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제 5차 정토해외대회 아시아/태평양> 둘째 날을 맞이한 날입니다. 아침 기상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울린 후 정토행자들은 함께 모여 40분간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 날 스님께서 명상과 알아차림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신 덕분인지 가벼운 마음으로 명상에 임할 수 있었고, 민다나오 수련장의 산 속의 맑은 공기와 선선한 바람도 함께였습니다. 곧 이어 첫째 날 일정에 함께하지 못했던 스님과 법사님들과의 천일결사 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엔 정토행자들의 희망처럼 힘차고 우렁찬 108배 정근 소리가 함께였습니다.

아침기도 후 공양을 마친 후 스님은 곧 바로 민다나오 센터를 주변을 산책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수련장과 비닐하우스 및 농장의 작물들을 둘러보시고는 잊지 않으시고 직접 민다나오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토행자들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때마침 마닐라 법당의 거사님들께서 뻥튀기 기계로 쌀 과자를 간식으로 만드는 것도 구경하였습니다.



직접 뻥튀기 기계를 구해 오셨다는 거사님 덕분에 여럿이 모여 추억의 간식을 먹는 체험을 하며 너도 나도 즐거움을 한 층 더해가는 아침 시간 이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둘째 날 아태지구 행자대회의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활동으로는 아태지구 활성화 방안에 대한 모둠활동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선주법사님께서 던져주신 주제인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가지고 모둠 별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로 모둠 별 토의가 끝난 뒤 모둠별로 발표자가 나와 정리된 내용을 토대로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발표 된 내용으로는, 새롭게 찾아오시는 분들에 대한 안내 매뉴얼을 만들어 담당자들이 안내를 매끄럽게 하자는 의견과 해외에서도 행복학교를 만들어 법당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 접근성을 높이자는 의견 등이 나왔습니다. 그 동안의 어려웠던 점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기도 하고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극복할 방법을 찾는 적극적인 토의가 이루어지는 뜻 깊은 모둠활동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모둠 별 발표 후에는 스님의 정리말씀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정토회 기구의 구조에 대한 설명과 정회원의 조건을 설명해주시고, 불교적 의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한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법당에 대해 불교적 의례의식의 필요성을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또한 스님은 정토회의 만일결사의 2가지 설립목표를 말씀하면서, 이번 9-6차에서 전법을 더 집중된 목표로 삼게 된 배경을 설명 해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2가지 위기의 상황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대외적 상황에서 제일 큰 변수로는 역시 미국의 상황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공화당이 지고, 민주당이 이기면 트럼프가 탄핵이 될 위기가 한번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위기로는 2년 후에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하여 정권이 바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미 정권을 트럼프가 쥐게 된다면 그와 합의했던 약속들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판도가 바뀌게 되어 우리에게는 다시금 평화적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공화당이 진다고 해서 곧바로 위기가 오진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 앞으로의 1년 6개월간은 위기가 고조될 위험이 적지 않겠느냐는 대략적 예측이 가능합니다. 앞으로 1년 반은 저는 평화재단과 함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겠지만, 우리 대중들은 이 기회에 전법에 더 치중하자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큰 틀에서 방침이 정해졌으니, 전법에 집중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처음 정토회의 설립취지가 지금까지 이어져 그 큰 맥을 이어간다는 점에 감명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스님은 큰 비전을 항상 바라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알고 있는 흔들림 없는 수행자의 면모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둘째 날의 아쉬운 행자대회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 길을 우리가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것에 자긍심만큼은 굳건해지는 알찬 스님의 정리말씀 시간이었습니다.

