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30분. 한창 잠에 취해 있을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국경을 통과해야 하는 날이어서 좀 서둘러 가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아 1, 4호차는 새벽3시, 그 다음은 3시 20분, 그 다음은 3시 40분으로 2대씩 20분간의 시간차를 두고 출발합니다.

스님은 가장 먼저 인도 국경을 통과해 네팔로 들어가 순례지인 룸비니에서 순례객을 맞이하는 것이 시간 지체 없이 일정을 진행할 수 있겠다는 스텝회의에서 제안으로 가장 먼저 국경을 통과하는 차량에 올랐습니다.

새벽 3시, 예정대로 차는 국경으로 출발하였고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차 안에서 올렸습니다. 안개길을 가르며 열심히 차가 달렸습니다. 4시간 뒤, 인도-네팔 국경인 소나울리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직원이 아직 출근 전이다, 담당 직원이 출근하려면 기다려야 한다, 한 사람씩 통과해야한다, 아니다 단체로도 가능하다 등 갖가지 이유들이 있은 다음, 한 사람씩 직접 여권을 들고 가야 가능한 것으로 진행되었습니다. 4호차 먼저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여권을 들고 가서 스탬프를 받고 다시 네팔 출입국 사무소로 가서 한 사람씩 과정이 마쳐지기를 기다렸습니다.

11시쯤 4호차 인원이 네팔 입국 수속을 마치게 되어 바로 룸비니로 출발하였습니다.

룸비니에 도착하여 주차장에서 점심 공양을 하였습니다. 어차피 다른 차량이 룸비니에 도착해야 하므로 여유가 있겠다 싶어 4호차는 명상, 절 등 정진 시간을 가지고 이어 도착한 1호차와 함께 사진촬영 시간도 가졌습니다. 룸비니에 도착해 스님은 10대의 차량이 모두 도착하였을 때를 준비해 400여명이 함께 예불 공양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봐두고 1, 4호 차량은 맨 안쪽에 자리를 깔고 준비하였습니다.



▲ 스님은 10개 차량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 두 개 차량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다음 팀이 도착하지 않자, 1, 4호차는 예불을 올리고 유적 설명을 충분히 한 후, 숙소로 들어가서 정비를 하도록 보냈습니다.

1시간 쯤 뒤, 두 개 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다시 예불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다시 룸비니에 도착한 팀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다시 룸비니에 도착한 팀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다시 1시간 쯤 뒤, 한 개 차량이 도착하였고 이어 다시 한 개 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두 개 차량을 묶어 함께 예불을 올리고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오늘은 룸비니를 거쳐 카필라바스투, 쿠단까지 참배를 하는 일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적관리 측에 문의해 보니, 마야데비 기념 관 안은 7시, 외부 유적은 8시까지 개방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한 개 차량씩,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미 6시를 넘어가고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상황이었습니다.

밝았을 때 도착한 팀들은 경전 독송도 하였습니다▲ 밝았을 때 도착한 팀들은 경전 독송도 하였습니다

6시 20분, 2호차량이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마야데비 관이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오니 먼저 마야데비 관을 둘러보고 와서 바로 예불과 유적 설명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6시 40분, 20분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이미 해가 지고 주변이 깜깜해져 사진으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10호 차량이 6시 46분, 뛰어서 도착하였습니다. 얼른 마야데비 관으로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나와 대열을 정비하였습니다. 이어 스님은 잠깐 명상을 한 뒤, 유적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여기가 룸비니 동산이에요.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정황에 대해 경전에는 굉장히 신비스럽게 기록이 돼있습니다.

마야데비 관 왼쪽에 400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두었지만 400여명이 다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야데비 관 왼쪽에 400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두었지만 400여명이 다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출생과 관계되는 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인 믿음,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역사적 사실’이란 실제로 부처님이 태어나신 모습이고, ‘종교적인 믿음’이란 부처님의 전생 얘기와 관련된 거예요.

