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도 문화를 느끼는 시간으로 배정이 된 날입니다. 상카시아 순례자 숙소에서 짐을 정리해서 새벽 4시 반에 출발하였습니다. 아침에 안개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라는 드라이버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일찌감치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안개도 적고 도로사정도 아주 좋아서 아그라성에 도착하니 8시 반 경이 되었습니다. 여유가 생긴 셈입니다.

아그라성 주차장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 스님께 인도 문화사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일 인도 국립 박물관을 관람할 때를 대비해 인도전역사와 각 시대의 건축, 불상 양식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각 조별로 아그라성을 자유관람 하였습니다.

아그라성 관람과 자유시간을 가진 후 오후에는 호텔에 도착하여 정리 법문을 들었습니다.

“보름 동안의 인도성지순례를 두 가지 방법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 일생별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순례한 코스별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인도대륙을 중심으로, 또는 인도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아라비아 해, 동쪽은 벵골 만, 남쪽은 인도양으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아라비아 해나 벵골 만도 다 인도양에 들어가지요. 그리고 북쪽은 세계최고봉인 히말라야 산맥이고, 북서쪽은 파미르 고원이 있습니다. 세계최고봉과 중간의 데칸 고원 사이에 강가강이 흐르고 거기에 힌두스탄 평원이 펼쳐져 있지요. 부처님 당시에는 거기가 인도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문명은 다 건조지형에서 발달을 합니다. 그 이유는, 고대문명이 발달할 때가 신석기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또 나중에 청동기가 발명이 되어도 청동기는 제기나 무기로까지는 사용을 해도 생활용품을 청동기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용품은 다 석기입니다. 석기로 풀은 벨 수 있는데, 큰 나무를 자를 수는 없기 때문에 문명의 중심지가 다 초원지대입니다. 그래서 인도대륙에서도 초원지대인 인더스강 유역이 인도문명의 초기 발달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더스문명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달했습니다. 중국의 황하문명도 북쪽에 황하강 유역에 있어요. 지금으로부터 한 3500년 전에 인류는 철기문명을 맡게 됩니다. 이 철기가 나오게 되면서 인도에서는 갠지스강 유역을 개발하게 되고 중국에서는 양자강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강남문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철기 문명이 아주 발달하기 시작한데가 중국은 소위 동주시대, 주나라 후기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이고 인도에서는 아리안문명의 후기시대에 주로 이 강가강 유역의 힌두스탄 평원에서 발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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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에서 붓다가 출현했습니다. 부처님은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전륜성왕이 되거나 붓다가 될것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희원, 요구가 이런 세상의 혼란을 좀 평화롭게 해 줄 전륜성왕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었고 사상계의 혼란을 정리해 줄 일체의 지자, 일체를 다 아는 자,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한 인간의 출현은 바로 이런 시대적인 요구에 응답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붓다는 전륜성왕으로 응답한 게 아니라 일체지자로 응답을 했다는 거예요. 결국 전륜성왕으로 응답한 사람은 나중에 아쇼카 대왕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붓다의 출생의 모습, 그 출생하실 때의 여러 가지 현상을 우리가 신비주의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이런 사회적인 환경,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걸 해석한다면 ‘아, 그래서 부처님의 출생을 이와 같이 묘사했구나. 이런 설화들이 가미가 됐구나.’ 하는 걸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가 갔던 카필라성 룸비니에서 태어나셨고, 카필라성에서 성장을 하셨고, 어릴 때는 당연히 부모나 사회의 요구와 요청에 따르는 촉망받는 젊은 이였으나 농경제에 참여해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고 사람이 소를 때리며 쟁기질을 하고 농부가 헐벗어서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이 왕궁의 풍요가 그냥 주어주는 게 아니라 저 농부들의 희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구나. 사람이 가축을 이용해서 농사짓는 그 편리함이 가축의 고통 위에 있구나. 새의 생존이 벌레의 죽음 위에 있구나. 이렇게 단독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있는 거예요. 아무튼 삶이란 이런 모순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당연히 살아가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겨야 되고 살아야 되는, 그래서 모든 세상의 학문은 어떻게 하면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기고, 어떻게 하면 내가 풍요를 누리느냐 이런 관점에서 학문이라는 자체가 지금도 그렇고 옛날도 그렇게 다 되어있는데 붓다는 그 둘을 동시에 봤지요. 나만 보고 남에게 이기는 게 아니라 이 둘이 함께 사는 길은 없느냐 함께 행복해 지는 길은 없느냐 하는 양쪽을 다 보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젊은 이가 사고를 그런 식으로 하게 되니까 세상의 모순 앞에서 굉장한 고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 성지순례할 때 그 붓다의 사문유관, 성 밖으로 나갔을 때 그가 고뇌했던 것, 죽은 자, 늙은 자, 병든 자를 보고 고뇌했던 것을 체험적으로 해 주려고 제가 시도했던 것이 콜카타(Kolkata)의 빈민촌이었어요. 그 성안과 같은 데가 어디였다? 콜카타에 있는 오베로이 호텔(Oberoi Hotel)이었어요. 그 오베로이 호텔이 5성급 호텔인데, 그 호텔 안에 채색이 전부 금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릇도 금이고요. 그런데 그 호텔의 문을 열고 나오면 호텔 앞에 거지 떼가 그렇게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봤을 때 인간이 결국 사고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예요. 그것을 보고 고뇌하든지 나는 그런 처지가 안 되기 위해서 더 내가 권력을 잡고 더 부를 축적하든지.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도를 볼 때는 왜 저런 사람을 보고 인도사람은 사회문제의식을 안 갖나 할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보고 자라기 때문에 결국은 어릴 때 이게 결정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고뇌하든지, 그래서 부처님처럼 출가를 하든지 안 그러면 그것을 무시하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든지.

