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네팔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인도로 들어가는 일정입니다.

스님은 네팔에 들어올 때 가장 늦게 들어왔던 2호차, 10호차의 대중들이 이번에는 가장 먼저 국경을 통과하도록 하여 10호차, 2호차가 가장 먼저 국경 통과 수속을 하러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10호차 청년들과 함께 국경 통과 수속을 하여 다음 일정인 삐쁘라하와에서 대중들을 맞이하기로 하였습니다. 네팔 출국과 인도 입국 수속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삐쁘라하와에 여유있게 도착하였습니다.

유적지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여법하게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예불 공양을 한 후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삐쁘라하와는 석가족이 세운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입니다. 100년 전, 진신사리탑이 발견되었는데 1898년 이 탑 터를 발굴할 때, ‘카필라바스투’라는 명문이 찍힌 사리용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델리박물관에 가서 친견을 하게 될 사리 용기와 사리(뼈조각)는 지금 우리가 참배하는 삐쁘라하와,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오늘은 국경 통과 수속이 순조로와 각 차량 도착이 끊임없이 연이어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한 차량, 혹은 두 차량을 합쳐서 정근, 예불공양, 설명의 순서를 진행하였습니다.

한참 일정을 진행하고 있을 때, ‘명등 108 순례단’이라는 조끼를 입은 한 분이 스님께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남자분은 밝게 웃으며 “천축선원에서 법륜 스님께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기서 뵐 수 있을 줄은 몰랐다”며 너무나 기뻐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3세라고 소개하며 중국 최초로 공식적인 단체명으로 불교 유적지 순례팀을 이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자 분은 기뻐하며 자신의 그룹과 스님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요청하였습니다. 스님도 반갑게 응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중국 순례단을 만난다는 것이 생경하게 다가왔지만 반가운 움직임인 것 같았습니다.

모든 팀이 유적지 참배를 잘 끝내고 다음 유적지인 ‘천불화현탑 터’로 달려갔습니다.
5시간가량 긴 시간을 달려 쉬라바스티의 천불화현탑터에 도착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3년째 되던 해에 죽림정사에 계셨는데, 그때 사위성(舍衛城), 즉 쉬라바스티(Shrvasti)의 큰 부자인 수닷타장자가 왕사성에 사업하러 왔다가 친구 집에 갔을 때 부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은 뒤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이 사위성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초청에 응하셔서 성도 후 3년째 되던 해에 이곳 사위성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수닷타장자는 부처님과 1250인의 대중을 초청해 놓고 이분들이 어디에 머무시는 게 좋을지 연구를 하다가 왕사성 밖 죽림정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위성 밖 한 숲을 발견하고 부처님이 그 숲에 머무시기 좋겠다며 마련한 절이 기원정사입니다.

부처님이 1,250인의 대중과 기원정사에 머무셨지만 이 사위성 사람들은 좀 물질적이었나 봐요. 왕사성은 오래된 도시라서 좀 문화적 도시인데 비해 이 사위성은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력은 풍부한 신흥강국이라서 문화적으로는 좀 수준이 떨어졌나 봐요. 그러니까 부처님 같은 성인을 존경하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면에서는 굉장히 약했는지 부처님의 법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나도 사람들이 몰려와서 법문을 들으려고 하는 게 별로 없이 좀 냉담했다 그래요. 복을 구하거나 기적을 행하거나 그러면 ‘우-’ 하고 모여들지,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는 좀 외면했나 봐요.

