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가장 차를 많이 타고 이동하는 날입니다. 쉬라바스티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이제 성지순례로서는 마지막 일정인 상카시아를 향해 가려고 합니다.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서 4시에 모든 차량이 출발하였습니다. 둘 혹은 세대의 차량이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하여 화장실 가는 것, 아침 공양 하는 것도 함께 가는 두 대 혹은 세대의 차량이 의논하여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님이 탄 4호차는 1호차와 짝이 되어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순례객 중 한 분의 시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스님은 저녁 7시 반, 델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도록 조치해 두고 차량끼리 연락하여 한국 가야하는 순례객을 4호차로 옮겨 타도록 하였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가려는 곳, 상카시아 담마센터의 책임자로 계시는 수바스지와 통화하여 델리 공항까지 빨리 달릴 수 있는 차와 운전기사를 찾아서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스님은 4호 차량 드라이브지에게도 비상 상황이어서 중간 지점까지 최대한 빨리 가야 순례객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직접 설명하였습니다. 드라이브지는 스님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운전하였습니다. 경적을 울려대며 달려갔습니다. 4호 차량 순례객들도 화장실이 급해도, 아침 공양 시간이 늦어져도 모든 상황에 우선하여 중간 지점까지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목적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4시간가량, 앰뷸런스처럼 달리던 4호차가 드디어 차량과 운전자를 섭외하여 나온 수바스지를 중간지점에서 만났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닥친 일에 어리둥절한 순례객을 격려하고 인천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안내해 줄 수 있도록 박지나 대표님도 함께 가도록 하였습니다. 4호차 순례객들도 조심해서 잘 가시라 격려를 보냈습니다.
긴급한 상황이 지나가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화장실이 급해졌습니다. 다들 웃으며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너른 공터에서 아침 공양으로 싸온 도시락을 점심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두 시간쯤 차를 더 달려 상카시아 탑 터에 도착하였습니다.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상카시아 탑을 크게 돌았습니다. 탑돌이를 하고 있을 무렵, 다른 차량들도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탑돌이를 마치고 상카시아 탑터를 바라보는 위치에 모두 자리를 펴고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이번 순례기간 중에 제일 멀리 온 날입니다만 예전에 비해서는 매우 일찍 도착한 편입니다. 인도도 자꾸 발전하다보니까 강가강을 건너는 다리를 하나 더 놓았네요. 옛날에는 럭나우(Lucknow)나 깐푸르(Kanpur)로 둘러오던 것을 오늘은 바로 가로질러왔기 때문에 시간이 단축되어서 예년에 비해 쉽게 왔습니다. 그래서 늘 이곳에서는 해가 지평선에 걸렸을 때나 행사를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해가 쨍쨍할 때 하게 됐네요. 또 늘 춥다가 오늘만 더웠지요?”

“(순례객들) 예.”

“제가 ‘17일 지나면 풀린다’고 얘기했잖아요. 보세요. 딱 17일 지나고 18일인 오늘부터 풀렸습니다.(모두 웃음) 아침에 지독히도 안개가 심하더니 말이에요. 여기가 성지순례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여러분들, 지난 보름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로 한 일은 없었지만요.(모두 웃음) 밥 먹고 똥 누는 일이 가장 큰일이었지만요.(모두 웃음)
이곳은 부처님의 흔적이 많지 않은 곳입니다. 부처님이 상카시아에서 좀 더 델리 쪽으로 가신 흔적은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활동하신 흔적은 별로 없습니다. 왕사성이나 사위성이나 바이샬리 같은 그런 활동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어제 경전 독송할 때 나왔던 코삼비(Kosambi)입니다. 이 코삼비는 여러 경전이 설해지거나 비구들의 갈등 등 어쨌든 사건이 많았던 곳인데, 상카시아는 아무 사건도 없다가 뜬금없이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서 도리천궁으로 가서 3개월간 설법하신 뒤 이리로 내려오신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말이에요. 전생 얘기도 아닌데 마치 전생 얘기처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게 후대에서 누가 지어낸 얘기라고 하기에는 초기부터 알려진 얘기거든요. 이게 대승불교에서 만든 얘기가 아니라 불멸 후 200년 때인 아쇼카 석주가 조성되어 있잖아요. 부처님같이 아주 합리적이신 분이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으셨기에 그게 이렇게 변해서 전해지게 된 건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른 건 그래도 해석이 되는데 이건 너무 앞뒤가 없어요. 그런데 이게 또 아주 초기부터 있던 얘기란 말이에요. 후기에 나온 얘기라면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설화로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해서 해결해야 부분입니다.