부처님은 사실 인도에서 태어나셨지만 좀 비인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도인들은 믿음을 굉장히 중시해서 앞뒤 안 맞는 얘기도 많이 하는데, 부처님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잖아요. 그러나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하는 사람은 역시 인도인이니까 인도식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지요. 인도인들이 생각하기에 어떻게 사람이 6년 수행한다고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지,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도인들은 과거생으로부터 한량없는 수행공덕을 쌓았으니까 이 세상에 잠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생에 대한 많은 얘기가 부처님 사후에 생겨난 거예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그런 보살행을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중에 있는 재밌는, 짧은 옛날 얘기를 차용해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래서 이 ‘전생’ 스토리가 서로 연결되어있는 게 아니라 하나씩 다 독립되어있어요. 현재 547개가 남아있는데, 그 547개를 묶어놓은 경전을 빨리 어로 ‘자타카(JATAKA)’라 그러고, 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본생담’, 즉 부처님의 전생 얘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 출생의 역사적 사실은 뭐냐 하면, 부처님의 아버지가 정반왕인데, 아버지의 종족은 석가족, 인도말로 샤끼족이에요. 그러고 아버지의 나라이름은 카필라 바스투(Kapilavastu)예요. 근데 어머니의 종족은 꼴리족이에요. 나라이름은 데바다하(Devadaha)이고요. 꼴리족 여자는 석가족 남자한테 시집가고, 석가족 여자는 꼴리족 남자한테 시집가는 이런 결혼동맹관계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뒤쪽이 서쪽인데, 서쪽으로 28킬로미터를 가면 카필라 성이 나오고, 앞이 동쪽인데, 동쪽으로 28킬로미터 가면 데바다하, 천비성(天臂城)이 나와요. 그러니까 여기가 그 중간쯤 위치예요. 땅은 카필라 성 땅이고요.

스님은 모임 장소를 아쇼카 석주 앞으로 옮기고 명상하며 대중을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모임 장소를 아쇼카 석주 앞으로 옮기고 명상하며 대중을 기다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하마야 데비((Mahamaya devi) 사이에서 태어나셨는데, 인도말로 ‘데비’란 부인이란 뜻이에요. 인도 당시에는 보통 15, 6세에 결혼해서 18, 9세에 첫 애기를 낳았는데, 마하마야 부인은 40이 되도록 애기가 없었어요. 거의 애기가 없을 확률이 높았는데, 40이 넘어 애기가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애기를 낳게 되기를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날은 축제날이라서 보시도 많이 베풀고, 몸도 정갈히 했어요. 그러다가 살포시 잠이 들었는데,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서 나와 보니까 저기서 빛이 반짝반짝 하며 다가오는 거예요. 뭔가 싶어서 이렇게 보니까 상아 6개짜리의 흰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 하는 사이에 코끼리가 마하마야 부인의 오른쪽 갈비뼈를 헤집고 확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깨보니 꿈이었어요. 태몽이었지요. 코끼리 태몽을 꾸고 부처님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안개가 밀려왔습니다. 안개 속에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안개가 밀려왔습니다. 안개 속에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547가지 본생담 가운데에는 원숭이 왕으로 태어났을 때, 코끼리 왕으로 태어났을 때, 수행자로 태어났을 때 등 온갖 얘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게, 연등부처님이 계시던 시절에 ‘선혜’라고 불리는 한 수행자가 부처님께 발심을 해서 출가하는 얘기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너는 미래세에 부처를 이루리라. 너의 이름을 석가모니불이라 하리라’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게 전생 얘기 중에 첫 번째 얘기라고 보고 있고, 547개 중에 마지막은 뭐냐 하면, 꼭 순서가 있는 건 아닌데, 수많은 공덕을 쌓아서 욕계의 네 번째 천상, 도솔천의 천주가 됐어요. 그래서 부처님을 ‘하나님 중에 하나님’이라는 건데, 어쨌든 도솔천의 천주 이름은 ‘호명보살’이에요. 거기 있을 때 세상에서 ‘부처가 출현할 시기다.’ 하니까 천인들이 ‘부처가 출현한다면 그건 호명보살밖에 없다’ 해서 ‘호명보살이여, 부처로 출현하소서.’ 이런 천인들의 요청이 있었어요. 그래서 호명보살이 세상을 쫘악 보면서 ‘어떤 어머니의 몸을 빌릴까?’ 하다가 ‘마하마야 데비의 몸을 빌려야 되겠다’며 코끼리로 변해서 갈비뼈를 뚫고 들어가는 전생 얘기가 거기 나오고, 현생 얘기는 태몽을 꾸는 걸로 나오고, 이렇게 해서 이게 연결이 돼있습니다.