그래서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수닷타장자와 많은 분들이 부처님께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러니, 이 사람들에 맞게 부처님께서 뭔가 법의 위신력을 좀 보여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몇 번이나 간청을 했다 그래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응하셔서 사위성 밖인 이곳에 사람들을 모이라고 하셨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데, 부처님께서 망고 씨를 하나를 땅에 심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 기다리니까 거기서 싹이 텄다는 거예요. 그래서 쭉쭉 자라더니 순식간에 큰 고목나무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놀랐어요. 그런데 또 그 고목나무에 황금빛 망고가 가득 달리더니 조금 후에 다시 그 망고가 전부 부처님으로 화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천불화현(千佛化現), 즉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난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사위성 사람들이 너무 너무 신기해하며 부처님 법에 귀의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불화현, 이것이 사위성의 상징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식으로 묘사가 됐을까?’ 이건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하겠지요. 아무튼 왕사성은 코끼리가 부처님께 조복하는 걸로 상징된다면 이 사위성은 천불화현으로 상징됩니다. 나중에 아쇼카 왕이 그것을 기념해서 이 자리에 천불화현탑을 쌓았고, 후대 사람들이 또 쌓고, 또 쌓고 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보다시피 이렇게 완전히 큰 산처럼 되었어요. 탑 중에 케사리아탑이 제일 크고 이게 두 번째로 큽니다. 케사리아탑이 발견되기 전에는 이게 제일 큰 탑이었어요. 이건 밑에서 보면 잘 안 보이니까 올라와야 하는데, 올라오다 보면 마치 등산하듯이 숨이 찰 정도에요. 여기 올라와서 이렇게 주위를 돌아보면, 맑은 날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느낄 수가 있어요. 탑 주위가 이렇게 연못처럼 습지가 많은데, 이건 강이 흘러서 그런 게 아니고 이 탑을 쌓는다고 흙을 파서 벽돌을 굽다 보니까 주위가 다 이렇게 습지처럼 변한 거예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내일 기원정사에 가서 하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도착한 두 개 차량의 예불 공양을 마칠 때 쯤 나머지 여덟 대의 차량이 도착하여 천불화현탑 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을 향해서 유적지 안내를 하고 이어서 함께 저녁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자리를 잡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대중들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고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함께 출발하였습니다.

천축선원은 쉬라바스티에 있는 한국절입니다. 부처님 성지에 있는 흔치 않은 한국 절인데다가 순례자 숙소를 이용할 수 있어서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이 곳 절의 주지스님이신 대인스님과 총무 보살님등이 환대를 하며 맞이해주셨습니다.

저녁 공양 후, 스리랑카 절로 숙박을 하는 차량도 모두 모여 함께 저녁 예불을 드리고 천축선원 마당에서 400여 대중이 자리한 법회를 열었습니다.

차량을 뒤로 물리고 각자 자기 깔판을 가져와서 깔고 앉으니 바로 법회 공간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깔판이 있으면 정진도 법회도 못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법회 전에 천축선원 대인스님과 총무보살님의 인사말씀을 청해들었습니다.

대인스님께서는 짧지만 반가움을 가득 담아서 맞아주셨습니다.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법륜 스님과 정토행자들이 기다려집니다. .... 각자 자기 처소에서 참다운 불제자로서의 모습으로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는 정토행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체 모든 생명의 시봉을 잘 하겠다는 원을 세우게 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오시는 수행자님들의 시봉을 잘 하고자 합니다. 안개 자욱한 날, 몸은 괴롭지만 마음은 흐뭇하고 부처님 법을 만나 좋은 도반을 만나 모든 인연이 행복임을 알게 됩니다. 순례하기에는 요즘 시기가 좋지 않지만 와주셔서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특히, 총무 보살님께서는 이번에 된장 담그기에 성공해서 순례 대중에게 맛있는 된장국을 공양 올릴 수 있게 되었다하며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어, 즉문즉설 법회가 열렸습니다. 순례 중에 궁금한 내용들을 스님께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행복은 절대적인 것인지, 상대적인 것인지가 궁금하다는 분, 담마적 불교와 종교적 불교의 차이점에 대해서 물어보신 분, 부처님이 대중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르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 생멸이 없다는 뜻이 무엇인지 등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이후에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시려고 많은 행적을 이어가셨는데, 모든 것이 제게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시고 사랑하셨던 곳이 이곳 바이샬리였고, 릿차비족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부처님께서 생을 마치실 때의 그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늙은 코끼리가 고개를 천천히 돌리듯이 그렇게, 따라오는 릿차비족을 둘러보시는 모습’으로 묘사가 되어있거든요. 거기서 저는 굉장히 안타까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도 아쉬움이 있었을지, 어떤 마음이셨을지 그게 궁금합니다.”

“질문에 약간 수정을 해야 되겠는데요. 법문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까 헷갈리나 봐요. 부처님께서 오래 주석하셨던 곳은 이곳 사위성입니다. 성도하신 후, 45안거 중에 24안거를 이 사위성에서 했다고 되어있고요. 그 24안거 중에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는 경전의 절반 가까이의 배경이 사위성 또는 기원정사로 되어있습니다. 오래 머무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부처님께서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셨지만 가장 사랑했던 종족이나 나라로 후대에 기록되어있는 건 바이샬리의 릿차비족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릿차비족의 바이샬리는 절대왕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가다국이나 코살라국처럼 왕이 막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러는 절대왕국이 아니고, 아테네처럼 일종의 도시국가 형태로써 왕족들이 가능하면 회의를 해서 의사를 결정하는 일종의 공화정 체제였습니다. 우리 상가(sa?gha, 승가僧家)의 운영원리가 바이샬리 릿차비족들이 하는 그런 원리와 좀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의 사회시스템을 좋게 보신 것 같아요.

