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계속되는 안개에 이제는 아침에 단단히 옷을 챙겨 입게 됩니다. 4시 20분, 송수신기의 아침인사가 시작되기 전에 스님은 먼저 일어나 숙소에서 아침 예불과 기도를 올렸습니다.

4시 50분이 되자, 차량별로 인원 점검이 시작되었습니다. 송수신기에서 1호차부터 차례로 인원점검 내용을 알렸습니다. 각 차의 차장님들이 하루하루 일과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송수신기 사용이 영 어색해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던 4호차 차장님도 이제는 여러 번 연습이 되어 “4호차, 34명 전원탑승!” 하는 알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5시, 1, 4호차가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먼저 하였습니다. 1시간 동안 기도가 끝나자 휴식 안내가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출발 준비하느라 잠이 올만도 한데,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달려가는 차가 걱정되어서 몇몇 분은 잠을 청하지도 못 하는가 봅니다. 특유의 경적 소리를 내며 달리던 차가 한 시간 반가량 뒤, 멈춰 세운 곳은 오늘의 첫 순례지, ‘케사리아 탑’ 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탑, 케사리아 탑은 안개에 가려 그 위용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도착한 4호 차량의 순례객들과 함께 한 줄로 서서 정근을 하고 조용히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뒤 이어 도착한 순례객들이 먼저 돌고 있는 탑돌이 행렬을 이어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였습니다.


420여명의 순례객이 한 줄, 한 팔 간격쯤으로 돌고 돌고 돌아도 그 둘레를 다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둘레가 424미터, 현재 높이는 16미터, 원래 돔의 높이를 51미터 정도라고 추정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시나라로 마지막 여정을 하려는 붓다를 리차비족들은 계속 뒤 따라갔습니다. 존경하는 붓다를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었지요. 붓다는 그들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붓다가 칸타키 강을 건너 간 후에도 그들은 강 언덕에 서서 붓다를 배웅하자 부처님은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물에 띄워 강 저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이 스투파는 붓다께서 발우를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순례객 전체는 탑을 바라보며 예불을 올린 뒤 조용히 돌아나왔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음 순례지인 쿠시나가르 ‘춘다의 공양터’로 향했습니다. 케사리아 탑을 지난 지 20여분 쯤 뒤, 칸타키 강을 지나 갔습니다.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하기 전, “동네가 험하니 앞 사람과 간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주의사항이 안내가 되었습니다. 마을을 통과하는 좁은 골목으로 걸어갔습니다. 400여 명의 인원은 길게 줄을 늘여서 조용히 ‘춘다의 공양터’에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현재 동네 사람들의 신성구역으로 가꿔지고 있는 힌두 사원 구역을 밟지 않도록 하되, 순례객들이 자리를 펴고 예불과 경전 독송을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황금색 가사를 수한 순례객 400여명이 ‘춘다의 공양터’를 가득 메우자 동네 사람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몰려왔습니다.

예전에 공양물을 차렸다가 예불도중에 아이들이 공양물을 덮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공양물을 따로 차리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파바마을에 있는 춘다의 공양터입니다. 이렇게 큰 탑을 세워서 춘다의 공양을 찬탄한 겁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께서는 인도전역을 유행하시다가 성도 후 45년, 세상나이로 80세 되던 해에 왕사성 영축산에서 출발하셔서 죽림정사를 거치고, 암라티카 동산을 거치고, 날란다를 거치고, 파탈리푸트라를 거쳐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 땅으로 들어오셔서는 암나빨리의 공양을 받으시고 바이샬리에서 그해 우안거를 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우안거 기간에 큰 병을 앓으셨고, 낡은 수레가 삐그덕거리며 겨우 가듯이 늙은 육신을 이끄시며 쿠시나가라를 향해 한 발, 한 발 북상하셨습니다. 바이샬리에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하시고,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자등명(自燈明),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법등명(法燈明)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중을 끌고 바이샬리를 떠나서 오늘 우리가 건너온 칸타키 강을 건너셨어요. 칸타키강을 건널 때 바이샬리 사람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강변에서 떠나지 않자 부처님께서는 증표로써 가지고 계시던 발우를 물에 띄워 강 저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처님이 건너셨던 것보다 조금 더 상류 쪽으로 해서 다리를 건너 강을 건넜습니다.