어두워지자 보리수 나무의 조명이 더 밝게 빛났습니다▲ 어두워지자 보리수 나무의 조명이 더 밝게 빛났습니다

어쨌든 마하마야 부인은 애기 낳을 때가 되자 당시 풍속에 따라 친정으로 가서 애기를 낳으려고 아침 일찍 동이 트자마자 데바다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 중간쯤인 이곳 룸비니에 정오쯤에 이르렀는데, 그때 아쇼카나무에 아주 아름답게 꽃이 피어있어서 마하마야 부인은 ‘좀 쉬었다 가자’며 가마에서 내려서 그 꽃구경을 하려고 오른손을 들어서 꽃가지를 잡으려는 순간에 산기를 느끼고 애기를 낳았다는 거예요. 그때 남편이 있었으면 남편 바짓가랑이를 잡았을 텐데 남편이 없어서 나뭇가지를 잡고 용을 썼다고 이해하셔도 되지요. 어쨌든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셨고, 길에서 도를 이루셨고, 길에서 설법하셨고,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도(道), 즉 길과 인연이 있었던 거예요.(모두 웃음)

그런데 태어나실 때의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있지요.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천왕들이 황금그물로 받았고, 용왕이 더운 물, 찬물로 몸을 씻기자 몸이 황금색으로 빛났고, 그러자 아기는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었고,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고, 또 한 손은 하늘,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했다는 게 태어나실 때의 정황이지요.

‘부처님처럼 위대한 분이 어떻게 여자의 사타구니로 태어날 수 있겠느냐? 당연히 옆구리로 태어나지.’ 이런 게 신앙적 믿음 아니겠어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거랑 같지요. 그런데 믿음으로 볼 때는 그렇게 말하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는, 신의 입에서는 브라만이라는 계급이 창조됐고, 신의 옆구리에서 왕족이 창조됐고, 신의 배에서 바이샤가 창조됐고, 신의 발바닥에서 노예계급 수드라가 창조됐다는 내용과 비교해 보면 부처님께서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건 왕족 출신임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 했는데, 여섯 발자국은 육도윤회를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넘어서 해탈했다는 걸 상징합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룸비니 유적지 안에는 우리들 일행 밖에 없었습니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룸비니 유적지 안에는 우리들 일행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의 일생을 보면, 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셨잖아요.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천하는 인간의 세계를 말해요. 그러니까 ‘신들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존귀한 존재다’ 하는 말은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다’는 말과 같고,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도 같은 말이에요. 다 ‘신들과 사람을 통틀어서 부처님과 비교할 분이 없다. 가장 존귀한 분이다’라는 얘기예요. 이건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상징이지요. 이걸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표현하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일성으로, 부처님의 삶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마야 부인은 친정에 갈 필요가 없어서 도로 카필라 성으로 돌아갔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첫 애기를 너무 나이 들어서 낳으면 좀 위험합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노산이라 돌아가셨다고 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보면 성인을 낳았기 때문에 한 알의 밀알이 썩듯이 진을 다 뺐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마야 부인이 40이었으니까 둘째 동생은 서른일곱 살쯤이고, 셋째는 서른다섯 살쯤이고, 이럴 거 아니에요? 옛날엔 10명씩 낳았으니까, 부인의 막내동생이 아직 시집을 안 간 거예요. 시집을 안 갔다는 건 20살 이하라는 걸 뜻하지요. 그래서 언니가 죽은 후 그 막내 동생인 마하파제파티가 정반왕과 결혼을 한 거예요. 우리에게는 좀 이상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매가 한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라시대에도 그랬어요. 김춘추는 김유신의 두 누이동생과 모두 결혼을 했잖아요.

새벽 4시에 출발해 네팔 입국 절차를 거치는데 하루 종일을 보내느라 지친 대중들에게 스님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맞이하였습니다.▲ 새벽 4시에 출발해 네팔 입국 절차를 거치는데 하루 종일을 보내느라 지친 대중들에게 스님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라고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커서 새 어머니를 맞으면 영향을 받지만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됐고, 또 이모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말하는 계모의 차별 같은 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경전에도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양모로서 부처님을 참 잘 키운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애기가 자라니까 이름을 지어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모든 것이 원만성취 하여지이다’란 뜻으로 살바다라 싯다르타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시타 선인(仙人)을 불러서 관상을 보게 했더니 선인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길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리라. 그런데 부처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은데, 나는 이미 120살이라서 그 미묘한 법문을 듣지 못할 것이 아쉬워서 운다’면서 자기 시자(侍子)에게 ‘너는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면 바로 가서 제자가 돼라’고 했답니다.