또 바이샬리는 당시에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풍요로웠다고 합니다. 또 굉장히 진보적인 도시였어요. 그래서 당시에 사회 조건에서는 비구니출가를 허용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래도 그 중에서 바이샬리가 가장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바이샬리에서 비구니출가를 허용했습니다. 후대에는 바이샬리에 사시는 출가스님들마저도 조금 개방적이어서, 당시는 화폐사용으로 경제시스템이 바뀌는 때였으니까 바이샬리의 스님들 사이에서 화폐를 보시로 받을 수 있느냐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바이샬리의 스님들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어요. 여기가 상업도시다 보니까 환경이 그래서 그런 건데, 이것이 2차 결집이 있게 된 동기이고, 보수적인 장로들이 ‘받을 수 없다. 그건 비법(非法)이다’라고 결정을 했거든요. 그런 걸로 봤을 때 도시가 그만큼 전통사회에서 좀 변화되어가는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까 이 바이샬리가 대승불교의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경전 중에 ‘유마힐경’, 즉 ‘유마경’이라고 있는데, 실존인물인지 가공인물인지 그것은 역사학자가 밝힐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 경전의 주인공인 유마거사가 바이샬리의 장자로 등장하거든요. 이런 여러 가지로 봤을 때 바이샬리는 굉장히 민주적이고, 진보적이고, 풍요로운 도시였다 싶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도솔천의 천인들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저 바이샬리 릿차비족의 모습을 봐라’고 하셨어요. 이어서 그들이 붉은 옷, 푸른 옷, 흰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마치 하늘나라 천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비유가 나오는 걸 보면, 바이샬리가 좀 풍요로운 도시, 진보적인 도시였다 싶어요. 그래서 암라빨리(Amrapali) 같은 분이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또 그분이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또 부처님께 자신의 망고정원도 기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불교의 운영원리, 상가의 운영원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상가를 구성하는 건 사부대중(四部大衆)이지요. 상가를 구성할 때는 수행자라야 됩니다. 신자는 상가의 구성원이 안 되고 수행자가 상가의 구성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네 부류의 수행자, 즉 출가수행자 중에 남녀 수행자, 재가수행자 중에 남녀 수행자, 이렇게 네 부류가 있었는데, 이걸 사부대중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신자와 개념이 다릅니다. 동격으로 쓰이긴 하지만 신자라 그러면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자라는 뜻이고, 수행자라 그러면 담마, 법에 귀의해서 그것을 향해 가는 자입니다. 목표가 복을 받거나 천상에 나는 게 아니고, 해탈과 열반을 추구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한 비구나 비구니만 아라한과를 증득한 게 아니라 재가수행자 중에서도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화하는 과정에서 이 출가수행자는 종교지도자인 브라만과 같이 사제 계급이 되고, 재가수행자는 점점 신자로 바뀌어서 점점 승속이 구분되었어요. 종교화되고 난 뒤에는 상가가 어떻게 구성이 되었느냐 하면, 출가승려만 구성원이 되는 거예요. 상가구성원은 출가오중(出家五衆)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불법승 중 승보에 들어가는 상가구성원은 출가오중입니다. 출가오중이란 비구, 비구니, 즉 20세 이상 성인 남녀수행자와 사미, 사미니, 즉 20세 미만의 남녀수행자, 또 식차마나를 말합니다. 식차마나란 처음 계를 받을 때 성인이라도 바로 비구니계를 안 받고 식차마나계를 받아서 그로부터 2년 후 비구니계를 받는 여자수행자입니다. 왜 이런 시스템이 필요했느냐 하면, 깨달음이라는 건 언제 올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도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고 법에 눈을 뜨면 ‘출가하겠습니다.’ 해서 출가가 허용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출가한 비구니가 아기를 낳는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런 사람도 출가는 할 수 있는데, 정식 출가승려인 비구니는 유보된 상태로 있다가 2년이 지났을 때 정식으로 비구니가 되게 한 제도입니다. 이렇게 해서 출가오중이 승보를 구성하게 됩니다.