이후 부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거쳐서 이곳에 도달하셨습니다. 이곳의 지금 이름은 파질나가르(Fazilnagar)인데 당시엔 파바마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파바마을에 이르러 망고나무 숲에 앉아계시는데 그 망고나무가 대장장이 아들 춘다의 소유였습니다. ‘대장장이의 아들’이란 천민이라는 얘기입니다. 춘다는 부처님께서 자기 망고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위해 법을 설하셨고, 춘다는 그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그 기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부처님께 ‘내일 아침에 부처님과 승중들을 다 식사초대하겠나이다.’ 이렇게 공양초대를 했더니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습니다. 춘다가 떠나고 아난다가 걱정스럽게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춘다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특히 올해는 흉년이 들어서 부자도 이 승중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못하는데 어찌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공양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아난다여, 너무 걱정하지 마라. 춘다는 능히 할 것이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때가 되었사옵니다’ 하고 알리니 부처님과 제자들은 발우를 들고 춘다의 집으로 갔는데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져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다 놀랐습니다. 부처님부터 시작해서 발우에 음식을 담는데 그 중에 한 음식, 스카라 맛다바(sukara maddava)라는 음식을 부처님의 발우에 담을 때 부처님께서 보시고

‘춘다여, 이 음식은 아무도 소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 대중들에게는 주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 음식은 누구도 소화시킬 수 없으니 저 흙을 파고 묻어라.’

‘알겠습니다.’

공양이 끝난 후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격려하는 설법을 하시고는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배가 몹시 아프구나. 어서 길을 떠나자’라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몹시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대중들이 걱정했습니다. 얼마 가자 부처님께서 ‘좀 쉬었다가 가자. 배가 너무 아프다’ 하셔서 잠시 쉬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목이 몹시 마르구나. 물을 좀 다오.’ 하시니까 아난다는 ‘부처님 조금만 더 가면 카쿳타강이 나오는데 거기 물이 아주 맑습니다.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지금 개울물은 흐려져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조금 후에 또 ‘아난다여, 목이 몹시 마르구나. 물을 좀 다오.’ 하니까 아난다는 다시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물이 몹시 흐려져 먹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가면 카쿳타강이 나오니 그 맑은 물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물을 좀 다오.’ 그래서 아난다는 발우를 들고 작은 개울로 갔다가 놀랐습니다.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서 물이 흐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요청을 2번이나 거절했는데 막상 냇가에 가보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거든요. 아난다는 참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물을 떠와서 부처님께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을 드시고 원기를 회복하셔서 다시 일어나 사자처럼 당당히 대중 앞에서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카쿳타 강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목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물으셨습니다.

‘지금 춘다는 어떤가?’
‘춘다는 몹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은 어떤가?’
‘대중들은 춘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부처님을 몹시 아프게 했기 때문에 아무런 공덕도 없다며 춘다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면 점잖은 표현이고 솔직히 ‘자기 처지를 좀 알지. 식량이 없으면 공양을 올리질 말지, 부처님께 아무 거나 드려가지고 병이 나시게 하다니. 저러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래?’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겠지요. 물론 수행대중이니까 점잖게 ‘춘다는 아무런 공덕도 없다’라고 말했다고 경전에 기록돼있습니다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앞으로 오라고 하셔서 옆에 앉혀놓고 아난다에게 물었습니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여래에서 올리는 공양이다.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 중에서도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무상정등정각을 얻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

이게 뭡니까? 수자타의 공양이지요. 수자타의 공양은 이미 유명한 공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난다여, 그와 똑같은 공덕이 있는 공양이 있으니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

