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회 해외지부 활동가 수련 입재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해외정토회 총무님들 26명은 오늘 입재식을 시작으로 앞으로 일주일 동안 각종 수련과 회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스님은 오전 내내 그동안 길렀던 상추 등 농산물을 해외지부 활동가들에게 맛보이기 위해 수확하는 두북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해외지부 활동가 수련 입재 법문을 하기 위해 문경정토수련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3시30분, 삼귀의 반야심경과 함께 입재식이 시작되었습니다. 해외지부 상임법사인 선주 법사님의 인사말씀이 있은 후 정토회 김은숙 대표님의 격려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시간 내고, 경비 내서 먼 거리를 이동해 참가한 해외 활동가 분들을 맞이하는 법사님과 대표님의 마음에 정성이 가득 느껴졌습니다.

이어서 해외지부 사무국장 이정인 보살님은 인사말씀에서 “아주 떨린다”며 설레이는 마음을 표현했는데요. 스님도 입재 법문의 시작을 “해외에서 오신 분들 앞에 앉으니까 떨리네요” 라고 해서 대중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오늘 입재 법문의 주제는 "일과 수행의 통일, 소통과 화합, 지구자치 분권의 의미" 입니다. 스님은 1시간 20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어차피 하는 봉사활동인데 조금 더 효율을 높이려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신 부분이 참가한 대중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 중 일부분만 짧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인생관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어릴 때는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어떻게든 나 몸 하나 건사하고, 가족들 돌보면 된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누구나 젊을 때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자 해요. 그런데 살다보면 그저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쁘고, 가족들 건사하기도 바쁘죠. 많은 경우에는 그것도 잘 안 되서 어떻게든 좀 도와달라고 여기저기 남에게 요청하고 신에게 빌고 다니는 인생을 살게 돼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수행을 통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살게 되고, 또 정토회를 통해 이웃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어찌보면 우리가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이런 활동을 통해 조금은 실천하고 있는 거예요. 혼자서는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일도 같이 모여서 하면 가능해질 때가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토회에서 ‘모자이크 붓다’를 제안하게 된 거예요.

가족과 세상을 떠나 출가해서 수행 정진하고, 오직 세상에 헌신하는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가진 시간과 돈의 일부를 모아서 어릴 때 가졌던 꿈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것은 가볍게 해볼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내가 부처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여러분 각자가 부처의 일부, 즉 모자이크 붓다가 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정토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이런 관점이 분명해야 수행 정진도 남의 눈치를 봐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정토회에서 하는 활동도 시간과 경비를 주체적으로 들여서 해나가게 됩니다. 관점이 분명하면 마치 배고플 때 밥을 사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정토회에서 필요한 활동에 시간과 경비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반면 관점이 이렇게 잡히지 않으면 정토회에서 하는 활동이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경비 지출도 부담되고, 시간 내는 것도 부담이 됩니다. 그래도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은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의 껄떡거림은 넘어섰기 때문에 오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둘째, 활동을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이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왕 우리가 마음을 내서 하는 일이라면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욕심을 내서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하는 일이라면 조금은 효율적으로 진행하면 좋잖아요. 세상의 진화와 발전도 모두 다 효율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기존에 하던 방식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을 발견하면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제안해서 부족한 부분들을 차츰 개선해나가기 위해 이렇게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변화에 있어서는 항상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변화를 하는 것이 전보다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고, 변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더 비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어요.

