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오늘 하루를 ‘한국의 안보와 국방의 미래’를 연구하는 전문가 모임 세미나로 시작하셨습니다.

퇴역 군 장성, 전직 관료, 교수님 등 안보와 국방관계 전문가들과 매 달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데, 오늘은 신범식 서울대 정외과 교수님을 모시고 ‘푸틴 4기 러시아의 정책 전망과 한-러 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러시아의 역사와 경험에 기초하여 러시아의 국내정치 상황과 국제관계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고 한반도 평화와 러시아, 한국의 상호발전을 모색해보는 자리였습니다.

저녁에는 서울정토회 부처님 오신 날 전야제 및 점등식에 참여해 기념 법문을 한 후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을 함께 기뻐했습니다.

서울 정토회관은 아침 일찍부터 많은 봉사자들이 모인 가운데 내일 있을 부처님 오신 날 행사 준비를 위해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연중 가장 많은 대중들이 법당을 찾는 날이기 때문에 구석구석 청소도 하고, 비빔밥에 쓰일 음식 재료들도 미리 썰어 놓고, 큐시트에 따라 봉축법요식 리허설도 해보는 등 아주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다함께 예불을 올린 후 부처님 오신 날 전야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정토가요제가 열렸습니다. 직장일, 집안일, 수행, 봉사로 바쁜 와중에도 팀별로, 개인별로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어서 8시부터는 잠시 후 마당에서 있을 점등식을 앞두고 스님에게 기념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청법가와 입정이 끝나자 스님이 법상에 올라와 점등식을 하는 의미에 대해 설법을 해주었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입니다. 동남아에서는 부처님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연대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는 크게 탄생일, 성도일, 열반일이 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부처님의 탄생일, 음력 12월 8일을 부처님의 성도일, 음력 2월 15일을 부처님의 열반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남방불교 혹은 테라밧다 불교 문화권에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인도 달력 바이샤카월의 마지막 날 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달력에서는 보름이 한 달의 중간이지만, 인도 달력에서는 한 달이 끝나는 날이 보름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일 년의 역학을 비교할 때 신년의 기준, 날짜의 기준 등이 많이 다릅니다. 불교 역시도 여러 문화권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해지다 보니 기념일의 날짜들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불교가 요즘 전해졌다면 비교적 통일된 날짜를 사용하니까 이런 일이 적었을 텐데, 예전에는 몇 백 년에 걸쳐서 전해지다 보니까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서역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고, 단기는 단군 왕검이 왕위에 오른 해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불기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삼아서 때로는 ‘불멸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올해는 불기 2561년인데,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올해로 2561년째가 되는 해라는 뜻입니다. 시작하는 날짜는 부처님의 탄생일이자 열반일인 오늘을 기준으로 하니까 엄밀히 말하면 오늘까지는 열반하신지 2561년째 되는 해이고, 내일부터는 열반하신지 2562년째가 되는 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주로 서기를 기준으로 사용하니까 2018년이 시작되면서부터 불기 2562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태국 등 남방불교 권에 가면 오늘까지는 우리의 불기가 한 해 앞서가는 듯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가거나 성지순례를 가면 둘 중 하나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고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서구를 중심으로 많이 바뀌다보니 생겨난 일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이야기하면 불기 2562년은 내일부터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남방불교에서도 달력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인도 달력으로는 지난 4월의 마지막 날(보름일)이 부처님 탄생일이자 열반일이었어요. 반면 태국 달력으로는 앞으로 일주일 후인 5월 29일(보름일)이 부처님 탄생일이자 열반일입니다. 이것도 날짜를 음력으로 따질 때 윤달이 어디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생겨난 차이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음력 날짜를 모두 양력 기준으로 바꾸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양력 4월 8일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역사 속 긴 시간에 걸쳐서 다양한 문화권에 불교가 전파되다보니 전 세계에 전해진 부처님 오신 날을 보면 각기 다른 날짜를 기념하는 흥미로운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 정말로 부처님 오신 날이 언제일까요?

