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송수신기의 아침인사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스님은 숙소에서 아침 예불과 기도를 하고 칠엽굴에 오르기에 간편한 복장으로 나섰습니다. 칠엽굴로 오르는 입구 앞에 도착하고 보니 청년들이 탄 10호 차량과 5호 차량이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해 뜨기 전이라 주위가 어두웠지만 손전등을 켜지 않고 어스름한 빛에 눈을 적응하여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지금까지 성지순례 동안 새벽에 칠엽굴로 가는 것은 없었던 경우라, 새로운 기분이라고 선주 법사님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한 낮에 그늘 없이 계단길을 40분 정도 걸어가야 해서 매번 칠엽굴에 다녀오면 땀으로 범벅이 되기 일쑤였는데 새벽 일정으로 조용하게 산책을 하듯 가는 것도 좋은 것 같았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부터 차례로 칠엽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도록 하고 안쪽부터 차례로 자리를 잡도록 하였습니다. 스님도 바위 위에 적당하게 자리를 마련해서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일곱 장의 나뭇잎사귀처럼 되어있는 동굴이라고 해서 칠엽굴(七葉窟)이라고 합니다. 인도말로는 ‘삽타파르니 굽타(Saptaparni Kupta)’라고 합니다. 지금은 오래 되어서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는 낮아서 엎드려서 기어들어가야 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들어가면 안에 조금 더 넓은 데가 나와요. 저쪽은 거의 다 무너져서 입구는 넓은데 안은 거의 다 막혀있습니다.
어제 저희가 걸어온 종착지, 손반다르 굴이라고 있었지요? 칠엽굴은 자연동굴이고, 손반다르 굴은 인공동굴입니다. 인공적으로 파거나 조각을 해서 거기서 수행하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이곳은 왕사성으로 말하면, 외성 밖, 성 밖이니까 외진 곳이지요. 그러니까 수행자들이 당시에 이런 곳에 머물렀다 그래요. 우리 인원이 420명 정도 되는데 지금 앉은 자리에 빈 공간이 좀 있네요. 당시 수행자들은 하루에 한 끼 먹어서 말랐기 때문에 여기에 500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었겠지요?”

“(순례객들) 예.”

“예. 여기는 부처님이 정진한 곳은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이 출가하셔서 가야로 가기 전에 여기서 스승을 만나서 수행할 때는 아마 이 산에 올랐을 거예요. ‘판다바 산에서 내려왔다’ 하는 기록이 있으니까 부처님이 여기를 방문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이 부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곳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29살에 출가를 하시고 35살에 깨달음을 얻으셔서 붓다가 되신 후로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교화하러 다니셨는데, 그렇게 유행을 하시다가 우리가 내일 가게 될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지요. 열반에 드실 때 많은 제자들이 스승이 떠나시는 것에 대한 굉장한 슬픔과 허전함을 맛봤습니다. 그런데 일부 젊은 승려들 중에서는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스승은 늘 ‘그건 해야 된다. 그건 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말을 하게 마련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더 이상 안 들어도 되니까 좋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제자가 많다 보니까 온갖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출가할 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입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요.

