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을 비롯한 순례대중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천천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와 합장한 두 손, 한 발자국씩 발걸음에 집중하며 행선하듯 걸어가는 대중들은 2600여 년 전 부처님과 1250인의 비구 대중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스리랑카 숙소에 묵었던 두 개 차량도 행렬에 합류하여 기원정사 입구에 도착하였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가면서 기원정사로 입장하였습니다.
스님은 천천히 행렬을 이끌어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자리, 부처님께서 찾아오신 손님을 맞이하셨던 코삼비쿠티, 열아홉 발자국 행선하셨던 곳을 거쳐 마지막 아난다 보리수까지 돌아 간다쿠티를 바라보는 자리로 대중이 앉을 수 있게 안내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부처님이 머무셨던 간다쿠티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자리▲ 부처님이 드시던 우물자리

부처님께 찾아오신 손님을 맞이하는 곳, 코삼비 쿠티▲ 부처님께 찾아오신 손님을 맞이하는 곳, 코삼비 쿠티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하셨던 곳▲ 부처님이 열아홉 발자국 행선하셨던 곳

아난다의 보리수 : 부처님이 안 계신 동안 부처님처럼 볼 수 있도록 보리수를 남겨달라는 수닷타 장자의 요청에 따라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가지고 온 보리수▲ 아난다의 보리수 : 부처님이 안 계신 동안 부처님처럼 볼 수 있도록 보리수를 남겨달라는 수닷타 장자의 요청에 따라 아난다가 보드가야에서 가지고 온 보리수

모두 간다쿠티를 바라보며 예참 불공을 올린 후, 스님은 지극한 마음을 담아 발원하였습니다.

“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동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처음 설법하신 바라나시(Varanasi) 성 밖 사르나트(Sarnath)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신 전정각산과 도를 이루신 보드가야,
최초로 절을 지은 죽림정사가 있는 왕사성과
원숭이로부터 꿀을 공양 받은 바이샬리를 거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부처님께서 사문유관하시고 유성출가하신 카필라 성을 거쳐서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동안 머무신 이곳 쉬라바스티, 사위성 기원정사를 참배하고,
예불공양 올리며 부처님을 찬탄하옵나니
이와 같은 기원정사 참배 공덕, 부처님께 예불 공양 올린 공덕,
이 모든 공덕으로 순례대중들의 육신이 강건하고,
정신은 맑아 지혜가 증장되고 복덕이 구족하여
성불하는 그날까지 불퇴전의 신심으로 용맹정진 할 것을 발원하옵나니
제불보살님들은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시옵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부처님 성지순례 공덕, 수행 공덕,
저희가 태어난 한반도에 회향하오니
남한국민 5,000만, 북한국민 2,300만, 해외동포 700만 등
8,000만 한민족, 온 국민들이 모두 다 편안케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발원 하옴은,
지금 한반도에 전운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사오니
부처님의 지혜 광명과 평화의 빛으로 이 전쟁의 먹구름을 속히 걷어주옵소서.
또한 북한 동포들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인권이 개선되어 우리와 더불어 인생의 복락을 누리게 하여주옵소서.
이와 같이 순례공덕, 발원공덕을 고통 받는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배고픈 자에게는 양식이 되고,
병든 이는 속히 쾌차하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이 성취되는 등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이 이고득락케 하옵소서.
저희의 이와 같은 발원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도 다 함께 왕생극락 하여지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스님은 이어 이번에 성지순례를 신청하셨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셔서 성지순례에 참석하지 못하신 부산 동래, 묘각화 김혜정 보살님의 천도 축원도 덧붙여, 대중들과 함께 왕생극락을 발원하였습니다.

예불 공양을 잘 올리고 자리에 앉아 잠시 명상을 하였습니다.

“이불로 두르다시피 옷을 입고 왔는데도 좀 춥네요.(모두 웃음)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바로 기원정사(祇園精舍)입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기원정사의 창건 유래부터 한 번 더 말씀드린 후에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맨 먼저 설법하신 곳이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입니다. 거기에서 5비구 등과 야사, 야사의 친구 55인, 합해서 60명에게 전법선언을 하시고, 보드가야 가까이에 있는 우루벨라촌으로 와서 우루벨라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과 그 제자들 등 천 명을 교화하신 후 이 대중들과 함께 왕사성 서문을 통해서 왕사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들어오실 때 서문 1유순 밖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서 그를 교화하고 죽림정사를 기증받으셨고요.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그리고 그 제자 200명도 귀의를 받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초창기 부처님의 제자를 ‘1250인’ 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1260명이지만 일반적으로 ‘1250인, 또는 1200 제대아라한’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곳에 계실 때 마하가섭존자의 귀의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을 교화하셔서 왕사성에는 이미 부처님의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사위성에는 아직 부처님의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나 봐요. 당시 인도의 시대상황은, 전 인도에 300여개의 나라가 있었고, 그 가운데 16개의 큰 나라가 있었는데, 그것을 ‘16 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우리가 ‘G20’라고 하듯이. 그 가운데에서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은 G2, 요즘으로 말하면 미.중, 옛날 같으면 미.소와 같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마가다국은 조금 오래된 나라이고, 왕사성은 문화가 아주 발달한 나라이고, 코살라국은 신흥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위성(舍衛城)의 인도 말인 ‘쉬라바스티(Shrvasti)’는 물자가 풍부하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군사적으로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아직 문화가 발달된 그런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신흥도시였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사위성에서 장사를 하는 사업가 출신의 수닷타 장자라는 사람이 왕사성에 사업차 오게 되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보통 사업차 왕사성에 오면 칼란다라는 친구 집에서 주로 머물었나 봐요. 그래서 그 집으로 가서 문지기한테 ‘친구가 왔다고 주인에게 가서 알려라’고 했는데 이 친구가 나타나질 않는 거예요. 보통 때에는 버선발로 뛰어나오던 친구인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으니까 속으로 좀 섭섭했어요. 한참 뒤에 친구가 젖은 손을 닦으며 나와서는

‘오래 기다렸지? 미안하다.’
‘무슨 일이냐? 딸이라도 치우거나 아들이라도 장가보내느냐?’
‘아이고, 그만한 일로 내가 자네를 기다리게 했겠느냐?’
‘그럼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느냐?’
‘내일 우리 집에 부처님과 성중들을 초대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요리를 감독하느라고 좀 바빴다.’
‘아니, 부처님이라니? 부처가 출현했단 말인가?’
‘자네는 아직 그 소식도 못 들었는가?’