점심공양을 한 후에는 두 번째 모둠활동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불대 개편안에 대한 소개와 법사님들이 진행자가 되어 개편된 불교대학을 직접 시연하는 모둠활동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연 활동이 끝난 후 나누기에서는 많은 분들이 새로운 불교대학 개편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로운 불대를 시연 하면서 설레었다. 참여와 체험을 유도하고, 재미를 더 붙였다는 의견 등이 있었습니다. 불교대학 개편안은 국내에서는 올 하반기부터 실시하기로 예정 돼 있으며, 해외에서는 지부와 법당마다의 실정에 맞게 올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에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 오후 일정으로는 활동을 주제로 한 스님의 즉문즉설이 있었습니다. 5명이 질문했는데 서원행자가 되면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JTS에서 봉사하고 싶은데 어떤 조건이 필요한 지 묻는 질문, 불대담당으로 두 사람의 갈등이 있을 시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다른 분들이 불교공부를 할 수 있도록 대신 아이를 돌봐주는 것에 문제가 없는지 묻는 질문, 나이가 들어 정토회 공동체에서 봉사하며 살 수 있는 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불대생 두 명의 요구가 충돌할 때, 불대담당으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불교대학 담당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최근 불교대학 입학생 수가 적어지고 중간에 그만두는 분들이 생기면서 현재 2명이 남아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 사이에 갈등이 생겨, 이런 경우에 수업의 진행자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문제는 남아있는 두 분 중 한 분이 수업에 아이들을 데려오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는데, 최근 방학을 하면서 거의 매 수업마다 데려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분은 아이들이 수업에 함께 하다 보니 산만해져서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다고 토로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아이 엄마는 마음이 불편하고 뜻이 맞지 않으니 같이 수업을 듣고 싶지 않다고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입학생 모집 때 ‘아이를 데려오면 안 된다’라고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실책도 있고, 입학생이 많을 때는 없던 문제가 2명이 수업을 하다 보니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진행자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풀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질문자에게 한 가지 물어볼게요. 도둑을 발견한 경찰이 도둑을 잡으러 쫓아가는데, 도둑은 경찰이 무서워서 도망을 가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도둑은 잡혀서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 관세음보살님에게 안 잡히게 해 달라 빌고, 경찰 역시 그 도둑을 잡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님에게 빈다면, 관세음보살님은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질문자가 답을 한 번 제시해보세요.”

“관세음보살님은 자유자재로 화현하실 수 있으니, 두 분의 뜻을 모두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찰에게는 범인으로 화현해서 잡혀주실 것 같고, 범인에게는 쫓아오다가 놓아주는 경찰이 되어주실 것 같습니다.”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정확하지는 않네요. (대중 웃음)

관세음보살님이 도둑으로 화현을 해서 경찰에게 잡히면, 이 도둑은 잡히지 않고 도망을 가게 되고 경찰은 도둑을 잡은 셈이 됩니다. 그러면 이 경우에 누가 처벌을 받게 됩니까?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와 유사한 예가 불교대학의 오계에 대한 부분에서도 나옵니다. 매가 비둘기를 잡으려고 할 때, 비둘기가 보디사트바 즉 수행자의 품 안으로 달려들어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때 수행자는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품 안에 숨겨줍니다. 그런데 매가 나타나서 수행자에게 자기 먹이인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함부로 생명을 해치면 안 된다’며 매에게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매는 수행자에게 ‘당신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다. 내가 비둘기를 먹이로 먹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그럼 비둘기 목숨은 중요하고 내 목숨은 중요하지 않는가, 이는 모순이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비둘기를 살리자니 매가 죽고, 매를 살리자니 비둘기가 죽는 모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디사트바의 해결책은 어느 한쪽에 부당함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다 정당한 요구를 한다 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둘기 무게만큼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서 매에게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는 허벅지 살을 먹어서 살게 되고, 비둘기도 생명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희생을 통해야 문제해결이 됩니다.

우리는 주로 자기희생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황금사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왕이 날마다 사슴 한 마리씩을 잡아 요리를 해 먹었습니다. 그러자 화살에 맞아 죽는 사슴은 한 마리인데, 화살에 안 맞으려고 피하다가 서로 부딪혀 죽는 사슴이 매일 열 마리가 넘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슴들은 매일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황금사슴이었던 사슴왕은 죽을 때 죽더라도 사는 동안만큼은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순번을 정해서 날마다 한 마리씩 왕에게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치는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왕도 날마다 수고로이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사슴들은 정해진 순번대로 순순히 왕의 먹이가 되었고 적어도 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릴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사슴 한 마리가 사슴왕을 찾아와 슬피 눈물을 흘리며 원래 오늘이 자기 차례인데 순서를 바꿔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유는 뱃속에 아기 사슴을 잉태하고 있으니, 아기 사슴을 낳은 후에 기꺼이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암사슴의 입장에서는 일리 있는 요청이었는데, 대신 순번이 당겨진 다른 사슴들은 자신들이 하루라도 먼저 죽게 되었으니 이에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평소 생각해내는 해결책은 대부분 이러한 범주에 속합니다.

사슴왕은 이때 그 대가를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그날 순번이 되기를 자처하여 왕을 찾아갑니다. 사슴왕을 본 왕이 놀라며 오늘 왜 사슴 왕이 오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사슴왕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왕은 비록 짐승인데도 스스로를 희생하는 마음이 기특하여 그날은 사슴고기를 먹지 않기로 하고 사슴왕을 살려줍니다. 그러나 사슴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오늘 요행히 살았지만 내일 죽을 사슴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왕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입니다.

