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새벽, 순례단은 라즈기르(라자가하Rajagraha, 왕사성王舍城, 라즈기르Rajgir)로 출발할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아직 주변이 컴컴한데다 안개까지 끼어 스산한 느낌이었지만 송수신기를 귀에 꽂고 차량 주변을 다니는 순례객들의 움직임은 바빴습니다. 모두 열 대의 버스가 수자타아카데미 교문 주변으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각자 차량에 짐을 싣고 인원 확인을 하면서 소리없이 바쁘게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길을 아침 예불을 하며 달려갔습니다. 출발한지 두 시간 가량 지났을 때 제티안에 다다랐습니다. 이번 성지순례의 일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이틀이 추가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제티안 도보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400여명의 대중이 천천히 걸었습니다. 20분 쯤 걸어가서 포장된 길에 언덕이 나왔을 때, 멈춰서서 자리 잡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안개 낀 제티안, 도보 순례를 시작하며▲ 안개 낀 제티안, 도보 순례를 시작하며

“여기 제티안은 나중에 검색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산이 이렇게 둥그렇게 있는 게 아니고, 폭은 한 1킬로미터로 좁고, 길이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마치 길쭉하게 줄을 쳐놓은 것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둥게스와리에서 본 산도 길쭉했지요? 그게 쭉 이어져서 여기까지 연결이 됩니다.

지도로 보이는 제티안의 모습▲ 지도로 보이는 제티안의 모습

제가 이 길을 자전거 타고 논길로 죽 따라와 봤는데요,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이 길을 걸어서 오셨습니다. 버스 내린 데에 보면 ‘라즈길(Rajgir, 왕사성王舍城) 16킬로미터.’ 그러니까 부처님의 하루 이동거리는 약 16킬로미터, 즉 40리였습니다. 평균 그랬어요. 인도에서는 그 정도를 ‘1유순’이라고 합니다. ‘유순’이라는 건 큰 소가 수레에 짐을 싣고 삐그덕, 삐그덕 거리면서 하루 동안 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하루에 그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1시간에 4킬로미터는 걸으니까 16킬로미터를 가려면 4시간 걸리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우리 속도의 절반 정도로 느리게 걸으셨어요. 걸음걸이에 깨어 계셨으니까 천천히 걸어서 이동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로부터 왕사성까지 1유순 정도의 거리가 남았던 건데, 부처님께서 여기 제띠안(Jethian, 杖林)이라는 숲에 머물고 계시니까 왕이 ‘부처님 일행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에서 기다리지 않고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직접 마중을 온 거예요. 경전에는 ‘왕이 부처님을 뵈러왔다, 마중하러 왔다’고 쓰여 있지만 역사적인 이런 저런 사실을 살펴보면 그때 왕이 부처님을 마중하러 왔다기보다는 우루벨라가섭을 마중하러 왔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루벨라가섭은 당대에 위대한 스승이셨기 때문에 빔비사라왕이 1년에 1번은 꼭 우루벨라가섭을 찾아서 뿌자(Puja), 즉 큰 제를 지냈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왕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 마중을 온 거죠. 이 평평한 인도평원에 왕사성만 이렇게 산이 삥 둘러싸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길 천연 요새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라 왕사성 있는 데만 좀 동그랗게 되어있고, 나머지는 다 길쭉한 골짜기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쪽으로 쭉 가면 왕사성 서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시 왕은 서문 밖으로 나와서 여기까지 마중을 온 거였어요.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앉아있는데 왕이 와서 우루벨라가섭에게 인사를 하고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스승 우루벨라가섭이시여, 제가 듣기로 우루벨라가섭이 어떤 젊은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가 되었다고 하던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80 먹은 노인을 보고 자기 손자라고 하는 것만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우루벨라가섭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부처님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합장공경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은 나의 스승이고,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내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분을 만나고는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제티안 도보 순례 시작▲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제티안 도보 순례 시작

