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7차 통일의병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총 2부로 나뉘어 진행된 이번 대회는 1부 입재식을 시작으로 법흥왕릉, 황룡사지, 선덕여왕릉을 답사하고, 2부 통일의병 대회를 선덕여왕릉에서 진행했습니다.

32도의 도심의 덥고 탁한 공기와 달리 모가 갓 심어진 논길을 따라 법흥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은 청량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 새벽부터 전국에서 출발해서 법흥왕릉에 자리 잡고 있던 통일의병들은 아래 쪽 길에서 올라오는 스님을 발견하고 큰 환호와 환영의 박수로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입재식 시작을 알리는 목탁소리는 새소리에 얹혀 가슴을 울리고 멀리 멀리 날아갔습니다. 입재식이 끝나고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350여 명의 통일의병들에게 인사를 건넨 스님은 현재 준비되고 있는 북미회담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한 설명으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의병대회에 오신 것을 먼저 환영하고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고,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순수하게 민간영역에서 이 운동을 진행하고자 통일의병을 발족하였습니다. 발족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는 천일기도를 시작했고요, 이번 5월 22일 초파일을 기해서 천일회향을 맞았는데, 북미정상회담이 21일간 연기되면서 저희도 천일기도회향을 21일간 연기해서 6월 12일에 회향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의병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의병모집을 마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웃음과 박수) 물론 앞으로도 의병모집이야 하겠지만 우리가 세웠던 원래의 취지는 1차적으로 마감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비를 한 다음에 기도를 하거나 어떤 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거예요. 해방 이후 분단 되고, 전쟁 나고,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되다가 지금 마무리가 진행 되고 있는 건데, 그러면 과거의 질서가 마무리되면 그것으로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1990년대 초에 마무리 됐어야 했던 일인데, 그게 25년간 연기된 거고, 이제 앞으로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가 구축이 될 겁니다. 그때 과연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위상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앞으로의 과제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향후 10년은 과거의 질서를 마무리하는,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이 될 거예요.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그 구상에 따라서 과거의 질서를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새로운 질서 구축에 유리할 것인가,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합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과거의 질서를 마무리 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과거의 질서는 마무리가 됐는데 그 마무리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때 도리어 장애가 되어서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질서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신질서 구축에 도움이 되도록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이제 새로 구축될 동아시아의 질서는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런 질서와는 다른 차원의 질서가 될 겁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 건지, 가만 내버려 두면 어느 쪽으로 갈 건지, 그게 우리한테 어떻게 유리하거나 불리한지, 우리한테 불리한 점은 개선하고 유리한 점은 쟁취하려면 새로운 질서 구축에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 이게 우리의 실천과제가 되겠습니다.”

이번 통일의병 대회 입재식을 법흥왕릉에서 한 이유는 신라와 가야의 통합을 주도한 왕이 법흥왕인데, 그 통합정책으로 발생한 시너지 효과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가야와 신라, 백제와 고구려 사국시대의 역사이야기는 문자로는 익힐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살아 움직였습니다.

이차돈의 순교와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 대해 말씀하면서 이차돈이 왕궁의 관리였고 이차돈의 성이 이씨가 아니라는 말씀에 대중들은 와! 하고 놀라움을 터뜨렸습니다. 대중들의 탄성 소리에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같이 울렸습니다. 문무왕대에 가야계를 모계로 하는 왕이 탄생함으로써 완전한 신라, 가야 통합이 완성되었음을 말씀할 때 의병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님의 법문에 호응했습니다.

입재식이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은 후 황룡사 문화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황룡사 문화박물관 앞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의병들의 이름이 적힌 깃발들이 장엄하게 두 줄로 도열해 있었습니다.

황룡사 문화박물관 안에 들어가 전시실을 둘러보았습니다. 호국 사찰 황룡사 건립에 대한 영상을 본 후, 스님은 황룡사 9층 목탑 모형 앞에서 건립과정, 규모, 전해 내려오는 설화, 건립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신라가 황룡사터에 9층 목탑을 세우면서 이렇게 발원을 했어요. 소극적으로는 ‘주변나라의 침공을 막아 달라’며 평화를 기원하는 발원을 했고,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삼한(三韓)이 하나의 나라가 돼버리면 평화가 항구적으로 이루어지니까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발원했어요. ‘삼한’이란 마한, 진한, 변한을 통칭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일 첫 번째 이름이 뭐예요? ‘한나라, 배달나라, 조선나라’ 순인데, 조선나라가 분열하면서 삼한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한’이라는 말은 원래 ‘크다’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한바다, 한나라, 이럴 때 ‘한’은 크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제 거기에 기초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도 삼한의 분열로 봤기 때문에 삼한일통을 발원했다는 거예요.

이 탑은 하나는 평화를 발원하고, 하나는 통일을 발원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렇게 탑을 세우고 평화와 통일을 발원한지 30년도 채 안 돼서 실제로 삼한일통이 이루어졌습니다. 통일을 이룬 것은 문무대왕 때지만 통일을 발원한 것은 선덕여왕 때입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통일을 발원하고 통일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선덕여왕입니다. 선덕여왕 때 키워진 인물들, 즉 김춘추, 김유신이 주축이 되어서 통일을 이룬 거예요. 그들이 선덕여왕 때 30대 초반의 활동가였다가 장성하여 5, 60대가 되면서 실제로 원을 성취한 겁니다.”