그러자 왕이 그 말에 수긍하여 앞으로 사슴고기를 먹지 않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동족의 희생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슴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 동족은 살았지만, 앞으로 죽게 될 다른 짐승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왕에게 되묻습니다. 왕은 ‘그럼 앞으로 어떠한 짐승도 사냥하지도, 고기를 먹지도 않겠다’고 약조합니다. 사슴왕은 날짐승과 물고기에 대한 물음을 이어가며 결국 왕은 모든 살생을 금하며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해법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수행과 더불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플러스 알파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디사트바라고 할 때는 사슴왕이 한 자기희생처럼 플러스 알파의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플러스 알파가 되겠다고 선택하고 그런 이념에 따라 살아가겠다고 원(願)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겠다고 했을 때 본인에게는 심리적으로 어떤 도움이 될까요? 남에게도 도움이 되고, 스스로에게는 보람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원하던 것이 되었을 때 기분이 좋은 것과는 달리 남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는 뿌듯함이 생깁니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는 당장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됩니다. 이 왠지 모르게 어깨가 펴지는 뿌듯함과 보람은 욕구 충족과는 다른 것으로, 그로 인해 자기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생깁니다. 자기 존재에 대해서 뿌듯함이 생기는 거예요.

이 플러스 알파는 결국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행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밖에서 보면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본인에게 굉장한 삶의 자긍심을 줍니다. 물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타의에 의해 억지로 남에게 도움을 줄 때는 희생이 되지만, 자발적일 때는 보람이 됩니다.

우리는 정토행자로서 남을 돕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내 삶을 자유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관점을 가져야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질문자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지금쯤 답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대중 웃음) 이 문제는 질문자나 불대 수업 진행자가 아이를 봐주면 해결이 됩니다. 내가 희생을 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두 사람을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불교대학생에게는 방해 받지 않고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아이를 데려와서 시끄럽게 한다면 그 사람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불교대학을 다니면서도 권리만 주장하지 자기헌신을 할 생각이 없긴 합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서도 교리를 지식으로만 받아들이지 그 내용을 통해 자기 헌신을 할 마음은 없는 거예요. 불교대학 수업을 듣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아이 엄마도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비록 아이 때문에 조금 방해가 되더라도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배려심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그런 배려심은 없습니다. 다른 수업이라면 몰라도 불교수업을 듣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그 분이 그렇게 배려심을 내는 플러스 알파 역할을 해준다면 좋지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닙니다. 배려심을 내는 것은 그 사람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사항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두 사람 중 공부할 권리를 가진 사람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아이가 소중하고 내가 수업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수업 듣는 것을 방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아이를 가진 엄마에게도 불교대학 공부를 할 권리가 있지만, 남이 배울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행복할 권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할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사물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입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방해 받는 사람의 권리 주장은 맞는 이야기인데, 배려심은 조금 부족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배려심을 내는 것은 그 분의 선택사항이지 의무사항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그 분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아기 엄마의 경우에도 우선 불교를 공부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능하면 아이 엄마도 아이를 데리고 와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환경 조성에 힘을 써야 하는데, 그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 아이를 데려온다면 그것이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문제가 됩니다. 만약 다른 분들이 자발적으로 배려를 해준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이를 데려오지 않거나 본인이 그만두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는 결정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아이를 봐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은 방해 받지 않고 수업을 듣고, 아이 엄마도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즉, 수업을 듣는 동안 주변에서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봉사자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직 아이를 봐줄 여건이 되지 않다고 아이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 엄마가 어느 정도 정리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 엄마가 입학 때 아이를 봐준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수업 들을 권리를 주장한다면 현실적 여건의 어려움을 잘 설명하고 수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렇게 각자의 권리만 주장하는 입장을 견지한다면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교리에 대해 배운다고 해도 실제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 이야기로 봐서는 두 사람 모두 자기의 권리만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둘 다 불교대학이 큰 도움이 안 되고 있어요. (대중 웃음) 불교대학 입학금은 사실 수업료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상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수업을 들을 여건이 안 되는 상황에서 자기의 권리를 계속 주장한다면 결국 우리 입장에서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은 입학금을 돌려주고 폐강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희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이유로 불교 공부를 하는데 서로 방해가 된다면, 굳이 불교를 공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과 불교대학을 통해 배우는 내용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 서로 배려심을 내라는 것이 불교대학의 내용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머리로 지식만 배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조금 불분명합니다.”

이후 스님은 이원주 JTS대표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저녁공양을 하였고, 그 다음 일정으로는 소감문 발표자들의 나누기 시간이 있었습니다. 수련에 참가하여 여러 법당들의 이야기와 사정 등을 듣고 새롭게 발심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소감, 민다나오에서 수련을 하여 JTS활동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 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감 등을 나누기가 있었습니다.