당시 부처님은 서른대여섯 세셨고, 우루벨라가섭은 팔십이었어요. 그런데 ‘윤회의 씨앗을 심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복을 빌었다’는 거예요. ‘복’이라는 것은 윤회의 씨앗을 심는 것이지요. 복을 받으면 천상에 가고,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하고, 그런 식으로 도는 것, 즉 윤회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윤회의 씨앗을 심었다’는 건 ‘윤회 안에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구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부처님을 만나서 윤회를 벗어났다, 즉 해탈과 열반을 얻었다는 거지요. 그렇게 빔비사라왕은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경전이라는 것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금씩 내용이 첨가되거나 섞여서 달라지지요. 그래서 경전에는 처음부터 왕이 부처님을 마중 온 것으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읽는 경전을 봐도 앞뒤가 안 맞는 게, 대중이 앉아서 우루벨라가섭과 부처님을 번갈아 보면서 ‘저 젊은 사문이 우루벨라 가섭의 제자인가? 우루벨라 가섭이 저 젊은 사문의 제자인가?’ 이렇게 의문을 가졌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당시 대중들이 부처님을 확실히 몰랐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니까 우루벨라 가섭이 일어나서 조금 전과 같은 얘기를 했다는데, 제가 볼 때 그건 인도가 불교국가가 된 뒤에 아마 부처님을 미화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실제는 당시 왕이 우루벨라 가섭을 마중하러 왔다고 보는 게 맞다 싶어요.

죽림정사. 여법하게 시작▲ 죽림정사. 여법하게 시작

빔비사라왕과 부처님은 이렇게 만나기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부처님이 출가 후 왕사성에서 스승을 만나서 수행했을 때 부처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모습이 너무 여법했대요. 왕이 왕궁에서 이렇게 내려 보니 저기 멀리 한 수행자가 걸어가는데 그 위의가 여법한 거예요. 그래서 신하를 시켜서 그 수행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대요. 그러니까 신하가 ‘저 북쪽의 왕족인데 출가를 하셨답니다’ 했대요. 그러니까 그때 빔비사라왕도 왕족이 출가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거지요. 그래서 왕이 나와서 그 수행자를 찾아와 인사를 하면서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의 성은 뭡니까?’하고 씨족, 종족을 물은 거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나는 저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태양의 후예, 석가족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해서 빔비사라왕이 소문을 확인한 거예요. 그런데 빔비사라왕은 이렇게 훌륭한 젊은이가 수행자가 된다는 건 너무 아깝고,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된다 싶었나 봐요. 그래서 ‘당신과 같은 사람이 이렇게 수행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한 거예요. 당시에는 아버지인 왕이 오래 살면 아들인 왕자가 못 견뎌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게 다반사였거든요. 그래서 ‘차마 아버지를 해치고 왕이 될 순 없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셨어요. 그러니까 더욱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내 나라를 같이 다스리면 어떻겠소?’라는 제안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거절하셨어요. 같이 다스리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나 싶어서 다시 ‘그렇다면 나보다 당신이 나아보이니, 당신이 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시오.’ 하니까 부처님께서 또 거절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미안해서 거절하는 줄 알고 ‘그럼 내가 군대를 줄 테니까 그 군대를 이끌고 다른 나라를 쳐서 제국을 건설하시오’라고 제안하니까 결국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입속에 있는 가래를 탁 뱉었는데 다른 사람이 더 굵은 가래를 뱉었다고 그걸 주워 먹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모두 웃음)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순례객들) 없어요.”

평화로운 죽림정사▲ 평화로운 죽림정사

“있을 거예요, 여기에도.(모두 웃음)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하니까요.(모두 웃음) 부처님께서는 왕을 가래에다 비유한 거예요. ‘이미 내가 내 나라도 필요 없다고 왕위를 버렸는데 하물며 어떻게 남의 나라를 갖겠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빼앗아서 가지겠느냐’는 거지요. 그러니까 빔비사라 왕이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왕이 ‘좋소! 내가 보기에 당신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 같소. 만약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면 오늘의 인연을 잊지 말고 꼭 나를 다시 만나서 그 좋은 법을 나에게 들려주시오’라고 약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빔비사라왕이 어쩌면 우루벨라가섭을 마중하러 왔던 것일 수도 있지만 약간은 고타마 붓다를 생각하며 마중 나왔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부처님께 경배하고 법을 청하니 부처님께서 중도(中道)와 사성제, 팔정도를 설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그 법을 듣고 깨달았어요. 마치 마음을 꽉 누르고 있던 어둠이 사라진 것 같아서 왕은 너무 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그 기쁨을 노래할 때 아까 그 소원 얘기를 한 겁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 소원이 다 성취되었다’고. 그러면서 ‘부처님이시여,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했는데 부처님께서 거절을 하셨어요. 부처님께서는 수용을 할 때는 답이 없으셨습니다. 침묵으로 응하셨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거절할 때는 반드시 ‘아니다’라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침묵을 많이 하셨을까요, 말을 많이 하셨을까요?”

“(순례객들) 침묵.”

“그렇다면 부처님은 대중들이 요청하면 대부분 받아들이셨다는 거예요? 거절하셨다는 거예요?”

“(순례객들) 받아들이셨어요.”