어쨌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마하가섭존자가 굉장히 우려했다고 합니다. 스승이 돌아가시자마자 벌써 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면 온갖 사람이 다 나올 거 아니겠어요? 제 멋대로 행동하면서 ‘부처님이 나한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하셨다’고 다 내세운다면 증명할 길도 없잖아요. 그래서 ‘붓다의 교법을 후대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서 결집을 해야 되겠다’, 즉 ‘법문을 다 모아서 편집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붓다가 열반에 드시고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처님께서 지금껏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가 다 정리해보자’고 마히가섭존자가 제안하자 전부 동의를 했습니다.
보통 부처님의 10대 제자라고 하면 ‘지혜제일 사리불, 신통제일 목건련, 두타제일 마하가섭...’ 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분들은 부처님 생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남은 제자 가운데 수행력도 가장 높고, 사람들로부터 덕망도 두텁고, 부처님 생전에도 인정받은 가장 대표적인 분이 마하가섭존자인데, 대중들은 이 마하가섭존자한테 ‘당신이 상수제자로서 이 결집 업무를 총괄하시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마하가섭존자가 이 결집의 책임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결집에 참여시켰을까요? 테라밧다(Theravada)에서는 수행을 네 단계로 나눕니다. 그러니까 크게는 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이 있는데, 깨달은 사람은 다시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는 거예요. 법문을 듣고 이치를 확연히 깨친 사람을 수다원(須陀洹), 이치는 깨쳤지만 아직 행이 다 되는 건 아니니까 그 단계별로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이렇게 나눈 겁니다. 아라한은 모든 이치를 깨쳤을 뿐만 아니라 행이 이루어지는 사람, 즉 마음에 번뇌가 없는 사람인데, 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 결집에 참여시키기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나 모여서 편집을 한 게 아니에요. 그때 아라한으로 인정받아서 이 결집에 참가한 사람이 50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500명이 앉았던 거예요. 500명이 결집을 하려면 돌아다니면서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500명이 결집할 동안에는 누군가가 공양을 제공해야 이들이 하루 종일 집중할 수 있을 거 아니겠어요. 그걸 아자타삿투왕이 지원한 거예요. 아자타삿투는 원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됐을 뿐만 아니라 데바닷타(Devadatta)의 제자였어요. 데바닷타는 ‘아자타삿투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니, 나는 부처님을 죽이고 새 부처가 되겠다’는 계획을 했다는데, 아자타삿투는 성공을 했을지라도 데바닷타는 실패를 했지요. 아자타삿투왕도 초기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러는 과정에서는 부처님을 굉장히 거부했지만 나중에 병이 나서 지바카한테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에게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 마음의 병도 크다는 걸 알고 결국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의 사리 중 8분의 1을 가지고 와서 여기다 탑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결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모든 재정지원을 다 한 거예요. 즉 500명의 아라한에게 하루에 한 번 공양을 제공한 거죠. 그렇게 아자타삿투왕의 후원을 받아서 여기서 500명이 3개월간 결집을 한 겁니다.

그냥 죽림정사에서 하지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했을까요?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거죠. 수행자라면 누구나 그 결집에 참여하고 싶을 것 아니겠어요? 그 중요한 결집에. 그래서 통제가 힘들었다는 거예요. 여기 참여를 안 시키니까 1만 명이 따로 모여서 결집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또 어떻게 결집할 것이냐는 것도 만만치 않은 문제잖아요. 부처님이 45년간 설법을 하고 가셨으니까 법문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했던 거예요.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 존자는 늘 부처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을 제일 많이 들었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난이 진리에 대한 말씀, 즉 경(經)에 대한 초안을 내기로 한 거예요. 그리고 계율에 대해서는, 가장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 우파리존자가 초안을 내기로 했습니다. 원래 우파리는 이발사로써 천민출신입니다. 10대 제자 중에 천민출신이 우파리존자 한 명인데, 우파리는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까 고지식하게 부처님이 하라는 것만 잘 듣고 그대로 했기 때문에 가장 계율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하가섭존자가 사회를 보고, 두 분의 초안자가 초안을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이 초안을 내면 500명이 다 검토를 해서 어떤 사람은 그 내용에 대해서 ‘나도 그렇게 들었다’며 동의하거나 ‘거기에 이런 내용이 빠졌다’며 첨가하거나 ‘그 내용은 거기에서 얘기한 게 아닌데 거기에 들어갔다’며 삭제하는 등 오류 수정을 거쳐서 500명이 다 동의하면 하나의 경전이 완성되는 방식이었어요. 그러고 그것을 500명이 같이 암송을 했습니다. 그렇게 2, 3번 확인을 한 뒤에 다음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500명이 검증하고, 500명이 다 암송했으니까 처음부터 책을 500권 찍었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했대요. 초기에는 결집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고 해요. 다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들은 사람만 모였으니까요. 내용에 대해서 별 이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도 검증과정을 다 거친 후에 외워야 되니까, 외기 쉽게 앞부분에 반드시 신문기사처럼 육하원칙이 들어가게 한 거예요. 예를 들어 아난다가 초안을 냈기 때문에 아난다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이어서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쭉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설명을 한 앞부분을 ‘서분’이라 그러고, 경전의 주 내용인 본문을 ‘정종분’이라 그러고, 그것을 다 듣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적은 부분을 ‘유통분’이라고 합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결집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으로 아라한이어야 된다는 조건이 붙는 바람에 아난다가 결집에 참가를 못 할 상황이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난다는 많이 듣기만 하고 부처님 시봉만 했지, 아라한과를 증득을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난다만 예외로 할 수가 없어서 마하가섭존자가 아주 냉혹하게 아난다를 참가시키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아난다는 백척간두에 선 마음으로 결집이 있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을 때 용맹정진을 해서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이 결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경전이 하나하나 결집이 되었어요. 경전이 결집되었다는 게 문자로 했다는 게 아닙니다. 전부 외워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 경전을 결집했을 때는 경과 율만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교화에 대한 얘기를 경, 수행자의 실천에 대한 지침은 율, 이렇게 두 가지만 가지고 결집을 완성시켰는데, 그것을 공표했더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아, 거기 빠진 게 있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정을 못 받아서 경전에 못 들어간 거예요. 그런 문제로 논란이 계속 되자, 어쨌든 1결집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에 제2결집이 있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오늘 우리가 갈 바이샬리였습니다. 그때는 왜 결집을 했느냐면, 700명의 장로, 즉 큰스님들이 계율에 대한 해석문제로 결집을 한 거예요. 바이샬리는 여성출가가 처음 있었을 정도로 자유로운 도시였고, 또 풍요로운 도시다 보니까 ‘돈을 보시물로 받을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 거예요. 그래서 그 결집에서 그 지역의 진보적 비구들이 행하는 계율의 10가지를 비법(非法)으로 규정하고, 또 그동안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 인정을 못 받았던 것들 중에 소위 바깥에서 계속 경전으로 읽혀온 것들을 재검토해서 경전으로 다시 추가인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100년이 지난 뒤에 파탈리푸트라, 즉 파트나의 아소카 왕궁에서 1000명의 장로가 모여서 제3결집을 했는데, 이때는 논장이 결집됐습니다. 경과 율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인데,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부처님 말씀에 대한 시대적 해석이나 요약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그 해석이나 요약을 쓰신 대스승들의 글 중에서 부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걸로 인정하는 것, 그것을 논장이라고 합니다.”