그런데 제가 콜카타를 통해서 이걸 체험하게 하는 게 일정상 너무 힘든 거예요. 여러분들이 콜카타 갔다가 기차타고 올라오면 우리가 이번에 한 성지순례 일정은 너무나 편한 거라고 느낄 겁니다. 콜카타로 들어오면 우리가 다음 일정을 위해서 인도기차를 타야 되거든요. 인도 기차의 3등 열차가 얼마나 힘 드느냐 하면 이런 조크가 있을 정도예요. 이 세상에서 사람이 말 안 듣고 애먹이면 ‘저놈의 자식 지옥을 가거라’ 이러잖아요. 그런데 지옥에서는 말 안 듣고 애먹이면 ‘저놈, 인도기차나 타라’고 한 대요.(모두 웃음) 그만큼 역전에 가보면 그냥 완전히 피난민열차 같고 북새통 시장 같거든요.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부처님의 고뇌를 우리가 이해해야 이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다가오지 부처님의 고뇌를 이해하지 않으면 깨달음의 법이라는 건 그냥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일이 많고 위험했어요. 기차가 연착은 물론이고 결항하고 그러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고 두 번째는 한국이 점점 살기 좋아지면서 굳이 콜카타를 안 가고 한국이 성 안이고, 인도가 성 밖이에요. 그래서 인도에 와서 굳이 콜카타를 안 가고도 우리가 지금 받고 있잖아요. 그래서 ‘굳이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되겠다’ 해서 콜카타를 코스에서 포기하고 바라나시로 비행기 타고 들어오도록 한지가 3, 4년밖에 안됐습니다.”

...... 제가 순례코스를 잡을 때 어떻게 잡으면 좋을지가 굉장히 고민이었어요. 부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려면 코스가 너무 복잡해지니까요. 제일 좋은 건 룸비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만 코스도 덜 중복되고 의미전달도 잘 되도록 잡은 게 우리가 다닌 코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붓다는 언제부터 붓다입니까?”

“(순례객들) 깨달았을 때 부터요.”