그런데 나름 의미는 있는 사건이에요. 뭐냐 하면, 부처님이 인드라천에 가셨다가 지상으로 내려오실 때 브라만신과 인드라 신이 부처님 양쪽으로 부처님을 시립해서 내려왔단 말이에요. 부처님이 계단 가운데로 내려오시면 인드라 신은 부처님께 일산(日傘)을 씌우고, 브라만은 ‘불’자를 들고 이렇게 두 신이 양쪽으로 부처님을 시립해서 내려왔습니다. 인드라신과 브라만신은 부처님 당시에 최고의 신이었어요. 인도는 다신교의 나라잖아요. 그런 다신교의 나라에서 최고의 신인 두 신이 부처님을 시봉했다는 건 뭐예요? 부처님이 신보다 높다는 거죠. 부처님이 신의 개념으로 다른 신보다 더 높은 게 아니라 신의 개념이 아니면서 신보다 더 높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 10가지 명호 중에 천인사(天人師), 즉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는 명호가 있지 않습니까. 신의 세계마저도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 안에 있는, 윤회의 세계 안에 있잖아요, 신의 세계도 복을 지어서 받는 과보의 세계이니까요. 그런데 부처의 세계는 해탈의 세계, 즉 인연을 지어서 과보를 받는 과보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라는 거죠. 그래서 붓다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붓다는 신과 인간의 스승이다. 신과 인간을 통틀어서 붓다와 비교할 사람은 없다’고 칭송받았잖아요. 그게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고요. 그러니까 이런 표현들은 수행, 정진을 통한 해탈이 믿음을 통해서 얻는 그 어떤 복보다도 더 수승하다는, 수행자들의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봤을 때 불교가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당시의 모든 종교의 우위에 설 수 있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무슨 사건 때문에 이런 이야기로 각색이 됐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신앙적으로는 ‘부처님이 그런 이적을 행하셨다’고 하면 되겠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는 해석이 아직은 잘 안 되는 겁니다.

그 스토리를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해 안거 때 부처님이 안 계셨어요. 부처님께서는 항상 이번 안거는 어디서 어떤 대중들과 지내신다는 게 있는데, 어느 한해 안거 때에는 부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부처님께서 어디 계신지 누구도 몰랐어요. 가섭존자, 사리불, 목건련도 몰랐고, 아난존자도 몰랐어요. 그래서 대중들이 목건련존자에게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좀 찾아달라’고 했어요. 목건련은 ‘신통제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목건련이 선정에 들어서 신통력으로 보니까 부처님께서 도리천(?利天), 즉 제석천(帝?天)이라고도 하고 인드라천(Indra天)이라고도 하는 천상계의 두 번째 하늘, 이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서 설법을 하시고 계신다는 거예요. 싯다르타 태자를 낳자마자 돌아가신 마야 부인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부처님께서 직접 도리천궁으로 가서 설법을 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중들이 목건련존자한테 ‘언제 오실 건지 부처님께 좀 여쭤달라’고 하니까 목건련존자가 신통으로 부처님께 가서 ‘언제 쯤 내려오실 겁니까? 어디로 내려오실 겁니까?’ 여쭈니까 ‘9월 (인도 달력으로 7월) 15일에 상카시아 성 밖으로 하강하겠다’고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항상 성밖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그날에 맞춰 사람들이 부처님을 뵈려고 여기로 모여들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하늘로부터 계단을 타고 쫙 내려오시는 걸 어떤 비구니 스님께서 제일 먼저 뵌 거예요.