또아리가 풀어지듯 재미있는 스님의 이야기가 송수신기를 타고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칠엽굴 아래로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집중하였습니다. 스님은 설명을 마치고 다 함께 경전의 결집에 참여한 아라한들처럼 조용히 들숨날숨을 관찰하며 명상하도록 하였습니다.

칠엽굴에서 내려와 먼저 인원이 확인된 차량부터 출발하여 바이샬리의 원후봉밀터로 갔습니다.

“제가 경주에 살았는데 경주에도 ‘봉황대’라는 게 있어요. 거기에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자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봉황이 앉는 곳이라고 해서 봉황대라고 불렀지, 그게 무덤이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나중에는 발굴이 됐지만요. 이곳도 마찬가지예요. 평지에 그렇게 산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큰 흙더미가 있는데 거기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라고 있으니까 이걸 탑이라고 생각을 안 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탑이라고 밝혀지게 된 곳입니다."

간단하게 원후봉밀터의 에피소드를 설명하며 스님과 먼저 도착한 4호차 일행은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아침 공양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다 같이 모여서 예불을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둘러보았습니다. 매 번 예불 올리던 자리에는 현지인 단체가 먼저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 자리를 피하되 4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햇빛도 피하고 여법하게 경전을 독송할 수도 있는 곳으로 적당한 곳으로 찾았습니다. 공양물을 올릴 곳을 봐두고 순례객이 열을 지어 앉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정해서 안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곳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든 부처님 이후에든 일화가 많은 곳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이샬리에서 있었던 일들 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여기는 여인이 처음 출가한 곳입니다. 사르나트에서 이미 사부대중(四部大衆) 중에 삼부대중(三部大衆)이 완성되었지요? 즉, 출가남자수행자, 재가남자수행자, 재가여자수행자는 완성이 됐는데 출가여자수행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성도 후 20여년쯤에 부처님의 아버님인 정반왕이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홀로 된 거예요. 남편이 죽었으면 아들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그 아들이 출가해버렸잖아요. 그런데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부처님의 양모잖아요. 그래서 그 양모와 정반왕 사이에서 난 아들 난다가 있긴 했는데 그 난다도 출가했거든요. 그러니까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없이 홀로 된 거지요. 그런데 부처님의 부인도 마찬가지였어요. 부모는 돌아가셨고, 남편은 출가했고, 아들 라훌라도 출가했으니까요. 그런데 석가족에는 그런 처지의 여인들, 즉 남편이 출가하거나 아들이 출가한 여인들이 500명이나 있었어요. 그래서 한 때는 이런 노래도 있었어요.

‘어제는 누구의 아들을 빼앗아가더니,
오늘은 누구의 남편을 빼앗아가고,
내일은 누구의 제자를 빼앗아갈 건가?’