황룡사 터에는 민족과 의병의 역사를 상징하는 28개의 깃발이 통일의병대회를 장엄히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청룡과 황룡의 깃발을, 왼쪽으로는 한나라부터 시작해 배달나라,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 대한민국, 북한, 그리고 그 모두를 계승하는 마음을 담아 통일코리아 깃발을 마지막으로 세웠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다물군, 고구려 부흥군, 고려 항몽의병, 임진의병, 병자의병, 동학혁명군, 을미의병, 정미의병, 독립군, 순국열사. 산업역군, 민주투사 깃발과 그 모두를 계승하는 마음을 담아 통일의병 깃발을 마지막에 세워서 통일에 대한 염원을 표현했습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깃발과 기수들이 서 있는 모습에서 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1000년 전에는 금당과 9층 목탑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가람이 몽고란으로 사라진 황룡사터는 하얗고 청초한 모습의 개망초꽃만이 빈 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황룡사터의 햇살은 통일에 대한 스님의 서원처럼 강렬하고 뜨거웠습니다.

스님은 기도문과 염불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한반도에 통일과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간절함을 담아서 기도를 함께 하자고 말했습니다. 자원 활동가, 통일의병 모두 400여 명의 대중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는 하늘도 감동시켜 북미 정상회담이 잘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염원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를 마치고 28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황룡사 9층 목탑지를 염불하면서 한 바퀴 돌았습니다.

햇살 쏟아지는 길을 긴 행렬이 질서정연하게 나란히 줄을 서서 노래를 부르며 황룡사터를 나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으로 향했습니다. 길가에 서 있는 뽕나무에서는 오디와 벚나무 열매가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선덕여왕릉에 도착하여 삼삼오오 자리를 펴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각자 싸온 도시락을 도반들과 함께 나눠먹으며 행진을 하느라 지친 몸에 에너지를 채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선덕여왕릉에 앉아 선덕여왕의 지혜와 그 당시 신라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 사천왕사를 짓게 된 배경과 교훈에 대해 들었습니다. 통일코리아를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대중들의 눈빛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10시부터 12시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순국열사 애국지사의 영혼과 해방이후 좌우이념 대립으로 희생된 무고한 영혼과 6・25 전쟁으로 희생된 남북군인과 주민의 영혼, 개항이래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 땅에서 숨진 일본군, 중국군, 러시아군, 소련군, 미군, 니시군등 외국군인들의 영혼도들을 모두 천도하는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이제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하니 외국군 영혼들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영면하라고 축원했습니다.

이어서 민족의 번영과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계시는 도문 큰스님의 법문과 영가천도 발원이 있었습니다.


도문 큰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관음정근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짧은 기도가 끝나고 선덕여왕릉에서 제7차 통일의병대회가 시작되고 스님은 ‘통일의병의 길’을 주제로 법문을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의병 또는 민병과 관병이 있습니다. ‘관병’이라는 게 뭡니까? 유사시에 나라를 지키라고 나라에서 월급도 주고, 옷도 주고, 무기도 주고, 지위도 주고, 다 이렇게 보살펴주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이렇게 투자해서 관병을 양성해 놓아도 정작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 바쁘고, 제 이익 챙기기에 바쁜 게 관병이에요. 임진왜란 때 우리가 봤잖아요. 관병은 다 도망가버렸어요.

그럼 ‘의병’은 뭡니까? 관병이 지면 나라를 잃게 되니 민(民)이 일어나서, 옷을 주거나, 먹을 것을 주거나, 무기를 주는 사람도 없고, 지위를 주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 목숨 자기가 내놓고, 자기 음식 자기가 들고 가고, 자기 옷 자기가 입고, 자기 무기 자기가 돈 주고 사서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 나라를 지키는 사람, 이게 바로 의병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전문성이 떨어지지요. 그러나 의지는 아주 충만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패배하면 의병이 주로 대량사망을 합니다. 관병은 약삭빨라서 도망을 가니까요. 그런데 승리하면 포상은 다 누가 받아요? 관병이 받아요. 의병은 잘 돼봐야 집으로 가는 게 최고의 포상이에요. 그런데 만약 의병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도 기여했다!’면서 고개를 쳐들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되던가요? 관병으로부터 역적이라는 모함을 받고 죽게 됩니다. 그래서 잘 되면 의병은 빨리 어디로 가야 된다고요?”

“(대중들) 집으로.”

“예, 집으로 가야 합니다. 얼쩡거리면 시기, 질투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관병과 싸우는 반란군이 아니잖아요. 관병이 부족한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의병입니다. 목숨이 필요하면 우리가 먼저 죽어주고, 포상이 필요하면 우리는 뒤로 물러나주는 거예요. 그래서 ‘의병’이라고 하니까 ‘이름이 너무 세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의병’만큼 우리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명칭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추진하는 의병이다’라는 의미에서 우리가 통일의병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전쟁난다’ 하면 우리는 통일의병이 아니고 평화의병, 즉 전쟁을 막는 의병이 되고, 또 전쟁의 위기가 끝나면 우리는 통일을 추진하는 의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가끔 소집명령이 떨어질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비군도 소집명령이 떨어지면 금방 모이는데, 의병은 더 쏜살같이 모여야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대중들) 예.”

