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의 수행을 통해 조금 더 마음이 가볍고 행복해진 대중들을 위해 스님은 5일 간의 수련을 마무리하며 회향 법문을 했습니다.

“4박 5일 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두려워할 일은 없습니다. 그냥 일은 일일 뿐이고, 사건은 사건일 뿐이에요. 그것을 임하는 나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럴 때는 잠시 눈을 조용히 감고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하고 호흡을 알아차려 보세요.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시공을 초월하게 됩니다. 내가 열살인지, 스무살인지, 서른살인지, 마흔살인지, 오십인지, 육십인지, 칠십인지, 팔십인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이곳이 문경인지 이곳이 서울인지 이곳이 뉴욕인지 이곳이 독일인지 이곳이 방콕인지 이곳이 시드니인지, 갈 수 있다면 이곳이 달나라인지 별나라인지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집에 있으나 절에 있으나 교회에 있으나 눈을 감고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냥 나는 한 포기 들풀이 되고, 나는 한 마리의 다람쥐가 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자신이 원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원하는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애도 쓰고 노력도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좋아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롭다’ 하는데, 이 세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진다한들 이루어지지 않는다한들 큰 변화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다행이다’ 생각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만이다’ 생각하고, 그래도 또 하고 싶으면 더 노력하면 되고, 그래서 이루어지면 다행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삶이지, 그 결과로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은 다하지 않고 늘 결과만 바라고 결과에만 연연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남에게 자꾸 기대하게 되고 빌게 되고 자꾸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을 자꾸 을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다고 그 일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해도 된다가 아니라 연구하고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결과에 너무 연연하게 되면 인생살이가 괴로워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10년, 20년, 50년 지난 뒤에 보면 전쟁이 일어난 게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전쟁이 일어났냐 일어나지 않았느냐 이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지금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감정적으로는 한 판 싸우고 싶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크나큰 고통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을 한다고 전쟁이 반드시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또 그 전쟁을 맞아서 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이 여러분들이 선택한 거라면 이루고 살 수 있도록 마땅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노력과 관계없이 헤어진다면 헤어진다고 해서 무슨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헤어지든지 말든지 내버려둔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게 중요하다면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그러나 주어진 환경이 헤어지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반드시 좋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의 좋고 나쁨이 반반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게 되면 결국은 괴로움이 생기고, 그것이 이루어져도 재앙을 몰고 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놓고 보면 다시 후회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지금 여기 깨어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과에 연연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잠시 하는 일을 멈추고 눈을 감고 마음을 코 끝에 두고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현재 지금 여기에 일어나는 일은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 일은 한 포기의 풀이나 한 마리의 다람쥐나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저 풀도 다람쥐도 괴로워하지 않는데 내가 괴로워한다면 이것은 자기의 사로잡힘에서 생겨난 일이지 상황의 문제는 아닙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된 마음을 풀어서 평정심을 다시 되찾고, 그런 가운데 해야할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너무 애를 쓰면 과로하게 되니까 결과적으로 더 나빠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거문고 줄을 매는 것에 비유를 했습니다.

‘너무 느슨하게 매도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팽팽하게 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너무 애써도 효과가 안 나고, 너무 게을러도 효과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원하는대로 애쓰다가 그게 안 되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니 애쓰지도 말고, 게으름에 빠져 포기하지도 말고, 다만 꾸준히 다만 꾸준히 해나가라.‘