이러면서 친구는 수닷타 장자에게 부처님의 얘기를 쭉 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부처님 얘기를 하느라 밤이 깊은 줄도 몰랐는데, 친구가 수닷타 장자에게 ‘너는 복도 많다. 부처님을 친견하기가 어려운데,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오시니까 너는 내일 여기 앉아서 부처님을 뵐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어요. 둘이 그러고 헤어졌는데, 수닷타장자는 내일 부처님을 뵙는다고 생각하니까 밤에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날이 밝기를 못 기다리고 이렇게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녘에 밖으로 나와 숲을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저 나무 밑에 어떤 수행자가 앉아있는데 그 자태가 정말 그림 같은 거예요. 뭔가 느낌이 와서 그 수행자한테 다가가 인사를 드리며

‘부처님이 아니십니까?’
‘그렇다. 내가 당신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하셨어요. 전에도 부처님께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였습니까?”

“(한 순례객) 마하가섭존자요.”

“예, 마하가섭존자가 부처님을 찾아뵈었을 때 부처님께서 ‘내 당신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요’라고 하신 일이 있었지요.
어쨌든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께 법을 청했고 부처님께서는 수닷타장자에게 법을 설하셨는데, 그 법을 듣고 수닷타장자는 번뇌가 다하게 됐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어요. 어쩌면 부처님과 수닷타 장자의 인연이 대중들 속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해서 아마 새벽녘에 단 두 분이 만나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수닷타장자가 부처님을 이 사위성으로 초대한 거예요.

‘저희 나라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많으니까 여래께서 오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위성으로 와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승낙을 하셨어요. 그게 성도 후 3년째의 일입니다. 그래서 수닷타장자는 사업이고, 뭐고 다 버리고, 먼저 이 사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먼저 부처님과 1250명의 성중이 왔을 때 그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할 생각을 했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자이니까 공양은 얼마든지 접대할 수 있었어요. 또 성중이 걸식을 하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때까지 공식적인 정사로서 인정받은 건 죽림정사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죽림정사는 왕사성 북문 밖 1킬로미터 이내에 있습니다. 절의 위치조건은 마을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멀면 걸식하기 어렵고, 가까우면 번다하니까요. 그래서 이걸 기준으로 가장 머물기 좋은 곳이 어디일지 사위성 주위를 돌아봤어요.

그러다 이 사위성 서문 밖 한 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이 숲이 가장 머물기가 좋겠다, 죽림정사에 버금간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누구 소유인지 확인해 보니까 한문으로는 기타태자(祇陀太子), 인도말로는 제따(Jeta)태자의 숲이었어요. 이 제따태자는 이 나라 왕인 프라세나짓(Prasenajit) 왕, 즉 빠세나디(Pasenadi) 왕의 동생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도 왕자였습니다. 왕자는 이걸 팔 리가 없잖아요, 돈이 아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수닷타장자는 소유자를 알게 된 후에도 포기를 하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장자는 제따태자를 찾아가서 이 숲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는데 태자가 거절을 했어요. 수닷타장자가 부자이긴 하지만 감히 ‘왕자의 땅을 달라’고 하니까 기분이 나빴던가 봐요. 그러니까 장자가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파십시오’라고 하면서 백지수표를 제안한 거예요. 당시 인도에는 백지수표를 제안하면 거절할 수가 없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 백지수표 관련된 일화가 또 하나 있었지요? 선혜동자가 꽃 일곱 송이 구할 때 구리선녀(拘利善女)한테 자기에게 꽃을 팔라고 했지만 구리선녀가 안 판다고 하자 선혜동자가 꽃값은 얼마든지 드리겠다며 백지수표를 제안하니까 구리선녀가 ‘꽃 한 송이에 금화 백 냥을 내시오’라고 해서 금화 500냥을 주고 꽃 다섯 송이를 산 일이 있었잖아요.
어쨌든 수닷타장자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파십시오’ 하니까 태자가 ‘사고 싶은 땅에다 금화를 깔아 보시오’ 했어요. 그러니까 땅값이 얼마라는 거예요? 금값이라는 말이지요. ‘네가 사고 싶으면 금화로 깔아 봐라. 네가 돈 좀 있다고 건방지게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런 거지요. 그래서 액수로는 얼마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는 높은 금액을 부른 거예요. 안 팔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때 장자가 ‘너무 비싸네요’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먼저 백지수표를 제안했기 때문에. 그래서 장자가 ‘알았습니다’ 이러고 돌아갔어요. 태자는 장자가 ‘알았습니다’ 하고 돌아가니까 포기한 줄 알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이 숲을 지키던 동산지기가 와서는
‘태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수닷타장자가 마차에 금화를 싣고 와서 땅바닥에 까는 중입니다.’