‘부처님, 제가 1등으로 부처님을 뵙습니다.’
‘아니다.’
‘아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그럼 저보다 누가 더 먼저 부처님을 뵈었다는 겁니까?’
‘수보리다.’
하셨어요. 우리말로는 수보리(須菩提), 인도말로는 수부티(Subhuti)죠. 금강경에 나오는 그 수보리 말이에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수보리는 그때 어디 있었느냐 하면 그리드라쿠타(Gridhrakuta), 즉 영축산(靈鷲山)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마중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제법이 공한 이치를 탁 깨쳤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도로 앉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뭘 말합니까?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는 거지요. 여래의 육신을 보는 게 여래를 보는 게 아니라 법을 보는 자,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수보리가 제법이 공한 이치를 탁 깨닫고 그 자리에 앉았을 때 바로 수보리가 나를 본 것이다’라는 게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의 뜻입니다. 금강경에는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모양과 형상과 소리로 나를 보려면 결코 나를 볼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오지요? 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도 했고요. 이런 얘기가 다 ‘제법이 공한 줄을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얘기와 연결이 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 성 밖, 상카시아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에 이곳에 탑을 쌓고 아쇼카 왕이 석주를 세웠습니다. 불멸 후 200년에 석주를 세웠다고 하니까 이 얘기는 초기부터 벌써 알려져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아쇼카 왕이 석주를 세울 정도이니까요. 여기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석주 머리 부분에 코끼리가 있었지요? 여러분들은 주로 사자상을 보셨을 거예요. 석주 머리 부분에 소도 있고, 말도 있는데, 여기는 코끼리 상이예요. 그런 걸 보면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이 상카시아는 8대 성지 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4대 성지는 왜 4대 성지로 선정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잖아요.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고, 깨달으신 곳이고, 처음 설법하신 곳이고, 열반에 드신 곳이니까요. 그런데 나머지 4대 성지를 한번 보세요. 다 약간의 기적과 연관이 있지요? 왕사성과 사위성은 부처님께서 굉장히 활동을 많이 하신 곳이에요. 전법활동을 주축으로 하신 곳이니까요. 그런데 그걸 상징하는 건 모두 약간 신화적인 이야기들과 관련된 것들이지요. 왕사성은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모습, 사위성은 천불화현,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꿀을 공양 올리는 모습,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으니까요. 이건 다 약간신비적인 요소와 결합된 거잖아요. 부처님께서 아무리 대중들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가르치셨다고 해도 아마 인도의 문화적인 환경 때문에 후대의 기록은 결국 그런 상징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요?

그리고 또 여러분들이 자식을 키워놨는데 그 자식이 집을 떠나버리면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쉬운 일이잖아요. 그래서 유교적 입장에서는 출가를 굉장한 불효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인도 문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인도에서도 집을 떠나는 건 부모한테 뭔가 미안한 일일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백중절, 그러니까 7월 보름에 돌아가신 부모의 영가천도를 한다든지 하는 거 아닐까요? 부처님께서 친모인 마야부인을 위해서 설법하러 하늘에 다녀오셨다는 이런 설화가 생긴 건 이 출가수행이 결코 불효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세속적인 저항을 완화시키는 그런 의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라도, 설령 부처라 하더라도 다 어릴 때는 엄마 손에서 자랐지요? 어릴 때는 다 똥 누고, 오줌 싸고, 침 흘리고, 떠먹여주는 밥 먹고 자랐는데, 나중에 커서 보면 다 저절로 큰 것처럼 생각하지요? 애를 한번 키워보면 잔손이 엄청나게 많이 가요. 그러니 우리가 다 부모의 은혜, 특히 부모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건 어머니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어머님의 은혜를 칭송하는 노래도 있잖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어머니의 마음’을 다함께 불러보겠습니다. 누가 선창해 볼래요? 자, 우리 모두 다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하러 하늘에 다녀오셨다고 하니까, 오늘 우리도 다 각자의 부모들 은혜를 생각하면서 같이 불러봅시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모두 박수)’