이런 관점을 가진다면 삶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어려움이 닥치는대로 배우는 것이 늘어나고, 고통 속에서는 시간이 길어지고,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부러 어려움을 추구한다면 고행주의가 되겠지만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어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려움은 더 이상 어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좋음에 들떠서 좋음에 빠지게 되면 좋음이 지나고 나면 아쉬움 때문에 역시 늘 거기에 연연하게 됩니다. 다만 그 순간에 만끽하고 거기에 들뜨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지나가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되 이런 관점대로 우리의 현실은 또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되지 않는 자기도 또 수용하고, 되지 않으니 포기하거나, 되기 위해서 너무 애쓰지 말고, 그저 꾸준히 방향은 되는 방향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현실은 되지 않는 이 곳에서 출발해서 되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면, 그것이 바로 주어진 삶을 가장 잘 사는 길이고 그것이 수행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늘 오롯이 가져서 괴로움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 넘어지더라도 또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런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정의나 평화를 위해서도 우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실천적 활동은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런 활동을 하고 그런 삶을 살 때 삶의 보람이라고 하는 또 다른 기쁨이 생깁니다. 세상을 위해 산다고 너무 무거운 짐을 지거나 자기를 위해 산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 길은 두 길이 아닙니다. 하나의 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발적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자발적이면 지금은 힘들지만 지나놓고 보면 다 자신에게 좋음으로 남습니다. 아무리 고생을 해도 자발적이지 못하면 상처로 남아서 트라우마가 됩니다. 그래서 그때 일을 생각만 해도 ‘아이고 다시는 하기 싫다’ 이렇게 싫어함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싫어하는 걸 하고 나서 그 상처 때문에 더욱 더 끔찍히 싫어한다면 그것은 인생을 잘못 산 겁니다. 그 차이는 자발적이냐 아니냐 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도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세상 속으로 가서도 꾸준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또 한 해 열심히 활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자각을 통해 변화의 시작을 하게 된다는 말씀에 대중들은 큰 박수로 공감을 표현하며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회향 법문을 마친 후 스님은 수련에 참여한 대중들 모두와 악수를 해주었습니다. 대중들은 긴 줄을 서서 스님과의 악수 차례를 기다리며 즐거워했습니다.

회향식을 마치고 나서는 대웅전 앞마당으로 다함께 올라가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스님과 대중들의 얼굴이 참 맑습니다.

대중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오후 3시 30분부터는 수행공동체 정토회에서 상주 생활을 하고 있는 실무자들의 ‘정토를 일구는 사람들’ 입재식이 열렸습니다.

오늘은 총 68명이 실무자, 상근활동가들이 참석했습니다. 실무자들은 매년 여름에 하안거 수련을 해왔는데, 이번 겨울부터는 동안거 수련을 겸해 정일사 수련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출가수행자는 원래 포살과 자자를 해왔는데, 정토회에서는 이를 대신해서 정일사 수련이 진행됩니다.

정일사 수련을 시작하며 스님이 입재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출가수행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따끔한 경책과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함께 수행하면서 저한테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내가 수행자다’ 하는 자부심이나 당당함, 책임감 같은 게 부족한 겁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옷을 사복을 해서 입고, 머리를 기르고, 명칭을 속명으로 불리고 있어서 그러리라 이해는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일반인과 똑같이 옷도 입고 머리도 기르고 이름도 불리니까 다를 바가 없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여러분들 자신도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 바랍니다. 얼마전 방콕에서 INEB 지도자들과 회의를 했는데 몇몇 분들이 저한테 이런 건의를 했습니다.

‘스님께서 출가 비구, 비구니를 많이 양성해서 해외에 파견을 하면 불교 발전에 굉장히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스님께서 그런 법력을 갖고 있으면서 승단을 구성하지 않습니까?’

이런 문제 제기 겸 승단 구성 건의를 했어요. 얼마 전에 대만에서 오신 분도 그 문제를 좀 강력하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런 훌륭한 스님들이 한국에만 있지 않고 세계 곳곳에 파견이 된다면 이 좋은 법이 훨씬 더 빨리 전파 되고 세상의 변화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저도 그 제안에 동의하고, 같은 의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승단을 구성하면 우리가 전법을 하고 여러 사회 활동을 하는 데도 무척 유리합니다. 위의가 갖는 엄청난 파워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유리해요. 특히 여러분들이 여성이 많고 젊은 사람이 많다 보니까 그러한 위의를 갖추게 되면 나이가 아래거나 여성이어서 받기 쉬운 편견도 다소 커버가 됩니다.

그러나 위의가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지금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속명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앞으로 전개될 미래 사회는 갈수록 그런 형식적인 위의보다는 실제 해결능력, 실력, 자기 수행력이 중요합니다. 미래에는 그런 위의나 형상을 가지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지금에 비하면 점점 더 줄어들 거예요.