그래서 쫓아가봤더니 진짜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팔겠다고 승낙도 안 했는데 뭐 하는 거요?’
‘당신이 값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금화를 깔라고 해서 내가 지금 깔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 거래가 성사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소송을 건 거예요. 요즘 같으면 법원에 갔더니 판결이 어떻게 났겠어요? 계약이 성립된 걸로 판결이 났어요. 그런데 장자가 아무리 부자라도 땅바닥을 금화로 다 채워 넣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깔다가 중간에 금화가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제따태자가 좋아했어요.

‘봐라. 네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걸 다 깔 수 있겠냐?’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숨겨놓은 돈이 더 있으니까 가져와서 깔겠소. 또 어음을 친구한테 맡기고 돈을 빌려와서 깔겠소.’

이러니까 제따태자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래서 물었어요.

‘이 땅을 사서 뭐하려고 그러냐?’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태자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기가 막힌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과 아무 관계도 없는, 수행자들이 머물 처소를 마련한다고 숲을 사들이는데 전 재산을 다 쏟아 붓다 못해 빌려서까지 값을 치르겠다고 하니까 궁금해진 거예요.

‘도대체 그 부처님이라는 분이 어떤 분이오?’

장자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다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제따태자가 그 설명을 듣고 감동을 해서 ‘그렇다면 나머지 땅은 내가 기증을 하겠소’라고 한 거예요. 어쨌든 땅값은 받았다는 거죠?(모두 웃음) 그런데 땅 전체로 봤을 때 산 게 더 넓을까요? 기증받은 게 더 넓을까요? 기증받은 게 더 넓어요. 왜냐하면 장자가 아무리 부자라도 숲 입구에 조금 깔았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이 절 이름이 ‘제따의 숲’, 즉 제따바나((Jetavana)입니다. 바나(vana)는 숲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별명이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즉 자선사업가예요. 이걸 한문으로는 급고독(給孤獨), 즉 외로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기타태자의 숲, 즉 기수(祇樹)에,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지은 절, 즉 급고독원(給孤獨園)이라고 해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과 성중들이 이곳에 오게 되었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건물을 지은 건 아니에요. 지금 보시는 유적지들은 훨씬 더 후대인 굽타시대에 스님들이 머무시던 승원터와 부처님을 기념해서 건축물을 지었던 것이 남아있는 것이지, 부처님 당시에는 어떤 건물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자연에서 지내셨는데, 그나마 있었다면 대나무 기둥 몇 개 세우고 그 위를 갈대로 덮어서 비를 피하는 초막 정도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절이 지어졌고, 부처님은 이곳에서 우안거(雨安居), 그러니까 우기 때 3개월간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 머무셨어요. 나머지 9개월은 유행을 하셨고요.
그러니까 45년 동안 안거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45번이 있었겠지요? 그 중에 24번을 이 사위성에 머무셨고, 그 중에 19번을 이 기원정사에서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부처님께서 가장 장기주석한 장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께서 이곳에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서 법문하신 양이 전체 경전 중에 제일 많습니다. 거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까 대승경전 작가들이 주로 대승경전이 설해진 배경으로 기원정사를 많이 기술했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도들이 제일 좋아하는 금강경이 설해진 장소도 기원정사로 되어있습니다. 참고로, 반야심경의 배경은 영축산(靈鷲山), 즉 기사굴산(耆?堀山)으로 되어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가장 많은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설법을 하나, 하나 경전으로 읽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대승불교도들로서 금강경 제6분까지만 독송을 하고, 여기에서 설해진 소승 경전 몇 편도 함께 독송을 한 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금강경을 읽어 내려가는 마음이 새로웠습니다. 금강경과 함께 경전을 몇 편 더 읽은 후, 스님은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가듯 ‘육화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대중 화합의 원칙 중에 6가지가 나오는데 이것을 ‘육화합(六和合)’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남이 싸우면 그 갈등의 원인이 뭔지를 규명해서 해소시켜야지 그냥 ‘싸우지 마라. 갈등 일으키지 마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갈등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라.’ 이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얘기입니다. 윗사람이 안 지키면서 아랫사람한테는 지키라고 한다면 아랫사람이 불만을 갖겠지요? 옛날에 우리 절에 중학생이 살겠다고 하기에 놔뒀어요. 그랬더니 그 중학생이 예불에 안 나왔어요. 그래서 스님이 불러서 ‘너 왜 아침 예불에 안 나왔니?’ 하니까 대번 ‘아무개 언니도 안 나오던데요?’ 제가 묻자마자 바로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모두 웃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불만은 그런 데서 생기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도 갈등이 많은 이유는 모든 사람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도 있잖아요. 지위가 있거나 돈 있는 사람은 수 백 억을 횡령해도 큰 문제가 없고, 하위직 공무원들은 10만 원만 받아도 처벌을 받잖아요. 그러면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사회적 갈등도 커지지요.

두 번째가 ‘의견을 맞추라.’ 아무리 좋은 것도 누가 일방적으로 지시하면 불만이 생기고, ‘그게 네 일이지 내 일이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남편이 어떤 결정을 혼자서 내리면 그게 아무리 가정에 이익 되는 일이라도 나머지 가족들은 ‘당신이 알아서 해라’며 방관자가 되고 그러지요. 그래서 반드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의논을 해서, 의견을 맞춰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게 민주주의예요.