그건 바로 내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날이 진정으로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모두 웃음) 내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것이 바로 해탈과 열반입니다. 이러한 니르바나를 증득하는 날이 내 마음에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자 열반에 드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나날이 기쁘고 행복하면 매일 매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고, 나날이 괴롭다면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모두 웃음)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전야제로 점등을 합니다. 점등, 즉 ‘등불에 불을 켜는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왜 등불을 밝힐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입니다.

어둠과 밝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에서 어둠은 주로 중생의 마음으로 비유되고, 밝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비유됩니다. 즉, 어둠은 어리석음과 무지를 상징하고, 밝음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이라 이름하고, 마음에서 깨달으면 부처라 이름 합니다. 그래서 깜깜한 방을 불로 밝힌다는 표현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어둡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지와 어리석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반면 밝다는 것은 훤히 보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지혜와 깨달음의 상태입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더듬게 되고, 더듬다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불상사가 따릅니다. 그것이 곧 괴로움입니다. 훤히 다 보이면 여러가지 장애가 있다고 하더라도 웅덩이나 장애물들을 능히 피해갈 수 있어서 불상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즉,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오신다는 것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로 불을 밝히는 행사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을 밝히는 것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된 사람이 태어난 날을 상징해서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사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날을 콕 집어 부처님이 오신 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당시에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아니셨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싯다르타 태자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그날이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그러니 육신을 기준으로 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고, 정신을 기준으로 하면 깨달음을 얻은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 됩니다.

이 날을 맞이하며 마치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을 밝히는 것처럼, 우리의 어리석음을 몰아내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점등을 합니다. 부처님이 눈이 어두우셔서 혹시나 길을 잃으실까 하여 불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이 날을 맞이하며 불을 밝히고 연회를 하라고 불을 밝히는 것도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부처님의 법을 받아들여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불은 주변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이 나고 값어치가 나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낮에 촛불을 하나 켠다고 해도 잘 보이지도 않고 값어치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촛불이라도 깜깜한 곳에서는 그 빛이 잘 드러나고 더욱 중요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주변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그들을 탓하지만, 사실 주변이 어두울수록 수행자는 더욱 빛이 나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면 여러분들의 존재는 있는 듯 없는 듯 별로 가치가 없을 거예요. 반면 지옥에 가면 여러분들의 존재는 한층 빛이 날 거예요. (모두 웃음)

흔히 사람들은 극락에 가기는 좋아하고 지옥에 가기는 싫어하는데, 보디사트바(보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촛불을 들고 낮에 나가봐야 별로 가치가 없고 오히려 밤이 깊을수록 빛이 나듯이, 수행자, 보디사트바는 어려운 곳에 갈수록 더욱 더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세상이 어렵다고 혹은 주위가 어렵다고 탓하는 것은 중생으로 살겠다, 남의 빛을 받아서 살아가겠다, 누군가 밝혀주는 촛불에 힘입어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내가 불을 밝혀서 세상 사람들이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관점을 가지는 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수행자라면 초가 자신을 태우고 주변을 밝히고 또 주변이 어두울수록 더욱 소중해지듯이, 자신을 내려놓고 어려운 환경에 갈수록 여러분들의 가치도 빛이 날 것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 찾아가는 분이지만, 여러분들은 지장보살님처럼 일부러 어려운 환경을 찾아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주어진 환경이 어렵다고 회피하는 것은 수행자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장애야 말로 여러분들이 더욱 빛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수행이 얼마나 소중하고, 수행자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오히려 그런 장애가 생김으로 해서 더욱 빛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밝은 곳을 찾으려 하고 주변의 어두움에 대해서는 한탄하는데,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도 자꾸만 기복의 마음이 됩니다. 그건 다른 존재의 덕을 보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자세로 불법(佛法)을 공부하게 되면 그저 글자만 외우게 되고 그 속에 담겨진 뜻은 어느덧 바뀌어버립니다. 자기는 나름 부처의 길로 나아간다고 했지만 도달하는 곳은 중생의 길이 됩니다. 바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수행을 가르치는 불법(佛法)이 복을 비는 종교의 길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정토회는 이 점을 돌이켜 수행자로서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열반과 해탈을 목표로 나아가고자 만든 단체입니다. 정토회는 수행자의 모임이지 복을 비는 신자의 모임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새겨주었으면 합니다.