“예. 제가 이런 법문을 했더니, 우리 행자 중에 어떤 분이 나한테 뭐라고 물었는데 제가 대답을 안 한 일이 있었어요.(모두 웃음) 저는 더 생각해 보려고 빨리 대답을 못했던 건데, 행자가 그대로 해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왜 허락도 안 받고 했니?’ 하니까 ‘스님이 침묵을 하셔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저 자신을 보니까, 저는 침묵을 하는 건 대부분 승낙을 아직 안 한 거고, 승낙할 때는 ‘오케이’하고 대답을 하더라고요.(모두 웃음)

어쨌든 왕이 식사초대를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왕이 ‘아, 왕궁은 아니 오신다고 하니까,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머물 곳으로 적당한 곳이 어디일까?’ 살펴봤어요. 그러니까 성 밖에 아름다운 자기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것을 드리면 좋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부처님께 기증을 했어요. 이곳은 위치가 좋아요. 즉 마을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습니다. 멀면 탁발하기 어렵고, 가까우면 번다하지요. 죽림정사는 성문 밖으로부터 한 1킬로미터 이내, 7, 800미터 정도 떨어져 있거든요. 성으로부터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지요. 그래서 죽림정사가 표준이 되어서 기원정사도 성 밖 고요한 곳에다 짓는 등 절의 표준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죽림정사는 빔비사라왕이 기증을 해서 마련된 절이에요.


오늘 우리는 왕사성으로 걸어서 차를 타고 궁 옆을 지나 죽림정사로 가겠습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거리가 13킬로미터 정도 되니까 3시간 반 정도 걸릴 거예요. 그래서 가다가 밥 먹겠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은 아까 버스에서 내린 자리에서 버스를 다시 타고 저쪽 반대편으로 오셔서, 거기서부터 힘이 되시는 분은 거꾸로 이쪽으로 걸어오세요. 그러다가 만나서 같이 죽림정사로 가면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는 위험하다고 반드시 경찰을 동반해야 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100명씩이나 되는 경찰을. 그런데 요즘은 도로가 다 닦여서 차가 다닐 수도 있을 만큼은 됐어요. 왜냐하면 1년에 1번씩 세계의 불교도들이 여기서 ‘피스 마치(Peace March)’, 즉 걷기를 합니다. 그래서 걷다 보면 1킬로미터마다 각국의 탑을 제 나라 식으로 쌓아놓은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비교적 안전해 졌고요, 또우리가 지금 400명이나 되니까 누가 총을 들고 온다고 해도 몇 명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 되겠지요?(모두 웃음)”

제띠안 길을 걸으며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죽림정사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1킬로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작은 탑을 세어가며 평평한 길을 걸으니 마음이 편안하였습니다. 손반다르 동굴까지 걸어서 13km를 걸은 후, 차를 타고 죽림정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절의 표준이 된 죽림정사에서 조용히 가사를 수하고 향을 피워 정근하며 들어갔습니다. 연못을 한 바퀴 돌아 자리에 앉아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였습니다. 조용히 이어지는 명상에 긴 산책의 피로도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영축산에서▲ 영축산에서

이어서 영축산에 올랐습니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뵈러 자주 올랐던 영축산의 길, 무장해제를 하고 오로지 홀로 부처님의 뵙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자 찾아갔던 그 길, 반야심경의 무대가 된 곳. 영축산을 오르면서 빔비사라왕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 있다는 것,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니까 말입니다. 400여명의 순례단은 영축산 정상부터 계단까지 이어져서 자리를 잡고 앉아 경전을 독송하고 참배하였습니다. 다른 순례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한쪽으로 붙어서 다니고 다른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배려하도록 스님이 각별히 안내를 하였습니다.

이어진 곳은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였습니다. 너른 터에 성벽이 둘러쌓여 있는 곳을 영축산을 바라보며 앉아 스님은 위제히 부인의 간절함을 담은 ‘관무량수경’의 이야기를 함께 해 주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스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경전 속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였습니다.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에서▲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에서

다음 순서는 나란다 대학과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표를 미리 사 둔데 비해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서둘러야했습니다. 400여명이 서둘러 나란다대학과 박물관을 둘러보자 하니 대부분은 나란다 박물관 관람은 포기하고 나란다대학을 보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늘 제티안 도보 일정을 넣으면서 시간이 많이 촉박하게 되었어요. 많이 피곤하시지요? 오늘은 저녁 공양을 먹고 일찍 쉬시기 바랍니다.”

제티안 도보순례와 영축산, 나란다대학 등 거의 모든 일정이 걷는데 있어서 피곤하였지만 새로운 순례길을 다녀올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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