세 번째가 ‘받은 공양을 똑같이 나누라.’ 이게 경제적 평등이에요. 오늘 날 우리 사회에 불만이 많은 건 경제적 불평등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절대빈곤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절대빈곤은 극복이 됐는데 상대적 빈곤이 너무 크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만약 제가 대중들과 같이 살면서 절에 들어오는 보시를 저 혼자 차지한다면 대중들의 불만이 많아지겠지요? 들어오는 돈은 회계처리를 투명하게 하지만 예를 들어 저한테 보시물을 건네는 분들은 ‘이건 꼭 스님이 쓰세요’하거나 ‘이건 꼭 스님이 드셔야 돼요.’ 합니다. 그 말에 집착을 하면 받는 사람이 ‘이건 내 거다. 내가 받았으니까 내 거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주로 대중들 앞에서 법문을 하니까 우리 몸에 빗대면 저는 정토회에서 얼굴 같은 존재인데, 우리 몸에는 얼굴만 있어요? 손발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작용하는 내장기관도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공동체에서 누구는 밥을 해야 되고, 누구는 청소를 해야 되는 등 역할을 나눴을 뿐인데, 우리가 사람을 상대할 때 그 사람의 얼굴만 보고 하듯이 얼굴에 해당되는 저한테만 ‘스님이 쓰세요.’ 하면서 보시를 한다고 그것을 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손발이 불평을 할까요, 안 할까요?”

“(순례객들) 해요.”

“예, 청소하던 사람들은 빗자루 던져버리고 다 가버릴 겁니다. 그래서 이 보시물을 모아놨다가 똑같이 나눠야죠. 즉 필요한 사람이 갖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야 불평, 불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놓고 자꾸 ‘불만갖지 마라. 화합하라’고 한다고 될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도 심할 수밖에 없는데 ‘너는 먹고는 살면서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건 승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에도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 날 한국 승단에 갈등이 많은 건 이 중에 1개도 안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1개만 안 지켜도 갈등이 생기는데, 1개도 안 지키고 있다는 거예요.

네 번째는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라.’ 이게 조금 어렵지요. 이건 투명성을 말하는 겁니다.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사니까 시시콜콜한 것까지 서로 다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으로 투명하지 않게 살고 있잖아요. 절에 들어 온 보시금도 어떻게 쓰는지 투명하지 않고, 지난 대통령 당시 청와대 안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투명하지가 않아서 결국 말썽이 났잖아요. 무슨 주사약부터 옷까지 온갖 게 다 말썽이 됐잖아요. 사실 그런 건 시비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게 투명하지 않다 보니까 먹는 것까지 트집을 잡히는 등 온갖 게 다 말썽이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집행하라는 얘기지요.

다섯째는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말의 내용은 옳은데 강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도 거기에 속하는데,(모두 웃음) 말이 옳아도 말이 부드럽지 못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뭘 잘못 하는 사람한테 ‘그게 잘 안 되니?’ 이러지 않고 ‘너 대학 나왔니? 대학 나온 게 그래? 너 뒷문으로 들어갔지?’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물론 저는 농담으로 한다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 자비롭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해야 되는데, 꼭 찍어서 침놓듯이 말을 하면 상대가 기분이 나빠지지요. 말은 틀린 게 아닌데 기분이 나빠진다는 거예요. 옛날에 정치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은 동료로부터 ‘옳은 얘기를 싸가지 없이 한다’ 이런 얘기를 듣기도 했어요.(모두 웃음) 부부지간에도 대화를 하다 보면 남편 말이 맞기는 맞고 합당한데, 듣는 아내는 기분이 나쁜 거예요. 자비롭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게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이 옳은 것만 갖고 살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왜냐하면 ‘옳은’ 건 이성적인 건데, 우리들의 감정은 옳고 그름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옳아도 감정적으로는 기분 나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자비롭게 말하라는 거예요.

여섯 번째 ‘남의 뜻을 존중해라.’ 상대의 뜻이 옳든 그르든, 내가 그 뜻이 좋든 싫든, 일단 좀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옳다, 그대로 하겠다가 아니라 일단 얘기를 좀 들어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얘기를 하다보면 들어주기가 쉽지 않지요. 첫마디 들어보면 벌써 ‘저거 되지도 않는 소리다’ 싶잖아요.(모두 웃음) 그래서 ‘알았다. 그만해라. 알았다니까!’ 이러잖아요.(모두 웃음) ‘알았다니까!’라는 건 알았다는 거예요? 듣기 싫다는 거예요?”

“(순례객들) 듣기 싫다.”

“그러면 ‘몰라!’ 하는 건 모른다는 거예요? 듣기 싫다는 거예요?”

“(순례객들) 듣기 싫다.”(모두 웃음)

“예. 그래서 부처님이 와도 구제 못하는 중생이 두 종류가 있는데, 그건 ‘알았다.’ 즉 ‘다 안다’는 중생하고, ‘몰라.’ 즉 ‘다 모른다’는 중생입니다.(모두 웃음) 뭘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뭐라, 뭐라 그러면 ‘안다니까!’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듣기 싫다는 거예요. 그 ‘싫다’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처님도 그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반왕이 깨닫지 못한 거예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내 아들은 옷도 잘 입고, 얼굴도 예쁜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시봉도 받고 해야 되는데, 마하가섭 존자니 뭐니, 사람들은 그들이 다 훌륭한 수행자라고 하지만 외형이 영 형편없으니까 정반왕이 석가족들을 불러 모아서는 인물도 잘 생기고 괜찮은 사람들을 강제로 출가시켜서 ‘부처님 옆에 있어라’고 할 정도였거든요. 순전히 세속적인 생각만 하는 거예요. 오직 ‘우리 아들!’ 말고 다른 데는 관심이 없던 거예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대도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붓다가 출현한다고 우리가 다 구제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알아보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기회가 오지, 그것마저 없으면 기회가 안 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갈등이 생길 때 이 6가지를 딱 적용하면 ‘아, 우리가 어떤 부분이 미진해서 갈등이 생겼구나’ 하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의 말씀은 2600년 전 얘기인데도 오늘 날에도 여전히 공동체의 화합이나 사회의 화합을 위해 그대로 적용 가능한, 합당한 말씀을 하셨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이미 새벽의 안개는 물러가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다가오니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고 기분도 밝아졌습니다. 햇빛 하나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바꿔주었었던가 새삼스럽게 고마웠습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청년들은 아침에 하지 못한 정진을 하고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조용히 앉아 명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시간을 가진 뒤, 스님은

“자, 그럼 우리들은 사위성으로 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차량 타는 일은 없습니다. 앙굴리말라탑터와 수닷타장자의 탑, 그리고 베사카 부인이 기증하신 동원정사까지 거쳐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은 걸으면서 진행합니다. 험한 길은 아니니 천천히 산책 삼아 걸어가보겠습니다.”

