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안개가 자욱하였습니다. 4시 30분, 쁘락보디홀에 모여 함께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드린 뒤, 보드가야로 걸어갈 채비를 하여 대문 앞에 모였습니다. 안개 속이라 추위가 더 느껴지는 날씨였습니다.

스님은 대문 앞에서 오늘 도보로 보드가야에 가지 못하는 사람을 다시 한 번 더 체크하고 선두, 중간, 후미를 배정한 뒤 출발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두르가푸르, 방갈비가, 만코시힐, 라훌나가르 마을을 차례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아침 볼일을 보러 밖에 나온 마을 사람들이 우리들 일행을 보자 어쩔 줄을 몰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건기라 마른 네이란자라 강을 건넌 뒤, 한참을 걸어 ‘부처님께서 강가에 쓰러졌던 곳에 도착하여 서서 경전 독송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아 모르는 사람은 찾아 올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JTS명상센터에 도착하여 싸온 도시락으로 아침공양을 하였습니다. 공양 후 나서면서 문 밖에서 줄을 지어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고 스님은 사탕을 세어 아이들에게 쥐어주었습니다.

수자타 공양터에 이르러 경전을 펼쳐들고 독송을 하다 보니 걸인이나 마찬가지였을 쓰러진 부처님에게 유미죽 공양을 올린 어린 수자타의 자비로운 마음이 새삼 느껴져 왔습니다.


공양터를 지나 우루벨라 가섭 교화터까지 왔습니다. 스님은 400명이 넘는 인원이다 보니 바깥 공터에서 경전 독송과 설명을 하고 한줄로 지나오면서 화룡이 가두어져 있었다는 우물을 보는 것으로 했습니다. 마을 길을 걸어가며 여광 법사님이 스님께 달려와 아사나 나무를 발견했다하며 알려주었습니다. 아사나 나무는 부처님이 네란자라 강에 몸을 씻었을 때 휩쓸려 떠내려간 부처님이 아사나 나무 가지를 붙잡고 올라왔다는 나무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사나 나무를 알게 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사나 나무

논두렁을 지나 수자타 마을에 들어서니 큰 탑을 만났습니다. 바로 수자타 탑 터였습니다. 정상부위까지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시 쌓기를 반복하며 거대해진 수자타 탑을 보며 사람들의 수자타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조금 가다 보니 멀리 보드가야 마하보디 대탑의 뾰족한 탑 꼭대기가 보였습니다.


마하보디 대탑에 도착하여, 426명의 우리 일행은 입구 공터에서 신발을 벗고 휴대폰을 걷어 두고 가사를 수한 뒤, 조용히 열을 지어 대탑 동편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불교의 수도, 서울이 이곳 보드가야(Bodh Gaya, 또는 부다가야)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불자들이 1년 내내 끊임없이 몰려들고, 심할 때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바깥에서 기다려야 될 정도로 늘 붐비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 조용히 앉아서 명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각국 불자들이 와서 다 자기네 식대로 마이크에 대고 온갖 염불을 하기 때문에 시장보다 더 시끌벅적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 1년 내내 이렇게 공사가 진행되는 혼잡스런 곳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사르나트는 한가하고 조용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이곳을 거의 티벳스님들이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을 때는 10만 명 정도가 몰려오니까요. 그럴 때는 이 보드가야 전체 시가지가 붉은 가사의 물결로 가득 찹니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오실 때는 더 굉장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어제까지 계시다가 오늘 다른 데로 가셨다가 삼일 후에 돌아오신다고 하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라도 앉아있는 거지, 안 그러면 여기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 부처님께서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건강을 회복하신 뒤에 다시 둥게스와리 쪽으로 가서 마지막 정진을 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으로 이 강을 건너와서 이곳 보리수 밑에서 성불할 것인지 망설인 것처럼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경전에는 그 부분에 대해 ‘여기 나무신은 이리로 오라 그러고, 둥게스와리 산신은 저쪽으로 오라 그랬다’고 묘사되어있습니다. ...... 이 탑은 300여 년간 힌두템플이 되어서 많이 부서졌어요. 그런데 미얀마의 왕이 브라만한테 엄청난 돈을 주고 이 탑을 관리, 수리할 권리를 얻어서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재정비를 했고요. 또 부처님께서 앉아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장소를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ana)라 그러거든요. 이 보리수와 탑 사이에 가보면 네모난 돌, 큰 반석이 있습니다. 거기에 태국사람들이 금을 입히고 그래서 보기가 좀 어렵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리수의 이쪽과 저쪽에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절을 할 때 머리를 이 기둥에 댑니다. 이게 인사법이니까 여러분들이 조금 후에 자유롭게 차별로 참배를 할 때 여기에 참배를 하세요. 또, 이쪽으로 보면 부처님 발바닥 무늬가 있는데, 그 무늬는 불상이 나오기 전에 부처님을 상징했던 표식입니다.

성도 후 49일간 부처님이 무엇을 하셨을까요? 핵심은 ‘전법’이에요. 다시 말하면, 본인이 깨달은 걸 아직 법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조리 있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는 것과 가르치는 건 좀 다르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리 있게 깨우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성제와 12연기의 원리를 구상하셨습니다. 그것이 경전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런 것을 아시고 경전독송을 하겠습니다.”

경전 독송을 여법하게 하고 명상에 들었습니다. 각국의 언어로 염불하는 소리가 시끄러운 것 같았지만 명상에 드니 그 소리마저도 어느새 하나로 어울어져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자율 시간을 가지는 동안 스님은 마하보디 대탑의 주지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보리수 앞에 자리를 빌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신 주지 스님께 감사함도 전달하고 왔습니다.