또,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자를 규정하는 방법이 달랐어요, 그러니까 출가한 스님들도 점점 종교화되어서 사제 계급이 되고 이러니까 옛날에 브라만교와 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다시 수행자의 기준을 출가 여부로 안 따지고, 발심 여부로 따졌어요. 그러니까 해탈과 열반을 증득해서 부처가 되겠다고 발심했다면 그가 출가 모습이든 재가 모습이든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에 발심을 하면 그게 브라만계급 출신이든 어느 계급 출신이든 따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이름을 ‘출가사문’이라고 안 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수행자를 규정한 거예요. 그게 뭘까요? 부처님의 수행시절 이름이 보디사트바(bodhisattva)잖아요. 그래서 수행자의 이름을 출가사문이 아니라 보살이라고 정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보살 중에 출가보살이 있고, 재가보살이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소심경에 ‘대승은 보살승이다’라고 되어있어요. 보살로 상가를 구성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출가하신 남녀수행자, 즉 비구, 비구니, 재가한 남녀수행자, 우바새, 우바이, 이렇게 해서 상가를 구성한다는 거예요. 혹시 잘못 이해해서 스님들과 가자가 합해서 승단을 구성한다고 아시면 안 돼요. 승단은 아무나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승단의 구성원은 수행자라야 돼요. 수행자가 아닌 사람은 승단의 구성요소가 아니에요. 수행자가 아닌데 어떻게 대중이 공경을 하겠어요? 그런데 형식을 잘못 이해해서 ‘재가신자도 다 승단의 구성원이 아니냐’고 이해하시면 안돼요. 재가의 모습이 아니라 발심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살을 뭐라고 규정해 놨습니까? 보살이란 발심(發心)한 자예요. 어떤 발심을 했느냐면 발보리심(發菩提心)을 한 자입니다. 어떤 보리심을 발했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고 되어있지요. 그래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가 ‘보살’이라고 규정되어있습니다. 선남자 선여인 중 누구라도 해탈과 열반,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겠다고 발심을 한 자가 수행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승에서는 출가한 승려라도 그냥 제사나 지내주는 사제계급이라면 그는 상가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는 게 나아요.

학자들은 이런 상가의 모델이 바이샬리의 릿차비족, 또는 밧지족의 국가운영원리와 많이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특히 바이샬리를 좋아하셨는지도 모르지요.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 불교대학생으로서 정토회의 정회원이 아닌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정토회는 불교신자와 수행자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교신자로서 정토회에 와도 괜찮은데, 정토회는 원래 설립목적이 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행집단, 그러니까 ‘신앙공동체 정토회’가 아니라 ‘수행공동체 정토회’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에서 공부하고 경전반 공부를 해서 ‘나도 수행을 해야 되겠다. 수행자가 되어야겠다.’고 하면 발심행자가 되는 거예요. 발심행자를 정토회에서는 정회원이라고 하거든요. ‘내가 수행자가 되겠다’고 발심하지 않고, 그냥 부처님 믿고 복만 빌고 그러면 그냥 일반 회원, 신자인 거고요.

그리고 한번 수행자가 되겠다고 발심했다면 수행은 의무가 됩니다. 신자일 때는 수행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고, 보시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고, 계율을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이지만 발심을 해서 수행자가 되겠다면 첫째, 계율을 지켜야 돼요. 안 지키고 어기면 반드시 포살(布薩)과 자자(自恣), 즉 참회를 해야 됩니다. 둘째, 매일 수행정진을 해야 됩니다. 정진을 안 하면 자격정지가 됩니다. 일주일에 1번은 꼭 법문도 들어야 해요. 1년 동안 참석률 통계를 내서 많이 빠진 사람은 또 자격정지가 됩니다. 셋째, 수행자는 승단을 유지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일정액의 보시를 정해 놓고 내야 합니다. 그걸 안 내도 자격정지가 됩니다. 신자로서의 자격은 정지시킬 수가 없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이런 시스템은 정토회가 수행자를 지향하는 모임이지, 일반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토회 설립 초기에는 그렇게 엄격히 구분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섞이기도 했어요. ‘신자는 나가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요. 기독교신자도 허용하면서 불교신자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신자도 포용은 하고 있지만 원래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됩니다.

수행자의 모임에서 회의를 할 때는 반드시 상가의 운영원리로 회의를 해야 합니다. 상가의 운영원리란 ‘소수의견의 존중’입니다. 다 평등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100명 중에 1명이 반대한다고 다수결로 결정하고 넘어가면 안 되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되는데, 만장일치제는 아닙니다. 만장일치로 해 버리면 소수의 횡포, 즉 1명이 끝까지 반대해 버리면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잖아요. 그렇다고 3분의 2, 다수결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결정할까요?