그러면 이런 얘기는 왜 나올까요? 당시 인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였어요.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에 16대국이 있고, 그 다음에 2대 대국이 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세계에는 200개의 나라가 있고, G20개의 중강국이 있고, 그 다음에 G2, 옛날에는 미.소, 요즘에는 미.중이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합병해 가는 상태예요. 그래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부처님 열반 200년 후에는 아쇼카 왕이 전 인도 대륙을 하나로 통일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라가 나라를 침공해서 합병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고, 형제 100명을 죽이고 왕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렇게 세상이 혼란스러우니까 백성들의 염원은 ‘세상의 평화’였어요. 위대한 왕이 나와서 세상을 하나로 평화롭게 한다고 해서 전륜성왕이라 그럽니다.

저녁 6시 48분, 마지막으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다섯 번째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저녁 6시 48분, 마지막으로 도착한 팀과 함께 스님은 다섯 번째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중국의 백가쟁명, 제자백가처럼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는데, 주류인 전통사상가들이 만든 브라만이고 신흥사상가 들이 사문입니다. 사문은 비주류이죠. 부처님은 비주류에 합류해서 수행을 시작하셨잖아요? 그런데 이 수많은 사상가들의 주장이 서로 달랐어요. 경전에만 보아도 육사외도(六師外道)가 있잖아요. 경전에 보면 62 견해가 있고 360 견해가 있거든요. 바로 이럴 때 이 사상을 통일할, 일체를 깨달은 이인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전륜성왕의 길을 간 게 아니라 붓다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고행할 때도 마왕이 항상 부처님께 뭐라며 유혹했습니까? ‘너 이 고행 안 하면 전륜성왕의 길을 갈 수 있는데, 왜 이 고생을 하느냐’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당시 세속에서는 ‘전륜성왕’, 사상계에서는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붓다’로서 응답을 하셨다고 볼 수 있어요. 비록 부모는 전륜성왕의 길을 원했지만요.

오늘 우리가 늦어도 여기에 낮 1시 반까지는 와서, 카필라 성으로 가서 부처님의 어린 시절 얘기도 하고, 동문에 가서 ‘출가의 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전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올 때마다 새로운 일이 생긴다고 그랬지요?

성지순례 25회 만에 처음 생긴 일이에요. 처음부터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4, 5시간을 잡아놨거든요. 그런데 실제 몇 시간이 걸렸습니까? 아침 8시 반, 9시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엄청난 시간이 초과되었어요. 그제는 또 우리 실무자가 절에 방 점거하러 갔다가 개한테 물리는 일도 있었어요.(모두 웃음) 그것도 25회 만에 처음 생긴 일이에요. 매회 이렇게 항상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 생깁니다. 기차가 연착하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해도 전에 480명이 왔을 때 보다도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두운 룸비니 유적지에서 마야데비 관과 아쇼카 석주의 조명이 마지막 도착한 성지순례팀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어두운 룸비니 유적지에서 마야데비 관과 아쇼카 석주의 조명이 마지막 도착한 성지순례팀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일정에 있던 가야산을 못간 일이 있어서 이튿날 보충했지요?”(모두 웃음)

“(순례객들) 예.”

“그래서 내일 카필라 성을 보아야 하니 설산을 포기할까요?”

“(순례객들) 설산도 봐요.”

“욕심도 많네요.(모두 웃음) 그럼 자정에 일어나야 해요.(모두 웃음) 하기야 가면서 자니까요. 자,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래도 예불 공양은 올리고 가야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부처님의 탄생성지 룸비니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경전독송은 내일 하겠습니다. 지금 밤이라 글씨가 안 보이니까요.”

“(순례객들) 예.”

스님의 밝고 힘찬 목소리가 듣는 순례객들의 지친 마음을 밝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 태어나신 룸비니에서 스님은 다섯 번의 예불과 4번의 경전 독송을 하였습니다. 지루하고 지칠만 한데 시간이 늦어질수록 스님 목소리가 밝아지고 힘찼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참 수고 많았어요.”하는 그 말.

스님은 마지막 10호차 청년들과 함께 어두워진 아쇼카 석주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얼굴이 안 보이는 걸 감안해서 아쇼카 석주 조명이 얼굴 빛이 향하도록 서서 함박 웃음을 웃으며 사진을 찍었지요.

아쇼카 석주의 조명으로 마지막 도착한 10호차 청년들과 스님은 함박웃음을 웃으며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쇼카 석주의 조명으로 마지막 도착한 10호차 청년들과 스님은 함박웃음을 웃으며 조별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일정은 오직 룸비니만을 위해 있었던 일정이었습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정이었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글 문수팀
녹취 정란희
사진 배성하, 문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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