그 마지막 공양이 결국 누구의 공양입니까? 춘다의 공양이지요. 그러니까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춘다가 부처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며 춘다가 마치 기독교의 가롯 유다처럼 될 소지가 있었는데, 부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춘다는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자가 되어서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수자타와 더불어 ‘2대 공양’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이 이렇게 탑을 쌓고 춘다의 공양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이것이 여래의 위신력입니다.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 토해 버릴 수도 있고,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고, 독성이 있는 줄 미리 알고 안 먹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신통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을 수 있지만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그 음식을 올린 자를 걱정해서 그를 편안히 하고, 세상 사람이 그를 비난할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 법문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춘다는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공양을 올린 건 아니었으니까요.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였지만 결과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 ‘스카라 맛다바’는 어떤 음식일까요? ‘스카라’가 돼지라는 뜻이라서 돼지 버섯, 돼지 고기라고 해석하는데 돼지 감자처럼 야생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뱅갈어로 ‘맛다바’가 토란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니, ‘스카라맛다바’는 야생토란이라고 볼 수 있어요.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은 야생의 풀뿌리를 많이 캐어 먹잖아요. 춘다는 천민이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먹어왔을 거예요. 그래서 자주 먹어본 사람들은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토란은 약간 독성이 있는 식물이잖아요. 특히 야생토란은 더 하겠지요. 당시 부처님의 건강도 좋지 않으셨으니까 아마 야생토란의 독성이 급성식중독을 일으킨 것 같아요.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피가 섞인 대변을 보셨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꼭 이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다기보다는 거의 돌아가실 때가 된 연세에 마침 또 이런 음식을 드셔서 열반에 드시게 되었다고 봐야 되겠지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런 걸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째, 아무 것도 없는 춘다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공양을 올린 것을 봤을 때, 우리도 춘다 같은 마음을 내어서 아무리 없다 해도 무슨 공양이든 올릴 수 있다는 마음을 내야 되겠지요? 물질만 아니라 봉사도 공양이니까요. 두 번째,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했지만 춘다의 공양은 오히려 부처님을 위대하게 했습니다. 붓다의 인격, 붓다의 위신력을 더 높인 사건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셨어도 이런 마음을 내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붓다를 더 위대하게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예불과 경전 독송을 마치고 스님은 ‘춘다의 공양’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춘다의 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기리는 탑 앞에서 듣는 ‘춘다의 공양’의 그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부처님의 한량없는 마음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스님은

“서두르지 말고 조용히 한 줄로 걸어 나가 주세요. 우리가 바쁜 마음을 내고 서두르면 이 곳 사람들도 같이 부산하게 됩니다. 한 줄로 차례로 조용히 걸어가나면 이들도 들뜨지 않을 겁니다.”