다 함께 ‘부모님 은혜’노래를 불렀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상카시아 탑터는 ‘부모님 은혜’ 노래로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자리를 정리정돈 하고 차량에 타서 5분 거리의 담마센터 부지로 출발하도록 하였습니다.

벽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곳에 석가족 여러분이 꽃 목걸이를 준비해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맞아주시는 석가족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웃음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천을 깔아놓고 행사장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우선 성지순례 회향식을 먼저 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차량 별로 두 줄씩 자리를 펴고 앉았습니다.
선주 법사님의 사회로 제29차 인도성지순례의 회향식을 시작하였고 이어 스님께 회향 법문을 청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가시는 길까지 같이 갔다가 여러분들만 보내놓고 저는 다시 이곳 상카시아로 내려올 겁니다. 와서 수련을 지도하거나 아니면 개원한 절을 방문해서 개원법회를 해야 합니다. 지금 저 포스터의 내용은 뭐냐 하면 ‘절 개원한다’는 거예요. 불교로 개종한 석가족들이 동네마다 절을 지었거든요.
저한테 ‘절 지어 달라’고 하기에 제가 ‘당신들 절은 당신들이 지어라. 그러면 내가 불상은 모셔줄 거고, 개원법회는 해 주겠다’고 했더니 자기들이 동네마다 작게 지었어요. 여기는 힌두절들도 다 규모가 작습니다. 그래서 여기 유지들이 땅을 내고, 자기들이 절을 짓고, 불상은 우리가 지원했어요. 그래서 저는 모레 다시 이리로 내려와서 이틀 동안 동네마다 다니면서 개원법회를 합니다. 우선 상카시아 탑이 허물어져 있으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저 탑의 원형을 하나 복원하려고 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아직 담마보다는 신앙이거든요. 그리고 이들이 교육받고 연수받아서 법을 알 수 있도록 연수원 시설을 하나 마련하려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음력 9월 보름, 양력으로는 10월에 여기에서 몇 만 명씩 모이거든요. 그럴 때 집회할 수 있는 오픈된 강당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니까 그런 것을 지원해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조건이 있거든요. ‘반은 너희가 부담해라.’ 그러니까 ‘예.’ 해 놓고 지금까지도 안 내고 있어서 저도 버티는 중이에요.(모두 웃음) 왜냐하면 우리가 지어주면 그게 이 사람들 게 안돼요. 자기네가 벽돌 한 장이라도 내고 노동이라도 하루 하고 그래야 진짜 이 사람들 게 되거든요. 우리가 형상만 만든다면 그건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제가 여기 동네에 학교를 짓는 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게 목적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거기 와서 일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키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는데, 저는 자기 아이에 대해서는 부모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걸 가르치려는 목적도 있거든요. 돈이 없어서 못 내면 와서 며칠 일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 와서 일한 사람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까요, 안 보낼까요?”

“(순례객들) 보내요.”