역사 속에서도 한 나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왕이나 대신이 모두의 이익보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기존의 시스템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다보면 어느새 나라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회사 운영이나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차츰 회사가 어려워지고, 개인의 사회적 역량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반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변화인 ‘개혁’이라는 것도 있어요. 물론 이 경우에도 사람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익숙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저항을 이겨내고 개혁을 이루어내서 사회 전체가 효율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든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든 지금과는 다른 변화를 추구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릅니다. 저항은 좋고 나쁜 게 아니라, 그저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듯이 변화에 대해 따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물리적 현상에도 ‘관성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게 있잖아요. 멈추어 있는 물체는 계속 멈춰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고 합니다. 멈추어 있는 물체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도 변화이고,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려는 것도 변화예요. 멈추어 있는 물체를 움직이려고 할 때는 계속 멈추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 저항이고,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려고 할 때는 계속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저항입니다. 두 경우 모두 변화에 따르는 저항이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도 변화이기 때문에 저항이 따르고, 마찬가지로 쇠퇴하는 과정도 변화이기 때문에 저항이 따릅니다. 누군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저항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온 관성에 의해 어색함을 느끼게 되고 그 어색함에 의해 ‘그냥 하던대로 하면 안 되나’하는 저항이 따르는 겁니다. 변화에는 이런 저항이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정토회가 변화해 온 과정을 돌아봐도 지나놓고 보면 효율적이지만 그걸 처음 시작할 때는 저항이 따랐던 것이 많습니다. 정토회도 처음에는 법당 하나로 시작을 했어요. 그러다가 전국적으로 법당이 여러 개 생기기 시작하고, 지역적으로 나뉘어서 운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법당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총무가 모든 책임을 지면 되었지만 전국적으로 여러 개가 생기다보니 모두를 총괄하는 사무국이 생기게 되었어요.

이런 변화로 인해 지방에는 큰 부작용이 없었지만, 서울의 경우에는 당시까지 총무가 모든 행정을 책임지다가 사무국장이라는 자리가 갑자기 생기니까 혼란이 오기 시작했어요. 총무와 사무국장 사이에 역할 분담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체제로 보면 사무국장이 서울과 지방의 법당들을 모두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기존에 총무가 서울 법당을 담당하는 관성이 있다보니 총무는 여전히 서울 법당을 관리하고 사무국장은 지방 법당들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총무 위에 사무국장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 병렬 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변화 초기에 겪은 어려움이에요.

이처럼 규모가 달라지면 전과 다른 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새로운 제도가 더 효율적이라고 하더라도 기존의 운영방식이 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갈등이 빚어지곤 해요. 이런 현상은 새로운 제도는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것은 정토회를 하나의 지부만 운영하다가 세 개의 지부로 나누어서 운영을 시작하던 때도 그랬고, 세 개의 지부를 여덟 개의 지부로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고, 나아가 국제부가 생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여기서 나쁜 변화를 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도에는 늘 따르는 현상이에요. 지금 실천하고 있는 대의원 제도 역시 아주 효율적이고 좋은 제도예요. 기존에는 집행부만 있었고, 대의원 제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행을 담당하는 기관과 의사결정을 하는 기관을 나누게 되다 보니 집행부 입장에서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대의원 회의에 문의를 해야 하고, 집행을 한 다음에는 다시 대의원들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행정처에 일이 아주 많아졌어요.

처음부터 이런 제도로 진행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처음에는 대의원 제도가 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제도가 생겨나서 빚어지는 문제예요. 한편으로는 효율적으로 나아진 점이 있지만, 기존에 일을 진행하는 부서에서는 전보다 일이 많아지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해외사무국에서도 작년부터 국제국이라는 곳이 따로 생기면서 지금 같은 문제를 겪고 있어요. 이 역시도 무언가가 잘못되었거나 누가 잘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입니다.

모두가 까르마, 습관에 의한 문제예요. 마치 수세식 화장실만 쓰다가 재래식 화장실을 쓰면 불편하듯이, 기존과 다른 것을 하려면 불편한 거예요. 재래식 화장실만 쓴 사람이 수세식 화장실을 써도 불편합니다. 어느 화장실이 좋고 어느 화장실이 나쁜 게 아니라 기존의 습관과 다른 생활을 해야 하면 불편함이 생기는 거예요.

불편함이 생길 때 ‘아, 이게 내 습관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게 ‘화장실 때문이다’라고 착각을 하면 ‘화장실을 왜 이렇게 만들었어?’하고 불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불편함이 일어나면 ‘화장실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에 불편함이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불편하긴 하지만 그에 따른 불평과 불만은 생겨나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마음 공부입니다.

여러분 중에 불편함조차 일어나지 않는 게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것은 목석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도(道)라고 오해하는 거예요. 누구나 환경이 달라지면 자동적으로 불편함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이 일어나는 원인을 정확하게 알면 그것이 불만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저 불편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요.

