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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설

말다툼 한 아내에게 어떻게 사과할까요?/ 법륜스님 즉문즉설

말다툼 한 아내에게 어떻게 사과할까요?


질문자 “저는 결혼한 지 23년이 되었습니다. 말다툼을 하고 나면 늦어도 잠들기 전에 사과를 하려고 말을 꺼내는데 그것이 도리어 큰 말다툼이 되어서 새벽 한 두시까지 언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사과를 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또 아내로부터 공격적인 말을 들으면서 저도 흥분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법륜스님 “사과를 할 때 정말로 사과만 하면 갈등이 생길 일은 없습니다.‘내가 사과를 하니 네가 내 사과를 받아들여라’ 하는 요구 때문에 사과가 다시 싸움이 됩니다. 사과를 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는 사람의 뺨을 때린 다음에 그 사람이 화를 내니까 사과를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화를 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사과를 했는데도 네가 감히 그 사과를 안 받아들여?’ 이럴 수는 없잖아요. 좋아하는 것도 내 자유고, 사과하는 것도 내 자유예요. 그런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상대의 자유이고, 마찬가지로 내 사과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도 상대의 자유입니다.”


“대개 제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기 보다는 너도 이 부분에서 잘못하고 나도 저 부분에서 잘못했으니까 이 정도에서 그만하자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사과가 아니라 휴전 제안이죠. (청중 웃음) 그리고 상대방은 휴전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아직 휴전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계속 이야기가 이어질 수도 있어요.”


“해가 거듭될수록 아내가 점점 더 잘 싸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원래 나이들수록 여자가 이기고 남자가 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도 자기가 젊을 때처럼 계속 이기려고 하면 이사 갈 때 안 알려주고 가는 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조심해야 해요.” (청중 웃음)


“계속 고민이 되는 부분은 제 잘못이 70% 정도 되는 것 같고 상대방의 잘못도 30% 정도는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 제가 70% 정도의 사과만 하면 되는지 아니면 100% 사과를 다 해야 하는지 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나머지 30%는 모른 척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욕적인 말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 같은데 특히 저한테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보통 사람과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며 인격적으로 공격한다는 느낌이 들 때 반응을 크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왜 인격적 공격인가요?”


“당신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친구도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아내 스스로는 다수 중 한 사람이지만 저는 소수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주장을 해요.”


“다수 중 한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건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자가 그런 말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것은 질문자도 다수가 되는 것이 좋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선입견이 없다면 아내가 그런 말을 할 때 ‘그래, 당신은 다수 해. 나는 소수할게.’ 라고 말하고 끝내면 되죠.” (청중 웃음)


“저도 시간이 늦어지면 ‘왜 이런 설명을 구구절절이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피곤하니까 끝내자고 하는데…”


“일부러 ‘끝내자’라고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아내가 ‘나는 다수고, 당신은 소수야’ 라고 주장하면 ‘그래 당신은 다수 해. 나는 그냥 소수할게’ 라고 답을 하면 대화가 저절로 마무리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왜 당신만 다수야, 나도 다수야’라고 주장을 맞받아치려니까 대화가 길어지죠.”


“제가 속이 좁아서 그게 잘 안 되는데…” (청중 웃음)


“스님의 말은 질문자가 속이 좁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 이건 속이 넓고 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자가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질문자의 무의식 속에 ‘다수가 좋다’라는 선입견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선입견이 없으면 아내가 그런 말을 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수가 꼭 좋은 것인가?’ 하고 되물어보는 거예요.”


“아내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는 다수이기 때문에 자기의 말이 옳고,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제 말은 틀렸다고 주장을 합니다.”


“계속 그렇게 주장할 때는 경상도 말로 ‘그래 니 똥 굵다’ 하면 돼요. (청중 웃음) 상대방이 계속 굵다고 주장을 하니까 그 주장을 알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넘어가면 되죠.”


“저도 말다툼이 생기고 나면 사과할 부분은 사과하고, 일일이 따지고 싶진 않아요.”


“따지고 싶지 않으면 그냥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넘어가면 된다는 거예요. 상대방이 계속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하면 ‘그래, 당신 말이 맞어’하고 받아들이면 돼요. 그럴 때는 그 주장이 객관적으로 옳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어, 당신 마음을 알겠어’라는 뜻이에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거예요. 질문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많이 접해보셨나요?”


“아니요, 잘 모르는 편입니다.”


“그러면 스님이 이 컵, 물병, 뚜껑을 가지고 비유를 들어볼게요. 우리가 대개 ‘컵이 크다’ 혹은 ‘컵이 작다’ 라고 할 때, 우리는 크고 작은 것이 컵의 객관적인 상태를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컵이 작다고 할 때는 컵을 물병과 비교했을 때 작다고 인식되는 것이고, 이 컵이 크다고 할 때는 컵을 뚜껑과 비교했을 때 크다고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컵이 크다 혹은 컵이 작다고 하는 것은 컵 자체의 성질이 크거나 작다는 존재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크게 혹은 작게 인식하는 인식의 문제인가요?”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은 없어 , 단지 다를 뿐


“인식의 문제요.”


“네. 크다, 작다는 것은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존재 자체가 크거나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새 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크다고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크다고 하고, 작다고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작다고 하고, 새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새 것이라고 하고, 헌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헌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옳은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옳은 것이 되고, 그른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그른 것이 됩니다. 이렇게 일체(一切)는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옛말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학생을 가리키며 ‘저 학생이 착한 학생인가요, 나쁜 학생인가요?’라고 물으면 저 학생은 착한 학생도 아니고, 나쁜 학생도 아닙니다. ‘저 학생은 공부를 잘하나요, 못하나요?’라고 물어도 저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 학생은 다만 저 학생일 뿐이에요.