환한 햇살이 비추고 있어 껴입었던 옷을 벗고 걸을 준비들을 하였습니다. 줄을 지어 걸어가는 기분이 밝고 상쾌했습니다.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숲길, 모래바닥 길을 400 대중이 걸어갔습니다. 30분쯤 걸어서 도착한 곳은 ‘앙굴리 말라 탑터’ 였습니다.

“춘다(Cunda)나 앙굴리말라(Angulimala) 같은 분들은 붓다의 인격을 위대하게 한 분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수자타, 수닷타, 베사카 같은 분들은 그들 자체가 훌륭한 사람들로서 ‘그런 훌륭한 사람들도 붓다의 제자가 됐다’는 의미이고, 이 앙굴리말라는 흉악범에 불과한 사람인데 붓다를 만나서 성인이 된 사람에 들어가니까 붓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앙굴리’라는 말은 손가락이라는 뜻이고, ‘말라’는 염주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서 목에 걸었다’ 해서 앙굴리말라인 거예요. 이건 그의 원래 이름은 아니고 별명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사위성의 좋은 집안 출신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를 공부시키려고 탁실라(Taxila), 즉 지금의 파키스탄이 있는 북쪽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그 당시에는 유학을 가면 스승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했는데, 그 스승은 이미 육십 넘은 노인이셨어요. 아마 본처가 돌아가시고 재혼을 하셨는지 그 스승의 부인, 즉 사모님은 아주 젊은 여자였고요. 그런데 그 집에서 아이들이 숙식을 하니까 그 사모님이 아이들 밥도 해먹이고 그런 거예요. 거기서 공부하는 아이들 중에는 먼 나라에서 온 유학생도 있고, 그 도시에서 통학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앙굴리말라가 공부를 제일 잘했나 봐요. 그래서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스승의 총애를 받다가 어떤 사고가 생겼어요.

주된 얘기는 같은데 경전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버전이 여러 개예요.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어릴 때 유학 와서 공부를 하면서 장성했잖아요? 13 내지 15살 정도면 상당히 크거든요. 사모님이 앙굴리말라를 어릴 때부터 키우다시피 했는데, 이제 장성했으니까 늙은 남편이 없을 때 앙굴리말라한테 연애를 좀 하자고 유혹했다가 거절당한 거예요. 그래서 너무 상처를 입은 거예요. 자기는 앙굴리말라를 그렇게 정성껏 보살폈는데 앙굴리말라는 자기를 내쳤다고 느껴서 한이 맺힌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돌아올 때에 맞춰 자기 옷을 스스로 찢고는 ‘이럴 수가 있느냐? 당신이 없을 때 이 아이가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며 앙굴리말라에 대한 거짓 고자질을 해서 스승이 총애하던 제자에 적의를 품게 되었다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앙굴리말라가 스승과 사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니까 그 동네출신 아이들이 그 스승한테 ‘사모님과 앙굴리말라 사이에 뭔가 있다’고 모함을 했는데도 스승이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보니까 자기 아내가 손으로 밥을 앙굴리말라 입에 넣어주는 걸 보고 질투심을 느껴서 문제가 됐다는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둘이 방에 들어온 쥐를 잡느라 엉켜서 옷이 막 흐트러졌는데 남편이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오해를 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남녀 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걸 빌미로 늙은 스승이 앙굴리말라를 오해해서 일이 벌어졌다는 거지요. 어쨌든 문제가 됐으니까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되잖아요.

‘나는 더 이상 너를 가르칠 수가 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라.’
‘아닙니다. 저는 아직 더 배울 게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배우고 싶다면 딱 하나, 마지막 남은 도술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너에게 말해 줄 수가 없다.’
‘아닙니다. 저는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100명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서 목에 걸면 바로 승천해서 하늘나라에 날 수 있다.’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확신이 들면 괴력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건 좋은 측면도 있지만 잘못 믿으면 엄청난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되었고,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피했어요. 왕이 군사 10명을 파견해도 오히려 다 앙굴리말라한테 살해되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어요.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고향인 사위성으로 점점 다가오니까 사위성 사람들은 불안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각 집마다 요령을 달고 그걸 밧줄로 이어서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는 표시로 누군가 밧줄을 잡아당기면 동네에 요령이 전부 흔들려서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는 외출을 안 할 정도로 공포가 컸던 거예요. 어쨌든 사람들이 불안해 하니까 빠세나디 왕이 천명의 군대를 끌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간다는 소문이 난 거예요. 그래서 그 어머니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우리 아들 좀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버전도 있고, 앙굴리말라가 어머니마저도 죽였다는 버전도 있어요. 아무튼 앙굴리말라가 괴력을 가진 공포의 대상이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막 ‘앙굴리말라다’ 하면서 도망을 가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앙굴리말라가 온다는 방향으로 길을 가시니까 사람들이 ‘부처님, 그리로 가지 마세요. 앙굴리말라가 나타날 겁니다.’ 하니까 부처님께서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셨어요. 술 취한 코끼리가 왔을 때도 부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어쨌든 부처님이 서서히 길을 걸어 가시니까 앙굴리말라가 숲속에서 칼과 방패를 들고 나와서는 천천히 걸어가시는 부처님을 쫓아갔어요. 그런데 아무리 쫓아가도 천천히 가시는 부처님께 도저히 닿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도 앙굴리말라는 ‘사문아, 멈춰라.’ 고함을 치면서 쫓아갔어요. 보통 그러면 사람들은 두려워서 ‘살려달라’고 하든지 도망을 가든지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고요하게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앙굴리말라가 씩씩대면서 ‘왜 멈추라는데 안 멈추느냐?’며 칼을 들고 악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나는 멈춘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너다.’고 하신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항상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리시거든요. 그래서 갑자기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문제에서 멈췄냐, 안 멈췄냐는 문제로 바뀐 거예요.