만약 10명의 멤버가 모여서 회의를 해 보니까 6명이 찬성하고 4명이 반대했다면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그냥 계속 회의를 해야 해요. 그런데 7명이 찬성하고 3명이 반대한다면 찬성의견이 3분의 2가 넘잖아요. 이게 절대 과반수예요. 이때는 3명이 소수자가 됩니다. 1차 표결을 해서 3 대 7이 됐다면 3이 소수자가 되니까 사회자가 소수자에게 ‘의견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어봐서 ‘철회하겠다’고 하면 결정이 납니다. 만장일치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장일치제이지요. 그러니까 3명이 ‘다수의견이 그렇다면 우리가 철회하겠습니다.’ 하면 결정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3명이 철회를 안 한다면, 다수라고 다 옳은 게 아니니까, 발언권을 누구한테만 주느냐? 소수자한테만 줍니다. 그래서 자기네 의견을 충분히 얘기하도록 하고 다시 표결에 부칩니다. 그런데 4 대 6이 돼버렸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앞서 논의는 아무 의미가 없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다시 표결을 했는데 8 대 2가 됐다면 두 번째 결정이 났잖아요. 그럼 역시 2가 소수의견이 됩니다. 그럼 또 사회자가 ‘의견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어봐서 ‘철회하겠다’고 하면 두 번째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철회를 안 하겠다고 하면 다시 소수자에게 발언할 기회를 줍니다. 충분히 얘기하도록. 그래서 만약 4 대 6이 됐다면 이건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또 8 대 2가 되거나 7 대 3이 됐다면 소수의견이 몇 번이나 연달아 나왔어요? 3번 연달아 나왔지요? 그러면 사회자가 이때 ‘철회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 상가구성원은 ‘철회하겠습니다’라고 답해야 돼요. 이해되세요?”

“(순례객들) 예.”

“그때 ‘아닙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상가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상가구성원이 된다는 건 뭐냐면 자기 의견을 3번까지는 낼 수가 있는데 다수대중이 원하면 자기 의견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수행자의 자격이 있는 거예요. 고집하면 이 사람은 멤버가 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경전에 나오잖아요. 아난존자에게 ‘부처님을 시봉하라’니까 아난존자가 두 번 거절한 뒤에 대중들이 세 번째로 요청을 하니까 그때는 승낙을 했지요. 그래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옳고 그른 걸 너무 따지면 안 되고, 대중의 의사를 존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만장일치예요. 이해되시죠?”

“(순례객들) 예.”

“이런 식으로 소수의견을 존중하면서 상가를 운영합니다. 왜냐? 10명의 멤버가 다 소중하기 때문에, 또 9명이 의견일치 했다고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회의가 항상 조금 길어요. 그래서 외부인들이 정토회 회의하는 걸 보고 ‘공산당이냐?’고 하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 회의는 결정을 목표로 의견을 제시해서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끝내버리는 게 아니다 보니까 좀 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삼의제(三議制), 즉 3번 의견을 듣는 제도예요. 이런 게 바이샬리에서 운영되는 원리를 수용한 거예요. 밧지족 침공과 관련된 일화에서도 나오잖아요.

‘그들이 자주 모이느냐?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기투합하느냐?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자주 모여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건 민주주의이지요. 의논해서 결정하는 건데, 우리는 내 의견이 안 받아들여지면 결정난 뒤에 ‘말은 네 말이 맞지만 기분은 나쁘다’고 생각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결론이 나도 실천력이 동반되지 않습니다. ‘네가 알아서 해라. 그래, 너 잘났다.’ 이러니까요. 그러니까 결론에 대해서는 반드시 의기투합해야 됩니다. 일단 결론이 나면 내 의견, 네 의견이 없이 결론이 바로 구성원 모두의 의견이 되어야 합니다. 삼의제와 같은 거죠.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이 있었던 거예요. 결정에 대한 의기투합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빛이 나지, 그게 안 되면 민주주의는 분열되거나 중우정치(衆愚政治), 즉 포퓰리즘(Populism)이 되기 쉽습니다.

인도는 공화정의 시원을 바이샬리로 보기 때문에 옛날에 인도 국회가 개원할 때는 바이샬리의 사리탑 앞 연못에서 물을 떠가서 개원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거기 투어리스트 방갈로(Tourist Bangalow)도 있었어요. 그만큼 바이샬리는 부처님, 그리고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질문하신 분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지 멋쩍게 웃으며 질문하셨는데 스님은 오히려 풍부한 내용의 답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세 분의 질문자가 남아있었는데 안개가 밀려와 더 진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스님은 내일 시간을 가지도록 하자며 법회를 마무리하였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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