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해외지부 활동가 수련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은 선유동천 나들길을 따라 산책도 하고 즉문즉설도 하는 등 하루 종일 해외지부 활동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온 뒤라 하늘도 화창하고 산들바람도 불어 기분이 절로 밝아지는 날씨였습니다.

문경정토수련원에서 새벽 예불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 활동가들은 오전 내내 ‘정토회의 역사’를 주제로 법륜 스님의 특별 법문을 함께 들었습니다. 스님과 함께하는 종일 일정이어서 모두들 기대감에 들떴습니다. 진지한 자세로 정토회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스님으로부터 들은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정토회의 역사, 해외 정토회의 역사에 이어 해외 정토행자대회의 역사까지 그 배경과 발전과정을 아울러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정토회의 조직 구조인 대의원회가 이루어지기까지의 배경설명을 들으니, 대중이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 선명히 보이면서 마치 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해외 활동가들은 4개로 나뉘어진 지구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오는 9월에 4개 지구별로 정토행자대회를 열 예정인데, 오늘 스님의 법문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문경수련원에서 차로 15분 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는 선유동 연수원을 방문했습니다. 건물 구석구석을 다니며 설명해주시는 스님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니 이 연수원에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좋은 법을 만나게 될까 상상이 되어 뿌듯하고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선유동천 나들길을 따라 산책을 했는데요. 산바람을 맞고 질경이를 밟으며 계곡을 올라가는 내내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웠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소풍이었습니다. 계곡 물에 발도 담그고 단체 사진도 찍으며 비행기 타고 먼 거리를 날아온 여독을 가볍게 풀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스님이 사 준 잔치국수였습니다. 한 참석자는 “6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오후에는 해외지부 현황 발표 시간을 가진 후 법사님의 정리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행복의 씨앗을 조금씩 퍼뜨려나가는 다양한 사례발표를 들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녁에는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구마다 다양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9차 천일결사부터 각 지역의 특성이 많이 반영되면서 지역 분권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불교 의식을 하는 이유와 법복을 입는 이유’에 대한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불교 의식을 하는 이유와 법복을 입는 이유에 대해서 지역에서 자꾸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하면 좋을까요? 한 불대생의 경우 '장소를 빌려서 하려면 돈이 드는데 의식 하는 시간까지 돈을 내기가 아깝습니다. 굳이 장소를 빌리지 말고 그 돈을 아껴 카페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차를 마시면서 법문을 들읍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해요. '정토회가 종교에 대해서 열려 있으면서 삼귀의나 반야심경 같은 걸 왜 해요?' 하고 물어볼 때 대답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법복을 입는 게 권위를 내세우는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스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래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이 옷을 입고 여러분들을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는 하거든요. 어떻게 대답을 하면 좋을까요?”

“불교라고 할 때 불교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가 종교로서의 불교가 있어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있고 종교로서의 이슬람교가 있듯이 종교로서의 불교가 있는데 이게 대부분의 불교가 보이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있어요. 예를 들어 어느 대학 불교학과를 간다고 하면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배우는 것이지 종교로서의 불교를 배우는 건 아니거든요.

불교가 인도에서 일어났으므로 종교로서의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당시 전통 종교가 브라만교니까 불교가 종교화할 때는 그걸 본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불교가 철학으로 가면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교가 있기 전에 이미 브라만교가 있었고 우파니샤드 철학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불교는 이 둘을 떠나서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수행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이 없었어요. 처음에 부처님 계실 때는 사람들이 '이게 종교인가, 철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겠죠. 부처님의 어떤 말씀에는 철학적인 요소가 있고, 어떤 말씀은 종교적인 것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기 때문에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걸 모두 떠나 있지만 세속의 눈으로 보면 불교 속에는 종교도 좀 들어있는 것 같고 철학도 좀 들어있는 것 같아 보이는 거죠.