‘너는 계속 가놓고 왜 멈췄다고 말하고, 나는 멈추어 있는데 왜 멈추지 않았다고 말하느냐?’
‘여래는 사람을 해치는 모든 행위를 이미 오래 전에 멈췄다. 그런데 너는 아직 그것을 멈추지 못했구나.’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앙굴리말라의 정신이 돌아와서 자기가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안 거예요. 그래서 칼을 집어던지고 부처님께 무릎을 꿇으면서 ‘제가 지은 죄를 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설법을 했고, 그 설법을 들은 앙굴리말라는 바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출가사문이 되기를 발원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여기 법이 잘 설해져 있도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하고 끝내버리셨어요. 이게 부처님의 위대함이에요.(모두 웃음) 아무 절차도 없이 말이에요. 앙굴리말라는 출가사문이 된 후로 엄청나게 집중적으로 정진해서 일주일 만에 깨달아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기원정사에 와있는데 빠세나디 왕이 천명의 병사들을 끌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제따바나 앞으로 지나가다가 그 정사 앞에 군대를 놔두고, 무장을 해제했어요. 부처님을 뵈려면 반드시 무장을 해제하고 부처님께 문안을 드렸어요. 그리고 부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대왕이시여, 무슨 일이시요?’
‘예,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말라가 나타나서 지금 잡으러 가는 중입니다.’
‘혹시 앙굴리말라가 출가사문이 되었다면 왕은 어떻게 하겠소?’
‘부처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소?’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앙굴리말라한테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당신 곁에 있는 이 수행자가 앙굴리말라요.’

그러니까 왕이 부들부들 떨었어요. 이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천명의 군대를 끌고 왔지만 천명의 군대로도 잡을까, 말까 한 두려운 존재인데, 그 살인마 옆에 지금 무장해제하고 혼자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왕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는 아힘사(Ahimsa) 비구요.’
그러니까 앙굴리말라의 법명이 아힘사라는 건데, 그건 비폭력, 불살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왕이 앙굴리말라를 가만히 보니까 이미 그는 수행자인 거예요. 그래서 왕이 아힘사 비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저는 아무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이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나는 천명의 군대를 끌고도 그를 제압하지 못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안 가지시고 그를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성자로 바꿔놓다니. 여래의 위신력은 누구도 당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까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비구가 됐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앙굴리말라에 대한 두려움이 안 가셔서 이제는 비구들만 나타나면 그가 앙굴리말라일지도 모르니까 막 요령을 흔들었어요. 그래서 비구들이 사위성에 탁발하러 들어오면 걸식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다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고 나와 보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다들 부처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왜 저런 사람을 출가시켜서 우리가 도매금으로 살인마 취급을 당해야 되느냐’는 거지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는 역시 ‘일주일만 지나면 오해가 풀리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일주일만 굶으면 되지,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불평하느냐’는 거지요.(모두 웃음) 오해가 풀리려면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앙굴리말라를 두려워하다가 앙굴리말라가 진짜 수행자가 됐다는 걸 인식하게 되면서 점점 두려움이 복수심으로 바뀐 거예요.
하루는 앙굴리말라가 어떤 집으로 걸식을 갔는데 사람들이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치니까, 그 집에 있던 산모가 아기를 낳다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까무러쳐버렸어요. 아기를 출산하다가 산모가 까무러쳐버리니까 큰일이 난 거죠.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갔어요.

‘부처님, 큰일이 났습니다.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아힘사여, 다시 그 집으로 가라. 가서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한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앙굴리말라가 아힘사로 태어난 이래로, 즉 출가한 이래로 한 번도 살생을 한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거죠. 그래서 출가사문에게 출가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아힘사 비구는 그 집으로 다시 가서 ‘여인이여,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그 여인이 정신을 차려서 아이를 순산했다는 거예요. 그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에게는 ‘앙굴리말라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라는 소문이 난 거예요. 그리고 오히려 앙굴리말라를 두려워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걸식하러 오는 앙굴리말라에게 집단적으로 돌팔매질을 해서 결국 앙굴리말라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어요.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달려오시자 숨이 넘어가려던 찰나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이시여, 저는 안온합니다.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스투파에 왔을 때 보니까 여기 이 스투파 밑에 구멍이 나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도 ‘앙굴리말라 굴’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앙굴리말라가 여기 숨어 있다가 나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는데, 여기는 앙굴리말라가 돌을 맞고 쓰러져서 열반한 자리에 기념탑을 세운 거라고 합니다. 앙굴리말라는 붓다의 교화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붓다를 위대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럼 경전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여래의 아들이여, 너는 이제 모든 악을 다 멀리 던져 버린 사람이니라. 앙굴리말라여, 부디 인욕하라, 널리 용서하라. 네가 지난 날 범한 악행으로 인해 너는 지금 이런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니라. 만약 이 일을 겪지 않을 진데 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기나긴 세월을 지옥에서 보내야 했으리라.”
부처님의 이 설법이 끝난 뒤 앙굴리말라는 평화롭게 반열반에 들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가 행한 착한 공덕
과거에 지은 모든 악행을 압도했나니
이 세상에 밝은 빛을 남겼도다.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이 밝게 빛나듯이. "
<법구경>

경전의 구절에 마음이 먹먹하였습니다.
앙굴리말라의 탑터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수닷타 장자의 탑터를 보았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이 탑 위에 올라 탑을 살펴볼 수 있도록 천천히 탑을 돌아 탑 위에 올랐습니다.