400여명의 순례객은 스님의 이야기를 수신기를 통해 들으며 한 줄로 조용히 골목길을 따라 나왔습니다. ‘상대 때문에~’하고 탓을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내 안으로 돌려’ 나로부터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을 갖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한 후, 일행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하시고 춘다에게 설법하셨다는 카쿳타 강으로 갔습니다. 카쿳타 강물은 지금도 맑았습니다. 강물에 손을 담근 후 강변에서 아침 공양을하였습니다. 아침 공양 후, 열반당으로 향하였습니다. 열반당 앞에서 가사를 수하는 마음이 떨려왔습니다. ‘이 곳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 사라쌍수 그늘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그 곳이구나.’ 벌써부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넓은 열반당을 400여명의 순례객은 천천히 돌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르(Kushinagar), 열반당입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탑, 저것이 부처님의 열반을 기념하는 탑이고요, 지붕이 둥근 건물에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모셔져있습니다. 그러고 부처님의 사리탑 오른쪽으로 허물어진 탑, 저것이 아난다의 탑입니다. 저 열반당 앞에 잎이 약간 누런, 아주 잎이 넓은 나무가 있지요? 저것이 사라수(沙羅樹, sala tree)입니다. 이 지역에는 사라수 숲이 아주 많습니다. 보리수는 둥그렇게 크기 때문에 한 나무 밑에 그늘이 있는데, 사라수는 위로 크는 나무이기 때문에 한 그루가 그늘을 이루기 어려워요. 그래서 수행자들은 사라수숲에 들어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라쌍수 사이에 자리를 깔았다’는 말이 경전에 나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부처님께서는 파바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카쿳타 강으로 오셔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후 그날 저녁 무렵에 이 쿠시나가르의 숲에 도착하셨습니다. 사라수가 빼곡한 숲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일 네팔에 가면 사라수 숲이 우리나라의 미루나무 숲처럼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저 나무가 가구용으로 좋거든요. 어쨌든 부처님께서는 사라수 숲속으로 들어가셔서 아난다한테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 자리를 깔라고 말씀하셨어요. 부처님이 입고 계시던 가사를 4겹으로 접으면 한 사람이 누울 정도의 크기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눕는 모습이 어땠느냐 하면,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왼발은 약간 구부려서 포개고 사자처럼 누우셨다고 기록돼있습니다.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면서 누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당에 들어가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경전에 묘사되어있는 것과 똑같은 모습의 열반상이 누워있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누우시고 부처님께서는 ‘오늘 저녁에 내가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면서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귀인이 오면 꽃을 뿌려서 환영하는 문화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수자타아카데미에 가면 아이들이 우리한테 꽃을 뿌려주는 거예요. 아무튼 부처님께서 그렇게 선언하시자 사라수가 학처럼 하얘졌다고 합니다. 사라수 잎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는 게 아니라, 사라수꽃이 필 때가 아닌데도 피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아난존자가 그런 기이한 현상을 보고 매우 놀라서 부처님께 여쭸더니 부처님께서는 ‘하늘의 신들이 부처님의 열반을 맞아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이 꽃과 음악을 공양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그런데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부처님다우신 말씀이시지요? 아무리 기적 같은 공양을 올린다 해도, 그것은 수행자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인도사람들은 뿌자(Puja)할 때 귀한 향을 피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불할 때 거기에 빗대어서 ‘오분향 예불문(五分香 禮佛文)’을 하는 것입니다. ‘계향(戒香)’이란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향기, ‘정향(定香)’이란 선정을 닦는 향기, ‘혜향(慧香)’이란 지혜를 증득한 향기, ‘해탈향(解脫香)’이란 해탈을 증득한 향기,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향기를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귀한 향이 아니라 그런 5가지 수행의 향을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는 거지요. 열반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런 예불형식이 나온 거예요.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나는 이곳에서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겠다. 그러니 저 쿠시나가르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전해라. 여래가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드니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와서 친견하라고 알려라.’
‘부처님이시여, 왜 하필 이곳입니까? 부처님의 제자와 재가신자가 많은 바라나시도 있고, 쉬라바스티도 있고, 왕사성도 있는데, 왜 하필 이 외진 쿠시나가르입니까?’
‘아난다여, 그런 소리하지 마라. 이곳은 먼 미래에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고귀한 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숲입니까? 저 쿠시나가르 성 안으로 가셔서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열반에 드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난다여, 그런 얘기하지 마라. 누구나 여래를 친견하고 싶다면 다 올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부처님께서 성안의 왕궁으로 가서 열반에 드신다면 천민들은 부처님을 뵙고 싶어도 뵐 수가 없잖아요. 짐승들도 올 수가 없고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 걸림 없는 열린 공간인 숲에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신분계급, 남녀노소 차별 없이 누구나 다 올 수 있도록 하신 거예요. 아난다는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돌아와서는 너무나 슬퍼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아난다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의 곁에 남아있으리라. 여래의 가르침인 계를 너의 스승으로 삼아라. 그리고 너는 지난 25년 동안 입안의 혀처럼 나를 잘 시봉했느니라.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하라.’

‘부처님이시여,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수행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사성지(四聖地)를 생각하라. 사성지를 순례하며, 이곳에서 여래가 태어나셨다. 태어나실 때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여래가 도를 이루셨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다. 그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열반의 모습은 이러하다.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그는 수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가 발우공양을 할 때 읽는 경이 소심경(小心經)입니다. 그 첫 구절이 이렇습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타, 설법바라나, 입멸쿠시라.’ 발우를 펴면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거지요. ‘부처님은 카필라성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시었고, 부처님은 마가다국 보드가야에서 도를 이루셨고, 부처님은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시었고, 부처님은 쿠시나가르 사라숲에서 열반에 드시었네.’ 이렇게요. 그래서 우리도 지금 이렇게 순례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어서 아난다는
‘부처님, 우리는 늘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수행을 했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수행, 정진해 왔는데 부처님이 안 계시면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사념처에 의지하라.’ ’

사념처(四念處)라는 것은, 관신부정(觀身不淨), 몸이라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관수시고(觀受是苦), 우리가 기분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괴로움의 뿌리다. 관심무상(觀心無常), 마음이라는 것은 늘 일어나고 사라지는 등 변화무쌍한 것이다. 관법무아(觀法無我), 존재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 이 네가지를 의미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바로 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아난다가 의문이 있는 것들을 여쭈면 하나씩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중생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서 큰 공덕을 쌓는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면 중생은 그런 큰 공덕을 쌓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공양이 네 가지가 있느니라. 첫째는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병든 이에게 약을 공양하는 것이고, 셋째는 가난한 이를 돕고 외로운 이를 위로하는 것이고, 넷째는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이게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이십니다. 우리 제이티에스(JTS)의 이념이 3가지인데, 부처님의 이 마지막 말씀 중에서 3가지를 뽑은 것입니다. 그것이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합니다. 병든 이는 치료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때에 배워야 합니다.’ 이것인데, 이것을 인도주의 원칙에 맞추면 옮기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가 기아, 둘째가 질병, 셋째가 문맹에 대한 것이 되지요. 그래서 기아, 질병, 문맹퇴치기구가 Join Together Society, 즉 JTS입니다. 인종, 종교, 민족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위 세 가지에 해당되는 사람은 도움 받을 자격이 있고, 이 세 가지를 돕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함께 일할 수가 있도록 한 겁니다. 그래서 ‘함께 만나서 일하자’는 의미에서 Join Together Society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Jungto Society와 이니셜이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정토회, 밖으로 나가면 JTS로 불리는 겁니다.”

