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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설

“우리 남편은 나쁜 사람이에요. 생활비를 줄 때...” 법륜 스님의 답변


행복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이 문경 정토수련원 대강당에서 있었습니다. 인천, 경기, 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서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듣고 있는 4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6시부터 9시 20분까지 3시간 20분 동안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며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새벽, 법상에 오른 스님은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대중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 꼭두새벽에 강의를 하느냐고 항의하는 분들이 있는데, 스님이 일정이 많다 보니까 이렇게 아침 6시에 강의가 잡혔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마침 1박2일 수련을 하니까 새벽에 강의가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는 새벽에 강의를 해주고, 이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또 다른 일정을 가져야 해요. ‘8시에 해주면 좋잖아요’ 라고 하시는데, 네 맞습니다. 저도 압니다. 그런데 왜 6시에 하냐고요? 8시에 할 형편이 못되니까요. (모두 웃음)



제가 지금 해야 되는 일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여러분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여러분들의 잠을 깨워가면서 하는 거예요. 하하하.” (모두 웃음) 


스님은 대중들의 새벽잠을 깨워줄 요량으로 평소보다 더 재미있게 문답을 이어갔습니다. 10여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는데, 그 중 첫 번째 질문 내용을 소개합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참회를 하라고 하잖아요. 과거에 지은 죄업에 대해 어떻게 참회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죄업을 참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를 지은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리면 참회할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게 진짜 참회예요. 쓰레기가 이만큼 있는 것을 다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일거리가 많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땔감하기에 딱 좋은 거예요. 그러면 쓰레기를 치울 필요가 없어지잖아요. 이렇게 깨닫는 게 훨씬 쉽지, 하루 종일 쓰레기 치우는 게 더 쉬워요? 치울 필요가 없는 줄을 알아버리는 게 더 쉬워요. 진짜 참회는 눈을 번쩍 뜨는 겁니다. 눈을 뜨고 나면 ‘꿈이네’ 하고 끝이에요.” 


“저희들은 일을 저질러놓고 후회하고, 이렇게 반복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화내고 참회하고, 화내고 참회하고, 화내고 참회하고, 이게 나아요? 화를 안 내는 것이 나아요?”


“화를 안 내는 것이 낫죠.”


“화내고 참회하고, 화내고 참회하고, 이렇게 반복하지 말고, ‘왜 화가 일어날까?’ 살펴서 ‘화 낼 일이 없네’ 하고 깨쳐버리면 훨씬 수월합니다. 나한테도 좋고, 남한테도 좋고요. 뭣 때문에 늘 죄의식을 갖고 살아요? 


화가 난다는 것은 일종의 미친 증상이거든요. 그래서 화가 날 때는 ‘화를 안 내야지’ 하기 보다는 ‘너 또 미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화가 더 빨리 사라져요.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수행은 깨닫는 거예요.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간단명료하게 문답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청중석에서 여성 한 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스님은 어떤 내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 다시 물어본 후 질문자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깨닫도록 안내했습니다. 이후 남편과의 갈등을 소재로 재미있는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무엇이 이해가 안 돼요?” 


“쓰레기를 다르게 보면 쓰레기가 아니듯이 죄도 죄가 아니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그렇다면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에게 이걸 한 번 적용해 보세요. 남편에게 딱 적용해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우리 남편은 죄를 많이 짓거든요. 정말 미치겠어요.” (박장 대소) 


“남편이 나쁜 놈인데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런데요. 저희 남편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내 입장에서 나쁘다고 인식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나쁘다고 인식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실제로 나쁜 사람인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남편이 어떤 죄를 지었는데요?”


“사업을 하는데 자기가 번 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요. 그 돈을 몇 천만원씩 어디에 투자했다고 하는데, 어디에 투자했는지도 모르겠고요. 남편은 자기가 벌었으니까 다 자기 돈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 셋을 정말 예쁘게 잘 키웠는데, 남편은 ‘애는 그냥 낳기만 하면 저절로 큰다’ 라고만 생각해요. 아이 셋 키우다 제 경력이 단절되어서 이제 돈 벌기도 애매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너, 나가서 돈 벌어라’ 며 굉장히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해요.”


“아이 셋 키우는 동안에 생활비는 누가 주었어요?”


“남편이 주긴 주었는데 치사하게 주었어요.” (모두 웃음)


“치사하게 주었다는 것은 생활비를 조금 주었다는 거죠?”


“저는 월급쟁이가 늘 부러웠어요. 매달 돈이 딱딱 들어오니까요. 남편은 날짜를 정해서 딱 주는 게 아니라 ‘달라, 달라, 달라’ 해야 무슨 팁 주듯이 턱 줘요.” (모두 웃음)


“그래도 어쨌든 지금까지 안 굶어죽고 살았고, 아이들 공부 다 시켰다는 것은 생활비를 받긴 받았다는 거잖아요?”


“아, 스님! 왜 그러세요?” (청중들 박장대소) 



“처음에는 남편이 돈을 치사하게 주었다고 그래서 저는 돈을 너무 조금 주어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러면 제가 ‘얼마씩 주었냐?’ 고 다시 물을 것 같으니까 말을 바꿔서 ‘찔끔 찔끔 주었다’ 라고 그러시네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날짜가 되면 알아서 탁탁 주지 않고, 달라고 말해야 주는 것이 불만이라는 거잖아요.”