그러니까 결혼한 남자도 출가를 하고, 젊은 남자도 출가를 하고, 또 남의 제자였던 사리푸트라 등도 출가를 하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부처님께서 남의 남편이나 아들이나 제자를 빼앗아 간다며 부처님을 비난을 했다는 거죠.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화를 받아서 출가한 사람들이 다양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실제 석가족 남자들이 출가를 많이 하다 보니까 마하파자파티 부인처럼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여인들이 많이 생긴 거지요. 정반왕이 돌아가시자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유선언을 한 거예요. ‘나도 출가를 하겠다!’ 한 나라의 왕후가 출가를 하겠다고 하니까 이에 따르는 여인들이 500명이나 됐어요.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청을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승낙을 안 하셨어요. 그래서 얼마 있다가 또 가서 청했는데도 또 승낙을 안 하셨어요. 그리고 또 얼마 뒤에 가서 청했는데 또 승낙을 안 하시고는 부처님께서 이곳 바이샬리로 와버리셨어요. 그러니까 그 500 대중이 부처님께서 허락을 안 했는데도 여기까지 부처님을 따라 걸어서 온 거예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회 시스템이나 조건이 여성들은 출가를 못할 상황이라 부처님께서 허락을 안 한 건데, 여성들이 여기까지 직접 스스로 걸어왔다는 건 이미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스스로 버렸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건 출가할 수 있는, 자립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다 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무튼 여인들이 여기까지 걸어왔으니까 그 몰골이 형편없었어요. 그런 몰골로 부처님께 가서 다시 청을 했는데도 부처님께서는 또 거절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울면서 물러나왔어요. 그 모습을 본 아난다존자는 마음이 너무 안 돼서 아난다존자가 부처님께 여쭸습니다.

‘부처님, 여인의 몸으로는 출가수행해서 열반을 증득하지 못 합니까?’
‘아니다. 능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허락을 안 하십니까?’

이어서 아난다존자는 부처님이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그 많은 공덕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 여인들을 출가시켜라’고 승낙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 사건은 어렵사리 여성이 출가하게 된 사건이기도 하고, 나중에 여성출가를 폐지하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봐라.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승낙하지 않으려고 하셨는데, 아난다존자 때문에 승낙하신 것이다’라며 부처님한테 책임을 물을 순 없으니까 아난다존자한테 책임을 물으면서 여성출가를 폐지를 했습니다.
당시 부처님은 두 가지를 고려하셨던 거예요. 첫째, 사회가 여성출가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거고, 둘째, 여성들은 의지하려는 까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않는 이상 출가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장소를 이곳으로 선택하셨고, 또 여인들도 여기까지 스스로 옴으로써 이곳에서 출가를 승낙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작용은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여성출가자들은 누구에게 속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즉 주인이 없기 때문에 나무 밑에서 수행한다고 앉아있으면 남자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거나 납치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 비구니들이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곳 바이샬리가 인류 역사 최초의 여성해방의 성지가 아닌가 싶어요. 여자가 자기 이름을 가진 첫 케이스도 여기서 나왔거든요. 당시 비구니는 ‘누구의’라는 수식어 없이 자기 이름만 단독으로 가졌거든요.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비구니 스님이 되겠다고 한국에서 비구니 계를 받아가지고 남방으로 가면 남방에서는 그걸 인정 안 합니다. 왜? 그 사람들은 대승을 비불설(秘佛設), 즉 사이비라고 생각하는데 거기 가서 계를 받아와봐야 인정하지 않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바이샬리에 비구니템플을 세워서 비구니가 되고 싶은 남방 사람들을 전부 이 바이샬리 비구니템플에서 계를 받게 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그러면 역사적으로 좀 해명이 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남녀차별의식 때문에 비구니를 허용하지 못했더라도,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허용을 해야 되는데, 지금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건, 즉 부처님 당시에 허용한 것을 지금도 안 한다는 건 훨씬 후퇴한 거죠.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스리랑카의 한 고승에게 ‘여성도 교육을 받아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게 세상의 추세인데, 이 문제를 빨리 개선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면 똑똑한 여성들은 불교를 성차별적인 종교라고 비난하면서 불교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큰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해소해야 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전통 때문에 남방에서는 여성의 출가문제가 굉장한 큰 사회적 쟁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당시에는 얼마나 어려우셨겠어요? 당시 사회에서 계급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한다는 게 얼마나 큰 사회적 저항을 받았겠습니까. 더구나 유녀, 즉 기생 500명을 출가시킨 일도 있었잖아요. 그때도 사회적 저항이 엄청났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탁발하러 가면 사람들이 아예 음식을 안 줬을 정도였어요. 앙굴리말라를 출가시켰을 때도 엄청난 사회적 저항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많은 비난이 따를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일주일만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 즉 일주일만 굶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거예요.(모두 웃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 부처님의 사리, 부처님의 유골을 서로 가져가려고 각 나라에서 왔는데, 이 바이샬리의 릿챠비족도 8분의 1을 가져와서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유골을 당시 8개의 부족이 나눠가져가서 탑을 쌓았는데 그 8개 중에 현재 3개가 발견된 상태예요. 하나는 석가족이 가져가서 쌓은 거고, 하나는 부처님 어머니의 종족인 꼴리족이 가져가서 쌓은 거고, 하나는 부처님이 제일 사랑했다는 릿챠비족이 가져가서 쌓은 탑, 3개만 지금 딱 발견이 된 상태인 거예요. 우리는 성지순례 기간 동안 그 3개의 탑을 10대 성지와 관계없이 다 참배할 예정입니다.