그런데 주어진 시공간에서 비교를 통해 인식이 될 때는 저 학생도 다른 친구와 비교해서 때로는 착하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나쁘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때로는 공부를 잘한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못한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때로는 키가 크다고 인식될 때도 있고 작다고 인식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옳고 그른 것이 객관적으로 있다는 전제를 하고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옳고 그른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 ‘어떤 때는 아내가 옳고, 어떤 때는 내가 옳고, 어떤 때는 아내가 30% 옳고 내가 70% 옳고, 어떤 때는 아내가 70% 옳고 내가 30%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옳고 그른 것이 있다는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가 옳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고, ‘내가 옳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사실의 관점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이렇듯 진실의 면에서 옳고 그름이 없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뿐이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에요. 나의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옳고 상대방이 그르겠죠.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주관에서는 상대방이 옳고 내가 그른 것이 됩니다.


객관적으로는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를 뿐이고, 주관적으로 내 입장에서는 내가 옳고 상대방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본래 옳고 그른 것은 없고, 또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조건에서는 내 생각에는 내가 옳고 상대방 생각에는 상대방이 옳은 거예요.


그러니 상대방이 옳다는 주장을 할 때 ‘그래, 네가 옳아’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상대방의 말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즉,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입장이 다르다고 다툴 필요가 없어요. ‘당신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당신의 관점은 그렇구나’하고 볼 뿐입니다.


‘내가 옳다’, ‘아내가 옳다’, ‘내가 30% 옳고 아내가 70% 옳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주관을 객관화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내가 70% 잘못했고 당신이 30% 잘못했으니, 내가 70% 사과하면 당신도 30% 사과해’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입장입니다. 아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응, 당신 입장은 그렇다는 거죠?’ 하면 되는 문제예요.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 가장 쉬워


살다보면 둘이 의견을 조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율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예요. 부부가 살다보면 방의 온도를 두고도 서로 다른 선호도를 보일 때가 있어요. 한 쪽은 추워하는데 다른 쪽은 더워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때도 내가 옳고 네가 그르거나, 네가 옳고 내가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체질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의 체질을 보면 몸에 열이 많은 사람도 있고, 추위를 많이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본인이 덥게 느끼니까 다른 사람도 더운 줄 알거나, 본인이 추위를 느끼니까 다른 사람도 추운 줄 알기가 쉬워요. 그러다보면 ‘별로 춥지도 않은데 왜 춥다고 그래?’라고 하거나 ‘왜 별로 덥지도 않은데 자꾸 덥다고 그래?’라고 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건 마치 한 사람은 컵을 물병과 비교해서 작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컵을 뚜껑과 비교해서 크다고 하면서, ‘너는 왜 컵이 크다고 하냐?’ ‘너는 왜 컵이 작다고 하냐?’하며 싸우는 것과 같아요. 이럴 때는 ‘아, 상대방은 크다고 인식하는구나’ 혹은 ‘아, 상대방은 작다고 인식하는구나’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 아내 입장에서는 춥구나’ 혹은 ‘남편은 지금 더워하는구나’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돼요.


이렇게 이해가 되어도 실제 상황에서는 방 온도를 결정해야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 중 첫 번째는 상대방에게 맞추는 방법이에요. 아내가 춥다고 하면 아내에게 온도를 맞추고 남편은 옷을 조금 가볍게 입으면 돼요. 아내가 덥다고 하면 아내에게 온도를 맞추고 남편은 옷을 조금 두껍게 입으면 됩니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나만 맞춰주면 되니까, 내가 결정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런데 ‘왜 나만 맞추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고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어렵다면 둘 사이에 중간점을 찾아서 타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중간점 찾기가 때론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에게 조금 더 맞추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내 입장에서는 중간이라고 느껴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70%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느끼기도 하고, 상대방 입장에서는 중간이라고 느끼지만 내 입장에서는 70% 상대방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느낄 소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잘 감안해서 둘 사이에 타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타협점을 못 찾으면 같이 지낼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해도 여전히 같이 지낼 수 있어요. 그건 방을 따로 사용하는 거예요. 서로 볼 일이 있을 때만 같은 공간에서 지내고, 더운 사람은 에어컨을 켜놓은 방에서 지내고 추운 사람은 온도를 조금 더 높여서 지내면 돼요.


이렇듯 두 사람 간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에는 상대방에게 맞추는 방법, 둘 사이에 타협점을 찾는 방법, 서로 다른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중 하나를 선택하면 돼요.”


“네,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맞추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웃음)


“아내에게 꼭 맞추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상대방에게 맞추는 방법은 내가 맞추겠다는 결정만 하면 되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니까 가장 쉽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방법이 가장 쉬우니까 그 방법을 선택하는 거예요.


질문자가 현명하다면 아내와의 관계를 착하고 나쁘고의 관점으로 보지 말고 조금 더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기고 지는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나중에 나에게 좋을까?’하고 대처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때로는 상대방에게 맞추는 방법이 좋을 때도 있고, 타협하거나 조정하는 방법이 좋을 때도 있어요. 기분이 나빠서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취향과 특성이 다르니까, 예를 들어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각자의 공간을 더 가져본다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말다툼이 생기면 조율을 하거나 내가 맞추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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