“네. 그런데 저는 돈을 받는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거죠.”


“결과로 따져보면 어쨌든 어느 정도 돈을 받았으니까 생활한 거잖아요.” 


“제 얘기 들어보니까 여자분들 너무 화나지 않아요? (모두 웃음) 제가 애 셋 키우는 동안 남편은 정말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했어요. 저한테는 정말 나쁜 인간이에요.”


“그래요. 이제 제대로 얘기하네요.(모두 웃음) 남편이 나쁜 인간이라서 내가 나쁜 인간이라고 이해한 게 아니라 내가 남편을 나쁘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 컵이 있는데 이 컵이 마이크보다 커요, 작아요?”


“작아요.”


“녹음기보다는?”


“커요.”


“이 컵은 마이크보다는 작고, 녹음기보다는 커요. 그렇다면 이 컵은 커요? 작아요?”


“네. 이해했어요. 그냥 남편은 남편일 뿐이에요.” (모두 웃음)


“법문을 유튜브로 좀 들었나보네요.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컵일 뿐입니다. 크고 작은 것은 이 컵에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인식에 있는 거예요. 컵을 마이크와 비교하면 작다고 인식이 되고, 녹음기와 비교하면 크다고 인식됩니다. 이건 인식상의 문제예요.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겁니다. 


본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컵을 내가 이 조건에서 작다고 인식했는데, 작다고 인식을 오래 하다 보니 본래 작은 줄 착각합니다. 이처럼 남편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그 인간이에요. 그 인간이 내 마음에 들 때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좋은 사람이요.”


“내 마음에 안 들 때는?” 


“나쁜 사람이요. 그런데 저에게는 매일 나쁜 사람이에요.” (질문자 한숨)


“남편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데, 질문자가 같이 살면서 매일 나쁘다고 생각하면 누구에게 안 좋을까요?”


“저한테요.”


“왜 질문자 같은 여자가 그런 나쁜 남자랑 같이 살아요?”


“애들이 셋이라니까요. 막내만 다 크면 그만 살아야지 생각했는데 계속 같이 살아야 될까요?”


“지금 막내가 몇 살이에요?”


“중학교 3학년, 열여섯 살이에요.”


“이왕 산 거 3년만 더 살면 되겠네요. 큰 애는 몇 살이에요?”


“스물두 살이요.”


“22년 동안이나 남편하고 잘 살았네요. 처음에 살 때가 힘들었어요? 요즘 살기가 더 힘들어요?”


“아휴, 계속 힘들었어요.”


“22년이나 살았는데 3년 더 못 살겠어요?”


“살더라도 남편을 고쳐서 살고 싶죠. 그런데 저한테는 몰라도 애들한테 그 이상 좋은 아빠는 또 없긴 해요.”


“그래요. 이것저것 다 따져보면 그만한 남자는 없어요. 아이들 문제도 고려해야 되고, 시댁 문제도 고려해야 되고, 친정 문제도 고려해야 되고, 주위에 있는 친구들 체면도 고려해야 되고…. 이것저것 온갖 요소를 컴퓨터에 넣어서 삑 누르면 ‘내 남편’ 이렇게 나옵니다.” (모두 박장대소)



“이것저것 넣어서 삑 했더니 우울증이 됐어요.”


“자꾸 ‘나쁘다, 나쁘다’ 하니까 우울증이 되지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닌 줄을 알면 우울증이 안 됩니다. ‘우리 남편은 나쁜 놈이다’라고 정해놓고 나쁜 놈하고 같이 사니까 자기가 우울한 거예요. 그래도 남편이 지금까지 생활비 떨어뜨린 적 없고, 자식도 셋 놓고 잘 산거 아니에요?” 


“아뇨, 애를 셋 낳으면 집에 일찍 들어오겠다더니 셋을 낳으니까 아예 안 들어와요.”


“셋을 낳으면 아내가 도망을 못 가니까요. 선녀도 애 둘을 낳았을 때 옷을 주었더니 도망을 갔잖아요. 둘은 데리고 도망갈 수 있는데 셋이면 하나를 놓고 가야 하니까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남자예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요. 그래서 저에게도 ‘너가 어디 가겠냐’ 라는 생각에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요. 제가 2박 3일 어디 갔다 와도 어디 갔다 왔는지 묻지도 않아요.”


“여기 딴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어떤 남편은 아내가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합니다. 그건 남편이 질문자를 믿는다는 거예요.” 


“아, 저를 믿는 거예요? ‘네가 뭔 짓을 해도 난 상관없다’ 뭐 이런 게 아니고요?”


“그런 남자라면 도인이죠.(모두 박장대소) 아무리 자기 부인이 마음에 안 들어도 ‘딴 남자를 만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이런 남자는 없어요.”