아쇼카 석주는 부처님이 이곳에서 원숭이에게 꿀을 공양 받은 일을 기리는 건데요, 부처님이 이 마을에 계실 때 누가 초대해서 수행자 500명과 함께 갔다가 발우 500개를 쭉 놔두고 잠깐 자리를 비운 일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그 사이에 원숭이가 그 500개의 발우 중에 부처님의 발우를 알아보고는 거기에 꿀을 공양 올렸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원숭이들이 모여 땅을 파서는 부처님이 세수하고 발 씻을 연못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진짠지, 거짓말인지...(모두 웃음) 그런데 무슨 사건이 있었으니까 그런 얘기도 전해지는 거겠지요. 어쨌든 그것이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얘기가 되어서, 아쇼카 왕이 여기에 석주를 세우고 탑을 모셨습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탑은 8개였어요. 그런데 200년 후에 태어난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면서 스토리가 있는 곳마다 ‘여기는 첫 번째, 설법한 곳이다’, ‘여기서 쓰러지셨다’, ‘여기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셨다’면서 기념탑을 쌓은 거예요. 얼마나 많이 쌓았느냐 하면, 8만 4천개를 쌓았대요.(모두 웃음) ‘8만 4천개’라는 건 많이 쌓았다는 뜻이지 구체적인 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벽돌로 탑만 쌓은 게 아니라 그 8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서 거기 몇 개 놔두고, 나머지는 가지고 다니면서 유적지마다 몇 개씩 집어넣어서 탑을 쌓은 거예요.”

아쇼카 석주와 탑을 배경으로 스님은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듯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주었습니
다. 한 낮의 햇빛이 적당하게 내리 쬐이고 있어서 아침 안개에 얼었던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졸릴만도 한데 순례객들은 경전을 읽을 때도 스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집중을 하고 들었습니다.

각자 사진도 찍고 짧으나마 정진도 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진신사리탑터로 향했습니다. 10대의 차량이 움직이려면 10대 차량의 모든 사람들이 타야지 가능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유적지에 가서도 내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서 우선 먼저 준비가 완료된 차량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이 탑 터는 8개의 진신사리탑 중에 바이샬리(Vaishali)의 릿챠비족이 세운 탑입니다. 여기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즉 진짜 유골은 현재 파트나박물관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참배하게 될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Piprahwa)탑의 사리는 현재 델리박물관에 보관되어있어서 저희가 나중에 델리박물관에 갔을 때 친견할 예정입니다.
이곳에서는 부처님의 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며 명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는 상관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코끝에 따악 모아서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는 나가는 줄을 압니다.”

명상▲ 명상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제법이 공하다는 가르침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가르침대로 늘 수행을 중요시해 왔지요. 그런데 믿음을 중요시하는 신앙에서는 부처님의 법보다도 부처님의 육신의 결정체로 남아있는 이 사리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해서 순례하잖습니까. 이곳도 세계의 불자들이 와서 이렇게 탑을 돌고, 복을 비는 등 해서 각자의 신앙심을 깊게 합니다. 우리는 법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불교인, 종교인으로서도 각자 여러분들의 신앙을 여기서 더욱 깊게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공양물을 올리는 차량부터 먼저 도착하여 공양물을 올릴 준비를 하는 동안 스님은 순례 행렬과 함께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진신사리탑터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탑터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순례객들은 자리를 깔고 저녁 예불을 올렸습니다. 한 낮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녁 예불을 하는 순례객의 얼굴에 지는 햇빛이 비쳐 예불을 소리와 함께 고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녁예불을 마친 뒤, 경전을 독송하고 각자 정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명상하는 사람, 절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등, 짧은 시간이지만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숙소로 왔습니다.

여행 일정도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갑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글 문수팀
사진 배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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