스님은 다시 한 번 부처님의 열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이어 열반당에 함께 갔습니다. 400여 명이 들어가기에는 좁은 열반당이었지만 발디딜 틈이 없어도 조금씩 원을 그리며 행렬은 모두 함께 열반당에 들어가 예불을 올리고 발원문을 읽었습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 성문스님네께 지성귀의하오며 발원하옵나니,
저희 한국에서 온 정토행자 대중 일종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르나트, 보드가야, 라즈길, 바이샬리를 거쳐
이곳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에 이르러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고 공양 올리며 예배하오며
부처님을 길을 따르고자 발원하오니
오늘 이와 같이 순례하고 발원한 인연공덕으로
이 순례대중들이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순례한 인연공덕으로 육근은 강건하고 정신은 영롱하여 자비와 복덕이 구족하고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그런 복덕자가 되게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순례한 인연공덕 한반도에 회향하오니
이 공덕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대화하고 화해하여 통일이 속히 오도록 발원하옵나니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순례한 인연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유주, 무주 모든 고혼들도
다함께 왕생극락하여지이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열반당을 나와 스님은 대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교화, 설법하시다가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그런 부처님께 아들 대학 가는 것까지 부탁해야겠어요?(모두 웃음) 이제 그러지 마세요.”

“(순례객들) 네.”

“우리 일은 누가 알아서 해야 합니까?”

“(순례객들) 우리가.”

“예,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해요. 한반도의 평화라든지 우리의 힘만으로 좀 부족하다 싶은 것, 공익을 위한 것까지도 부처님께 부탁하기보다는 ‘우리가 하겠습니다. 이제 안온하게 계십시오.’ 이래야지요.(모두 웃음)
늙은 부모한테, 80 먹은 노인한테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제자라면 ‘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부처님, 편안히 계십시오. 이제 남은 일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고, 전법하는데 필요한 일들은 우리가 부처님의 분신이 되어서 하겠다’는 큰 원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순례객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열반당에서 조금 더 시간을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정진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부처님 열반하신 그 그늘에서 부처님 마음을 좀 더 느껴보기로 말입니다.
각자 일정을 가진 후 다시 차량을 타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인 ‘라마바르 총’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시신을 다비했습니다. 원래 쿠시나가르 말라족 족장의 대관식을 하던 곳이었으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자기 나라에서 제일 성스러운 곳인 여기에 부처님의 다비장을 차리고 전륜성왕과 같은 장례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아까 지나온 카쿳타 강물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하신 물이고, 이 히란야바티 강물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신 물입니다. 이 물은 아까 열반당 옆으로 해서 이렇게 흘러 내려와서 또 이렇게 흘려 내려갑니다.


히란야바티강을 한 번 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문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울타리를 돌아가면 사당 같은 게 있는데, 그 뒤에 강변이 있습니다. 지뢰(똥)가 많으니까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폭이 한 10여 미터 되는 조그마한 개울입니다.”

라마바르총에서 저녁예불과 경전 독송을 마치고 순례객은 모두 히란야바티 강으로 갔습니다. 작은 개울에 불과했지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다비장이 있었던 곳, 부처님의 마지막 목을 축였던 이곳이 그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스님은 ‘다 함께 사진찍자’ 고 제안하여 400여명의 얼굴이 그득하게 담긴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국 절인 ‘대한사’에 들러 참배하고 주지스님을 뵈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일정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바삐 일정에 좇아가던 마음들이 차분하게 될 무렵일 뿐인데 순례 일정은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까지 가 본 오늘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글 문수팀
사진 배성한, 문수팀
녹취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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