탑 위에 올랐다 내려와서 사위성을 가로질러 동문 쪽으로 나갔습니다. 무너진 흙더미 속에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먼지 바람 일으키는 흙 길에 나뒹구는 벽돌들이 2600여 년 전 제국의 영화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라니 신기했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걷다가 마을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릇을 씻는 아주머니, 아이들 머리를 빗어주는 어머니, 우루루 나와서 순례객을 구경하는 동네 개구쟁이들, ‘안녕’하고 인사하니 웃으며 따라 하는 아랫도리를 벗은 꼬맹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들판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갔는데 어느새 밭을 망쳐서인지 울타리로 막아두어서 지름 길을 갈 수 없어서 마을을 통해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스님은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색한 한글로 ‘푸르바람 비하르’라고 적힌 간판을 지나쳐 왔습니다.

“여기 원숭이가 거칠고 그러니까 원숭이가 먹을 거나 가져갈 만한 것을 밖에 꺼내놓지 마세요.”

“(순례객들) 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푸르바람입니다. ‘푸르’는 동쪽, ‘바나’는 숲이란 뜻으로서 동원정사(東園精舍)입니다. 동원정사를 누가 창건했습니까? 베사카(Vaisakha) 부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안거를 1번 지내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주로 비구들이 있었으니까 비구 사찰이었는데, 나중에 역사를 보면 비구니 사찰로 운영된 것 같습니다.

베사카 부인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있습니다. 베사카 부인의 할아버지가 거부장자, 즉 큰 부자였는데 할아버지가 부처님의 재가신자였으니까 부처님께서 베사카 부인이 어릴 때 그 집에 가셔서 공양접대도 받고 그랬나 봐요. 그러니까 베사카 부인은 7, 8살, 아주 어릴 때 벌써 부처님을 친견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부처님께 공양접대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베사카 부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신심이 돈독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지만 당시에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자꾸 합병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나라도, 마가다국 옆에 있던 나라인데, 결국 마가다국에 합병이 됐나 봐요. 그런데 합병이 되면 장자들은 오히려 자기네가 장사할 시장이 넓어지는 격이 되니까 사업이 더 번창했대요. 그래서 왕사성의 부자가 됐는데, 베사카가 커서 열여섯 살 이 되자 사위성의 큰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냈나 봐요. 그때 베사카의 지참금이 시댁 재산보다 더 많았대요. 할아버지가 손녀를 워낙 아끼니까 지참금도 많이 줬지만 혹시 시댁에 가서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서 시녀 수 십 명과 8명의 현자, 요즘 말로 하면 고문단까지 파견을 보냈나 봐요. 과장인지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그렇게 시집을 왔더니 시댁은 육사외도 중에 하나인 니간타의 신자들이었어요. 그래서 스님들이 탁발을 하러 오면 시댁에서는 스님들께 공양을 안 주는 거예요. 종교가 다르다고. 그리고 또 니간타의 제자가 늘 이 집에 머물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스님들이 베사카 부인의 시아버지가 밥을 먹고 있을 때 탁발을 온 거예요. 인도의 풍습은 밥을 먹고 있을 때 탁발을 오면 공양을 올리도록 되어있는데, 시아버지는 돌아앉아서 계속 밥만 먹는 거예요. 우리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모두 웃음) 우리도 길거리에서 밥 먹다가 애들이 밥 달라고 하면 돌아앉아서 계속 먹잖아요. 그러니까 남 욕할 게 못 되더라고요.(모두 웃음)

어쨌든 시아버지가 공양은 안 올리고 돌아앉아서 밥만 먹으니까 베사카 부인이 스님들께 민망해서 ‘지금 우리 시아버님이 식은 밥을 먹고 있다’고 변명한 거예요. 그런데 시아버지가 그 얘기를 들은 거예요. 그래서 엄청나게 화를 낸 거예요. 자기는 지금 금 그릇에 맛있는 걸 먹고 있는데, 며느리가 스님들한테 자기가 식은 밥을 먹고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시아버지 모독죄로 파혼, 즉 소박을 준 거예요. 그러면 베사카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재산을 다 차지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일이 시아버지를 모독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송사가 붙었어요. 그래서 결국 현인들이 도와서 ‘그것은 시아버지를 모독한 게 아니다. 만약 파혼을 하려면 베사카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만큼 배상을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시댁의 전 재산이 다 없어질 판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이게 무마가 됐어요.

대신 이 사건을 통해서 시아버지의 기가 한 풀 꺾인 거예요. 그러니까 베사카 부인은 처음 시집왔을 때는 눈치 보느라고 못 하다가 그 이후로는 스님들께 공양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부처님을 집으로 초대한 거예요. 배포가 대단하지요?(모두 웃음) 그래서 시댁사람들에게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시댁사람들이 외도의 신자들이다 보니까 아무도 공양을 안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만 올리고, 공양이 끝난 뒤에 시댁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시니까 들으시라’고 하니까 시아버지는 좀 듣고 싶었는데 집에 있던 니간타 제자가 못 듣게 한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 이 시아버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병풍 뒤에 숨어서 들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듣다가 깨달아버린 거예요.(모두 웃음) 그래서 발심을 한 거예요. 그 이후부터 시아버지 미가라(Migara, 鹿子)가 며느리를 ‘법의 어머니’라고 불렀대요. 그래서 베사카 부인의 별명이 그때부터 ‘미가라의 어머니’, 즉 녹자모(鹿子母)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 동원정사의 별명도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입니다. 이렇게 해서 집안이 교화가 된 거예요.