알라원에 가는 산행을 위해 공식적인 일정의 마지막으로 회향식이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불교적 의식들을 통해 우리가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회향법문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사를 할 때에는 늘 삼귀의(三歸依)를 합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를 진행할 때 국민의례를 하듯이, 불교 행사에 있어서도 의례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삼귀의를 하고, 그 다음으로 반야심경 독송을 합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삼귀의 후 오계를 하는 것이 의례입니다. 북방불교에서는 삼귀의, 반야심경이에요.

삼귀의에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은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신 분, 일체를 깨달으신 분을 존경하고 그 분께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내 인생의 목표가 나도 그 분처럼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붓다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라는 말은 그런 붓다가 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모든 괴로움이 나의 무지(無智)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또 ‘무지를 깨우치면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그분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요지가 중도,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삼법인인데 이러한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삼귀의의 첫 번째는 수행의 목표에 대한 것으로 그 목표가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길을 함께 할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함께 할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은 수행자들입니다. 붓다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함께 하고,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수행자들입니다. 이렇게 목표와 방법을 함께하는 수행자들이 바로 내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승(乘)은 바로 대중을 뜻합니다. 그 뜻을 풀어보면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복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승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내가 함께 해야 할 수행자들에게 귀의합니다’를 뜻합니다.

이렇게 목표, 방법, 함께할 사람들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 바로 수행공동체입니다. 이를 분명히 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논의도 하고 활동도 하겠다는 의미로 삼귀의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반야심경 봉독을 하는데,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만 간추려놓은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경전이지만 가르침의 요지가 들어있고, 또 우리가 대승불교권에 속하다보니 반야심경 봉독을 합니다. 남방불교권에서는 대신 오계를 봉독합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늘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는 고집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사실 잘 살펴보면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내가 옳다고 할 것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무아(無我)사상, 공(空)사상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야심경은 바로 이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마치 꿈속에서는 있는 것 같지만 눈을 뜨고 보면 없고, 어두운 곳에서는 있는 것 같지만 불을 밝혀 보면 없고, 눈을 감고 보면 있는 것처럼 같지만 눈을 뜨고 보면 없고, 얼핏 보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없다는 의미입니다. 꿈속에서 보거나, 눈을 감고 보거나, 어두운 데서 보거나, 얼핏 보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색(色)입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서 보고, 불을 밝혀 보고, 눈을 뜨고 보고, 자세히 보면 괴로워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바로 공(空)입니다. 바로 이 내용을 설명하는 경전이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의 내용을 모두 풀어서 한글로 쓰기는 어렵겠지만 만약 누군가 반야심경의 내용을 쉽게 풀어서 번역해달라고 한다면 방금 설명한대로 할 거예요.

꿈속에서는 있는 것 같은데, 깨어나서 보면 없다.
어두운 곳에서는 있는 것 같은데, 불을 밝혀 보면 없다.
눈을 감고 보면 있는 것 같은데, 눈을 뜨고 보면 없다.
얼핏 보면 있는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면 없다.

이것이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그러니 괴로울 일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얼핏 보니까 괴로운 일이 있어서 난리지만, 마치 꿈속에서 강도가 쫓아오면 도망가듯이 이건 꿈속에서의 난리인 거예요. 꿈에서 깨고 자세히 보면 쫓아오는 강도가 없습니다. 이것을 늘 가슴에 새기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늘 새기고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우리는 이 관점을 지닌 수행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행사를 진행한다는 의미로 행사에 앞서 삼귀의, 반야심경으로 시작하는 예불로 시작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서 돈을 버는 것이나 권력을 갖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행의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서 법을 논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국가행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국체를 분명히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에 관련된 일을 논의해야 하는 만큼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직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 다음 관련된 일을 논의해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회향법문의 말씀 중에 아직은 아태지역이 정토회 해외지부에서 가장 열약한 실정이지만, 짧은 시간동안은 아니겠지만 50년, 100년 정도의 긴 시간이 흐르면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스님은 "지역마다 어려움이 있다. 저도 듣고, 해외사무국 국장님, 지구장님, 법사님도 듣고 했으니 오늘 여러분이 하신 것들이 상황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돌아가서 부지런히 정진하시고요. 감사합니다" 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회향법문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중들은 박수와 함께 뿌듯한 감정을 느끼며 아시아/태평양지부 해외정토행자대회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내일은 JTS센터에서의 마지막 날이며, 알라원으로 산행을 가는 날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류현동, 최영희, 김경필, 조태준, 박은선

<스님의 하루>에 실린 모든 내용, 디자인, 이미지, 편집구성의 저작권은 정토회에 있습니다. 허락없이 내용의 인용, 복제는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