“제가 한번은 편지를 딱 써놓고 애 데리고 나가서 일부러 새벽 4시에 들어왔어요. 내 속 좀 느껴보라고요. 그런데 4시에 왔더니 아직도 그 사람은 안 왔어요. 그래서 그 편지를 제가 다시 읽었어요.” (모두 박장대소)


“남편은 질문자에게 관심 없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집에 안 와서 편지를 못 읽어본 거예요. 그 편지를 읽고도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편지를 못 본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집을 나갔다 온 줄을 남편은 모르는 거예요. 


남편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질문자가 원하는 만큼 남편이 일찍 들어오고, 돈도 제때 주지 않는 건 사실이에요.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남편이 친구들하고 술 먹을 때 술값을 다 내주면 친구들은 남편을 좋아하겠지요. 또 술집에 가서 팁을 팍팍 주면 술집 종업원들은 남편을 좋아하겠지요. 남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 미워할 게 없습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안 살면 되지, 미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선택이에요. 그런데 제가 보니 질문자는 남편하고 살겠네요.” 


“왜요?” (질문자 큰 소리로 웃음)


“지금 그만한 남자 어디 가서 잡겠어요? 다른 남자 잡아 고르다가 ‘아이고, 우리 남편이 더 낫네’ 이래서 다시 오면 벌써 딴 여자가 채 가버리고 없어요.”


“안 그래도 누가 주워가려고 하더라고요.” 


“누가 남편을 주워간다 하면 자기는 눈에 불을 켜고 또 잡으러 갈 거예요. 그러니 좀 늦게 들어오더라도 ‘딴 여자한테 안 잡혀간 것만 해도 참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몇 시에 들어오는지 따지지 말고 ‘사흘 안에는 들어올 거야’ 이렇게 생각하세요.” (모두 웃음)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크다, 작다 하지만 크다고 정해진 속성도 없고, 작다고 정해진 속성도 없습니다. 속성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게 ‘무아(無我)’예요. 다른 말로 하면 ‘공(空)’이라고 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건가요? 아닙니다. 이런 시공간의 조건에서는 작다고 불리고, 이런 시공간의 조건에서는 크다고 불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조건 공(空)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속성 자체는 정해진 그 어떤 속성도 없지만, 시공간을 따라서, 인연을 따라서는 ‘크다’로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법성게에서는 이것을 ‘불수자성(不守自性)’, 즉 ‘크다느니 작다느니 하는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 라고 표현했어요. ‘공’이란 뜻이에요. 그 다음 문장이 ‘수연성(隨緣成)’, 즉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 이루어질 뿐이에요. 


물에는 얼음이니 물이니 수증기니 하는 상태의 속성이 없고, 인연을 따라서 온도에 따라서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영하로 떨어지면 고체가 되고, 영상이 되면 액체가 되고, 100도가 넘으면 수증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 죄라고 할 만한 속성은 없어요. 그러니 남편을 미워할 것도 없어요. 그러나 인연을 따라서는 죄라고 불리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대중)


“네. 있어요. 그러나 죄라고 불린다고 해서 죄의 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시 말하면 ‘사람은 옷을 입어야 합니까? 벗어야 합니까?’ 했을 때, ‘입어야 한다’, ‘벗어야 한다’ 라고 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목욕탕이라는 조건에 가면 벗어야 하지요. 그런데 밖에 나오면?” 


“입어야 해요.” (대중)


“네. 입어야 합니다. 그럼 ‘밖에 나오면 입어야 된다’라고 정해져 있나요? 밖에 나와도 밤에 부부가 함께 잘 때는 입어야 하나요? 벗어야 하나요? (대중 웃음) 이렇게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정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해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잘못 이해하면 ‘목욕탕 안에서 옷 입어도 되고, 밖에 나와서 벗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진리의 속성이고 핵심입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굉장히 어렵고 복잡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도 늘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차를 타면 승객이라 불리고, 아이를 만나면 엄마라고 불리고, 남편을 만나면 아내라고 불리고, 엄마를 만나면 딸이라고 불리고, 학교 가면 학부형이라고 불리고, 절에 오면 불자라고 불리는 겁니다. 이렇게 늘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 불리고 저렇게 불리고 할 뿐이지 ‘너는 아내다’, ‘너는 엄마다’ 라고 고정해서 칭할 게 없어요. 결혼 관계를 맺었을 때 남편과 아내이지, 이혼을 했거나 남편이 죽어버리면 나는 더 이상 ‘아내’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남편이 죽었으면 다시 결혼하든 혼자 살든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내가 아내이기 때문에 다시 결혼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인연이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붙잡고 있는 겁니다. 즉 이 마이크와 같이 있는 게 아닌데도 ‘작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아요.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환하게 웃는 질문자의 모습을 보고 청중들 모두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질문자의 솔직한 질문과 스님의 명쾌한 답변으로 강연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본래 죄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참회’ 라고 할 때는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남편과의 갈등이라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적용하도록 안내함으로써 모든 대중들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즉문즉설의 묘미가 잘 살려진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변해 준 스님은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아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늘 생활 속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배운 내용을 생활 속에서 체험해 보세요. 각자 미워하는 사람을 한 사람씩 떠올리며 스님의 말씀이 정말 맞는지 한 번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감은 댓글로 남겨주시고, 공감한다면 주위에 공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