실제로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많은 모함을 받았는데, 그 모함을 대부분 수닷타 장자와 베사카 부인이 후원함으로써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베사카 부인이 기원정사에 법문 들으러 갈 때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된 외투를 입고 갔다가 벗어놓고 법문을 듣고는 귀가할 때 깜빡 잊고 온 거예요. 집에 도착해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려서 베사카 부인은 하인을 시켜서 ‘가서 찾아오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다시 불러 세워서는 ‘혹시 그 외투가 그 자리에 그냥 있으면 가져오고, 아난존자가 그 외투를 이미 챙겨놨다면 보시하고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인이 가보니까 아난존자가 챙겨놓은 거예요. 그래서 하인이 ‘베사카 부인이 보시를 하고 오라고 당부하셨다’는 말을 전하니까 아난존자가 ‘이런 건 우리가 보시로 받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하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베사카 부인은 자기가 한 번 보시하기로 했는데 상대가 못 받는다고 하니까 아예 그 외투를 팔아서 그 돈을 보시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외투를 살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돈을 주고 샀어요. 그 돈으로 지은 게 이 동원정사입니다. 그만큼 신심이 있었다는 거지요. 수닷타장사에 버금가는 스토리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부처님께서 한 철을 나셨고 마하가섭존자도 여기서 수행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 원래 아쇼카 석주가 있었는데 그게 부러졌어요. 그런데 거기다가 사람들이 링가를 깎아서 여길 힌두절로 썼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무도 여기가 동원정사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쇼카 석주가 부러진 것을 깎아서 링가를 만들어놓은 거였어요. 그래서 현재 인도 스님께서 원래는 힌두교였다가 출가한 뒤로 지금껏 여길 가꾸고 계세요. 그래서 아는 사람만 이렇게 방문을 하는 겁니다. 저도 동원정사가 있다는 소리만 들었지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 전에 들렀던 앙굴리말라 스투파만 보고 돌아갔는데, 몇 년 전에 답사를 와서 거리도 확인하고, 동문도 확인하니까 기록 속에 동원정사와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정식 성지순례코스에 넣었습니다. 자, 경전독송해 보겠습니다.”

동원정사 작은 뜰(?)에 400대중이 열을 지어 앉아 경전을 펴들고 독송을 하였습니다. 상세한 기록과 세밀한 표현에 읽어가는 재미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대중들이 경전 독송의 재미에 빠져드는 동안 오른쪽 길목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줄을 지어 앉아 사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무리 하고 스님은 법사님들과 행자님들에게 동네 아이들 사탕을 나눠주라고 이르고는 대중들과 함께 반대방향으로 난 지름길로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대중들이 가는 동안 법사님과 행자님들은 아이들 줄을 세워 앉혀 두고 차례차례 사탕을 나눠주었습니다.

천축선원에 돌아와 대중들이 저녁 공양을 챙겨 먹는 동안, 스님은 가까이에 있는 중국 절과 인도 절을 방문 하였습니다. 먼저 중국 절에 들러 지난 12월에 열반하신 ‘쁘라즈난다 스님’의 영정과 사리를 참배하고 영가축원을 하였습니다.

쁘라즈난다 스님은 수자타아카데미 설립 초기부터 인연을 맺어 함께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해 협력하셨고, 인도 불교 부흥의 혁명적 인물로 칭송 받는 암베드카르에게 수계를 해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수자타아카데미 설립 초기에 봉사를 했던 석가족 청년들의 스승님이시기도 하여 법륜 스님과 제이티에스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큰 분이십니다.
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 염송을 하고 해탈주 독송을 한 뒤 일어났습니다.
절 관계자 분들과 쁘라즈난다 스님의 부도탑 건립 부분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보시금을 전달한 뒤 인도 절로 갔습니다.


인도 절에 들어서서, 스님은 먼저 법당에 참배하였는데 법당에 있는 어린 사미승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습니다. 이어 속속 어린 사미승들과 스님들께서 나오셔서 스님께 예를 표했습니다. 스님은 주지 스님과 반갑게 인사 나누시면서 보시금을 전달하고 나왔습니다.
해마다 성지순례로 이 곳 쉬라바스티에 오게 되면 스님은 이곳 인도절에 잊지 않고 들러 꼭 보시를 하고 갑니다. 올해로 벌써 20년 째가 됩니다. 스님은
“처음에 이 인도절은 아주 작았는데 해마다 조금씩 불사가 되는구나.” 하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당에서 즉문즉설 법회가 열렸습니다. 어제 시간 관계상 미처 질문을 하지 못한 세 분과 오늘 이어서 질문하는 분이 모두 여섯 분이었습니다.

수행문과 참회문은 좋은데 진언, 신중단이 와닿지 않는다는 분의 질문, 부처님 열반 당시, 몸이 악화된 상태에서 관하셨다고 하는데 스님은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 묻는 청년, 위파사나 수행으로는 궁극적인 도를 이루기 어렵다고 하는데 참선을 왜 가르쳐주시지 않느냐고 질문하시는 분,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청년의 질문, 부처님이 가필라성에서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출가하셨는데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부처님 성인의 가르침에 관심이 가질 것 같다는 질문 등이 이어졌습니다.

안개가 가득한 쉬라바스티의 밤이 법문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부처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기원정사에서 순례자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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