“깨달음을 얻는 때부터라고요? 설법을 하신 때부터이지요. 설법을 하신 걸 듣고 내가 깨달아야 그분이 붓다인 줄 알지요. 그런 것처럼 중생에게 붓다는 붓다담마를 설하신 때부터 붓다인 거예요. 그래서 어디를 첫 코스로 잡았느냐 하면 사르나트를 잡은 거예요. 그래서 붓다의 첫 설법을 우리가 듣고, 그 다음에는 ‘이런 설법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했던 것인가?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수행을 해야 되느냐?’ 해서 우리가 보드가야에 가서 깨달음과 수행을 연결해서 살펴본 거예요. 또 그 다음에는 그 깨달음을 널리 전한 왕사성에 들어가 봤던 거지요. 왕사성 갔다가 사위성까지 들렀다가 도로 돌아 나오면 제일 좋은데 그렇게는 못 하니까요. 앞부분은 그렇게 끝나고, 두 번째로는 붓다의 마지막 여정이 왕사성에서 쿠시나가르까지니까 그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 본 거죠. 성지순례는 사실 여기까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분이 젊은 시절엔 어땠느냐?’ 이렇게 다시 접근을 해서 룸비니로 가서 태어나시고, 성장하시고 출가하신 과정을 본 거예요.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설법하셨던 쉬라바스티로 가서 부처님의 법문을 많이 다뤄본 거예요. 이렇게 해서 마무리를 하고, 8대 성지 중에 상카시아는 ‘불교가 신앙을 가진 종교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을까?’ 하는 걸 살폈습니다. 그 답은 뭡니까? ‘붓다는 어떤 신들보다도 더 위에 있다.’ 이렇게 신앙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인사(天人師)라는 표현으로 부처님을 표현하잖아요. ...... 쉬라바스티에서는 또 수닷타 장자와 같이 그렇게 신심 있는 불자에 관한 얘기도 나눴고, 또 동원정사에 가서 신심 있던 위사카 부인의 동원정사 창건 이야기도 나누면서 쉬라바스티 참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제 마지막으로 상카시아로 가서 부처님께서 낳아주신 어머니가 계신 하늘로 가서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고 내려오셨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출가가 결코 불효가 아니고, 오히려 죽음과 가족을 뛰어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석가족들이 전 인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유독 상카시아에 많이 모여 살고 있어요. 석가족이 그 상카시아 주위의 5개의 디스트릭(District)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신앙을 지키고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디스트릭마다 석가족이 최대의 인구수를 자랑하는 카스트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그들을 위해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불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성지순례를 마치게 됐습니다. 제가 지금 다시 정리하는 이유는, 다닐 때는 정신없이 다녔기 때문에 이제 와서 돌아보면 자기가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모두 박수)

전체 여정을 스님의 말씀에 따라 되짚어 본 다음, 순례객은 그동안 있었던 소감문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차량당 두 사람씩 발표를 했는데 자신이 인도에까지 와서 매일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할 만큼 깔끔을 떠는 사람인줄을 몰랐다는 분, 자신이 집이나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군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새삼 ‘아내’에게 고마움이 생긴다는 분, 수신기가 익숙하지 않아 순례기간 내내 적응하기 힘들고 불러도 대답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조금 적응이 된다고 하시는 분 등 각자의 소감을 진솔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소감문을 모두 나누고 인도식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드라이브지와 컨덕트 지를 비롯해서 차장과 조장님, 스텝에게 스님은 머플러 하나씩을 선물해주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플러를 걸어주는 스님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값으로 따지자면 더 없이 훌륭하고 비싼 것들이 많겠지만 16박 17일 내내 함께 성지순례를 보낸 우리들은 스님의 따뜻한 마음을 전해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고해주신 드라이브지, 컨덕트 지, 차장님들. 수자타아카데미에 순례객을 대신하여 보시금을 전달하는 스님▲ 수고해주신 드라이브지, 컨덕트 지, 차장님들. 수자타아카데미에 순례객을 대신하여 보시금을 전달하는 스님

스님, 운전해 주신 분들, 스텝들, 법사님들, 내 옆의 도반들. 이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제29차 인도성지순례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며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는 몰랐는데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바로 내일인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내 앞에 놓인 인도식 만찬의 훌륭한 음식들을 놓고서야 인도 아이들이 ‘박시시’하며 입으로 가져가던 그 손짓과 매일 저녁마다 졸린 눈으로 다음날 먹을 도시락 밥을 싸던 우리 조원들의 따뜻한 마음이 다가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 나라에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참으로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스님과 법사님, 스텝분들에게 더 없는 감사의 마음이 생기는 오늘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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