불교가 전해내려오면서 결국 사회 속에 편재될 때는 둘로 나눠서 편재되었습니다. 하나는 종교로서의 불교로, 하나는 철학으로서의 불교로 흘러갔어요. 그런데 지금 정토회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다시 정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수행적 관점에서 볼 때는 종교로서의 불교와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가까운 게 아니라 종교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종교로서의 이슬람교가 더 가깝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같은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철학으로서의 불교도 신학으로서의 기독교나 유교와 더 가깝습니다. 그건 논리학이기 때문이에요. 합리적으로 뭘 따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쪽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정토회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추구하고 있지만, 제가 볼 때 종교로서의 불교가 정토회에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 정도 섞여 있어요. 정토회도 종교 의식을 조금은 하고 있으니까요. 천도재를 지내거나 예불을 드리는 것도 다 종교로서의 불교 의식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성제와 팔정도를 예로 들어보면요. 수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또는 호흡이 깨어있기 위해서 관점을 잡는 것은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그러나 '팔정도에는 8개가 있다. 정견, 정사, 정어...' 이렇게 외우는 것은 교리로서의 불교, 학문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지금 정토불교대학에서는 학문으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교리로서의 불교를 상당부분 배우고 있어요. 이것도 정토회 안에 20퍼센트 이상 돼요. 종교로서의 불교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학문적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은 뒤 나누기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리면 이것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교리 배우는 불교만 하고 있는 거예요.

현재 정토회에는 이런 요소가 다같이 들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가톨릭 신자도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배울 수 있고 학문으로서의 불교를 배울 수 있지만, 가톨릭 신자는 종교로서의 불교에는 거부감을 갖습니다. 종교로서의 카톨릭과 종교로서의 불교는 종교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반면 불교 신자들은 종교로서의 불교 의식에는 아무 저항감이 없고 친근감이 있는데,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굉장히 저항감을 갖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절에서 배운 것과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정토회는 기독교인이 적응하기보다 불교인이 와서 적응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불교 안에는 이런 종교적인 요소가 일부 있고, 철학적인 요소도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수행이 중심입니다. 수행을 정체성으로 하고 있지만, 종교로서의 불교와 철학으로서의 불교도 같이 포함돼 있습니다.’

만약에 다른 종교인이 올 때는 정토회 안에 남아 있는 종교로서의 불교 의식을 수용해줘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으라는 뜻이 아니에요. 절에 가서 템플스테이를 할 때는 그 부분을 수용해줘야 하잖아요. 성당에 가면 미사하는 것을 수용해줘야지 거부하면 안 되잖아요. 정토회 안에서도 이런 종교적인 부분을 우리가 수용해야 합니다. 절에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저는 항상 이렇게 수행적 관점을 잡아줍니다.

'종교 의식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한 마음을 지켜보면서 불교 의식 때문에 불편한지 아니면 기독교 의식과 다르기 때문에 불편한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불편한 것이지 불교 의식을 하기 때문에 불편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 '정토회는 불교가 아니다‘, ’정토회는 종교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안 돼요. 정토회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교적인 요소도 일부 있고 철학적인 요소도 일부 있어요. 예불, 삼귀의, 반야심경을 하고 천도재를 지내는 것은 현재 정토회에서 수용하고 가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정토불교대학에 다니려면 이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설명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종교의식을 없애고 갈 건지는 앞으로 더 논의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어쨌든 현재 정토회는 종교 중에서 불교라는 카테고리에 넣어져 있잖아요. 그걸 없애버리면 우리는 의식 차원에서 다른 불교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요. '정토회에 30년 다녔다', '내가 불교 신자다' 라고 하는데 예불도 할 줄 모르고 반야심경도 할 줄 모르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절에 온 것과 똑같이 되어버려요. 이런 문제 때문에 불교 의식을 최소로만 수용하자고 한 것이 예불, 반야심경, 해탈주와 간략한 천도재입니다.