위의나 형상은 일을 하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그것이 갖는 단점도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들이 교만에 빠지기가 쉬워요. 여러분들이 승복을 입고 ‘스님’이라 불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여러분 개인의 인격이 정말 본받을만해서 존경하는 게 아니라 그 모양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시간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한테 속게 되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존경하는 그것이 진짜 자신인 줄 착각하게 됩니다. 상에 집착하게 돼요. 대중만 상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 자신이 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남을 속이는 것보다 자기를 속이는 것은 위험 부담이 굉장히 큽니다. 적어도 수행자라면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서는 안 돼요. 남을 속이는 것도 물론 세상에 끼치는 피해가 크지만, 자기를 속이는 것보다는 피해가 적습니다. 수행자는 특히 그래요. 자유와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자가 자기에게 속고 자기를 속인다면 이것은 수행의 근본에서 보면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속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위의를 가지고 거들먹거리느라 자기 시간을 보내기가 쉬어요. 이것이 사실은 제일 큰 위험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보니까 겸손한 보통 사람도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대중의 절을 받으면서 3년만 지나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거들먹거리기 쉽습니다. 승려가 됐는데도 자기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 겸손한 사람은 백명 중에 한 명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그런 형식을 갖춰 출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형상을 갖추는 걸 제가 취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미 정토회에서도 초기에 큰스님의 권유로 출가를 시켜봤지만 하나같이 다 그런 폐습에 나가떨어졌지, 그 폐습을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속명으로 불리며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반면에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교만함이나 거들먹거림은 없는 대신, 자긍심이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승려든 목사든 신부든 그들 앞에 서면 출가 수행자로서 전연 위축됨이 없이 자긍심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여러분들은 말로는 수행자라고 하면서 그런 위의에 심리가 짓눌리는 비굴함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당당함이 없고, 또 자기 스스로 그냥 일반인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수행자라는 긍지가 없다는 얘기예요.

위의를 갖추고 일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우리가 굳이 이렇게 해나가는 것은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 내 내면이 당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위가 더 아래여도, 나이가 더 어려도, 허드렛일이나 실무를 하면서도 내면의 자세가 똑바르고 당당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지식이나 돈이나 지위는 세상 사람들이 더 높더라도 마음으로는 우리 수행자들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승복을 입고 사무실에서 근무한다면 아마 그들은 위의 때문에 여러분들을 굉장히 존경하고 존중하면서 일을 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위의를 갖추지 않으니까 일반 사무실의 직원처럼 대해요. 일반 사무실의 직원처럼 대하는 그 속에서 여러분들의 품성이나 삶의 자세, 행동거지나 말이나 자세의 당당함이 드러나서 그들이 여러분들을 승려 이상으로 존경하게 될 때 여러분들에게 ‘진짜 실력이 있다’, ‘능력이 있다’, ‘수행력이 있다’, ‘법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의 효율을 떨어뜨리면서도 이렇게 생활하는 이유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에게 속는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거예요. 제가 사업의 효율만 생각한다면 오히려 대량으로 출가를 시켜서 많은 승려를 배출해 곳곳에 파견하는 게 나아요. 여러분들이 나이가 어려도 승복을 탁 차려입고 있으면 누구도 여러분들을 함부로 못하고 존중하게 되고, 일의 효율도 오르고, 재정 수입도 생기는 등 업무상 이익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도 중요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하나하나, 여러분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자로서의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고, 수행자로서의 당당함이 있어야 해요. 여러분들은 수행자니까 항상 세상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대해야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정말 자기에게 속지 않는 경지까지 갔을 때 여러분들에게 필요에 따라 위의를 주게 되면 효과가 배가 됩니다.

우리가 사업도 잘 해야 되지만 지금은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자로서 거듭나는 것, 수행자로서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 눈을 감아도 내 삶에 한 톨 의심도 없고 후회도 없는 삶이 먼저 자리 잡혀야 해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일하고 관계없이 자기 정진에 다시금 집중하셔서 자기 부족한 것을 늘 알아차리세요. 알아차려서 개선할 수 있으면 좋고, 개선 못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고 직시하고 인정해서 수행자로서의 기본 바탕을 갖춰 나가시기 바랍니다.



매년 일이 많긴 했지만 특히 지난 1년은 연말에 와서 다급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모두 수고들 하셨습니다.”

실무자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을 경청한 후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이후 8명, 10명씩 소그룹으로 나뉘어져 법사님들과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시작된 수련은 밤11시까지 계속 됐습니다. 한 해 동안 각 부서에서 많은 활동들을 하면서 서로 부대끼며 갈등을 겪었던 점도 많았을텐데, 도반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수행의 관점을 잡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일은 실무자 상근활동가 모두 스님과 함께 송구영신의 의미를 담아 호연지기도 기를 겸 스님과 함께 산행도 하고, 즉문즉설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더 깊이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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