문을 했던 사람이 다시 손을 들면 우-하기도 하고, 스님 말씀에, 질문자의 질문에 공감하는 웃음들도 중간중간 툭툭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의 강연장과 다를 바가 없었습다. 아니, 젊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질문을 해서 오히려 토론의 장처럼 되어 활기가 넘치고 스님도 온 몸으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두 시간이 훌쩍 넘어섰는데도, 질문자들이 서로 질문을 하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한 사람만 더 질문 받겠다고 하고는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마지막에 단체 사진을 찍자, 한국어 배우는 학생들이라 “감사합니다.”하며 스님께 인사드렸습니다.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착하게 살아서 손해 보는 것 같다고 질문한 여자 분에게 살짝 물어 보았습니다.

“만 깨싸 해?(마음이 어때요?)”
“보훗 할까 해.(매우 가벼워요.)”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젊은 한국인 남자가 보여서, 오늘 강연이 어땠는지 물어보자, 대뜸 자기는 주인도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다고 자기 소개를 하면서, “지금도 환희심에 가슴이 뜁니다.”하며 약간 흥분된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한국인, 인도인들의 환한 얼굴들을 보면서 인도에도 이런 강연이 더 자주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은 한국인이나 인도인이나 크게 다르지가 않고,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는 일은 그 어느 곳에서나 필요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문화원에서 준비해 주신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다음 일정은 내일부터 진행되는 석가족마을 불상 점안식 및 법회를 위해 우따르 프라데시주 이타와라는 도시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차가 4시간 연착이라고 떴습니다. 인도 겨울에 워낙 흔히 있는 일이라 놀라울 일은 아니지만, 밤 9시 30분까지 기차를 기다리기엔 있을 곳도 마땅치가 않고, 또 더 연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차를 대여해서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국문화원장님, 자혜정사 회장님 등 도와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7인승 이노바를 타고 5시간을 달려 이타와에 도착했습니다. 20년 이상 스님과 인연이 깊은 수바스지 가족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스님께선 수바스지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시면서, 상카시아 명상센터 건축에 대해서 건축 설계 전공인 수바스지 아들과 함께 또 회의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선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않고 일에 몰두하시는 느낌입니다. 스님 말씀을 들으며 석가족을 위한 명상센터의 완성된 그림을 그려봅니다.

내일은 석가족 마을 불상 점안식 및 법회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보광, 조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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