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옅은 구름이 하늘에 드리워져 있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좋은 날입니다. 아침 7시 활동가 봉축법회를 시작으로 서초동 정토회관에는 오전 10시 일반인 대상, 오후 2시 1000일 기도 회향 법회, 오후 5시 시민사회종교인사 초청 법회, 저녁 7시 30분 청년 봉축법회까지 모두 5회의 봉축법회가 마련됩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법회 준비를 위하여 새벽예불을 30분 앞당겨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자, 서울 공동체 성원과 일찍 회관에 도착한 대중들은 회관 곳곳을 정리 정돈하고 법회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가장 이른 시간인 오전 7시 법회는 방문하시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접대하다보면 정작 법당의 주인인 활동가들이 법회를 놓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고려한 법회입니다. 이렇게 꾸준히 아침 7시에 법회를 하다 보니, 일부러 찾아오시는 분도 계십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법당 가는 길마다 자원봉사자들이 친절히 안내문을 들고 길안내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법당 앞 골목에는 JTS, 월간정토, 통일 부스 등의 체험부스가 있어서 어린이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부스 체험을 할 수 있게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1년 만에 맞이하는 부처님 오신 날 법회에는 한복과 평상복을 곱게 차려입은 도반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모두들 얼굴도 부처님의 모습처럼 환했습니다. 오전 10시 법회에는 예년에 있던 1시 법회가 1000일 기도 회향법회 때문에 통합되어 예년보다 3배 많은 대중이 참석해서 비좁은 법당이 더 좁게 느껴졌습니다. 1층 대강당뿐만 아니라 2층과 3층에 마련된 강당에도 도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특히 2층에는 아기들과 엄마들이 함께 법회를 볼 수 있게 마련했습니다. 봉사자들은 한 자리라도 더 마련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기들과 함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엄마들을 위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다른 강당들이 포화 상태이다 보니 여기까지 일반 대중들이 앉게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비록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다른 강당보다 산만할 수는 있었으나 스님의 법문이 해맑은 아이들의 분주함 속에서도 평화롭게 전해져 오는 모습들이 또 다른 축복으로 느껴졌습니다.

3층 강당도 이제는 강당 안이 모두 빈틈없이 꽉 차 문을 열고 복도에 앉아서 법문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복잡하기도 하였지만 도반들이 그만큼 많이 늘었다는 반증이기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법당 2, 3층에서 계속 몰려드는 대중들을 위해 자리 정돈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한 사이, 2층 한쪽에서는 통일 천일정진 목탁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들어가 보니 한 분이 통일정진을 열심히 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1000일째’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오전 10시의 봉축법요식이 시작되기 전, 법당에서는 ‘초파일의 노래’ 가 울려 퍼졌습니다.

드디어 정각 10시, 스님은 부처님 전에 향을 올렸습니다. 서초법당 이보경 님과 강남법당 이정주 님이 깊은 지혜를 발원하며 부처님 도량을 밝히는 등을 올리고, 서초법당 박성희, 백명아 님이 부처님 전에 꽃을 올렸습니다.

정근과 삼귀의를 한 뒤 법사님의 타종과 함께 대중이 함께 석가모니불을 부르며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였습니다. 법요식 순서에 따라 진행 후 법륜스님의 기념 법문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건 부처님은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사람은 다 태어나자마자 설 수가 없는데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섰다’는 것은 우리 중생은 항상 무엇인가에 의지해서 사는데 부처님은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걸 의미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에 의지해서 살고, 나이 들어서는 아내나 남편에 의지해서 살고, 늙으면 자식에게 의지해서 살고, 또 돈에 의지하고, 지위에 의지하고, 인기에 의지하고, 건강에 의지하고, 이렇게 우리들은 뭔가에 기대어서 삽니다. 그것도 부족하면 신에 의지하고 살지요.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섰다는 것은 부처님은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으시고 자립해서 살아가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인도의 전통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도 전통신앙에서 중생은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는데, ‘악업을 짓게 되면 지옥, 아귀, 축생이라는 삼악도에 떨어지고, 선업을 쌓게 되면 수라, 인간,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악행을 해서 지옥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벌을 다 받으면 다른 곳으로 가고, 아무리 선행을 해서 천상에 태어났다하더라도 그 복이 다 하면 다른 곳으로 돌고 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섯 발자국이 중생들의 윤회의 세계를 상징한다면 부처님의 일곱 발자국은 그 윤회에서 벗어나서 해탈하실 분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 ‘한 손은 하늘 위를 가리키고 한 손은 하늘 아래를 가리켰다’는 것은, 하늘 위라는 것은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하늘 아래는 인간세계를 말합니다. 또 천상은 우리들의 정신세계,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 천하는 육신을 기준으로 하는 물질세계를 말합니다. 신들의 세계라거나 인간들의 세계를 통틀어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의미의 유아독존(唯我獨尊)에서 ‘아(我)’라고 상징되는 이것이 가장 존귀한 것입니다.