이렇게 알아차리지 않고 불편함이 일어나는 원인을 외부로 돌려 환경을 탓하게 되면, 불편한 마음이 불만이 되고 나아가 미움으로 번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할 때는 자기 마음에서 불편이 일어날 때를 늘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불편함에 깨어있어야 해요. 그런데 중간 중간 놓칩니다. 놓칠 때는 자기의 불편함이 화장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는 착각에 확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상(相)을 지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주관이 객관화되는 것을 상을 짓는다고 표현해요.

상을 지으면 반드시 집착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관을 주관이라고 알지 못하고 객관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회의를 하고 토의를 할 때 각자 자기 생각을 토대로 ‘이것이 더 낫다, 이것이 더 효율적이다’ 라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 가진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불평과 불만이 생겨납니다. 같은 것을 두고도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가’ 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가령, 재래식 화장실을 두고도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이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재래식으로 유지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늘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토론을 하다보면 은연 중에 내가 느끼는 불편함에 대한 호소를 내 주장 속에 담게 됩니다. 정작 내가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대중이 불편함을 느낀다고 주장하게 되는 거예요. 말하는 사람도 자기가 그러는 줄 모르고 말합니다. 자기가 불편한 것을 대중을 빙자하여 주장을 한다면 양심불량이지만, 대부분은 대중도 그렇게 느낀다고 착각을 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착각을 하면서도 착각을 하는 줄 모르는 무지에서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자기 상태를 스스로 점검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이 상태를 일러 ‘자기가 자기한테 속는다’ 라고 표현합니다. 무지가 모든 고(苦)의 근본이라고 할 때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대화를 나누고 회의를 할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변화를 시도할 때에는 설령 좋은 쪽으로 나아가는 변화라고 하더라도 정착하기까지는 불편함이 따릅니다. 이성적으로는 새로운 방향이 맞다는 것을 알지만 습관적으로 불편함이 일어나는데, 그건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이에요. 반면 기존의 시스템에서 불편함을 느낀 사람은 새로운 변화가 도입되면서 불편함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보이는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음이 불편한 것에 자꾸 끄달리면 효율적인 개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서 내리는 결정이라고 해서 대중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대개 모두가 동의해서 내린 결정에는 불평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 불만을 토로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이성적인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기존의 습관이 있으니 불편함을 느끼는 거예요. 비록 같이 논의를 하고 동의를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비록 불편이 느껴지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볼 때 효율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나의 불편함을 넘어서서 모두를 생각했을 때 무엇이 더 효율적인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통은 과반수 찬성을 요구조건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면, 기존의 것을 없애거나 새로운 것을 도입할 때는 과반수가 아닌 2/3 찬성을 요구조건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거예요. 비록 좋은 변화라고 하더라도 습관에 의한 불편함이 따르기 때문에 더 많은 다수가 찬성을 할 때 비로소 변화를 채택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일과 수행의 통일의 관점을 어떻게 잡아나갈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번 수련은 문경에서 열리는 4번째 해외지부 활동가 수련인데요. 26명 중에서 일본 도쿄와 필리핀 세부, 미국 앨라배마에서 온 세 분은 해외지부 활동가 수련에 처음으로 참가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2~3회 참가하신 분들입니다. 처음 참가한 분들에게 법문이 끝나고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온 은미경님은 수줍은 웃음을 보이며 소감을 말했습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화가 있으면 저항이 당연히 있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도쿄 법회가 신생 법회여서 많은 변화가 있는데, 스님 말씀 듣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초심자로서 정토회 전체 모습을 보기가 힘든데, 총무로서 어떤 비전을 가져야할지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 비전을 갖고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필리핀 세부에서 온 김니은님에게도 오늘 첫 참가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스님 법문은 역시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업과 정토회 일 사이에서 힘들다는 예를 들어주신 것이 좋았어요. 관점을 잡을 수 있었구요. 깨달음의 장에서 이미 관점이 정리된 것 아니냐는 말씀에서 울컥했습니다. 출가하는 마음을 다시 되새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번 수련에서 제가 갖고 있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입재 법문을 마친 후 스님은 참가한 활동가들 한 분 한 분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건냈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해외지부 활동가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스님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평화재단 조찬 모임이 있고, 오후에는 평화재단 심포지엄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혜진, 이희정, 조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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