“그런데 우리가 학교를 지어 주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하면 보낼까요, 안 보낼까요? 매일 우리가 데리러 다녀야 돼요.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납득을 하고 와서 며칠이라도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제 아이를 학교에 보냅니다. 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도 않을 거면서 와서 일하는 부모는 없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직접 지은 학교에는 해를 안 끼칩니다. 우리가 지어서 주면 벽돌이라도 깨가거나 해서 다 부셔버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사업이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형상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하도록 하느냐는 게 더 중요해요. 우리가 폼 잡고 사진 찍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성지순례 와줌으로 해서 이 사람들 활동을 지원할 수도 있고, 제이티에스에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 왔을 때 환영도 받고,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는 거고요. 회향을 여기서 하는 이유도 여러분들이 10년 후, 20년 후에 다시 여기 오셨을 때 ‘아, 내가 성지순례하면서 호텔에서 안 자고 밥 해먹으면서 순례자숙소에서 잤더니 이런 결과가 있구나.’ 하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그렇게 생활한 것 자체가 보시입니다. 수자타 아카데미를 처음 지었을 때 그 돈의 원천도 그 당시 성지순례에서 남은 돈이었어요. 나중에는 후원금이 들어가기도 했지만요. 여기도 그런 식으로, 자기들도 십시일반 참여하고 우리도 좀 보태서 이 석가족 후예들이 정신적 구심점을 찾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요? 우리가 순례 다니면서 아무 데나 똥도 누고 오줌도 눴으니까 우리가 인도에 그 빚도 좀 갚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옛날에 혜초스님 등이 오셔서 여기서 밥 좀 얻어 드셨으니까 그 자손인 우리가 그 빚도 좀 갚아야 되지 않겠어요? 옛날에는 못 살아서 못 갚았지만 요즘은 살만 하니까 좀 갚으면서 살아야지요.

그러니까 돈이 있다고 호텔에 자고 그러지 말고 순례자숙소에 자면서 아낀 돈들을 인도 사회 변화를 위해서 쓴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겠습니까. 배고픈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병든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인도에도 이런 좋은 불법이 부흥될 수 있도록 우리의 지나간 자취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사람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겠지요? ‘한국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다녀갔는데 그 사람들 지나간 자리에는 휴지도 한 장 안 떨어져 있더라. 그 사람들이 다녀간 숙소에는 청소할 것도 없이 깨끗하더라. 사람이 400명이나 되는데 한 줄로 주욱 와서 조용히 앉아서 기도한 뒤에 한 줄로 주욱 나가더라. 대단하더라.’ 교육 중에서는 체험교육이 제일 중요하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교육적 모델이 되어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성지순례에서 이렇게 생활 한 것 자체가 보시를 이루었다는 스님 말씀에 내가 알고 한 것은 아니지만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보시가 되고 모델이 되는구나. 부처님 제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사르나트에서 수계식과 함께 받았던 가사를 반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사를 반납하여 17일간의 순례자로서의 시간은 마무리 하지만 수행자로서의 삶은 지금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이어 석가족 여러분과 함께 하는 감사와 축하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석가족의 많은 분들이 꽃 목걸이를 만들어와 스님께 걸어드리고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꽃 때문에 스님 얼굴이 잠기듯 사라져가는데 웃음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꽃 목걸이를 걸어드리고 기념 사진을 찍는 석가족 여러분의 모습이 재밌었습니다. 석가족 청년(?)회를 이끌고 있는 수바스지의 인사말에 이어 축하공연도 있었습니다.

현란한 손짓, 발짓이 신기했습니다. 준비한 순서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석가족에서 마련해 주신 짜이를 마시며 석가족 여러분들과 사진을 찍기도 하고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였습니다.

스님은 한 쪽에 짓고 있는 요사체(?) 건물을 수바스지의 안내를 따라 둘러보았습니다. 부엌, 식당, 작은 방이 1층에 있었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건물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자 석가족 분들이 모여서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석가족의 활동에 감동을 받은 순례객들이 보시해주신 7만 루피의 보시금을 수바스지에게 순례객을 대신하여 전달해드렸습니다. 수바스지는 머리 숙여 보시금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스님은 어제 쉬라바스티 중국절에서 프라즈난다 스님의 영정과 사리를 친견한 것을 전하면서 부도탑 건립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프라즈난다 스님은 이곳 석가족들의 스승이셨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성지순례 일정을 마무리 하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순례객들도 이 먼 곳, 인도 상카시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하며, 특히 같은 부처님의 제자라는 동질감을 느끼면서 마음 뿌듯하게 순례 일정을 마무리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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