그럼 이 ‘아(我)’가 상징하는 게 뭐냐? 첫째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지요. 그래서 재물을 얻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해치거나 자기 생명을 해치는 건 어리석은 짓에 속합니다. 그래서 제일 첫 번째 계율도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인 거예요. 생명존중사상, 이게 불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여러분들 각자, 자기 자신.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함부로 하지요. 자아상실의 시대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 함부로 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함부로 하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함부로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괴로움에 빠져있는 겁니다.

세 번째,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를 말해요. 어리석게 천 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롭게 깨어서 하루를 사는 게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공자님도 ‘아침에 도를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깨어있는 것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럼 이 ‘깨어있는 상태’를 붓다라 그러고, ‘깨어있지 못한 상태’를 중생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깨어있는 상태가 가장 소중한 겁니다. 즉 붓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거죠. 이때 ‘붓다’란 고유명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 각자 마음의 상태가 깨어있을 때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깨어있지 못한 상태는 어떤 겁니까? 괴로움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깨어있는 상태는요? 괴로움이 없는 상태지요. 이 괴로움이 없는 것이 열반, 즉 진정한 행복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가 있다’는 뜻이에요. 피부빛깔이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국적이 어떻든, 신체장애가 있든 없든, 성적지향이 어떻든,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든, 어떤 경험을 했든,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이게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다’라는 얘기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어리석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를 정말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상에 빠지고, 이념에 빠지고, 믿음에 빠져서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고, 어리석게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괴로움에 빠지게 된 겁니다. 다음 문장은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입니다. 그래서 ‘온 누리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다 괴로워하고 있으니’, ‘아당안지’, ‘내 이를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어떻게? 생명의 소중함을, 자신의 삶이 소중함을, 깨어있음이 소중함을 알도록 해서 누구나 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삶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거지요. 이게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일성(一聲)으로 한 말이다. 어린애가 진짜 그런 말을 했느냐고요? 그게 아니라 붓다의 전기 작가가 볼 때 부처님의 평생을 요약하면 바로 이 두 문장이겠다 싶어서 그렇게 기록을 한 거죠.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부처님의 삶이 그 태어나실 때의 일성으로 집약돼있고, 상징화돼있다고 한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이념이나 믿음이나 사상이나 이런 것보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나 이런 것보다 정말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한번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이익을 조금 더 보려고 하다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곳곳에서 이익 때문에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현실을 흔히 볼 수 있잖아요. 또 과거 역사를 보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켰습니까.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그 이념이나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습니까. 특히 중동에서는 믿음 때문에, 또 과거 냉전시대에는 이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됐습니까.

또 오늘날 우리는 남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얼마나 함부로 하고 있습니까. 돈에 매달려서, 출세에 매달려서, 쾌락에 매달려서 자신들의 삶을 팽개치고 있잖아요. 또 일부에서는 이념이나 사상이나 종교나 믿음에 매달려서 삶을 팽개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깨어있지 못하니까 생명 존중할 줄 모르고, 자신의 삶도 존중할 줄 모르는 거예요. ‘욕심에 눈이 어두워.’ 또,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이게 다 사로잡힌 상태, 즉 ‘어리석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나서는 후회할 일, 즉 자기가 자기의 발등을 찍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에도 세간적 지혜가 있고, 출세간적 지혜가 있습니다. 세간적 지혜라는 것은 인과의 법칙을 올바르게 알고 있는 거예요. 선행을 하게 되면 선의 과보가 따르고, 악행을 하게 되면 악의 과보가 따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법칙이에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런데 우리는 복은 받고 싶은데 복은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빚을 얻었으면 반드시 갚아야 되는데 빚만 얻고 갚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되는데 벌은 또 안 받으려고 하지요. 선행은 하지도 않고 또 칭찬은 받으려고 하고요. 이게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인과의 법칙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믿고 나쁜 결과가 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런 인연은 짓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계율에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마라,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삿된 음행을 하지 마라’고 한 건, 나쁜 결과를 받지 않으려면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써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거짓말하거나 욕설하지 마라. 술을 먹고 취해서 행패를 피우지 마라’는 거예요.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스스로 그 몸을 청정하게 간수하며 진실을 말하고, 위로의 말을 하고, 마약이나 술에 취해서 정신없이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나쁜 결과가 오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이런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세간, 즉 세속에 살면서도 이 정도 지혜는 있어야 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출세간의 지혜, 즉 여러분들은 괴로움의 본질을 알아야 됩니다. ‘괴롭다’고만 아우성칠 게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이 뭔지를 규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본래 일어날 필요가 없는 것임을 꿰뚫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일단 일어났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할 수 있는지, 그 법을 알아서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스러운 출세간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사성제를 행해야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은 왕자로 모든 것을 누리는 위치에 있어도 행복하지가 않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정말 어떻게 살아야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탐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왕이 되겠다든지, 돈을 더 모아야 되겠다든지, 이런 쪽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것을 누리고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100년 전 사람들이 보면 오늘날 우리는 괴로울 일이 없어요. 옛날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꿈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먹고, 비단옷 입고, 날아가는 기와집에 사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의식주는 다 갖춘 셈이니까 100년 전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괴로울 일이 뭐가 있냐?’ 할 거예요. 그런데 100년 전 사람들보다 우리 머리가 더 복잡하고, 자살률도 더 높아요.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오늘 날 우리 삶의 문제의식과 같은 거였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이 바른 법이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불법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이유는 시대상황이 그랬기 때문이고, 지금 조명되는 이유는 지금의 시대상황이 부처님과 같은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나이가 스물, 서른, 오십, 팔십, 다양한 분들이 계시는데, 살만큼 살아봤잖아요. 그런데 한 30년 살아보고, 한 40년 살아보니 옛날보다 지식도 늘고, 재물도 늘고, 결혼도 해 봤고, 애도 낳아봤고, 할 만큼 해 봤는데 ‘오, 아니네?’ 이러면, 요만큼이라도 지혜가 있으면 ‘이건 아닌 것 같다.’ 해야 되지 않아요?(모두 웃음) 팔십인데도 아직 ‘돈을 조금만 더 벌면’, ‘얼굴 여기를 좀 더 팽팽하게 하면’ 이러는 거예요?(모두 웃음)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서 우리가 정말 잘 사는 게 뭔지, 잘 산다는 게 뭔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재물 모으고, 지위 올라가고, 인기 끌고, 죽어서 어디 가고, 이런 게 정말 중요한 건지를 좀 돌아볼 때가 됐어요. 그래서 처음 얘기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좀 더 지혜로워야겠고, 깨어있어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괴롭다고 아우성치는데 한 발만 떨어져서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세요. ‘뭐가 괴롭냐? 뭣 때문에 괴롭냐? 왜 그게 괴로울 일이냐?’ 이렇게 좀 탐구를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세간적 지혜가 있으면 복락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고, 출세간적 지혜가 있으면 윤회하지 않는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어요. 이런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동시에 이런 바른 견해 위에 여러분들 각자의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아, 이것은 나에게 고통이 따르니 내가 이것을 행하지 말아야겠구나’, ‘아, 이것은 나에게 복락이 따르니 이건 내가 마땅히 행해야 되겠구나.’ 이런 바른 사유와 바른 의도를 가진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렇게 행해 나간다면 미워하거나 슬퍼하거나 외로워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원망하거나 하는 심리상태, 즉 불건전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서 훨씬 더 밝고, 맑은, 가벼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삶이 바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안내해 준 해탈과 열반의 길입니다.”