부처님의 큰 힘을 빌어서 내가 복을 받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나도 부처님처럼 괴롭지 않은 삶,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자세를 갖고, 나도 부처님처럼 어리석은 자를 깨우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관점을 가지셔야 합니다. 도반들과 함께 있으면서 도반들이 성질내고 짜증내는 것을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성질내고 짜증내는 그 도반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내야 수행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하나 다 시비하고 결국 내 주변의 도반들이 나의 성질과 짜증을 봐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자세로 살면 절에 들어와서 몇 년을 살아도 부처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런 사람은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남이 내 성질을 봐낼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성질을 봐주는 수준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 오신 분들의 수준은 어때요? (모두 웃음)

그것이 바로 남에게 쓰이는 자, 남에게 보탬이 되는 자입니다.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먹기 보다는 밥을 한 끼 해주는 사람이 되고, 남이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되는 관점을 가져야 이 혼탁한 세상에서 세상을 탓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관점을 갖고자 오늘 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진리에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뭘 외우거나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에 귀의하고, 붓다의 가르침인 담마에 귀의하고, 그 길을 가는 수행자, 상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나무붓다, 나무담마, 나무상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면서 자신이 먼저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동시에 이 좋은 법을 이웃에게 전해서 그들도 나와 같이 갈 수 있도록 전법하는 것이 수행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불을 밝히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를 되새기고자 함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시 바랍니다. 그리고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등불에 관련된 이야기로 경전에 전해지는 ‘가난한 등불의 여인’의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책을 보시면 그 이야기가 나오니까 각자 한 번씩 보시고 불을 밝히는 연유를 다시 한 번 새기면서 내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점등식의 의미를 자상하게 알려준 스님에게 대중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법문을 모두 마친 후 대중들은 ‘석가모니불’을 염하며 앞마당으로 나가 탑돌이를 하였습니다. 탑 앞의 큰 연등 주위에 원을 그리며 대중이 모두 자리하자 다함께 ‘보살의 서원’을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장엄한 북소리에 맞춰 가난한 여인의 등불을 상징하는 작은 등불을 들고, 인도옷 사리를 입은 한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와 가운데의 큰 연등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앞마당에 줄지어 설치된 수백 개의 오색연등과 탑에도 일제히 불이 들어와 주변을 휘황찬란하게 밝혀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대중들은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이어서 스님과 대중들은 환하게 밝혀진 연등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합장한 채 ‘발원문’을 다함께 낭독했습니다.

정성을 기울여 발원을 하고 나니 아직도 이 세상 곳곳에서 고통 받고 있을 많은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들의 이 간절한 마음이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 질병과 문맹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제3세계의 아이들,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많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사홍서원으로 점등식 행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한반도에 봄이 오는가 싶더니 다시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 평화적인 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행사가 모두 끝나자 떡과 방울토마토가 간식으로 나왔습니다. 대중들은 간식을 먹으며 오랜만에 만난 도반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또 오색빛깔로 법당 앞마당을 수놓고 있는 연등 아래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밝게 웃는 모습이 어린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습니다.



내일은 불기 2562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스님은 아침 7시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1부 법회를 시작으로, 아침 10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2부 법회, 오후 2시 통일기도 천일 회향을 기념하는 3부 법회, 오후 5시 이웃 종교인, 사회 인사들과 함께하는 4부 법회, 저녁 7시 반 청년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5부 법회까지 하루 종일 법당을 찾아오는 대중들을 위해 기념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함께 만든 사람들
조태준, 유미경, 김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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