“우리는 과거의 기준으로 진보니, 보수니, 이런 걸 논하면 안 됩니다. 경상도니, 전라도니, 기독교니, 불교니, 이런 걸 논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집단이 첫째, 평화를 지향하느냐, 전쟁을 부추기느냐, 아니면 통일을 지향하느냐, 분단고착화를 지향하느냐는 걸 봐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이 그거예요. 그게 1번이고, 그 다음에 민주적이냐, 또 그 다음에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느냐, 이런 것도 봐야 하는데,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뭐라고요? 우리는 통일의병, 평화의병이기 때문에 그 집단이 통일과 평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느냐는 것을 제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있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참여를 해야 됩니다. 알았지요?”

“(대중들) 예.”

“그리고 앞으로 또 회담이 뒤집어져서 전쟁을 한다고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평화대회에 참여해야 됩니다.”

“(대중들) 예.”

“그날 해외에 약속이 잡혀있느니, 어쩌느니,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건 무조건 취소하고 우선적으로 평화대회에 참여를 해야 돼요.”

“(대중들) 예.”

“그러니까 입장을 확실히 알고 의병이 되어야지, 그냥 의병 티셔츠만 입었다고 의병이 되는 게 아니고, (모두 웃음) 의병대회에 왔다고 의병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을 추진하는 의병이다!’ 하는 입장을 확실히 해야 의병이 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대중들) 예.”

“우리는 통일부나 국방부의 직원은 아니지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 문제만큼은 어떤 사람보다, 통일부 직원보다도 더 통일을, 국방부 직원보다도 더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여러분들이 진정한 의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역사기행 같은 데에도 가서 역사공부도 하고, 또 이렇게 경주같은 곳에 와서 과거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연구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교육은 의병이 되기 위한 교육이고, 앞으로의 교육은 의병의 자질을 함양시키는 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에 빠지면 자격이 정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병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병으로서의 자부심도 가지시고, 의병으로서의 역할도 확실히 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정토회의 회원일 뿐 아니라 통일의병이라는 입장에서 늘 어떤 일을 보고 ‘아, 이거 의병이 해야 할 일이다.’ 하면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자로서는 괴롭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통일의병으로서는 한반도에 절대로 전쟁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일의 희망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어가는 과정이니까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전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 이런 생각도 하고, 거기에 필요한 행동도 하는 사람이어야지, ‘아이고, 내가 뭐 잘났다고...’ 이런 생각을 하시면 안돼요. 여러분들은 잘난 사람들이에요. 아시겠어요?”

“(대중들) 예.”

“못난 사람은 의병이 될 수 없어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정치인들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서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그런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의병이에요. ‘의병’보다 더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깃발들을 보셨겠지만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등 9000년 우리 역사 속에서 나라를 잃었을 때 첫 번째 일어난 의병이 뭡니까? ‘다물군’입니다. ‘조선의 옛 고토를 되찾자!’고 해서 다물군이 일어난 이래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늘 민(民)이 일어나서 나라를 되찾았고, 그래서 우리도 그 의병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아시고 오늘 의병이 되셔야 하고, 또 이 대회에 참가해야 의병이 되는 겁니다. 의병 되신 것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 이제 의병이 됐기 때문에 오늘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됩니다. 저도 여러분을 대할 때 오늘 이전은 그냥 일반인으로 대했지만 오늘부터는 의병으로서 대할 테니까, 여러분들은 질서가 딱딱 서있어야 돼요. 알았어요?”

“(대중들) 예.”

“의병은 오합지졸처럼 굴면 안돼요. 딱 자세를 갖추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이런, 저런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고 ‘네!’ 하고 그냥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작년에 의병이 되었던 분들은 좀 마음이 무거웠는데, 올해는 좀 희망이 보여요, 안 보여요?”


“(대중들) 보여요.”

“우리가 이번 기회에 한반도에 평화를 확실히 정착시킨다면 과거를 한 차원 매듭짓고, 역사의 큰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6월 12일에 ‘전쟁종결선언’을 하게 된다면 ‘자, 그러면 우리가 다음에는 어떤 질서를 만들어낼 거냐’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큰 과제, 즉 화두로 남게 될 겁니다. 여러분들은 통일의병이니 일반 국민 수준은 넘어야 되지 않겠어요? 역사를 앞서 가는 선각자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대중들) 예.”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모두 박수)

통일의병대회가 모두 끝나고 ‘통일이 미래의 희망이다’ 는 문구의 현수막 앞에서 모두들 함박웃음을 지으며 각 지부별로 스님과 기념 시간을 찍었습니다. 32도의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가열차게 모든 행사를 잘 마쳤습니다. 하루하루 한국사의 중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황룡사와 통일의병의 의미가 어느 날보다 더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안정미
사진
김선주
녹취_정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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