불기의 기준에 대한 이야기와 부처님께서 태어날 때의 이야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의 뜻은 언제 들어도 깨달음을 얻은 인간 붓다의 지향점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법문의 마지막에서는 현재의 남북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월 27일에는 남북 지도자가 만나서 평화 분위기가 전 세계에 형성되어 꿈인가 생시인가 했는데 앞으로 꽃샘추위가 몇 번은 와야 제대로 된 평화가 구축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잘 알 수 있는 감로의 법문이 끝나고, 부처님 태어나심을 돌아보는 강생 찬탄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이 먼저 읽고 대중들이 따라 읽는 풍경이 경건했습니다. 찬탄을 마치고 초파일의 노래 3절까지 함께 불렀습니다. 그런 후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던 봉축법요식의 가장 활기찬 순서인 욕불 의식과 마정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마정수기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사람들에게 꼼꼼히 그러나 재밌게 일러주시며 질서 있게 의식이 진행되도록 부탁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아기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욕불 의식이 끝낸 후, 대중은 스님으로부터 ‘당신이 부처입니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마정수기를 받았습니다. 마정수기는 대중들에게 가장 의미 있고 설레는 의식 같습니다. 합장한 채 스님과 눈을 마주치면 이마에 차갑고 부드러운 스님의 붓 자국이 머리에 느껴지면서 눈앞이 맑아지고 기쁜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대중들은 이 순간을 위해 불편하고 더운 법당 안에서도 조용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정수기는 스님의 축복을 받는 느낌이 들기에 더욱 의미가 크게 느껴져서인지 강당을 막 나오는 도반들의 얼굴들에서 완연한 생기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욕불 의식 후 탄생 선언을 낭독했습니다. 스님이 법요집을 먼저 읽고 대중이 따라 읽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네.
온 세상 모두 고통 속에 빠져 있구나,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마지막으로 다 함께 발원문을 낭독하고 법요식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법요식이 끝난 후, 정토회 상임법사님이신 자재법사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처럼 하루씩만 붓다로 살아보자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많이 남았습니다.

곧이어 점심 공양이 이어졌습니다. 오늘 오후에 비 소식이 있었지만 11시가 넘어서도 밖의 날씨는 아직 밝았습니다. 그래도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약간의 비구름 내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법당 밖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붐비어 갔고 일찍부터 점심 공양을 하는 도반들도 늘어났습니다. 비록 법당 밖이 분주하였지만 스님의 법문은 법당 넘어 바람이 피부에 스치며 지나가듯 부드럽게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공양을 마친 도반들은 바깥 부스 체험을 하며 부처님 오신 날을 즐겼습니다. 좀 있다 2시에 있을 통일정진 천일 회향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통일정진 천일 회향 법회 소식은 내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김바다, 이재민, 김광섭, 이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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