그리고 법복은 권위로 입는 게 아니에요. 법문을 들을 때는 일상복을 입지만 법회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수행복을 입기로 한 겁니다. 이것을 권위주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하면 돼요. 저도 ‘승복 비슷하게 입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봐도 깔끔하고 우리도 편리하면서 또 사복은 아닌 그런 디자인을 하자’ 고 10년 전부터 얘기했는데, 디자인을 아직도 못해서 못 만들었어요.(모두 웃음)

저는 법복을 입으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진행 상 이런 옷이 필요로 하다 보니까 그냥 불교 쪽 옷을 받아서 입게 됐고, 자꾸 입게 되다 보니 지금 보편화가 된 거예요. 법복은 그냥 절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입게 된 거예요.” (모두 웃음)

“작년에 한 번 천도재를 했거든요. 목탁 치면서 정식으로 했는데 그걸 보고 놀라서 안 나오게 된 분이 계세요.” (모두 놀람)

“그걸 보고 놀라서 안 나오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게 좋아서 나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안 나오는 것은 안 나오는 걸 감수하면 돼요.”

“안 나오게 된 이유가 그때 너무 좋아서 막 울었던 분이 계셨거든요. 그걸 또 이상하게 생각해서 안 나오시게 됐어요.” (모두 웃음)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한 원칙에 맞게 수용이 되는 사람들은 오는 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못 오는 거예요. 정토회에 와서 종이컵을 쓰겠다고 하면 정토회에 못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컵을 본인이 갖고 다니면 됩니다. 여기 있는 컵으로 먹으려면 다들 립스틱을 바르지 말자고 우리가 정해야 하는데 그건 정할 수가 없잖아요. 모두가 자기 컵을 가지고 다니면 종이컵 문제가 해결이 되죠.

의식도 마찬가지예요. 의식이 싫으면 그 시간에 자기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오면 되지 그거 자체를 못하게 하면 안 되죠. 다수 대중의 문제인지, 몇 사람의 문제인지를 살펴봐야 해요. 또 좋아하는 게 다수 대중인지도 봐야 해요. 한 두 사람이 좋아한다고 계속 할 수도 없잖아요. 그걸 평가하셔서 취지를 잘 설명한 후 의식을 진행하든지, 회수를 조절하든지 여러분들이 건의해서 바꾸시면 돼요. 이런 의식은 다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요.

천도재를 지낸다거나 예불을 한다고 법당에 안 나오겠다는 사람은 스님 법문을 잘못 들은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경계일 뿐입니다. 그 경계에서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보면서 '아, 이것은 내 생각을 고집하니까 불편이 생기는구나' 하고 알아차려서 내 고집을 내려놓고 편안해지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걸 반야심경 강의에서도 가르치고, 금강경 강의에서도 가르치고, 매일매일 즉문즉설에서도 가르치고, 불교대학에서도 가르치는데, 스님 법문을 들었다면서 불교 의식이 싫다고 이렇게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한 게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아마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일 거예요. 앞뒤가 딱 맞는 논리가 좋아서 지적으로 이해해하고 '아, 불교 좋다' 이러는 사람에 해당됩니다.

종교와 철학은 정토회의 한 부분일 뿐이지 절대 정토회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목표예요. 거기에 죽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종교 의식이 좀 있고, 논리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철학적인 요소가 좀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목표는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어떤 상황에서든 내 마음을 평화롭게 관리해가는 걸 말합니다.”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법당에서 불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었는데 스님의 답변을 듣다 보니 해외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겠구나 이해가 되었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명확히 짚어주신 부분도 좋았고 정토회 안에 그런 요소가 들어온 이유를 설명해주신 부분도 좋았고, 다수의 요구인지를 살펴보라는 말씀도 참 좋았습니다. 불편한 마음이 의식 때문이 아니라 내 습관 때문에 일어나는 걸 봐야 수행이라고 지적해주실 때는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 각 지구별로 당면한 어려운 점들을 듣기도 했는데, 한 참석자는 “상당기간 정체되었던 예민한 사안들이 왜 제 시간에 처리될 수 없었던 이유도 알 수 있게 되어 좋았다.”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해외 활동을 하면서 놓치기 쉬웠던 수행자로서의 관점을 되새길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많은 대화들을 나누는 가운데 문경수련원에서의 밤도 더욱더 깊어만 갔습니다. 내일은 용성진종조사 탄신 134회 기념일입니다. 조사님이 태어난 곳인 장수 죽림정사에서 비석 제막식을 비롯해 기념 법문, 즉문즉설 시간을 대중들과 함께 가질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박은선 신재숙 사진 이희정 녹취 손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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