사람들의 자율시간이 마치겠다 생각했을 무렵 예전에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오랜 기간 봉사하면서 지냈던 김정준 법우와 이수진 법우가 찾아와 스님께 인사드렸습니다. 그리고 대탑 주변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수자타아카데미 출신 우다이 꾸마르 군도 찾아와 스님께 인사드렸습니다. 해를 더할수록 반가운 인연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각자 사진도 찍고 짧으나마 정진 시간도 가졌던 자율시간을 마치고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어제 들르지 못한 가야산에 함께 오르기로 하였습니다. 열 대의 차량이 코끼리 머리 산 앞에 정차하였습니다.

“이 산줄기를 따라 쭉 가세요.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아침에 걸어갔던 길을 가셔서 목욕하시다가 쓰러지신 후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강을 또 하나 건너셨어요. 그게 같은 네란자라강입니다. 강이 이렇게 Y자로 갈라져서 그래요. 그리고는 오늘 우리가 참배한 보드가야 그 강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어요. 깨달음을 얻고는 다시 다섯 친구를 위해서 사르나트까지 가셔서 그들에게 초전법륜을 하시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에 갔던 터에서 우루벨라가섭을 교화하시고, 또 아까 오다가 제가 오른쪽에 나무 한 그루 있다고 했는데, 그 두 강이 Y자 형식으로 만나는 지점에 있던 나디가섭을 교화하시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후에 이 방향으로 지나가는 버스, 즉 강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보면 왼쪽 밑으로 힌두템플이 많이 있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서 화장도 하고 그러는 데가 보일 텐데, 거기가 가야가섭이 수행하던 데입니다. 거기서 또 가야가섭을 교화하셨어요.


▲부처님이 앉았던 바위라고 알려져 있는 움푹 패인 바위.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천 명의 제자와 함께 이 산 중턱에 앉아서 부처님의 ‘불의 설법’을 들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가야산(伽揶山)이라고 하면 원래는 거기를 말하는데, 여기도 가야산이라고 합니다. 그 산 이름은 가야산, 가야마운틴이고, 이 동네에서는 가야시르사라고 하거나 지금은 힌두템플이 있기 때문에 브람조니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한문경전에는 상두산(象頭山), 즉 긴 코가 달린 코끼리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두산이라고도 하는데, 천여 명이 여기 둘러앉았던 거지요. 지금은 사람들이 땔감용으로 나무를 다 베어가서 나무가 없지만 원래 이 산에도 나무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어제 우리가 갔던 전정각산에도 산 위까지 나무가 많이 자라 있었잖아요?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자꾸 나무를 베어가서 중턱까지는 나무가 없는 거예요. 가섭형제는 원래 배화교도들이었는데 깨달음을 얻고는 그렇게 제사지내는 것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고 제구(祭具-제사에 쓰이는 기구)를 다 버렸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밖에 있는 불은 껐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제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고 하신, 그 유명한 ‘불의 설법’을 하신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증거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은 없어요. 왜냐하면 2500년 동안 그대로 보존이 됐으면 모르겠는데 중간에 한 700년 동안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불교 유적이 힌두템플이 되어서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역사가 전부 신화가 돼버렸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동네마다 다니면서 그 전설을 채취해서 다시 복원한다면 다시 역사적 사실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제가 경주에서 살았는데,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전설이나 설화를 기록한 것으로 치부했는데, 지금은 그게 다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되어서 삼국유사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됐거든요. 그런 것처럼 인도도 산업화가 되면 이런 흔적들이 다 없어질 거예요.

제가 인도에 와보고 하나의 원을 세웠다면, 제가 죽기 전에 인도에 아직 남아있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걸어 다니면서 동네마다 들러가지고 노인들로부터 그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채취해서 경전과 하나하나 맞춰가지고 복원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힌디어를 할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힌디어랑 한국어를 다 할 줄 아는 사람을 한 명 만들어내기까지 20년이 걸렸어요. 그 사람이 바로 쁘리앙카 선생님인데, 지금 쁘리앙카 선생님은 또 학교를 운영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청년들과 자전거를 타고 순례하는 걸 계획해 보기도 했는데, 인도의 교통이 워낙 복잡하니까 순례하는 중에 한두 명은 사고로 죽을 걸 각오해야 되는데,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냥 시비에 휘말려서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끝나버리기 때문에 시행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버스를 타고 중간, 중간에 걷는 이런 정도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 모두 산에 잘 올라오시네요.(모두 웃음)

자, 우리여기까지 왔으니까 ‘저기 부처님께서 계신다’고 생각하고 반야심경 일편 독송하겠습니다.”

(모두 함께 반야심경 독송)

“반야심경의 핵심은 ‘제법(諸法)이 공(空)하다’는 겁니다. 즉 정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 반야의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걸림 없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부분은 ‘가세, 가세. 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세.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여 열반을 이루세’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을 독송할 때는 힘 있게 해야 되겠어요? 죽어가는 소리로 해야 되겠어요?(모두 웃음)”

“(순례객들) 힘 있게 해야 돼요.”

“그런데 가기 싫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힘없이 하면 되겠어요?(모두 웃음) 자, 이제 다시 내려가겠습니다.”

다시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갔습니다. 해 지면 돌아갈 집으로 가듯, 둥게스와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돌아와서 저녁 공양을 조별로 지어먹고 저녁예불 후 스님과 함께 마무리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저녁은 인도JTS의 현재 활동을 각 부분별로 자세히 브리핑 받고 질문도 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등학교 등 교육파트, 병원파트, 마을개발파트, 건축파트로 나누어 인도, 한국, 활동가들의 소개와 사업현황 소개에 순례객들은 열렬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순례객들이 10km도 더 넘는 길을 걸어서 피곤할거라며 스님은 저녁 법문 없이 일찍 끝내고 휴식하도록 하였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문수팀 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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